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제 2 장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 3 -

문성식 2011. 2. 21. 00:12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서울 대교구 사제 피정 강론)

 

 

교형 자매 여러분, 또한 서원하시는 수녀님들,
오늘 이 거룩한 서원 미사에 미사를 집전하는 우리 모두와 이 미사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서원하시는 수녀님들이 오늘의 서원의 그 정신에 따라서 평생을 충실히 수도 생활에 살 수 있고 또한 하느님께서 그런 은총을 주시도록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남김없는 봉헌
서원하시는 수녀님들에게는, 수녀님들이 그 동안 수도 생활을 해 오셨고 또 이 서원을 앞두고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줄곧 묵상하고 기도하고 생각해 본 후 여러분은 오늘의 서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알고 계실 줄로 믿기 때문에 긴 말은 필요 없을 줄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마디 말씀을 드린다면 여러분이 오늘 서원하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수도자로서의 이상이나 혹은 사상 혹은 규칙에 대해서 서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서원하는 것은 생활하신 그리스도께 서원하며 여러분 가운데 우리 안에서, 우리 형제들 속에 특별히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 속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고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그분이 가신 길을 평생토록 나도 가겠다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끝내 이같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또한 우리 이웃 속에 그리스도를 보려고 노력하고 또 볼 수 있을 때 여러분의 서원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는 그리스도와 같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어떠한 어려움도 어떠한 고통도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참으로 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서원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서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사랑에 충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전부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아마 이 순간에 원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리 전부를, 여러분 각자가 가지신 전부를 여러분의 몸과 마음, 영혼과 육신, 여러분의 전 존재를,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것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서원하면서 무언가 내 편에 그리스도께 대해서 유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사랑한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참으로 나는 남김없이 그리스도께 나를 바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나의 일부 무언가를 그리스도께 대해서 이것만은 내 것으로서 남기고 싶은 것은 없는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대해서 보류하고 있지나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오늘 성경 말씀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서 내 목숨까지도 바칠 용의를 가지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성직자나 수도자 우리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는 참된 복음적인 모습입니다. 그분들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그리스도의 체취를, 정말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부터 수도원 밖으로 나가서 해야 하는 복음적인 생활, 복음적인 증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입는 수도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수도자로서의 법적 신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그 정신과 그 생활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려고 하는 그런 좋은 뜻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그 고통을 나누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존경받으려는 의식 버려야
우리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자기 신분 의식을 굉장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 무의식중에 교회 안에서 어떤 존경을 받고 대접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그리스도의 생각인지는 대단히 의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수록 그것은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일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참으로 복음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또 복음적인 교회가 되어야 되겠다고 충분히 자성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굶는데 우리는 아직 잘 먹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헐벗었는데 우리는 잘 입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 때문에, 정의 때문에, 사랑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요구하고 우리 자신에게 편안한 생활을, 안이한 삶을 아직도 찾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그렇고 대부분의 성직자 수도자가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도 결코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정신의 빈곤이 문제입니다. 참된 신앙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박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참으로 복음적인 것이 무엇이냐? 저와 복음을 선교해야 한다는 사제들이 또한 수도자들이 생활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정말로 우리 안에 복음적인 것이 있는가를 우리 마음에 불을 켜고 찾아봅시다. 정말 우리는 복음적인 것이 무엇인지 비질을 해서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에서 찾아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자신 있게 "이것이 복음적이다."라고 오늘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반대로 우리 신자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일 연보를 낼 수 없어서 성당에 왔다가 부끄러워서 제대 앞에까지도 못 나오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더 복음적인 신앙 자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어려움 가운데 핍박을 당하면서도 그래도 올바른 것을 추구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 안에 오히려 복음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각해야 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자신이 바리사이적이고, 저도 그렇고 우리 성직자간에 여러분이 지금 보는 많은 수도자들에게 이 바리사이적인 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가면을 벗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수녀님들, 오늘 여러분이 지금 서원하시면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이 가면을 벗어 버립시다. 그리하여 진심으로 그리스도께 여러분이 한 가지 한 가지 약속하시는 그것을 진실히 살아가겠다는 뜻을 가지고 서원합시다. 우리는 부족한 인간입니다. 오늘 서원해도 내일이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 속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에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 중에 우리가 받고 있는 그 은총은 충만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이제 오늘 이 제대 앞에서 서원하시는 수녀님들께서 이같이 훌륭한 뜻으로 끝내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드립시다. 그분들이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자신들의 모두를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수도자가 될 수 있도록 이 시간에 간절히 기도합시다.

(1973. 8. 25. 명동 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