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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달항아리, 그 넉넉함의 미학

문성식 2010. 9. 2. 18:56

 

 

조선 백자 항아리의 세계


글+사진 윤용이 _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문화재위원


백자 항아리는 대접, 사발, 병 등과 함께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그릇의 하나로 백자 중에서도 다양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항아리들은 당시의 생활 모습을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형태와 문양, 유색 등에서 차이를 보이며 만들어졌다. 백자 항아리는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기형과 문양을 새겼는데, 주로 일상생활에서 쓰는 그릇과 제사나 잔치와 같은 예식에 사용하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항아리는 여러 용도로 쓰였는데, 각종 양념, 꿀, 소금, 젓갈, 잡곡,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을 이들 항아리에 담아 부엌 찬간이나 뒤주, 쌀광 등에 놓아 사용하였다. 항아리는 옹기甕器로 만든 다른 그릇과 마찬가지로 습기를 막고 벌레, 쥐들의 피해를 방지하는데 유용했으며, 또한 꿀 등을 담는데 사용한 단지처럼 내용에 따라 쓰임의 크고 작은 예가 많이 있다. 항아리에는 청화靑畵나 철화鐵畵 기법으로 장식하여 사용했다.
뱃두리라고 불리는 배가 둥그런 항아리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많이 만들어졌는데 단지와 함께 짧은 시간 내에 먹을 김치나 된장, 술 같은 것을 담았다. 이러한 둥근 항아리는 조선시대 항아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 수가 많으며 순백색으로 문양이 없거나 철화로 시문한 예가 있다. 그 외에도 석간주 항아리는 단지와 함께 18~19세기에 걸쳐 꿀 및 양념류를 담는 데 쓰였다. 태胎를 담는 태 항아리는 어깨부분에 네 귀가 달리고 뚜껑이 있으며, 왕족들의 전유물로써 사용되었다.
제사와 잔치 등의 예식에 쓰인 항아리들은 대체로 단정한 형태와 청초한 유색으로 엄숙한 느낌을 준다. 이것들은 일상생활에 사용한 그릇이라기보다는 탁자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기물이라고 생각 될 만큼 옆에 두고 보기 위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장식용으로 쓰인 이들 항아리는 목을 높게 세우고 몸체의 면은 다각多角으로 깎은 것이 많으며 굽이 높다. 궁중의 연회 등에 사용되는 술항아리와 꽃항아리는 청화나 철화 안료를 사용하여 운룡雲龍, 봉황, 모란 등을 그려 넣었다.
이처럼 술항아리는 제사 및 잔치 때 쓰일 술을 담거나 꽃을 꽂는 그릇으로써 종묘宗廟를 비롯한 여러 관청에서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는 사대부는 물론 일반 민간에서도 널리 쓰였다. 특히 쌀뒤주 위에 장식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그릇을 올려놓고 그 속에 잡곡을 넣어 두었다가 제삿날에 떡쌀로 쓰기도 하였다.


 

