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업적 - 사회사목 부문

문성식 2011. 2. 15.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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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업적 - 사회사목 부문
 
교회는 가난한 이들 눈물을 닦아 줘야 합니다
 
 
▲ 김수환 추기경이 1997년 개원 10주년을 맞은 무료병원 요셉의원을 방문해 축하미사를 집전한 뒤 영등포 쪽방촌을 둘러보며 빈민들을 만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 지향엔 늘 '소외된 형제들'이 자리했다.
 
팍팍한 노동 현실과 마주한 노동자들,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 어렵사리 삶을 지탱하는 빈민들, 급격한 공업화와 함께 소외된 농민들, 한때 잘못으로 영어의 몸이 된 재소자들,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 소외된 이주민들, 나아가 재난을 당한 아시아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의 기도 목록에 포함됐다.
 
평소 '가난한 이웃들과 똑같이 먹고 자며 살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김 추기경은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줘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소외된 현장 어디든 찾아 위로
 
이미 본당 신부 시절부터 김 추기경은 가난하고 소외된 현장이라면 어디든 찾아 위로하고 희망을 건넸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런 신념에 날개를 달아줬다. 복음화에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의 비전을 통합, '적응과 쇄신'으로 압축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은 '사회사목' 활성화로 구체화한다.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특히 김 추기경의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마산교구장(1966~68) 주교로 재임하던 1967년 5월, 제2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로 취임한 김 추기경은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심도직물 노조사태에 연대를 표명하며 함께한다.
 
당시 미사에서 김 추기경이 한 강론은 노동사목에 대한 그의 지론을 함축한다. "억눌리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행하느라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JOC 회원들에게 존경을 표할 뿐입니다.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 결과, 1968년 상반기 중 노동조건 개선과 함께 노조원 전원이 복직되는 것으로 마무리됐고, 이는 우리나라 사회정의 신장과 가톨릭 인권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같은 김 추기경의 노동자에 대한 사목적 관심은 1970~80년대 노동사목과 빈민사목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1971년 3월 '도시산업사목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발족, 이듬해 10월 도시산업사목위원회로 개칭한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는 1980년 6월 현재의 이름으로 바꿔 40년 가까이 적극적 노동사목과 함께 현장 활동을 강화하며 한국교회 노동사목의 종가로 그 위상을 다져가고 있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와 남미 출신 이주노동자와 이주민들이 몰려들자 이들을 위한 사목에도 변함없는 애정을 쏟았다.
 
노동사목은 필연적으로 빈민사목과 맞물렸다. 도시 재개발과 강제철거로 가난한 이들의 삶의 자리가 뿌리까지 뽑히는 현실을 보다 못한 김 추기경은 1985년 3월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발족시켜 빈민사목을 본격화한다. 서울대교구장 재임 막바지인 1995년 3월에는 빈민사도직 선교사 양성 프로그램인 '바울로 계획'을 실행하는 등 빈민사목에 열심을 드러냈다. 김 추기경은 수시로 철거민들 집단 이주지를 찾아가 철거민과 사목자들을 격려했다.
 
김 추기경은 당시 "잠시라도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머문 시간은 행복했다"며 "산동네와 복지시설에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고 했다. 또 "내가 가서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고 하기에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다녔다"면서 "그들의 까칠한 손을 잡아줄 때 오히려 내 자신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앞두고 1987년 11월 발의, 1988년에 닻을 올린 '한마음한몸운동'은 김 추기경의 사회사목활동에 분기점을 이룬다.
 
 
'민족 화해와 일치' 물줄기 이뤄
 
지금은 독립 사회사목 기구가 됐지만 성가정입양원이나 환경사목위원회,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민족화해위원회, 생명위원회 등은 한마음한몸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끼니마다 예수님 몫으로 한 줌 쌀을 내어놓는 헌미헌금으로 모은 기금은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통해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남미까지 도움으로써 세계교회 속에 한국천주교회 위상이 우뚝 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에 오태순(서울대교구, 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전 회장) 신부는 "(한마음한몸운동은) 한국천주교회가 최초로 '나눔운동'이라는 펀드를 만든 것"이라며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한마음한몸운동을 적극 추진하심으로써 겨레에 '사랑의 등불'이 되셨다"고 회고했다.
 
해방 50주년이던 1995년 3월 닻을 올려 1997년 1월 독립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김 추기경이 아니었다면 설립이 어려웠을 사회사목 기구였다.
 
당시 홍수와 가뭄으로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을 돕자는 제안에 교회 일각에선 "식량을 들고 북녘에 들어가면 총을 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사회분위기는 경직돼 있었다. 이에 김 추기경은 "(식량을 갖고 들어가면) 방아쇠를 당기는 게 좀 약해지지 않겠느냐?"고 답변하며, 대북 식량지원을 결단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교회 일각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만해도 '대북 선교'라는 차원에 머물러 있던 한국천주교회는 '화해의 성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북녘 형제들과 나눔을 실천하고, 민족화해와 일치를 기도하며, 남북이 하나되기 위한 민족화해 교육을 동참했다. 이에 전국 각 교구도 속속 민족화해위원회를 신설, '민족 화해와 일치'는 교회 사목의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됐다.
 
교도소에 갇힌 수인들과 사형수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대교구장 재임 시절은 물론 퇴임 후에도 때때로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를 통해 서울구치소 등을 찾아가 미사를 주례하고 견진성사를 베풀며 재소자들을 위로했다. 김 추기경은 1999년 7월 당시 미사 강론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이 선한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며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셨다"고 강조하고, 재소자들에게 늘 신앙 안에서 희망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곤 했다.
 
아울러 사형제도폐지운동에도 적극 동참, '예수님께서도 사형수였습니다'라는 제목의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등 15대 국회 이후 계속된 사형폐지 서명운동과 법안 상정에도 꾸준히 함께했다.
 
이처럼 김 추기경의 한평생 벗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처럼, 착한 이웃이 되어 모든 이를 위해 살아간 한 삶이었던 것이다.
 
[평화신문, 제1007호(2009년 2월 22일), 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