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두 번의 교황선거

문성식 2011. 2. 11. 23:33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3] 두 번의 교황선거
 
베드로 사도 후계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출
 
 
<사진설명>
처음 교황선거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에서 두번째). 김 추기경은 "성령께서 우리 추기경들을 매개로 역사하셔서 하느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한다.(1978년 8월 26일)
 
 
1978년 8월 7일 아침, 교구청에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교황 바오로 6세 서거 소식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1897~1978)는 내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촌티나는 시골 신부였던 나를 주교, 대주교, 추기경으로 임명해 주신 데다 한국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 로마 회의장 같은 곳에서 나를 만나면 항상 반갑게 맞아주시고 따뜻한 격려를 빼놓지 않으셨다.
 
부음을 듣고 남달리 슬펐던 또다른 이유는 고인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교회 현실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마음 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몰고 온 쇄신 열풍 부작용 탓에 사제와 수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고, 일부 진보적 신학자들은 교황권위에 정면 도전했다. 교황님은 너무나 힘겨운 나머지 "나도 인간이다"라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다고 전해 들었다.
 
교황님이 역경을 이겨내시면서 교회 구석구석에 공의회 정신을 불어넣는 모습을 뵐 때마다 우리 모두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 전 세계 7억 500만명 신자의 수장(首將)이 지고가는 십자가 무게를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변화와 쇄신 작업을 추진해 공의회를 완성하신 업적은 우리가 두고두고 기려야 한다.
 
교황님 장례식을 마친 후 나를 비롯해 교황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추기경 115명(80세 미만)은 교황선출회의(콘클라베)에 들어갔다. '열쇠로 잠그다'라는 뜻을 가진 콘클라베(conclave)는 말 그대로 바티칸 회의 및 투표소를 외부와 완전 격리하고 진행된다. 추기경들은 새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그 안에서 먹고 자는데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다 보니 감옥생활이 따로 없었다.
 
내 숙소는 임시 개조한 10층 어느 사무실로 배정되었다. 실내가 무덥고 텁텁한 냄새가 나서 창문을 열려고 했더니 창문까지 쇠끈으로 잠궈놓고 봉인을 했다. 비밀과 보안이 생명인 콘클라베 명성을 그때 실감했다. 다행히 사무실에 환풍기가 한대 있었는데 다른 방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다른 추기경들은 내 방 환풍기를 부러워하면서 로마의 무더운 여름을 톡톡히 체험했다.
 
교황 선거는 후보자도 없고 선거운동도 없다. 피선거권이 있는 추기경 115명 이름과 간단한 약력만 갖고 투표를 해야 한다. 인상 깊었던 것은 투표소인 시스틴성당에 입장할 때 울려퍼진 '임하소서 성령이여'라는 합창소리였다. 교황 선출은 정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일이다.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이끌어갈 베드로 사도 후계자는 인간이 뽑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사도들을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께서 보내주신 성령이 그 순간에 임해야 가능한 일이다. 나도 성령이 내 생각을 이끌어주길 기도하면서 투표에 임했다.
 
8월 26일 첫 투표날, 오후 2차 투표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교구장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이 제263대 교황에 선출됐다. 투표 첫날 교황 선출에 성공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유력 후보와 선거운동이 없는 선거에서 추기경 3분의 2의 의견이 자연스레 모아지는 것 자체가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이름도 당연히 후보 명단에 올라가기는 했으나 한 표도 얻질 못했다. 그때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가?
 
새 교황 탄생을 바깥에 알리는 흰 연기가 솟아 올랐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결과를 기다리런 신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새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공의회를 소집하고 완성한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선임자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가 성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서서 손을 흔들고, 거기에 화답하는 군중 모습은 참으로 감격적이었다.
 
장례식과 교황선거를 모두 끝내고 한달여 만에 귀국했다.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어느 날, 관리국장 신부가 구내전화로 뚱딴지 같은 얘기를 했다.
 
"교황님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무슨 얘기야. 교황님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지금 뉴스에 나오고 있어요."
"어느 교황?"
"아, 세상에 교황님이 두 분 계신가요."
 
세상에 이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있나.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즉위 26일만인 9월 28일 밤(현지시각) 심장마비로 서거하셨다. 바티칸 당국은 교황님이 15세기 성자 토마스 아 캠피스의 저서 '그리스도를 닮은 길'이란 책을 읽으시다가 불을 켜 둔 채 잠들어 운명하셨다고 발표했다. 전 세계 교회가 충격에 휩싸였다. 하느님께서 새 교황을 보내주신데 대한 감사노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장례식과 콘클라베는 매우 침통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두달새 교황 장례식과 선거를 연거푸 치르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교황 선거는 직전 선거에 비해 다소 진통을 겪었다. 추기경단은 이틀 동안 8차에 걸친 투표 끝에 10월 16일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58)을 새 교황에 선출했다. 그분이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455년 만에 탄생한 비이탈리아 출신 교황인 데다 공산권에서 나온 첫 교황이라는 점에서 전 세계 언론이 주목했다.
 
사실 직전 선거에서도 비이탈리아 출신 교황 탄생에 대한 기대가 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세계교회에 심으려면 다른 나라에서 교황이 탄생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세계 각국의 기대와 반응도 뜨거웠다. 그러나 정작 폴란드 공산정부는 이 사실을 짧막한 보도로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폴란드를 비롯해 동유럽 전체가 공산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새 교황님도 공산치하에서 큰 고통을 겪은 분이다.
 
새 교황님은 신앙과 정신세계가 참으로 깊고, 두뇌가 명석한 분이다. 주교 시노드 상임위원회에서 3년 동안 함께 일했기 때문에 그분을 잘 안다.
 
언젠가 상임위원회 회의를 하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분은 내 옆에 앉아 회의를 잘 이끌어 가셨다. 그런데 틈만 나면 토론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책을 펴놓고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발언할 때는 빈틈없이 적절한 말씀을 하셨다. 교황 즉위 전에도 이태리어·프랑스어·독일어·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셨다. 나중에 스페인어와 포르투칼어도 배우셨다.
 
교황님은 지금 한국말도 몇마디 하실 줄 안다. "감사합니다.", "찬미예수" 
 
[평화신문, 제766호(2004년 3월 28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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