백자에는 장식 무늬가 없는 순백자純白瓷와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청화백자, 철사鐵砂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백자 그리고 산화동酸化銅의 안료로 무늬를 그린 동화銅畵백자, 상감象嵌기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상감백자 등이 있다. 이들 중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이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순백자이며, 청화백자와 철화백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상당량 제작되었고 그 외에 상감백자와 동화백자는 드물게 만들어 졌다.
순백자 항아리에는 문양이 없거나 음각, 양각, 투각의 문양이 시문된 예가 있다. 무늬가 없는 백자 항아리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이 만들어 졌으며 음각 및 양각, 투각의 백자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분원리分院里 가마에서 만들어졌다.
문양이 없는 백자 항아리는 전 시기에 걸쳐 광주 분원의 관영사기공장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시기에 따라 15,16세기의 항아리는 입이 밖으로 말렸거나 안으로 숙여 세워진 형태에, 몸체가 어깨에서 벌어져 서서히 좁아져 내려와 충만하고 안정감이 있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전의 형태를 이은 것과 새로운 둥근 항아리가 크고 작은 형태로 만들어 졌는데, 유색은 회백색灰白色을 짙게 띠며 입이 예각으로 깎인 특이한 모습이 둥근 몸체와 잘 어울렸다.
18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입이 곧게 세워지고 몸체가 길어져 원숙함이 나타난다. 유색에 있어서 전형적인 유백색을 띠며 조선 조형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또 이전과는 달리 각이 진 항아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목이 더욱 높이 세워지고 몸체가 길어지며, 굽 모서리가 깎이는 항아리와 팔각八角의 항아리가 만들어졌다. 유색은 청백색을 띠며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다.
이처럼 백자 항아리에 있어 입과 어깨, 배와 바닥의 변화와 유색의 변천에서 순백자의 변화를 볼 수 있는데, 백자 항아리 중에도 특히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원숙한 달항아리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청화백자 항아리는 제례기祭禮器에 사용되었을 주기酒器, 화기花器, 제기용祭器用의 기물이 많이 있다. 이러한 청화백자의 코발트 안료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15, 16세기의 항아리는 격이 높았지만 드물게 제작되었다. 실제로 널리 쓰인 것은 18, 19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형태와 용도의 면에서 다양하다. 15, 16세기의 형태로 순백자 항아리와 같이 입이 밖으로 말렸거나 안으로 숙여 세워진 여러 형태의 항아리가 있다. 18세기부터 목이 직립되고 몸체가 팔각의 각이 진 항아리가 만들어졌다. 19세기에는 목이 더욱 높이 직립되고 문양은 여백이 없이 꽉 차게 배치되며 장생문長生文, 봉황문, 운룡문 등이 시문되었다.
철화 백자 항아리는 코발트 안료의 대용으로 많이 제작된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졌다. 특히 17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다양한 철화 문양의 항아리들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철화 백자가 가장 많이 만들어진 곳은 광주 신대리新垈里 가마로 수많은 철화 항아리 조각이 발견 되고 있다.
동화백자 항아리는 18~19세기에 걸쳐 드물게 만들어졌으며 이중의 입술을 지닌 둥근 항아리와 몸이 직립된 항아리, 팔각의 항아리에 연꽃, 모란, 포도 문양들이 강한 필치로 그려진 것이 남아 있다. 이러한 동화 백자 항아리는 그 붉은색으로 인해서 특수한 용도의 기물로써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가장 원숙한 백자 달항아리를 제작할 수 있었던 시대 배경과 구체적 양상은 어떤 것일까. 17세기에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대부들이 이루었던 모든 것들을 전쟁으로 잃어버려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더욱 그들을 당혹시켰던 것은 청淸의 등장이었다. 청은 오랑캐로 불리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여진족은 이전까지 우리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모셨었다. 그 당시 유학儒學의 가르침으로 사대부들에게 영향을 미친 종주국은 중국의 명나라였는데, 전쟁 이후 청이 상국이 되자 중국의 주인이 하루아침에 오랑캐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노론老論 세력을 형성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비롯한 서인들에게 중국은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삶의 목표를 두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들이 도출한 것은 ‘중국은 우리다’. ‘조선이 중국이다’라는 것이었다. 결국 중국은 사라졌고 우리가 중국이며 우리 자체 내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친 회화, 특히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추구했던 것도 금강산金剛山이라는 진경산수眞景山水, 즉 조선을 소재로 한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이 시기의 실학實學도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로써 우리 자체 내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찾는,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춘향전, 흥부가와 같은 소설, 판소리, 민화 등도 이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목기라든지 옹기 문화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오늘날 한국적이라고 하는 세계의 뿌리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재발견에서 시작된 것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들어가면 중국은 청화백자 위에 애나멜로 삼채三彩, 오채五彩, 칠채七彩를 색칠하여 화려한 채색자기를 만들었고, 일본은 그것을 배워 중국자기와 똑같이 만들어 유럽에 수출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모두 오랑캐 짓이라 하여 외부를 바라보지 않고 내부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래서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간결한 순백자의 풍만한 항아리들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17세기 후반에는 백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사용되었고 둥근 달항아리가 만들어졌으며, 철화 기법으로 운룡문, 매죽문梅竹文, 초화문草花文 등이 자유롭게 시문된 철화 백자 항아리들이 제작 되었다.
1670년대의 대표적인 광주 신대리 가마는 회백색, 담청회백색淡靑灰白色의 백자에 철화로 운룡, 초화, 국화 문양 등이 자유롭고 간략하게 시문되거나 생략된 철화백자의 가마로, 전국적으로 수많은 백자 가마에서 자유롭게 시문된 초문草文의 병甁, 호壺들이 이 시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1680년대의 가마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숙종 2년의 기록에 보이는 ‘탑립동분원塔立洞分院’은 광주 지월리池月里 가마로 추정되며 회백자灰白瓷와 담청회백자淡靑灰白瓷의 제작이 계속 이루어진 곳이다. 1690년대의 백자가마는 확실하지 않으나 회백자에서 유백자乳白瓷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로 추정된다.
18세기 전반은 조선백자에 있어서 고전적인 유백색의 백자 제작이 이루어졌으며, 그 제작의 중심은 경기도 광주 금사리金沙里 가마였다. 이 시기를 살았던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1677~ 1724)의 ≪두타초頭陀草≫책3에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앵자산鶯子山 북쪽 우천牛川 동쪽에
남한산성이 눈 안에 있고
강 구름은 밤마다 계속해서 비를 만들며
산골 나무에는 열흘 계속하여 바람이 길게 부네.


