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제 5장 인간다운 삶의 완성을 향하여 1

문성식 2011. 6. 27. 17:36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오늘 고통과 슬픔 속에 이 자리에 나와 계신 인재근 씨를 비롯한 김근태 씨 가족,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과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한형제로서, 신앙인으로서 부활의 축복과 사랑의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야만적 고문이 없는 사회 건설을 다짐
우리는 지금 예수 부활 시기에 있습니다. 부활은 참으로 새로운 세계, 영원한 세계, 새로운 가치에 대한 체험을 일깨워 준 위대한 사건입니다. 고(故) 로버트 케네디에 대한 기억도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 이상 억울한 죽음,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진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서의 인권 유린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과 취지에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이 제정,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시상하고 또 수상하는 이 자리에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수상자인 김근태 씨가 이 자리에 없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멀리 외국의 인권 기관, 외국인에 의해서 이 상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착잡하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상을 직접 전달, 시상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는가 하면, 이 상을 주거나 받지 못하게 하려는 노력도 그에 못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뜻과 공적을 기리어 주는 포상은 만인의 축복과 기쁨 속에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을 놓고 그 누구나 다 함께 축복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이 진정 어디에 있는지 한번 근원적인 질문을 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김근태 씨와 우리를 갈라 놓고 있으며 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코 그 상을 받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갈라 놓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언제까지 이렇게 갈라져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나라 국민 된 한 사람으로서 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저는 우리 정치 공동체가 진작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더불어 함께 인간답게 살아 나갈 수 있었다면, 오늘의 갈라짐은 없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고문과 같은 비인간적 만행이 자행되던 시대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 출발한다는 자세가 확고했다면 그리고 진정 인간애와 형제애가 있었다면, 오늘 김근태 씨가 이 자리에 없는 슬픔은 씻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김근태 씨가 없고 서로 갈라져 있다는 사실이, 과연 우리 사회가 올바른 길로 올바른 속도로 제 갈길을 가고 있는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이 김근태 씨와 그 부인인 인재근 씨에게 주어진 것은 고문과 억압, 인간적인 모멸과 학대를 이겨 낸 인간의 의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경의의 표시라고 생각됩니다. 그분은 모진 고문 앞에서 처음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참으로 약하고 처참한 자신을 발견했지만 그러나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있는 힘을 다하여 비인간적인 고문, 정치 보복적인 용공 조작은 없어져야 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분명 엄청난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그의 목소리가 전달되었습니다. 오늘의 이 자리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된 것인 줄 압니다. 오늘 우리는 김근태 씨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안타까움에 대한 연대적 사랑으로 이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야만이 없고 보복이 없고 모욕이 없는 사회를 건설해 나아가자고 하는 다짐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사회에 다시는 김근태 씨와 같이 고문받는 사람이 없고 정치 보복적인 용공 조작이 없게 하기 위하여, 너나없이 다 함께 인간으로 거듭나고 잃어버린 인간성과 형제애를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그것만이 오늘의 착잡함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무엇보다 간절하게 하루속히 김근태 씨가 감옥에서 나와 여기 그의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과 그리고 그를 염려하고 아끼는 이웃들과 뜨겁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외 모든 양심수인들이 석방되어 가족들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인권상을 주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로버트 케네디 기념 재단'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바입니다.

(1988. 5. 4. 가톨릭 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