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제 1 장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으로 일치되기 위해 - 1 -

문성식 2011. 2. 20. 23:53

 

가톨릭의 세계적 전망(신앙 대학 강좌)

 

 

도처에서 일어나는 정신 혁명
이 제목을 보고 정확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오늘날 동정이 어떤지를 말해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가톨릭 교회는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보며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말해 달라는 것인지 두 가지 다인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 신앙 대학 강좌의 여러 제목과 말씀하신 분들을 프로그램에서나마 보니까 쇄신이라는 낱말이 자주 나오고 있고 또 혼탁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선교할 것인가 하는 부제를 보고서, 저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오늘의 교회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근본 문제는 무엇이며, 여기에 우리는(가톨릭 신자 되는 사람들로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며 또 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오늘날 세계가 가장 크게 또 보편적으로 관심을 가진 문제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 견해를 달리할 것입니다. 경제 전문가에게 물어 보면 그것은 에너지 문제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에너지 문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우리 나라 같은 개발 도상국은 물론이요 선진국들도 경제 발전에 제동이 걸리고 발전의 둔화와 더불어 실업자 문제, 물가 앙등 등, 사회 생활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질 염려가 큽니다. 며칠 전 우리 나라 당국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까 우리 나라가 지금 비축하고 있는 기름은 겨우 25일 분이랍니다. 그러니까 지금 원유 확보와 비축을 위해서 정부는 비상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란 사태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해졌던 것 같고 만일의 경우 아랍 석유국들로부터 우리가 무슨 이유에서든지 기름을 수입해 오지 못하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확실한 전망은 아직 없는 모양이고 지금 동자부 장관이 원유를 비롯한 기타 원자재 확보를 위해 여러 나라를 방문 중이라고 합니다. 에너지 문제에 못지 않게 지금 또 세계적인 관심사는 무엇인가? 에너지 문제와는 전연 다른 문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어쩌면 근본적으로는 상관 관계가 없지 않는 것으로서 인간 존엄성과 인권 문제입니다. 여기에 따라서 세계를, 정치 경제 등 제도적 측면에서도 어떻게 하면 보다 인간다운 인류 세계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거대한 물결처럼 도처에 정신 혁명이 일어나고 있고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정신 운동은 분명히 복음에 따르면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에너지와 인간 존엄성 내지 인권 또는 인간적인 세계가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너무나 이상론을 말하는 것이 될지 모르지만 온 세계의 모든 정치, 경제의 책임자들이 진정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또한 권력과 금력의 이해 관계를 떠나서 또 인간을 경제나 정치의 도구로 삼지 말고 "인간을 주체와 목적으로 존중하고 인간을 위해 경제가 있고 정치도 있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서 인간을 구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나라의 정치나 경제 체제를 인간 중심으로 바꾸고 전 세계를 인간다운 세계, 상호 존경하고 협조하는 세계, 일체의 인종적 차별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종교적 차별 기타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인간이 고르게 잘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데 공헌하자." 이렇게 만일 생각을 바꾸고 마음의 문을 열고 협력한다면 에너지 문제는 물론이요 동서간의 대립, 지역적, 민족적 분쟁이-각국 사회가 내적으로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 등 모든 것이-비록 일시에는 아닐지라도 빠른 속도로 그리고 대단히 밝게 해결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 때에 세계는 진정 하느님이 뜻하시는 대로 인간의 세계로 발전하고 그 발전은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기본 인권은 상식화된 주장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교황으로 당선되시고 취임하실 때 지난해 10월 22일의 취임사 중에서 세계를 향해서, 특히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힘을 믿고 문호를 개방합시다. 모든 정치와 경제 및 문화권의 문을 활짝 엽시다."라고 강력히 호소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인간화와 발전과 평화를 위해서 하신 호소였다고 믿습니다. 그 당시 저는 유럽 여러 나라의 큰 신문들을 사 보았습니다. 교황님의 긴 연설 중 그들이 가장 관심을 두고 취급한 대목은 바로 위의 이 말씀이었습니다. 그만큼 교황님의 이 말씀은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점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어느 정도 이 말씀을 따르느냐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세계가 참으로 구원되고 발전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교황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와 함께 인간을 진실로 존중해야 합니다. 인간 존엄성 또는 인권 문제가 중요시된 것은 카터 대통령이 이를 정책으로 들고 나온 데서 비로소 세계의 관심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카터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더 불러일으키고 문제를 더 크게 부각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 자체는 그 이전에 이미 UN의 인권 선언이 그보다 훨씬 앞서서 20년 전에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종 차별이 있고 남아프리카, 로데지아 또는 미국의 흑백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고 각국의 인권 유린 사태가 특별히 개선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는 피부색 때문에 또는 가난하기 때문에 또는 여자이기 때문에 또는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을 차별 대우해서는 안 된다, 또는 기본 인권 주장 때문에 구속되고 박해를 받아서도 안 된다는 원리 원칙만큼은 거의 상식화되다시피 인류 세계의 절대 다수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미 초창기부터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 입각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이나 