 

도공들은 산모롱이에 사는데
오랜 부역이 괴롭다네.
스스로 말하길 지난해 영남으로 가서
진주 백토를 배에 실어왔단다.


 

선천토宣川土 색상은 눈雪과 같아서
어기御器 번성燔成에는 제일이라.
감사가 글을 올려 백성의 노역을 덜었지만
진상품은 해마다 쓰지 못할 물품이 많네.


 

수비水飛하여 만든 정교한 흙은 솜보다 부드럽고
발로 물레 돌리니 저절로 도네.
잠깐 사이 천여 개를 빚어내니
사발, 접시, 병, 항아리 하나같이 둥글다네.


 

진상할 그릇 종류는 삼십 가지요.
사옹원 본원에 바칠 양은 사백 바리나 되네.
깨끗하고 거친 색과 모양 논하지 말게.
바로 무전無錢이 죄이로다.


 

회청灰靑으로 칠한 한 글자를 은처럼 아껴
갖가지 모양 그려내어도 색깔이 고르다.
지난해 내전에 용준龍樽을 바치니
내수사內需司에서 면포를 공인에게 상으로 주었다네.


 

팔십노인 성은 박씨라.
그 안에서 솜씨 좋은 장인으로 불린다네.
두꺼비 연적은 가장 기이한 물품이고
팔각 중국풍 항아리 정말 좋은 모양이네.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연구》 일지사 2001 p.166~167쪽에서 인용


 


숙종 35년(1709)에 이하곤이 묘지墓誌 사번私燔을 위해 분원에 머물며 제작과정을 지켜보면서 지은 시이다. 분원에 장기간 입역하여서인지 제작에 임하는 장인들의 노고에 대한 연민의 정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손에서 빚어지는 우리 백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광주 일대의 백자 가마터 중에서 금사리 가마터 출토의 백자편白瓷片과 유사한 백자를 제작하던 곳으로, 1710년대 전후의 궁평리宮坪里 가마와 현재의 실촌면 오향리五香里 가마를 들 수 있다. 실촌면 오향리 가마는 경종 즉위년(1720) 12월 17일조에 기록된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정유년(1717)에 실촌면實村面의 오양동五陽洞에 사기제조장沙器製造場을 이설移設하였다’라는 기록으로 1717년부터 1720년까지 제작활동을 하였음을 출토되는 백자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1721년부터 1725년까지는 광부 우천변牛川邊의 가마, 즉 지금의 퇴촌면退村面 관음리觀音里 가마에서 제작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기록에 보이는 우천강변의 금사리 가마에서는 1726년경부터 1751년까지 분원리로 가마를 옮기는 25년 동안 제작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사리 가마에서는 유백색의 백자를 바탕으로 풍만하게 이루어진 둥근 달항아리를 비롯한 굽이 높아진 각종 제기와 면面과 각角을 다듬은 다양한 항아리와 병이 등장하고, 청화로 간결하게 패랭이, 난초, 국화 문양이 그려진 청초한 청화백자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는 조선의 유교적 부위기에 따라 질박하고 검소하며 실용성을 띤 형태로 생활에 꼭 필요한 용기容器로서 용도에 따라 크기 또한 대, 중, 소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왕실 및 사대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제사를 위한 제기로서의 항아리와 국가가 치르는 각종의 잔치를 위한 예기禮器로서의 항아리가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동화백자, 상감백자 등으로 격식을 갖추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지배 세력의 확대에 따라 사대부를 비롯하여 일반 민가에서도 이들 항아리들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항아리들은 시대에 따른 미감美感과 백토, 안료에 따라 여러 종류의 형태를 갖춘 항아리들로 만들어졌다.
항아리 형태의 변천을 보면 15~16세기 경에는 입술이 밖으로 말리거나 안으로 오므라져 세워지고, 몸체는 풍만하며 넓은 굽을 지녀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유색은 회백색, 유백색, 청백색을 띤 매우 뛰어난 항아리였으며,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는 입의 각이 예리하게 깎여지고 몸체가 둥근 달항아리가 새로 제작되었다. 19세기에는 입술이 높이 곧게 서 있다. 백자 항아리 중에서도 원숙함을 가장 농밀하게 표현한 달항아리가 제작되었던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는 우리 자신의 세계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졌던 시기로, 이 시기의 달항아리는 광주 금사리 가마를 중심으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특색인 조선 백자 달항아리의 흰색과 둥근 맛의 세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백자 달항아리는 실제 생활에 잘 쓰이도록 견실하게 제작되었고 장식이나 기교가 없는 단순한 형태에 담백한 우윳빛의 백색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현대에 와서 세계 도자 속에서 조선 백자가 갖는 가치의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지극히 평범하고 꾸밈없는 조선 백자 항아리의 세계는 보면 볼수록 더욱 가까이 하고 싶은 깊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1 18세기 | 높이 45cm, 몸체지름 43.5cm, 입지름 20.5cm, 밑지름 15.5cm |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
달항아리 중에서 질박한 생활의 채취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 1887~1979)가 1935년 한국에서 구입하여 소장했던 항아리이다. 버나드 리치는 이 항아리를 구입해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 라며 좋아했다. 1997년 대영박물관이 운 좋게 구입해 한국실에서 늘 전시되어 왔다.


