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얼굴 / 법정 스님
사람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본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노라면 문득 안쓰럽고 가여운 연민의 정을 느낄 때가 있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처지로 보아 몹시 미운 놈일지라도 한참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미운 생각은 어디로 사라지고 측은하고 가엾은 생각만 남는다.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돌려 세워보면 그 뒤뜰에는 우수의 그늘이, 인간적인 비애가 서려 있다.
얼굴은 가려진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환한 얼굴과 싱그러운 미소로써 기쁨에 넘치는 속뜰을 드러내고, 그늘진 표정과 쓸쓸한 눈매로써 우수에 잠긴 속마음을 표현하다. 그러므로 얼굴은 얼의 꼴.
요즈음, 만나는 사람마다 사는 재미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고 보니 얼굴마다 수심이 서리고 굳어 있는 것 같다. 이것이 80년대의 얼굴인가. 우리가 기대하던 그런 얼굴이란 말인가. 내 입에서도 곧잘 재미없는 세상이란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언제는 깨가 쏟아지게 신나고 재미있는 세상이었던 것처럼.
한 입 두 입 ‘재미없는 세상’이라고 뇔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돌림병처럼 온통 재미없는 것으로 가득 채워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별로 재미가 없는 세상을 말로써 거듭거듭 다질 때, 어쩌다 움터 나올 재미도 그 싹을 틔울 수 없게 된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낙원이 아닌 사바세계, 사바세계란 그 어원은 범어(梵語)애소 온 말인데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온 데 길이 든 우리는, 또 참고 견디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숨을 쉬고 먹고 작 배설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짐승이나 다를 게 없다. 보다 높은 가치를 찾아 삶의 의미를 순간순간 다지고 드러냄으로써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니 사나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피어남[轉生]이다.
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잿빛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사람에게 웃음과 눈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웃음과 눈물이 우리를 구원한다. 웃음과 눈물을 통해 닫혀 진 밀실에서
활짝 열린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웃은 얼굴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어준다.
눈물 어린 얼굴에서 친구의 진실을 본다. 반대로 우거지상을 한 굳은 얼굴이나 찌푸린 얼굴은 우리들의 뜰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살아가는 기쁨을 앗아간다.
역사상 독재자들의 얼굴에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웃음이 없다. 무섭도록 굳어 있기만 하다. 그의 내면이 겹겹으로 닫혀있기 때문이리라.
누가 자기한테 오래오래 해 처먹으라고 욕이라도 하지 않나, 혹은 자기 자리를 탈취하려고 음모를 꾸미지나 않을까 해서 늘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이 다음에는 어리석은 백성들한테 또 어떤 먹이를 던져줄까. 머리를 짜다보면 잠자리인들 편하겠는가. 그래서 잔뜩 굳어져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을 수밖에.
자기 얼굴은 자기가 만든다고 했다. 자기가 만든다는 말은 동시에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링컨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새로운 각료로 가용해보라고 어떤 사람을 천거했다. 링컨은 친구가 소개해 보낸 사람을 마났지만 그를 기용하지는 않았다. 며칠 후 친구가 대통령을 찾아와, 자기가 소개한 사람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한 거냐고 물었다. 이때 링컨의 말.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네.”
“여보게, 얼굴이야 부모가 만들어준 것인데 그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친구의 항의를 듣고 링컨은 이렇게 말한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만들어준 얼굴로 통하지만, 인간이 마흔을 넘어서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네.”
그렇다. 우리는 아무리 재미없는 세상에서라도 우리들의 얼굴을 만들 책임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