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제3장 교회는 왜 사회 참여를 하였는가? 6

문성식 2011. 6. 27. 17:19

 

민주 질서를 지탱하는 뿌리인 언론
1. 저의 방 앞에 가면 복도에 목각 현판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의 `말 한마디'라는 제목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 은혜스런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 주고 /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이 시는 매일 제가 방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앞에 볼 수 있습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정말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가 하면,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옛날부터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듯이 말이란 이렇게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이미 사도 야고보가 말의 실수가 없도록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야고 3, 2)라고 하였습니다.
2. 개개인의 경우에도 말이란 이런 힘을 가진 것이라면 언론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언론은 나라 안에 있어 입법, 사법, 행정부 다음에 오는 제4부라는 말이 있고 또 신문 기자를 무관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언론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은 미국 같으면 워터게이트의 경우, 워싱턴 포스트의 그 누구입니까. 아무튼 한 기자의 끈질긴 추적과 진실 보도를 통하여 닉슨 대통령을 사임시켰습니다. 닉슨 미대통령이면 당시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주름 잡던 큰 힘의 정치가가 아닙니까?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언론의 힘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막강한 실력자 다나카 전 수상의 수뢰 사건도 결국 언론의 끈질긴 추적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언론이 만일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다면, 요즘 한참 다시 문제 되고 있는 박종철 군 사건은 아마 초기 단계에 모든 것이 사실대로 밝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범양 사건의 비자금 문제도 지금쯤은 밝혀져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언론의 자유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언론 자유는 이렇게 진실의 보도를 통하여 사회를 바로 서게 할 뿐 아니라 여론 형성을 통하여 권력의 횡포를 견제하고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데 결정적 뒷받침이 되고 또 나라의 민주 질서를 지탱하는 근간이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저는 작년에 나라의 민주화에 있어 제일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것이 언론의 자유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무튼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는 진실의 등불이 타는 밝은 나라요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는 진실의 등불이 꺼진 어두운 나라입니다.

말씀의 전달은 교회의 근본 사명
3. 말과 관계하여 언론 못지 않게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도대체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위에 서 있고 이를 세상에 전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진실 아닌 그 무엇도, 정의 아닌 그 무엇도 전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명을 진 자로서, 그 말씀을 통하여 세상에 구원과 평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언지 모르게 오늘의 주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교회와 언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겠다는 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4. 교회와 언론, 얼핏 보면 서로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볼 때에는 언론이란 너무 가깝게 할 수도 없고 너무 멀리할 수도 없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에서 보아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자체의 사명 수행, 즉 복음 선교를 위하여 신문 방송 등 홍보 매체를 적극 이용하는 필요성을 느끼고 이에 대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은 일반 언론이 아니고 교회 언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언론은 주로 일반 언론일 것입니다. 그런 일반 언론에서 교회를 볼 때에도 요즘은 박종철 군 사건 때문에, 즉 범인 은폐 문제를 여기 사제단에서 터뜨렸기 때문에 그 연유로 언론과 교회가 매우 가까워진 감은 있으나 그렇다고 늘 그런 것은 아니고 언론이 볼 때 교회 역시 하나의 취재 대상으로서의 의미는 있을망정 그 이상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취재 대상 치고는 가장 접근하기 어렵고 많은 기자들은 아마 괜히 별것도 아니면서 콧대만 높은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취재할 거리만 없다면 꼴도 보기 싫은 것이 여럿 있겠는데 그중 하나가 교회이다." 이쯤 되어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교회와 언론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에 있어서 상호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5.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하느님 말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교회의 근본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세상에 하느님의 참 생명이 주는 구원을 가져오고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선포로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하면 교회는 인간과 인류 세계가 찾고 있는 진실을 간직하고 또한 이를 주는 원초적 언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물론 자체 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본래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 다시 말해서 자신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풍성히 알게 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교가 믿는 하느님은 결코 고고히 홀로 서 있는 분이 아니고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이시며 또한 이렇게 자신을 열고 자신에 관한 정보를 우리 인간에게까지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정보의 내용, 즉 빛과 생명과 진리, 정의, 사랑, 자비, 평화를 통하여 인간과 세상이 구원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이것을 인간들이 당신을 거슬러 거듭거듭 배역하는데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다시금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특히 