 

2 18세기 | 높이 49cm, 입지름 20.1cm, 밑지름 15.7cm | 국보 제262호 | 우학문화재단 소장
몸체지름에 비해 키가 커서 갸름한 인상을 준다. 담청색 유약을 내외면에 씌웠으나 부분적으로 유약이 씌워지지 않은 곳도 있다. 유약이 흘러 뭉친 곳은 옅은 푸른색을 띤다. 몸체 하부 곳곳에 태토에 섞인 잡물로 인해 황적색을 띠는 부분이 있으며 표면 전체에 걸쳐 미세한 기공들이 분포해 있다.


 

 


 

백자달항아리의 미학적 해석과 견해


 

혜곡 최순우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 미술에 표현된 둥근 맛은 한국적인 조형미의 특이한 체질의 하나이다. 따라서 한국의 폭넓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 시대 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외국 사람들은 곧잘 한국을 항아리의 나라라고는 부르지만 우리네의 집안 살림살이 세간 중에서 크고 작은 항아리 종류들을 빼 놓으면 집안이 허수룩해질 만큼 그 위치가 크다. 따라서 이렇게 많은 항아리들 중에는 잘생긴 작품이 매우 많다. 이 항아리들을 빚어 낸 사람들도 큰 욕심 없이 무심히 빚어 내었을 것이고 이것을 사들여 아침 저녁 매만지던 조선 시대 여인들도 그저 대견스러운 마음으로 무심하게 다루어 왔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남겨진 백자 항아리들이 오늘날 한국미의 가장 특색있는 아름다움의 한 가닥을 차지하게 되었고, 요사이는 잘생긴 백자 항아리 하나에 천만금이 간다고 해도 놀랄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백자 항아리의 작가들이 비록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작품화한 것이 아니었다 해도 그들은 자신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항아리의 둥근 맛과 여기에서 저절로 이어지는 의젓한 곡선미에 남몰래 흥겨웠을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비록 작가 의식을 가지고 계산해서 낳아 놓은 아름다움은 아니었지만 도공들의 손길은 그들의 흥겨운 마음을 따라 움직였을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즉 모르고 만들어 낸 아름다움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 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을 우리는 어느 나라의 항아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대견함을 느낀다. 이러한 백자 항아리들을 수십 개 늘어놓고 바라보면 마치 어느 시골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네들의 흰옷 군상들이 생각나리 만큼 백자 항아리의 흰색은 우리 민족의 성정과 그들이 즐기는 색채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백의민족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불러 보기도 했는데, 우리네의 흰 의복과 백자 항아리의 흰색은 같은 마음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겠다. 이웃나라 중국 자기나 일본 자기들이 그렇게 다채로운 빛깔로 온통 사기 그릇을 뒤덮던 시대에 우리는 마치 배꽃이나 젖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순정어린 흰빛의 조화를 유유하게 즐겨왔으니 과연 한국 사람은 백의민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이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하면 혹시 심미에 대한 건강한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조선 자기의 아름다움은 계산을 초월한 이러한 설명이 필요하리 만큼 신기스럽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1994, p. 217~219 |


 

