김수환 추기경

죽음 앞에 선 인간 / 김수환 추기경

문성식 2012. 2. 6. 20:48

      죽음 앞에 선 인간 나는 이제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다. 온몸의 맥이 풀리고 피곤하여 사지를 움직일 수 없다. 혈관과 고막에 울리는 피의 흐름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몽롱한 가운데 점차로 멀어져 가는 생명의 기이한 음악! 죽음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이 먼저 느끼는 것은 두려움이다. 나는 가끔 죽음과 마주 서 있는 환자를 방문한다. 그 대부분 말할 수 없이 큰 고통과 함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할 때, 그것이 미구(未久)에 나의 것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른다. 거기다 한생을 살아오면서 이래저래 지은 죄도 많은지라 하느님의 심판대전에 나서기란 참으로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되도록 고통이 적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얼마 전에 가장 오래된 친구 한 사람이 죽었다.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는데, 가기 전날까지도 정신이 맑고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선하게 살다 선종(善終)을 한 것이다. 그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서 영전 앞에 고인을 위해 기도드릴 때, 나는 그가 하늘나라에 가 있으리라 믿고 나 역시 남은 생애를 선하게 살다가 선하게 죽을 수 있게 해주십사 하고 빌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마셔야 할 쓴잔이다. 예수님도 아버지에게 할 수만 있다면 면하고 싶다고 한 그 고뇌의 잔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하느님은 왜 인간에게 이 죽음의 굴레를 씌우셨는가? 성서에 의하면,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려 죄를 범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이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끝인가, 아니면 저승의 삶의 시작인가? 이에 대하여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라고 과학적 실증을 통한 답을 줄 수 없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을 가리켜 현세의 삶의 끝일지언정 그것이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종말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사도신경의 말미에서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사도 바오로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함과,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 썩을 몸은 불멸(不滅)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不死)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고린 15,53)라고 천명한다. 이 믿음에 따르면, 죽음은 우리를 죄와 이로 말미암은 온갖 고통과 불행, 인생의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복된 생명으로 옮겨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사(死)에서 생(生)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감'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 같은 가르침의 근거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사건에서 예시되고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써 성취된 빠스카 신비에 있다. 죽음은 믿는 이에게 있어서 빠스카 신비의 구현이다. 예수는 참으로 죽음을 쳐 이기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였다. 여기 세상이란, 예수의 구원이 없었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그 세상이다. 어떤 이는 '죽음은 아직 펴 보지 않은 책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책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기쁨과 행복, 사랑과 평화, 빛과 생명을 가득 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생각은 죽음을 너무나 미화하는 것이 아닌가? 미화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는 데서이다. 그 사랑이 사람이 되어 오시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죽음을 달리 볼 수 있다. 사랑은 파괴하지 않고 건설한다. 사랑은 죽이지 않고 살린다. 사랑은 해치지 않고 구한다. 사랑은 병든 것을 낫게 하고 죽은 것도 다시 살린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사랑을 다하여 당신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한 인간을 죽음과 멸망으로 끝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그 때문에 누구든지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영생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 뒤에 우리가 누릴 행복에 대해 '눈으로 본 적이 없고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 2,9)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참되고 아름답고 복된 새 생명에 들어간다 해서 그것 때문에 죽음의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여전히 두렵고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이요 고뇌일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죽음 앞에 섰을 때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살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결국 당신의 사랑과 그 사랑이 베푸는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좋은 준비는 나날이 이 믿음을 깊이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을 상기하면서 우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이, 병든 이, 고통 속에 갇힌 이를 형제적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은 다음에 분명히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들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를 사랑한 것이 당신을 사랑한 것과 같다.'(마태 25,40)고 하면서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마련한 나라를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의 준비이다. - 김수환 추기경님의 명상록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