이 예언을 스스로 받아서 듣고 따를 뿐 아니라 인류에게도 전해야 할 사명을 지닌 이스라엘 민족이, 이를 끝내 거부하였을 때 드디어는 당신의 외아들까지 보내셨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과 그 외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 성경의 복음을 잘 읽어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 당신에 관한 구원과 생명의 정보를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이시면서 동시에 그 메시지 내용 자체이시기도 한 분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이분을 실제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 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여기 이 `말씀'은 그리스말로 Logos라고 하고 이 Logos는 단순히 `말'이란 뜻만이 아니고 생각, 이성, 지혜까지 뜻하며 특히 성서적으로는 하느님의 창조의 생각을 포함하여 진리, 정의, 사랑, 빛,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고 또 빛이라고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그 자유를 주는 진리이심을 시사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써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여 주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느님 말씀으로 새 인간, 새 세상, 하느님 나라를 도래케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하느님 말씀 위에 서 있고 그 말씀을 전한다면 같은 의미의 인간 구원을 가져오고 또 세상을 참으로 인간적인 세상으로 변혁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이런 총체적 의미를 지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신 예수님의 전달로써 세상에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증진을 가져오고 인간을 구원하며 평화를 이룩해 감을 사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하느님으로부터 그 사명을 받은 원초적 언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론도 진리를 바탕으로 사회 선도
6. 그러면 언론은 어떤가? 신문 또는 언론을 우리는 사회의 목탁이라고 합니다. 저는 목탁이라는 말마디를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보니, 세상 사람을 가르쳐 바로 이끌어 가는 사명을 신문과 언론은 띠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의 전달로 세상을 구하는 사명을 지고 있는 교회와 세상 사람을 가르쳐 바로 이끌어 가는 사명을 띤 언론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록 교회의 구원 차원은 현세만이 아니고 영세에까지 미치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진리와 정의의 선포 및 사랑의 확산으로써 보다 인간다운 사회, 보다 인간다운 세계로 만들어 가는 데는 양자가 거의 같은 사명을 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언론인을 비록 성직자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가 지고 있는 사명의 신성함으로 볼 때 성직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분명히 언론인은 단순히 그 분야의 전문 기술인만이 아닙니다. 그의 직업은 인간과 사회에 진실로써 봉사해야 하는 천직입니다. 이것은 설령 본인이 이런 천직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독자들(수혜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요즘 박종철 군 사건을 두고서도 수많은 독자들이 신문 기자들에게 진실에 충실하여 줄 것을 그렇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주 사태나 또는 그 이전에도 시민들이 신문사나 방송국을 불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신문 방송은 진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시민을 배반하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KBS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사실 교회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 말씀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언론의 뿌리 역시 그 말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때 무엇에 준거하여 이것이 진리이다, 이것이 정의이다, 이것이 인간 도리이다 하고 사설이나 논설을 쓸 수 있겠습니까? 또 어느 한 기자가 이 사실을 사실 대로 기사화시킬 것이냐, 아니냐로 번민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 때 마지막 판단은 양심의 소리일 것입니다. 이 양심의 소리는, 양심이 잘못되어 비뚤어진 경우 또 마비된 경우도 없지 않으나, 정상적 상황에서는 그것은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하느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의 양심의 소리는 사회적 차별과 인종, 국경, 종교의 차별까지 초월하여 세계 모든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너무나 자주 체험합니다. 아무튼 이럴 때 언론의 뿌리는 역시 하느님 말씀입니다. 적어도 저희들,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회의 사명과 언론의 사명은 세상을 바로 이끌어 보다 인간다운 사회, 진실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드는 데 있어서 같습니다.
7. 바로 그런 뜻에서 올해 1987년 세계 홍보의 날에 교황님은 메시지를 발표하면서, 세계의 모든 언론인들과 그 수혜자들이 당신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메시지 주제는, 정의와 평화 증진을 위한 사회 홍보입니다. 그리고 강조하신 것은 사회 홍보 제작자, 즉 언론인이나 그 수혜자(방송 시청자, 신문 독자) 다 같이 정의와 평화의 시각을 망각하지 말고 자신들의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오늘의 세상에 참 평화가 이룩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어떤 절박한 심경에서 이것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세계 평화는 실제로 위협받고 있고 그 위협은 날로 더 커져 가고 있습니다. 그 위험이 현실화될 때에는 그것은 참으로 인류의 종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참변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평화 속에 사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는 힘의 균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세계를 일순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를 주축으로 하는 무력의 힘을 동서 진영이 균형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결코 참된 평화는 아닙니다. 위장된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 위장은 아주 쉽게 벗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절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교황님은 이 메시지에서 "공포의 세력 균형을 상호 신뢰의 전략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신뢰의 전략(strategy of trust), 이 말씀은 세계의 모든 위정자와 대립되어 있는 진영 사이에는 물론이요 모든 나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세계 곳곳의 모든 이에게 진실의 정보가 전달되고 세계의 지도자들을 위시하여 모든 이 안에 대화의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오늘의 언론인, 즉 홍보 매체 종사자들의 사명이라고 교황님은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평화를 위한 그 대화는, 정보 교환은 물론 오락과 광고, 예술 창작과 교육, 문화적 가치 평화에 대한 교환까지도 내포한 총체적 대화(total dialogue)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것이 이룩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평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 홍보, 즉 매스컴 종사자들은 물론이요 수혜자들까지도 정의와 평화에 대한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권력과 금력의 손 안에 있는 한국 언론