방병선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분수를 아는 조선 선비들의 지혜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간이나 왕조를 유지했던 건강한 나라였다. 그런 조선을 이끌고 나갔던 조선의 선비들은 외래문화를 흡수하면서도 고유문화 창달을 이루어냈다. 선비들은 철학과 문예를 겸비한 당대 핵심적 문화그룹을 형성하였다. 시서화詩書畵에도 능하여 실제로 산수·자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통해 조선시를 짓고 훌륭한 문장을 남겼으며 고유한 화법을 창안하였다. 이들은 꾸준히 학예적 역량을 키우며 선비가 지녀야 하는 아름다움의 지향점을 제시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 역시 선비였다. 역대 임금들의 학문적, 예술적 수준은 가히 최고의 지위에 걸맞는 것이었다. 왕실의 미감은 사대부의 미감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세종이나 영조, 정조 임금처럼 조선의 예능 세계를 선도하였다. 이러한 조선 선비들이 사용하던 그릇, 아끼고 사랑했던 그릇이 바로 백자였다. 백자에는 이들의 사상과 미감이 녹아들어 있었다.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묵묵히 화려하지 않게 세월의 무게를 견디어 왔다.
조선 전기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조선 백자도 세종 조에 왕실 그릇으로 채택되었다. 조선 초기 백자는 중국 명나라 백자를 많이 참고하였지만 그 내용은 달랐다. 화려함을 배격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는 선비처럼 은은한 멋을 우선하였다.
일부 화려한 청화백자도 눈에 띄긴 하지만 아무 문양이 없는 사발, 대접 등이 주를 이루었다. 게다가 중국이나 일본 그릇처럼 철저한 좌우 대칭은 찾아볼 수가 없다. 빈대떡 두 장을 마주 합쳐놓은 듯 한 편병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이다. 약간의 흠집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 더욱 크기와 화려함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계급을 초월한 소탈함과 평범의 미가 조선 백자의 속내인 셈이었다.
선비의 곁에서 말없이 학문의 도반이 되었던 연적과 필통 등도 요란스럽지 않게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식물과 동물의 모양을 따라 알맞게, 하얗게, 그렇게 구워졌다. 백자에 대한 사랑은 죽어서도 지속되었다. 선비의 무덤에는 평소 사용하던 그릇들을 축소해서 만든 그릇과 부인이나 가족들을 연상시키는 인물들이 명기라는 이름으로 백자로 만들어졌다. 죽어서 몇 해가 지나면 후손들이 백자에 자신의 행적을 묘지명에 적어 무덤에 같이 묻어주었다. 왕실의 경우 태어날 때 탯줄을 백자에 담아 풍수가 뛰어난 봉우리에 매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백자와 함께 한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의리를 중시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과 저항 정신에서, 그리고 명에 대한 의리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졌던 효종대의 북벌론과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의리는 그릇에서도 나타났다. 명나라 대신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로부터 안료를 수입해야 하는 청화백자 제작을 중단하고 조선 어디에서도 구하기 쉬운 철화 안료를 사용하는 철화백자를 대신 제작하였다. 의리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매화, 간단한 초화문도 철화로 그려졌다.
의리뿐 아니라 여유와 해학도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왕실용 그릇인 용이 그려진 항아리에는 우스꽝스럽고 어설픈 용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나라는 극도의 긴장 상태였지만 시국을 풀어나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릇의 모양도 둥글넓적한 우리 얼굴 같은 평범함이 대세를 이루었다. 굵고 길어진 목과 묵직하고 오동통한 몸통을 가진 병은 조선 초기 지향했던 순수와 소박함에 당당함과 여유가 더해진 것이었다. 게다가 항아리와 대접에서는 S자형의 유연성을 자랑하기도 하고 무디지만 중국 그릇처럼 각을 이룬 예리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유교 성리학의 중심인 의례의 생활화를 중시했던 조선에서 제사 그릇이 백자로 만들어진 것은 당연하다. 제기와 향로, 모진 그릇이든 둥근 그릇이든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그릇보다는 간혹 휘기도 하고 점도 보이고, 움푹 패인 곳도 있는 평범한 우리 얼굴 같은 그릇이 왕실이나 민간, 어디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우리 그릇의 원료가 중국이나 일본과 달라 그들 그릇처럼 새하얗게 만들기 까다롭고 불 속에서도 제 모양으로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남에게 감춰야 할 우리만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순순히 인정하면서 오히려 표면에 내세워 자연미로 승화한 평범의 미를 보여주었다. 이는 조선 선비들의 자신의 분수를 아는 지혜와 상통하는 수분守分의 미와 같은 것이다. 17~18세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달항아리도 사실은 동그랗기 보다는 어느 한쪽이 약간 크거나 작은 짱구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통은 말할 것도 없고 구연부마저도 제대로 원을 이룬 것은 찾아보기 불가능하다. 배 한가운데는 영락없이 상하를 접합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생긴 대로 살겠다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가공과 장식을 거부하고 소박함 그대로를 드러낸 수분의 미 그 자체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청조문화淸朝文化의 영향을 받아 중국 문물의 유입이 봇물을 이루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중국 그릇이 조선의 상류층을 유혹하였다. 실제로 일부 왕실과 사대부에서도 총천연색의 중국 그릇에 매료되어 조선 백자는 간혹 서자 취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 백자는 형태의 대범함을 잃지 않았다. 구연부는 더 길어지고 몸체는 둔중해졌다. 간혹 중국 그릇을 본 딴 사각 그릇이나 주름문 항아리가 만들어졌지만 비대칭에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낸 속성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문양에서도 장식을 절제하고 개성을 표출한 절용節用의 미를 유지하였다.
이렇듯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했지만 조선 백자는 한결같았다. 순백의 마음을 지닌 조선 선비들의 절개와 의리, 수분과 절용의 미의식이 백자에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 방병선 [조선 선비의 사상과 미감, 백자] 파라다이스 사외보 2006 |


