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존재 의의와 목적
성경본문|에베소서 1: 22 ~ 23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히2:8, 계19:16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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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목회자가 쓴 목회에 관한 어떤 글을 보니까 열심히 봉사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큰 교회를 떠나는 것과 작은 교회를 떠나는 것은 그 떠나는 이유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대단히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이 떠나는 이유는 좋아서 떠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멀리 이사하는 경우와 같은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담임목사가 싫어서, 교회가 싫어서, 동료 교인이 싫어서 떠납니다.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목회자의 심리가 다르다고 합니다.
큰 교회의 경우는 오히려 시원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떠나는 성도가 일방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떠납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의 경우 담임목사나 성도가 다 같이 상처가 크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오묘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과정을 통해 당하는 마음의 상처를 통해서도 새로운 살을 돋게 하시고 많은 교훈을 그 과정 중에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배우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교회를 옮기는 과정의 아픔 속에서도 배우기를 거절하면 한이 생깁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교회를 기본적으로 불신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교회에서도 헌신을 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옮기는 과정에서 배우기를 힘쓰면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정이 많이 들고 소중한 기억이 많은 교회를 떠날 때는 더 많이 배웁니다.
특히 무엇을 배웁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은 역시 겸손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가서는 보다 조심하고 보다 지혜롭게 행동하게 됩니다.
때로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과정 중에 믿음이 있어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은 성숙해집니다.
그러나 믿음도 포기하고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은 거기서 신앙생활이 중단됩니다.
사실상 우리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교회생활 하는 것으로는 잘 모릅니다.
교회를 옮기게 된 상황, 깊은 마음의 상처를 동반한 상황에서 그 순간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고 이전과 변함없는 태도로 충성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그 순간에 교회를 떠나서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작 상처의 순간에, 고난의 순간에 믿음 여부가 판명납니다.
물론 교회를 떠나는 것은 엄청난 상처입니다. 그 후유증이 오래 갑니다. 특히 떠나는 사람이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이 교회 옮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떠나 교회 옮기는 것은 사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목사님도 성숙할 수 있고, 성도도 성숙할 수 있습니다.
떠나야 하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그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하고 선한 일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진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새로운 역사를 기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너무 당연한 원리이지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의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 말씀대로 우리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교회 의식이 너무 지나친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성도들은 교회를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옮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교회를 자기의 교회로 보는 태도이지 주님의 교회로 보는 태도는 아닙니다.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본다면 모든 교회가 다 똑같은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야 하고 옮기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라는 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옮길 수 있어도 함부로 옮기지 않습니다.
교회를 옮길 때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잘 옮겨야 한다는 생각까지 해야 합니다.
기존 교회에 상처를 주지 않고, 기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누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교회를 옮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역시 어느 누구의 교회도 아니고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모두가 가지고 있다면 교회 옮기는 것이 지금보다 더욱 자유스럽게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본적으로 교회는 사람의 교회가 아닌 주님의 교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누가 싫어도 교회를 싫어하거나 교회를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교회를 주님의 교회라고 하면서 또한 뭐라고 정의합니까?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구절은 교회에 대한 최고의 찬사요 최고의 정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가득한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교회의 정의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존재하게 하신 목적이 있는데, 도대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세 가지로 교회의 중요한 목적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역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너무 기본적인 원리가 아닙니까?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고,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배가 갈수록 사람 중심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요새 교회경영학, 교회 마케팅이라는 용어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좋은 취지, 좋은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교회가 마치 기업처럼 운영되고 있습니다.
얼마를 투자하면 얼마의 결과가 나온다는 계산적인 방법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이단 소리를 듣는 어떤 교회는 교회에서 월급을 주는 유급직원만 5백 명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교회가 기업화되다 보니까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각종 아이디어가 등장하고 있고, 그 틈을 타서 출판사들은 그런 책들을 출판해서 이윤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고객이 되고 고객의 취향에 맞추어 교회가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들을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의 취향에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조율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일부 교인들에게는 신자인지 아닌지 모를 말이 서슴없이 나옵니다.
"교회는 아늑해야 해! 교회는 커야 해!"라는 식의 말이 서슴없이 나옵니다.
그리고 비전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미리 투자를 하라고 합니다.