민족 또는 사회 신분과 성별에 의한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형제 자매요 사랑으로 하나이다라는 것을 뚜렷히 믿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골로사이서 3장 11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헌장 32항에서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평등한 이유 중에 가장 근본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고 또한 모든 인간이 다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근본 이유가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과 그 인권 존중 및 평등 사상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오고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 입각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세속적인 문제, 정치 세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 세상을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이 사랑 속에 만민이 형제 자매가 되고 하나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하느님은 계속 이를 위해 세계를 내적으로 쇄신해 가십니다. 초대 교회가 이 같은 정신을 복음적 정신으로 받아들인 데 반해서, 박해 시대를 지나 교회가 세속 권력과 타협하고 교회 스스로가 세속의 왕국과 같은 체제를 갖춤으로 실제 교황이나 주교들이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영토를 소유하고 성직이 귀족과 같은 신분으로 인정되고 계급화됨에서부터 교회는 오히려 이 같은 인간 존중과 형제적 평등 사상을 망각하고 교회 스스로가 인권을 유린하는 사례가 역사상 많았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정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교회는 위험시하고 그들을 세속적 인본주의자로 배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까지도 교회 일부에서 이러한 인간 존중과 인권 옹호 운동을 여전히 위험시하거나 또는 세속적인 의미의 정치 문제에 관여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그러한 귀족적 성직주의 및 인간을 비그리스도교적인 그리스 철학에 따라서 이원론적으로 영육 구별하여 육신을 불결하게 보고 오직 영혼을 구하는 것만을 구원으로 본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권 침해는 창조주에 대한 모독
또 이런 사고를 가진 분들은 정녕 현대 교황님들의 여러 사회 회칙, 특히 요한 23세의 `지상의 평화', `어머니와 교사',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 공의회 문헌 중 특히 `사목 헌장' 등을 진정 알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복음과 복음의 예수님을 아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 당시의 유다 종교와 그 제도가 아니었고 실로 인간이었고 그중에서도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기회에 저나 또는 다른 이들이 이 문제에 언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역대 교황님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몇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인권 문제에 있어서 교회가 가장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문제는 아마도 국민의 특히 가난한 서민, 근로자들의 생존권과 기본권에 대해서 언급할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공의회 사목 헌장은 26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사회 공동선을 강조하면서 "공동선이라고 하면 집단이나 구성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보다 완전하고 보다 용이하게 자기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생활상 여러 가지 조건들의 총체를 말한다. 그런데 상호 의존 관계가 날로 긴밀해지고 점차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가기 때문에 오늘날 공동선은 더욱 세계적인 것으로 확대되고 인류 전체에 관계되는 권리와 의무까지를 내포하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나 다른 집단들의 필요와 정당한 요구를 고려해야 하며 인류 가족 전체의 공동선까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말한 후,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개인 인격의 고귀한 존엄성에 대한 자각도 커져 간다. 개인 인격은 만물을 초월하고 그의 권리와 의무는 보편적이며 불가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의식주, 신분 선택의 자유와 가정 형성의 권리, 교육과 노동에 대한 권리, 명예와 존경에 대한 권리, 자기 양심의 바른 규범을 따라 행동할 권리, 사생활을 수호할 권리, 종교적 분야까지 포함해서 정당한 자유을 누릴 권리 등이 인간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 질서와 사회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복지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사물의 질서가-곧 정치, 경제 등의 체제가-인간 질서에 종속될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 친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실 때에 이 진리를 인정하신 것이다." 이렇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도 체제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체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하심으로써 인간이 정치와 경제 체제 위에 있고 또한 그렇게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말을 사목 헌장은 이 헌장의 서두 3항에서부터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전체, 영혼과 육신, 마음과 양심, 지성과 의지의 결합체인 인간이 우리 논술의 중심 테마가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사목 헌장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본 인간관, 이 인간을 중심과 목적으로 본 사회관, 정치관, 경제관 등을 다룬 헌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와 경제가 세속적인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정치와 경제인 한 그것은 단순한 통념의 세속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교회의 최고 교도권을 가진 공의회가 이 문제를 이렇게 심각히 다루었겠습니까? 그래서 27항에 `"공의회는 실제적이며 긴급한 결론으로서 인간에게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 특히 불우한 이웃과 예수님이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나의 가장 미소한 형제"라고 부르신 모든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불가침의 권리에 대한 일체의 침해를, 예컨대 고문, 인신 매매, 근로자 학대 등 일체의 인권 침해를 창조주께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단죄하고 있습니다.