 

18세기 전반 | 높이41cm, 몸체지름40cm, 입지름 20cm, 밑지름16cm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자료사용승인 허가번호:[중박200701-5])
이제까지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백자 달항아리의 정형整形이다. 약간의 굴곡이 있는 둥근 형태에 빛깔은 따뜻한 느낌을 준다. 입술이 주판알처럼 각이 진 듯 말려 있어 더욱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토 이쿠타로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장
변환이 자유로운 기적 덩어리
그곳에 그 항아리가 있었다. 일본 나라시에 있는 화엄종 도다이지에는 17개 소의 탑두塔頭(큰사찰내의 사원)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관음원이다. 관음원 주지는 카미츠카사 카이운(도다이지 제206대 주지)이라는 스님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스님을 ‘항아리 법사’라고 부르곤 했다. 스님이 자신의 거체에 있는 정원에 항아리를 가득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항아리들 가운데서 카이운 스님이 가장 소중하게 아낀 것이 있었는데, 바로 조선시대 중기에 만든 백자대호이다. 이 항아리는 항상 관음원의 응접실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놓여 있었다. 항아리 뒤쪽 벽에는 한 폭의 족자가 늘 걸려 있었다. 거기에는 유래가 있다. ‘소설의 신’이라 불리는 시가나오야는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자로 카이운 스님은 그를 예술가로서 가슴깊이 경애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대도시는 극심한 식량부족에 빠졌고 이로 인해 시가도 도쿄를 떠나 잠시 나라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때 헌신적으로 돌봐준 이가 바로 카이운 스님이었다. 시가는 도쿄로 돌아온 후 감사의 뜻으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백자대호를 스님에게 보냈다. 그때부터 이 항아리는 ‘시가의 항아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항아리 뒤편에는 시가 나오야의 근직한 서풍을 나타낸 ‘덕불고德不孤’과 ‘서처청棲處淸’이라는 글 중 하나가 족자에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반세기 전의 어느 여름 늦은 오후, 숲에서는 매미가 싸우기라도 하는 듯 소란스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내리쬐는 정원 앞으로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불자 시간인 멈춘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때 처음 본 백자항아리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하나의 위대한 정신이 미리 예고된 듯한 빛깔을 띠며 본연의 모습으로 조용히 그곳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 후 이 항아리를 보기 위해 수없이 관음원을 방문했다. 항아리와 무언의 긴 대화를 나눈 후 돌아갈 때는 돌아가신 카이운스님의 미망인이 항상 산문까지 배웅해주셨다. 부인은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문 앞에 서 계셨는데 노부인의 절도있는 온화한 동작과 행동은 항아리의 모습과 겹쳐져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어느 때는 나라 도다이지 관음원의 가장 중요한 곳, 어느 때는 서울의 유서 깊은 양반집 사랑방, 또 어느 때는 뉴욕의 초고층 빌딩 사무실 장식장, 어느 때는 런던 교외의 깔끔한 별장 난로 옆 등 다양한 곳에 조선 중기 백자대호가 놓여있었다.
내 상상은 더욱 부풀어간다. 어느 때는 사하라 사막 오아시스의 푸른 대지, 어느 때는 남이탈리아 로코로톤도의 원추형 집들이 모여 있는 하얀 마을의 층계, 어느 때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에 이들 항아리가 마치 오랜 옛날부터 그곳에 놓여 있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상상해도 어떤 이상함이나 부자연스러움이 없다.
이와 같은 조형물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중국 청대의 현란하고 호화로운 채자대호彩瓷大壺, 독일 마이센의 정교한 기술을 응집시킨 장식항아리, 일본 중세 시가라키에서 만든 백자대호 등은 보관 할 장소만 얻을 수 있다면 주위 공간과 잘 어울리는, 매력있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자기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을 선택하는 듯하다. 그에 반해 조선 중기의 백자대호는 놓여진 환경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자신이 있어야할 장소를 선택하지 않는다. 바로 변환이 자유로운 기적 덩어리와 같은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7월 4일 ‘시가의 항아리’는 하나의 사건에 휘말렸다. 이날 대낮에 관음원에 한 남자가 침입하여 객실에서 그 항아리를 꺼내어 산문으로 도주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신도우 신카이 주지스님은 큰소리를 지르면서 그 남자를 뒤쫓으며 경비원에게 알려 도움을 요청하여 전후에서 포위해 남자를 잡으려 했다. 더이상 항아리를 가지고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 남자는 갑자기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힘껏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쳤고 항아리는 무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남자는 그대로 구름 속 안개처럼 사라져 도망쳐버렸다.