은혜 받으면 헌신하고, 헌신이 모이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고 커지면 순수한 목적 이외의 목적을 가진 상태에서 헌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헌신하는 것도 인간 중심적인 생각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인간 중심적인 것을 찾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가 커지면 목사님들의 고개는 자기도 모르게 뻣뻣해지고 점차 교회가 종교기업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할 때 하나님께 단정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칼빈은 예배드릴 때 벌이 와서 쏴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발을 꼬거나 데리고 온 자녀들과 장난을 하거나 하지 말고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는 자세를 가지고 서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며, 그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위로를 받기 위해 그분께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만이 유일한 예배당이 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밖에서도 예배하는 삶이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항상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의 제일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제일 중요한 목적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예배드릴 때 최선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둘째, 교회의 중요한 목적은 영혼을 깨우치고 살리는 것입니다.
목욕탕에 들어 갔다 나온 사람은 얼굴이 훤해집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갔다 오는 사람들의 얼굴도 그처럼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에 마음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성경 교습소가 아닙니다. 성경학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배움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배움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숙이라는 것은 배움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양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배움이 많지 않았어도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지금은 성경은 많이 알았는데 설 알아서 비판의식은 늘어가기만 하고 오히려 꽤만 자꾸 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익숙하지만 인격에는 미성숙한 모습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대부분 예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을 못합니다.
성경공부에는 열심을 내지만 예배하는 일은 등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적 신앙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교회도 그냥 부흥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의 목회 이슈는 성장이 아니라 건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건강성은 교인들의 숫자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가에 따라 군대의 힘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최전선에서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훈련하는가에 따라서 그 군대의 힘이 평가되고 측정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얼마나 많은 숫자가 예배에 참석하는가에 따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서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교회의 건강성과 성도의 성숙함이 측정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의 목적이 변질되었습니다.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고 복 받고 즐거움만 찾으려는 곳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교회가 복과 즐거움을 얻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정작 본인이 해야 할 책임을 등한시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을 갖출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참 제자로 훈련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즉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날에 재현하는 작업! 이것이 소중합니다.
이러한 목적 의식에 성도들도 마음 문을 열고 제자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3. 셋째, 교회의 중요한 목적은 복음을 나누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런 자세로 온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수평이동에 의한 성장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수평이동으로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목회하는 데는 기분이 좋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자랐기 때문에 금방 적응을 하고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이전에 보고 배웠던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그 스타일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유대 속담에 재혼하면 네 명이 한 집에 산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재혼한 부부 외에, 옛 남편과 옛 아내가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두 명이 살지만 속으로는 네 명이 사는 셈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콩가루 집안이 되기에 딱 좋습니다.
교회는 그보다 훨씬 더 합니다.
자칫하면 수백 명의 목사님들이 있는 셈이 됩니다.
이전의 것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적응하려는 십자가의 자세가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옛날의 좋았던 것을 들고 와서 자꾸 강요합니다.
사실 좋았던 것이 그것뿐이겠습니까?
나빴던 것과 비교해서 지금 좋았던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시야도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시야는 구체적으로 가지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2-3개씩을 가지고 오면 좋은 것이 몇백 개 몇천 개 됩니다.
그처럼 들고 오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교인들을 잘 보냅니다.
마음껏 축복을 하고 보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잘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보낼 때의 마지막 가르침을 잘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떠나는 교인을 심방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이런 얘기를 할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교회로 가면 저의 좋은 점을 가지고 비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기억 속에서 저를 기억해 주시되 교회 생활 속에서는 저를 철저히 잊어 주세요.
옛날 목사님은 사랑이 많았느니, 말씀이 좋았느니, 교회분위기가 좋았느니 하지 마시고
그 교회의 방식대로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떠난 것, 지난 것을 기억해서 현재에 밑거름으로 삼으면 좋은데
그것들을 기억해서 자신의 현재를 우울하게 만들고,
현재의 삶에 정을 붙이지 못하게 만든다면 과거의 아름다움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내 생각을 강요하는 장소가 아니라
나의 소중한 마음과 손길을 마음껏 나눠주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도 나누고, 정도 나누고, 용서도 나누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가만히 앉아서 섭취만 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심술궂게 되어갑니다.
나누는 교회, 나누는 교인이 되어야
교회가 바른 교회이고 희망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교회의 아름다움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일의 기초석을 가장 앞서서 놓는 여러분들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출 처|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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