기본 인권 침해받는 우리 현실
뿐만 아니라 동헌장 73항에서 정치 공동체, 즉 국가 및 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인간 존엄성 및 인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 존엄성의 자각이 보다 생생해짐에 따라 공공 생활에 있어 인권을 더 잘 보장해 줄 정치 내지 법, 제도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증대되고 있다. 보장되어야 할 인권이란,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공사간의 종교 자유 등이다. 사실 인권 옹호는 국민이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국가 생활과 국가 통치에 적극 참여하기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 같은 공의회의 가르침 곧 교회의 공적 가르침과 우리의 현실을 볼 때에 여기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 곧 기본 인권 침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것을 자유롭게 아무 위험이나 두려움 없이 신자들에게나 국민 모두에게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위정자에게 이 권리를 요구하면,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국사범으로 다루어지고 감옥에 가야 합니다. 교회가 자신의 기본 교리를 가르칠 수 없을 만큼 법이 이를 막고 있다면-예컨대 긴급 조치 9호 같은 것으로 막고 있다면-그곳에 엄격한 의미로 종교 자유,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 존엄성, 인권 수호, 시민권 수호 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얼마든지 들 수 있으나 이 정도로 끝이겠습니다.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지난번 3 1절 기도회 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지난 1월 하순 멕시코의 푸에블라에서 있은 남미 주교 회의에서 개인의 자유와 생존권, 신앙자유를 침해하거나 또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정치 참여권을 제한 또는 박탈하면 이는 인간 존엄성 침해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월 21일 알현 시 해방 신학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인간 존엄성과 인간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해방시켜야 함의 중요성을 재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왜 이 같은 인간 존엄성과 인권을 주장하는 것입니까? 이미 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는 복음에 의거해서입니다. 현 교황님은 "인간 존엄성은 복음적 가치이다."라고까지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에 의거해서란 무슨 뜻입니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고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데 근본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인간 존엄성의 가장 숭고한 이유는 사목 헌장 19항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이 하느님과 결합되기 위해 불리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같이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이 사랑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그 모반과 죄에도 불구하고 버리시지 않으시고 계속 그를 구원하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신구약 전체가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전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마침내 당신 독생 성자까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이 말씀은 바로 인간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라는 뜻입니다. 인간들 곧 너와 나를, 우리 하나하나와 우리 모두를 우리의 죄와 부족에도 불구하고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시기까지 하셨고 이는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 이 성경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다
이것은 사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시고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신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확신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쁜 일이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뜻 깊고 가치 있는 일도 보람된 일도 더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사실인가 싶을 정도로 의심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여러분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십시오. 거기서 결론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성경에도 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그 서간에서 말씀하시듯이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 1서 4장 10절에서 요한은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라는 존재는, 때로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만큼 귀한 존재이기에 어찌 `나'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이기적 자애심과 다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나 자신이 잘난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전적으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이유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너'를 사랑하시고 `그'를 사랑하시고 `저'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 하나하나를 사랑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를 사랑한다 해도 100퍼센트 사랑하지 않습니다. 20퍼센트, 30퍼센트 50퍼센트 등 등급을 짓고 제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진실하시기에 100퍼센트 사랑하십니다. 나를 100퍼센트 사랑하십니다. 나의 이웃을 100퍼센트 사랑하십니다. 언제부터?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에페 1장) 천지 창조 이전부터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으시고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기도 전이니 우리가 무슨 선행을 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사랑에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래서 내가 `나'이니까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잘못과 죄에도 불구하고 충실하십니다. 사도 신경은 바로 이 같은 하느님 사랑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신조이고 곧 사랑의 신조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물줄기는 우리를 통해서 이웃과 세계로 번져 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 12)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같이'를 뺐으면 하는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 인종, 국적, 신분, 성별(性別), 모든 것을 초월해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바로 구원입니다. 성령은 이 때문에 오셨습니다. 오신 첫날 모든 민족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사도 2장 참조). 그런데 다만 감정적으로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족한가? 여기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백인과 흑인이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이웃과 같이 좋은 감정으로 대한다 할 때 물론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변화요 또 이것이 앞서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감정적 변하는 있어도 여전히 흑백 분리, 흑백의 차별이 사회 제도로 존속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서로 사랑하면 흑인도 백인과 같이 차별을 받지 않게끔 제도도 함께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용자와 고용인(근로자가)이 서로 대립적 감정을 씻고 아침 저녁 만나면 인사도 나누고 잘 지낸다면 이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과는 별도로 근로자가 여전히 제도적으로 불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든지 근로자의 기본 삼권이 사실상 행사할 수 없도록 묶여 있다면 이것은 결코 참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지만 그 타인인 이웃이 궁핍한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는 그를 거기서 구출해 주고 더 나아가 그 곤경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정치나 경제 체제에 있다면 그것의 변화가 동시에 수반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나라의 우호 관계도 같습니다. 서로 우호적인 정신으로 대할 뿐 아니라, 서로가 함께 인간 사회로 발전할 수 있게끔 실제로 서로 도와야 합니다.