신도우 신카이 스님은 남은 도자기 조각을 고고학자의 도움을 받아 작은 가루까지 솔로 쓸어 봉투에 담았다. 커다란 도자기 조각은 신문지로 쌌다. 셀 수 있는 도자기 파편만 해도 300조각이 넘었다고 한다. 경찰의 조사가 끝난 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의 거듭되는 요청에 의해 이 항아리는 파편인 채로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거의 2년여에 걸친 동양도자미술관의 검토 결과, 이 항아리는 가능한 한 수리·복원하여 형태만이라도 남겨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수리·복원 전문가를 불러 상담하였으나 좀처럼 맡으려 하지 않았다. 장시간의 설득 끝에 마침내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 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 전문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수리 방법에 대한 내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현재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미술관으로 옮겨온 백자대호를 복원 전문가는 커다란 포장용 상자에서 한 손으로 꺼내 전시대에 올리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괜찮으세요?” “이 정도로 접착 부위가 어긋나는 일은 없습니다.”라는 대답. 그리고 전시대위에 놓은 항아리를 한 본 보고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항아리는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복원 전문가의 놀라운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까지가 수리 중간단계입니다. 앞으로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디서 어떻게 보더라도 파손되었던 것을 알 수 없도록 복원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자세히 보면 복원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양쪽 다 가능합니다만 어느 쪽을 선택 하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도 완전하다고 생각한 복원된 항아리의 모습에서 이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한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자세히 보면 복원·수리한 흔적을 알 수 있도록 두 번째 방법으로 부탁합니다.”
한 달 후 미술관으로 돌아온 ‘시가의 항아리’는 전보다도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약 60년 전부터 ‘시가의 항아리’로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던 항아리는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항아리의 소생이었다.
미술관에서는 복원 완성을 기념하여 이 항아리의 특별전을 열고 시민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2000년에는 뉴욕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전시하여 필립 드 몽트벨르 관장과 아시아 미술부 특별고문 웬펑으로부터 한국 도자의 대표작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많은 관람객들로부터도 경탄과 찬사가 쏟아졌다.
조선 중기의 백자대호 한 점이 그 빛깔과 형태에 의해 한민족의 영혼이라 할 고결한 정신을 조용히 이야기하며 국경을 넘어 한국의 ‘소리 없는 문화사절’로서 커다란 역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 이토 이쿠타로 [예고된 듯한 빛깔과 본연의 모습, 조선 중기 백자대호] 백자달항아리(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발췌 |
18세기 | 높이41cm, 몸체지름42.4cm, 입지름 21.2cm, 밑지름15.9cm | 일본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몸체가 약간 기우뚱하고 입술이 반듯하지 않는데 그것이 오히려 부정형의 정형을 느끼게 하는 큰 맛이 있다. 원래 일본 동대사東大寺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이 항아리를 훔쳐가려던 도둑이 집어던지고 도망치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났다. 수백 개의 깨진 파편들을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이 4년에 걸친 기적적인 복원 작업 끝에 원형을 되찾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
너그러운 마음의 표상
우리는 각지거나 모난 것보다는 둥근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옛 동양인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 것으로 생각했으나 지구 또한 둥글다는 사실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직선과 달리 곡선이 주는 느낌은 우선 부드럽다는 점이다.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를 흔히 ‘원만한 사람’으로 부른다. 마치 둥근 보름달같이 꽉 차있는 넉넉한 형태라고나 할까. 원만한 사람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너그러움에 있다. 오늘날 마음이 넓고 포용성이 커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넉넉하고 뿌듯하게 느껴지며 따사로움이 전해지는 사람을 몇이나 찾아 볼 수 있을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너그러움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지니게 된 듯하다. 이를테면 주인이 하인에게 대하는 모질지 않은 태도,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선심, 또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주는 자비심 정도로, 혹은 약자나 패자 그리고 부족한 이들이 기득권의 소유자들에게 취하는 비굴함을 포장하는 용어로 생각지는 않는지. 이상의 것들은 너그러움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너그러움 하면 우선 인품이나 사람 됨됨이가 주는 느낌일진대 너그러움을 경제적인 풍요로, 가시적이고 물리적으로 생각케 됨은 우리들의 심성 또한 물질적으로 변모한 탓일까. ‘너글너글함’을 ‘느글느글함’쪽으로 잘못 이해함은 아닌가. 느글거림은 과식욕이 보여준 생리적 반응인 반면 너글너글함은 이와는 전혀 다른 너그럽고 시원한 마음씨가 주는 아름다움의 수식어이다. 보잘 것 없는 이기심에서 선뜻 벗어나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 그 자체가 너그러움은 아닌지. 그것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듯이’로 요약되는 주의 기도문 가운데 한 구절과도 통하는 의미이다.