8. 제가 지난 4월 말에 로마에 회의 때문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작년에 저의 이른바 로마 발언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는 데 역할을 한 AP 통신의 구삼열 기자를 만나 다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분 말이 언론에 대하여 교황님이 강조하시는 말씀, 즉 언론은 참되고 정의롭고 또 보다 인간다운 세계 건설과 평화를 위해서 이바지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냉담하고 으레 하는 설교 말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차츰 그 속의 언론의 본질적 사명이 밝혀져 있고 현실의 언론은 이것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또 자기가 어떤 기사를 쓰면 그것은 곧 상품처럼 된다고 하며 "그래서 여러 신문에 자기가 쓴 기사가 많이 게재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즉 잘 팔리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잘 팔리려면 자연히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쓰게 되고 그것은 곧 재미나게, 센세이셔널하게 쓰는 습성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진실을 왜곡하여 전달하기 쉬운 유혹까지 받게 됩니다. 그 결과로 보다 진실되고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와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 건설에 이바지하기보다는 자칫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데 이바지하게도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한 기자의 이 같은 고백은 저에게도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언론은, 일선 기자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또는 무슨 동기로 기사를 쓰는가, 기사는 상품에 불과한가, 신문이나 잡지 등도 결국 상품에 지나지 않는가, 심지어 사람의 얼굴까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TV 방송국에 앵커우먼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분명히 지성적이고 목소리도 맑고 좋아야 하지만 얼굴도 잘나고 각선미도 있는 젊은 여성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로마 가는 비행기 안에서 월간 가정 조선 4월호에서인가 마침 이 문제를 다룬 글을 읽었는데, 영국의 BBC에서는 이것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BBC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사실 보도 그 자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BBC에 아주 예쁘고 각선미가 좋은 앵커우먼이 있었는데 거기서 별로 그런 점을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것을 알아주는 미국 보스턴 어느 방송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BBC는 사실 보도에 있어서 세계적인 신망을 받고 있습니다. BBC에서 말했다 하면 누구도 의심치 않는 그런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9. 제가 좀 옆길로 흘렀나 봅니다. 제가 다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즉 우리 나라의 언론인과 수혜자들은 교황님의 그 호소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 답이 쉽지 않습니다. 전에 제가 일본 상지 대학 다닐 때, 독일인 신부님인 교수 한 분이 우리에게 "자네들, 세계를 주무르는 정치인들을 지배하는 것은 누군지 아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갑작스런 질문에 답을 못하고 우물우물하고 있자니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여론을 조종하는 신문이야. 그런데 그 신문을 지배하는 것은 누구인지 아느냐? 그것은 돈 많은 자본가들이고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유다인들이야. 그러니 결국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유다인들이야…."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누구에게 들으니 오늘도 역시 유다인들이라고 합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요즘 한국에 정치는 형편없는데도 불구하고 경제는 잘되어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삼저 호황 무어라고 하지만 실은 세계 유다인 지도자들이 소련과 맞서 있는 한국의 전략적 위치를 재인식하고 한국을 돕자고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가 졸렬한 정치에도 불구하고 잘되어 간답니다. 또 올림픽을 한국에서 하게 된 것도 다 그 친구들이 막후에서 조종을 했기 때문이랍니다.

제도 언론의 틀 속에 안주해 온 일부 언론
또다시 옆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국의 신문, 방송은 누구의 손에 있느냐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기자나 편집진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권력과 금력의 손 안에 있습니다. 물론 이들도 어느 정도까지는 여유를 두고 있겠지요. 그 여유가 아마 지금 누리고 있는 언론의 자유의 폭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의 권리로 당연히 주어진 것도 헌법으로 보장된 것도 아니고 그들 실권자들의 아량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안 된다 하면 그것까지 이겨 내면서, 언론인 본연의 사명에 따라 언론 자유를 고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여기다 또 우리 나라에는 저 유명한 `언론 기본법'이라는 언론 자유를 크게 제약하는 악법이 있습니다. 거기다 보도 지침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숱한 인권 유린과 공권력의 남용이 언론의 침묵 속에 활개 치고 있는 세상입니다. 예를 들어, 김대중 씨는 지난 4월 10일부터 오늘까지 46일간 불법 감금과 다를 바 없는 연금 아래 있습니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무기한 계속되고 있는 김대중 씨에 대한 연금은 정치 활동이라는 구실로 장남과의 접근조차 금지하는 비인간적인 것인데, 언론은 이 문제를 단순한 가십으로 가볍게 다룸으로써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공권력의 남용을 외면한 결과를 빚어 냈습니다. 김대중 씨만한 정치 지도자에게도 무차별하게 저질러지고 있는 인권 유린의 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면 이런 언론이 어떻게 평범한 시민의 권리를 지켜 줄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이렇듯이 이른바 제도 언론의 틀 속에 안주해 온 우리의 언론 현실은 부끄럽고 슬프기조차 합니다.
