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유신 종말과 서울의 봄

문성식 2011. 2. 11. 23:36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5] 유신 종말과 서울의 봄
 
"박정희를 불쌍히.." 내 기도에 신자들 깜짝 놀라
 
 
<사진설명>
김수환 추기경이 중앙청앞 광장에서 엄수된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 영결식에서 천주교 대표로 나가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1979.11.3)
 
 
1979년 10월19일, 바티칸 인류복음화성 회의와 추기경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내 나라, 내 국토. 가난과 혼란으로 얼룩지고,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에 숨 죽인 국토가 그날 따라 유난히 슬퍼 보였다.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부마사태)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출국하는 길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신현준(요아킴) 교황청 한국대사 관저에 머물렀다. 26일(현지시각) 늦은 밤이었다. 신 대사님이 갑자기 방문을 두드렸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는 큰 딸한테 방금 전화가 왔는데 박대통령 각하께 유고(有故)사태가 발생했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방송 뉴스에 나왔다고 합니다."
 
"무슨 유고랍니까?"
 
잠시후 전화벨이 또 울렸다. 작은 딸한테서도 똑같은 전화가 걸려왔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구체적 상황을 파악한 것은 현지 통신사 뉴스를 통해서였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오발(誤發)사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김 부장은 지학순 주교님 구속 사건 이후 여러번 만났다. 유신정권 핵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자주 접촉한 사람이 김 부장이다. 얼마 전에도 여야가 팽팽히 대치하는 게 안타까워 박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 김대중씨 면담을 주선하기 위해 그를 피정의 집에서 조용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은 박 대통령과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임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도 집권자의 야욕과 군사 독재정권의 한계에 대해 괴로워하는 심경을 서너번 내비쳤다. 그는 박 대통령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생이다. 그가 총을 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엇갈린다. 유신 종식을 위한 혁명적 거사라는 말도 있고, 박 대통령의 총애를 잃은 데 대한 우발적 행동이라는 말도 있다.
 
아무튼 교황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나서 조문과 장례식 참석을 위해 급거 귀국했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국민들은 온통 슬픔에 잠겨 있었다. 주교단은 11월2일 명동성당에서 신자 2000여명과 고 박정희 대통령 추도미사를 봉헌했다. 나는 그날 강론에서 고인에 대한 애증(愛憎)을 이렇게 정리해서 말했다.
 
"고인께서 군인과 대통령으로서 보여주신 애국심은 열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고인은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실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 사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집과 탐욕, 증오와 폭력을 우리 가슴 속에서 씻어내고 용서와 화해, 사랑을 채워넣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국상(國喪)을 끝낸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그날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나간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는데 미사 참례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한 시대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빌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건, 가난과 핍박에 시달리던 사람이건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하느님 앞에 나가 심판받아야 하지 않는가. 육신은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박 대통령을 생각할 때마다 애석(哀惜)의 정을 감출 수 없다. 그분이 쌓은 업적을 보건대 제3기 집권야욕을 꺾고 정권을 이양했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국부(國父)가 되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 후 김재규씨 모친이 찾아왔는데 그분의 꼿꼿한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여든이 넘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노모는 "친형제 같은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을 보면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던 모양이다"라며 아들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한치 흐트러짐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참으로 감명 깊었다. 김씨 부인은 여러번 만났는데 그분은 나중에 나한테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
 
김씨 부하로서 사건에 연루된 박흥주 대령의 부인도 나를 몇번 찾아왔다. 박 대령의 아이들은 아버지 구명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왔지만 내가 힘이 되어줄 사안이 아니었다. 어느날 박 대령 부인이 새벽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추기경님, 어제 남편 면회를 갔는데 자기 소지품을 모두 가져가라고 해서 갖고 왔어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제발 남편을 살려주십시오."
 
부인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떨고 있었다. 안구가 막 돌아가는 등 부인에게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부인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시각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기도밖에 없었다. 부인이 돌아간 후 혼자 우두커니 앉아 기도로 안타까운 마음을 삭이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에 박 대령 사형이 집행됐다.
 
부인과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시간이 좀 흐른 후 박 대령 집을 방문했는데 다행히 고통을 잘 이겨내고 있어서 안심하고 돌아왔다. 김재규씨 부인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면서 사는 것을 보았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감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 와중에 신군부 세력이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김대중씨, 김영삼씨 같은 야당 지도자는 곧 대통령이 될 것처럼 행동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권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게 눈에 보였다.
 
1980년 정월 초하룻날, 실세로 떠오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게 새해인사를 왔다.
 
[평화신문, 제768호(2004년 4월 11일), 정리=김원철 기자]

'김수환 추기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군부 세력과 5.18 광주(하)  (0) 2011.02.11
신군부 세력과 5.18 광주(상)   (0) 2011.02.11
한 달 동안의 피정   (0) 2011.02.11
두 번의 교황선거   (0) 2011.02.11
오원춘 사건  (0) 201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