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오늘의 말씀과 묵상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6/13)

문성식 2011. 6. 13. 10:32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6/13)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파도바의 안토니오라고 불리는 것은 파도바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평소 친분이 있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다. 사제로 서품되어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고해 사제와 유명한 설교가로서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이끌었다. 평소 몸이 약했던 성인은 36살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1232년)에 시성되었다.
    말씀의 초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슬프고 가난해 보이지만 그들은 진리와 말씀의 힘으로 마음은 늘 기쁘고 풍요롭다. 매질과 모욕, 옥살이를 당해도 그들은 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진실한 사랑을 전한다. 초대 교회의 예수님 제자들의 선교 모습이다(제1독서). 이스라엘의 복수 동태법은 무자비하게 복수를 하는 것에서 가해자를 보호하고 형평성에 따른 동등한 형태의 벌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마저도 거부하시면서 오히려 더욱더 적극적인 사랑을 바라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6,1-10 형제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이 직분이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살면서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소외를 당하고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벌이나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기도 하고, 누명을 쓰거나 이유 없이 해를 입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에게 그만큼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내가 받은 슬픔과 고통을 그들도 똑같이 받아 보아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정의가 바로 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4)는 ‘복수 동태법’이라는 법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와는 반대로 더 억울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어집니다.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만 갚을 때 그 악의 세력은 더욱 번창해 갑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 주는 누군가의 ‘바보 같은 사랑’과 희생이 있을 때라야 악은 그 힘을 잃고 맙니다. 사회에 질서와 정의를 세우는 것은 인간이 만든 법과 힘일 것 같지만, 사실은 더 깊은 곳에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주님께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보 같은 사랑을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자캐오나무-그대 사랑에 눈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