 

마치 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달항아리로 지칭되는 조선백자가 있다. 처음 대면할 때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으나 가까이 하고 바라볼수록 정이 더한다. 한 쪽이 일그러져 완전한 좌우대칭을 이루지는 못한 점이 바로 멋의 핵심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심성에 깊숙이 내재한 아름다움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완벽을 거부하며 생긴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익살이기도 하며, 때로는 무신경이나 끝맺음의 결여 등 부정적인 측면에서 거론되어지기도 한다. 장단점을 논하기에 앞서 특징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대부분의 도자기가 그러하듯 그냥 모셔놓고 바라보는 관상용이 아니라 그 안에 내용물을 담는 생활용구로서 제작된 것들이나, 이들 생활공예에서까지 선조들의 가락잡힌 멋과 예술혼을 감지케 된다.
경기도 광주군에 위치한 관요官窯인 금사리 가마에서 18세기 초 탄생된 도판의 달항아리는 매우 잘 알려진 명품으로 우리 문화재의 해외전시에 있어 반드시 출품되곤 했다. 일반서민용이 아닌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 전유물로서, 이를 만든 도공은 우리 도자기 대개가 그러하듯 성도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항아리를 쓰는 이들이 일그러짐을 지적하고 완전한 형태로 만들 것을 명했더라면 이렇게 맵시 있는 일그러짐을 간직한 채 전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 조형예술에 담겨진 미감은 신분과 계층을 뛰어넘어 민족 전체가 추구한 미의식을 솔직하게 그대로 반영하는 것임은 주지된 사실이다.
여전히 이런 형태를 선호하기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달항아리는 많은 복제품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차가운 흰색에 윤택이 너무 강하고 매끄럽다. 어지간히 모습은 유사하나, 색조에 따뜻한 체온이 감지되는 우유빛 흰색인 선조들 것과는 달리 창백하기만 하다. 조선시대 달항아리는 겸손과 온유함을 담은 우리 민족의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의 표상이었을진대, 이미 우리의 심성이 이에서 크게 벗어났고 그와 같은 본질적인 내용물이 빠져서일까. 
 | 이원복 [너그러움-백자달항아리] 나는 공부하러 박물관 간다, 효형출판 1997 |


 

18세기 | 높이44.5cm, 몸체지름43.5cm, 입지름 17.7cm | 디 아모레 뮤지움 소장
백자 달항아리 중에서 가장 당당한 형태미를 자랑하고 있다. 유약은 따뜻한 유백색이고 몸체 한쪽으로는 손맛을 느끼게 해주는 얼룩이 연하게 퍼져 있다. 항아리의 입술이 약간 벌어진 듯 곧게 솟아 있고 굽 역시 밖으로 벌어진 듯 받치고 있어 안정감이 살아있다.


 

18세기 | 높이44.5cm, 몸체지름42cm, 입지름21.5cm, 밑지름16.5cm | 보물제1424호 | 삼성미술관Leeum 소장
가장 원圓에 가까운 둥근 곡선미를 지니고 있으며 사용하면서 저절로 배어나온 추상화 같은 얼룩이 짙게 남아 있다. 달항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세월의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출처;blog.chosun.com/jls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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