10. 그러나 그것이 물론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수없이 이를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습니다. 이 땅의 언론 자유 획득은 국민 모두의 과제겠으나, 그렇더라도 첫째로는 언론인들 자신들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일어난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로 그 동안에 유신 이래 수없이 많은 언론 탄압 속에서도 그 자유를 위해 투쟁하신 분들, 동아 투위, 조선 투위의 여러분들, 오늘도 역시 `말'지 사건, 즉 보도 지침을 폭로한 사건 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계시는 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명합니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에, 서울 신문 편집국 기자 분들이 편집권 독립을 위하여 성명서를 냄으로써 언론 자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또 어제는 동아 일보 기자 일동(98명)이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장'을 발표하면서 역시 언론 자유의 회복이 민주화의 최선결 요체임을 밝힌 점 등은, 참으로 박해와 희생을 무릅쓰고 용감히 일어선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있는 한 그리고 이 같은 움직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한 이 땅에 언론 자유는 반드시 회복된다고 믿습니다. 저희들 교회가 이 땅의 언론 자유, 또는 민주화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교회나 언론이나 다 같이 오늘 이 시대에 이 같은 소명을 받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 좋은 일, 또 우리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아주 필요한 일에 깊게 손을 맞잡고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리핀에서 작년에 민주화가 이룩 될 때에, 교회와 언론은 다 같이 크게 협력했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엔릴레 국방 장관과 라모스 참모 총장이 마르코스 진영을 이탈하여 ?사 거리에 있는 군 소속 무슨 건물에 가서 마르코스에게 저항하기로 하였을 때, 마닐라 대주교 신 추기경은 라디오 베리타스 방송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즉 모든 민주 시민들은 즉시 ?사 거리로 나와서 그들을 마르코스 측의 무력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거듭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그 거리에 모여들었고 드디어 그것이 필리핀의 마르코스 18년 독재의 종지부를 찍고 코라손 아키노 여사로 하여금 민주화의 승리를 이룩하게 한 민중의 힘을 형성했습니다. 이 때 또한 친정부지 외에는 많은 신문들이 적극 후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언론이 함께 손을 잡고 협력함으로써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그것도 비폭력의 평화로운 길을 통하여 이룩한 좋은 예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물론 필리핀이 아닙니다. 또 현재의 상황은 필리핀의 그것과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있어서 역시, 첫째는 모든 언론인과 종사자들 그리고 수혜자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올해 홍보의 날 메시지에 따라서 끊임없이 정의와 평화의 시각을 잃지 않고 우리 나라가 진실과 정의에 의하여 인간화되고 민주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언론인들은 진정 자신들이 천직으로 받은 사명이 바로 이 시대에 진리와 정의 증진, 사랑과 평화 증진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위하여 언론 자유를 회복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수혜자로서의 입장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그 본래의 사명 때문에 언론 자유를 포함하여 이 땅의 모든 자유가 제약받지 않음으로써 이 땅이 참으로 인간다운 사회될 수 있도록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언론과 교회 또 시민이 하나 될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민주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박종철 군 사건 사실대로 규명돼야
11. 끝으로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에 대한 저의 소감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당국이 진상을 은폐하고 조작하였음이 밝혀져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 고문을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를 위한 제도적 방안이 여러 부분에서 제시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부 당국도 인권 특위를 구성하고 고문 방지를 위한 의지를 표명하였습니다만 이제 다시 한 번 국민은 정부를 불신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습니다. 그토록 진상과 다르게 조작하고 그토록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려고 한 점은 국민을 한낱 통치 대상으로밖에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엄청난 범행을 은폐하고 조작하기까지의 과정에는 고위층이 관여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검찰의 수사권을 포기하도록 하고 경찰이 자체 수사하게끔 한 점만 보아도 판단할 수 있는 점입니다. 범행의 진상 은폐와 축소 조작의 사실이 폭로된 이후 검찰이 수사를 재개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고 있습니다만, 진실은 당초에 은폐한 사람들에 의하여 밝혀질 수 없습니다. 검찰은 진실을 어둠 속에 파묻었을 뿐만 아니라 조작에 동조, 묵인했다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으므로 그들에 의해서 밝혀지는 진실은 적어도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제라도 진상이 사실과 하나도 다름없이 규명되지 못한다면 현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국민을 다시 한 번 속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큰 혼란을 우리 안에 초래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간절히 바라는 정부 대 국민의 신뢰 회복, 사회 안정과 나라의 희망, 그리고 민주화는 국민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이 사건이 공명 정대하게 진실 그대로 밝혀질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1987.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