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교리] 메시아와 그리스도 (1)
히브리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닌 ‘예수’라는 이름은 이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단 하나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의 영원한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21 참조)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us)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 말 ‘메시아’(Messias)를 그리스 말로 번역한 것인데, ‘기름부음받은이’라는 뜻이고, 우리 말로는 ‘구세주’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봉헌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부었다. 왕과 사제들의 경우가 그랬고, 간혹 예언자들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결정적으로 세우시기 위해 파견하시는 메시아의 경우는 그중 가장 특출한 예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36항)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이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온전히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 이후에 신망 있고 힘 있는 왕을 갖지 못했던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역사 안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과 같은 이상적인 왕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힘 있는 왕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다시 강한 민족으로 만들어 다른 민족들을 다스리게 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메시아 대망론’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주기를 바라는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다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는 오로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 현세적인 힘과 능력을 지닌 메시아였습니다.
“많은 유다인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희망을 가진 몇몇 이방인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 곧 ‘다윗 자손’의 근본적인 특징들을 알아보았다. 예수님은 당신의 권리인 메시아라는 칭호를 받아들이시지만, 당시 일부 사람들이 이 칭호를 지나치게 인간적인 개념으로, 특히 정치성을 띤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매우 조심스럽게 받아들이셨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39항) 메시아라는 칭호를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 경우, 사람들이 당신을 정치적인 왕으로, 현세적 영웅으로 생각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신 다음 곧바로 당신에게 닥쳐올 수난을 예고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태 16,16-23 참조) 또한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드로는 아직 유다인들의 메시아사상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고 꾸짖으시며 잘못된 메시아 개념을 올바로 잡아 주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누리시는 왕권의 진정한 의미가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밝혀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리스도이십니다. [2018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영우 베네딕도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생활교리] 메시아와 그리스도 (2)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구약성경 안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은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됩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었고,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이심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줄곧 당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십니다.(마태 16,16-20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칭호를 매우 조심스럽게 받아들이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기 민족을 억압과 압제로부터 구해 줄 수 있는, 지극히 세속적 권력을 가지고 현세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메시아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메시아의 모습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후, 사람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신 모습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요한 6,1-15 참조)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해방자, 현세적 구세주, 놀라운 기적과 예언을 행하는 유능한 지도자, 지금 당장 여기에서 우리들이 먹고사는 걱정을 없애주는 해결사로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고난 받는 주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분명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였지만, 하느님의 종으로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으시고,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종,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메시아,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5-26) 고난을 통한 영광, 죽음을 통한 부활, 십자가를 통한 승리의 길, 그 길이 바로 하느님의 고난 받는 종의 길이요 그리스도의 길이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단순히 메시아로 믿고 고백한다면, 그러한 신앙은 다른 여러 종교, 특히 지극히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형태의 종교들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을 잘 섬기고, 그 신 앞에서의 봉헌과 속죄 행위를 통해 세속적인 행복과 물질적 풍요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들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요 지금 나의 신앙입니다. 나는 내일 밤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실 예수님 안에서 아직도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지, 그분이 오시어 현세적 행복, 세속적 권력,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시리라 기대하고 있지 않은지,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그리스도가 아닌 메시아를 믿는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2018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영우 베네딕도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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