세계를 변혁시킬 누룩의 역할
그럼 교회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한 국가 사회에 있어서나 세계적인 차원에 있어서나 교회가 좋은 말만하고 그 세계와 사회가 모든 이의 공동선을 위해 변혁될 수 있게끔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인간과 세계를 새로이 탄생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는 것이 못 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본시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하시는 분이시면서 당신을 낮추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시대에 이 사회와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현존시켜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 속에 들어오셨듯이, 교회도 그 말을 행동으로 육화시키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실제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누룩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진정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하시지 않고 남을 위해 자신을 내주셨듯이 교회도 자신을 세상 구원을 위해 내주는, 오늘의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헌장은 그 1항에서 교회를 가리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聖事)와 비슷하다. 즉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요 도구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전 세계 모든 이를 사랑하며, 그 사랑의 끈으로 온 인류를 일치시킬 때에 참으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자체를 위한 교회가 아니고 바로 이렇게 전 인류의 사랑의 일치, 어떤 누구도 소외됨이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는 도구요 이를 나타내는 표지여야 합니다. 교회 쇄신이란 바로 이 정신으로 교회가 이웃과 사회, 세계를 위해 봉사하기 위한 쇄신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서 남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주기 위한 쇄신입니다. 하나의 종교 집단, 하나의 세력으로 자기 확장을 위해 교회가 쇄신한다면 그것은 쇄신도 아니요 교회 역시 종교를 빙자한 하나의 이익 단체에 불과합니다. 필립비서 2장 6-8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는 남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우셨습니다. 교회도 진정 이렇게 남을 위해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이를 구하기 위해 당신 독생 성자를 보내셨고 독생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같은 사랑에서 곧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서 교회를 세상 속에 보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세상에서 선남 선녀만 골라서 자신들의 구령에만 몰두하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정치와 경제, 불의와 부정, 죄와 악이 득실거리는 그 세상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가서 사목 헌장 1항의 말씀대로 그 속의 인간들과 함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을 그리스도와 같이 나누는 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참모습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자연히 교회와 그 구성원이고 특히 세속의 삶 속에 직접 몸담고 있는 여러분의 사도직 수행 현장이 어디인가가 잘 드러납니다. 제도적 교회의 테두리, 본당의 여러 가지 직무 수행도 뜻 깊지만 여러분의 사도직 수행 현장은 바로 세상 한가운데입니다. 이른바 죄에 물든 세속 한가운데서 누룩이 되고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평신도 사도직입니다. 인간을 사랑합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써 우리 이웃을 진정 사랑합시다. 특히 우리를 위해 수고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더 알고 사랑하고 따르기 위한 이 사순절에 교회와 우리는 교회 헌장 8항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를 당하시며 구세 사업을 완수하셨듯이,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하여 교회도 같은 길을 걷도록 불린 것이다." 이 말씀을 묵상할 뿐 아니라 이 말씀대로 행동하고 살아야 합니다.

(198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