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업적 - 민주화운동 부문

문성식 2011. 2. 15. 22:23

 

 

김수환 추기경 업적 - 민주화운동 부문
 
70,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선봉장
 
 
김수환 추기경 업적은 한국 격동기의 민주화운동과 가톨릭 교세성장 분야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1970,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자 사회정의의 보루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한가운데서 민주화 선도세력 역할을 했다.
 
김 추기경은 1967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 자격으로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개입, '사회정의와 노동자 인권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교서'를 발표했다. 이는 한국교회의 첫 대사회적 발언으로 기록돼 있다. 이 사건은 향후 1970~80년대 가톨릭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김 추기경은 이어 박정희 정권과 팽팽하게 대치하고, 때로는 유화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힘없는 이들의 권리를 지켜주었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유신정권을 견제할만한 세력이 전무하다시피했던 터라 김 추기경의 용기있는 발언은 국민들에게 '가뭄 속 단비'처럼 느껴졌다.
 
언론조차 침묵하고 있던 1971년,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명동성당 성탄절 자정미사에서 박 대통령의 독주를 비판하던 중 생방송이 중단된 사건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그 방송을 시청하던 박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방송중지 명령을 내렸다.
 
 
시국사건 개입에 이념논쟁도
 
김 추기경의 예언자적 행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독일 유학시절에 탐구한 '그리스도 사회학' 영향이 크다. 공의회는 "이 시대 인간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라고 선언(현대세계의 사목헌장)하면서 정의와 인권 증진에 앞장설 것을 권고했다. 또 필요하다면 정치질서에 대해서도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은 로마에서 열리는 공의회 소식을 독일에서 시시각각 접한 덕분에 어느 누구보다 공의회가 추구하는 변화와 쇄신을 빨리 이해했다. 그는 독일 신부들과 공의회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면서 그 정신을 받아들였다. 또 '그리스도 사회학'은 그에게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심어주었다.
 
그는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라며 "이런 신념은 70~80년대 험난한 시기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작용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에게 70년대는 특히 고난의 시기였다. 교회와 박 정권은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1974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대립했다. 그는 양심을 굽히지 않는 지 주교를 옹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부 탄압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했다. 그는 고뇌 끝에 박 대통령과 독대해 지 주교 석방을 이끌어내고 내친 김에 민청학련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은 유인태, 이철, 이강철 등의 감형조치를 얻어냈다.
 
이후 젊은 신부들이 결성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각종 시국사건에 개입하자 교회는 이념논쟁에 휘말렸다. 그는 주교단 사이에서 사제단에 대한 찬반의견이 엇갈려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것은 물론 교회 내 보수세력의 비난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일각에서는 그를 사제단을 조종하며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심지어 그를 추기경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연판장이 돌기도 했다. 정부 압력과 음해공작도 그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특히 정부와의 갈등은 1970년대 후반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때 신부 연행과 시국기도회가 악순환처럼 반복되자 그는 얼마나 고달팠던지 "차라리 내가 감옥에 가는 게 낫겠다"고 하소연했다. 당시 고뇌는 일시적이나마 환속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 노동자와 농민 편에 서서 그들의 피맺힌 절규를 대변해주었다. 도표에 그래프를 그려가며 수출 실적을 독려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그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리 없었다. 생존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은 좌경용공세력으로 몰려 탄압받던 시절이다. 1978년 인천 동일방직 여공들이 명동성당에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는 강도에게 가진 것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은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처럼 그들을 도와주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들머리 시위는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는 1980년 '광주의 5월'을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가슴에 묻고 살았다. 당시 그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만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혼자서라도 항의성명을 내려고 쓰고 찢기를 수차례 반복했으나 끝내 내지 못했다. 성난 대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자극하면 유혈사태가 서울로까지 확대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차라리 광주에 내려가 시민들과 피를 흘리며 싸웠더라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 승리의 물꼬 터
 
그는 또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들을 숨겨준 교회에 쏟아지는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5공화국 정권은 신문방송을 동원해 연일 '가톨릭 때리기'에 나섰으나 그는 "교회로 피신한 이들을 숨겨준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 행동은 사제로서 정당했다"며 의연하게 맞섰다.
 
그가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승리의 물꼬를 튼 업적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4ㆍ3 호헌조치, 노태우씨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체육관 선거 등은 시민들 분노를 폭발시켰다. 대학생들이 '6ㆍ10 규탄대회'를 마치고 경찰에 밀려 명동성당에 들어왔을 때 그는 경찰 진압을 저지하면서 시위대를 보호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가 경찰병력 투입을 통보하자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만저 나를 만나게 될 것이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수녀들을 보게 될 것이오.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소.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시오."
 
명동성당 앞 대치는 우리나라가 민주화의 길로 가느냐, 군사정권이 연장되느냐의 갈림길에서 벌인 마지막 '기 싸움'과 같았다. 결국 정부 당국은 학생들 안전귀가를 보장하고 경찰병력을 해산시켰다. 이어 국민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하겠다는 '6ㆍ29 선언'이 발표됐다.
 
그는 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온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그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김 추기경의 민주화운동 기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육화(肉化)이자 시대적 요청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평화신문, 제1007호(2009년 2월 22일), 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