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1. 삼국시대의 불교
2) 불교적 정치이념
전륜성왕
불교가 수용된 이후 삼국에서는 고대국가의 통치체제,
특히 국왕의 존엄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불교의 사상이나 이론을 정치이념으로 이용하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불교의 수용과 고대국가 체제의 정비가 함께 이뤄진
신라사회에서 두드러지지만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불교를 이용하여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모습들이 일부 보이고 있다.
불교의 정치이론을 현실의 정치이념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예로서
전륜성왕의 이념을 들 수 있다.
전륜성왕은 본래 인도의 이상적이며 신화적인 군주로서,
그 통치방식에 따라서 금륜(金輪)과 은륜(銀輪), 동륜(銅輪), 철륜(鐵輪) 등으로 구분되며
이들이 지상에 출현하면 분열된 나라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평화로운 세계가 건설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입멸한 후에 북인도에서 아쇼카 왕이 출현하여
분열된 나라들을 통합한 후에 덕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자
그를 가리켜서 전륜성왕 중의 전륜성왕에 해당한다고 하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도덕과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한 아쇼카 왕이 불교의 가르침에 공감하여
불교교단을 보호하고 주변지역에 불교의 포교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그를 모델로 하여 불교적 전륜성왕의 이상형을 만들어 냈다.
『아육왕경』 등의 경전에 묘사된 불교의 전륜성왕은
불법에 의거하여 세상을 통합하고,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며
불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널리 불법을 전하고,
노년에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였다.
또한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내세불인 미륵이 지상에서 성불하여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이야기되었다.
신라 법흥왕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이와 같은 전륜성왕의 이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군주였다.
아들의 이름을 전륜성왕의 이름을 딴 동륜과 금륜이라고 하였고,
그가 창건한 황룡사의 장륙불상은 원래 인도의 아쇼카 왕이 불상을 만들기 위하여 발원한
철과 금을 사용하여 주조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진흥왕이 이처럼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적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 유역과 함경도지역까지 영역을 넓혀 가던
그의 팽창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정책을 단순한 정복전쟁이 아니라
분열을 통합하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세우고,
이 점을 불경에 묘사된 아쇼카 왕의 통치와 동일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자신이 정복전쟁을 일단락 지은 후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행하면서
도덕에 의한 통치로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며 새로 편입된 지역의 백성들도
차별 없이 대할 것을 선언한 순수비를 세웠다.
이것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아쇼카 왕이 새로 개척한 지역에 건립한
아쇼카 법칙(法勅)의 돌기둥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진흥왕은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안정된 통치기반을 확립하였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앙하였다는 점에서
불경에 나타난 전륜성왕에 부합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륜성왕 이념은 신라의 진흥왕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였던
백제의 성왕에 의해서도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왕이라는 왕호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불교를 장려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전륜성왕과 비슷한 점이 있다.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위축되어 있던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백제의 부흥을 도모하고자 한 성왕에게 전륜성왕은
매우 이상적인 모델로 비쳐졌을 것이다.
진종(眞種)의식
전륜성왕 이념과 함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된 정치이론 중에
신라 왕실의 진종의식이 있다.
진종이란 말은 불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의 의미는 인도의 네 계급 중 크샤트리야 계급을 뜻한다.
크샤트리야를 한문으로 옮길 때에 발음을 따서 찰제리종(刹帝利種)이라고 하거나
참된 종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진종(眞種)이라고 번역했으며,
여기에서의 종(種)은 신분이 아니라 혈족으로 이해되었다.
신라의 왕실은 이러한 한문 번역어에 기초하여서
진종을 부처님이 속했던 석가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들도 진종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경전에 묘사된 석가족의 신성함을 이용하여
왕실이 자신들의 혈통을 일반 백성들과 구별되는 신성한 혈통으로 내세우려 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진종의식은 신라의 국가적 신성함을 보장해 주는 논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진흥왕 이후 진덕여왕에 이르는 왕실에서
진(眞)이라는 글자를 붙인 왕호를 빈번하게 사용한 것도
이러한 진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왕실을 진골(眞骨)이라고 하여 두품(頭品)을 갖는 일반인들과 구분하는 의식도
이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 역시 진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신라 왕실의 진종의식은 불교에 대한 신앙을 더욱 심화, 발전시켰다.
자신들을 석가족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부처님의 가족과 동일시하고
나중에는 국왕을 부처와 같은 존재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진평왕의 이름은 경전에 부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오는 백정(白淨)이었으며,
진평왕의 형제들 이름도 부처님의 삼촌들 이름을 따서 백반(伯飯), 국반(國飯) 등이었다.
또한 왕비 이름 역시 부처님의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摩耶) 부인으로 불렸다.
이러한 이름들은 국왕 일가가 자신들을 부처님의 가족과 동일시하기 위하여 붙인 것으로,
이러한 가족에게서 부처님과 같은 국왕이 태어나기를 기대하였다고 생각된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딸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녀의 왕호인 선덕여왕은
경전에 나오는 동방세계의 부처의 이름인 선덕여래(善德如來)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또한 선덕여왕의 사촌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曼)은 『승만경』의 주인공으로서
장래에 부처가 될 것을 약속받은 승만 부인의 이름에서 딴 것이었다.
이처럼 왕실 중에서도 특별히 국왕의 가족들을 진골 왕실과 구분할 필요성이 생겨났는데,
성골(聖骨)로 불리는 집단이 바로 이러한 제한된 국왕의 가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덕여왕 이후 성골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처럼 국왕의 가족을
부처님의 가족과 동일시하였던 진평왕의 가계가 끊긴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왕실에서는
불교의 사상이나 이론을 이용하여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는데,
이는 역대 국왕의 왕호나 이름을 불교식으로 한 것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경우 법흥왕은 ‘불법을 일으킨 왕’을 뜻하고,
진흥왕은 ‘진실로 불법을 일으킨 왕’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들은 말년에 왕위를 내 놓고 출가하여
각기 법공(法空)과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가지기도 하였다.
특히 법흥왕에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는 시기의 국왕들은
모두 불교와 관련되는 왕호나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이 시기를 ‘불교식 왕명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라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불교적인 국왕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백제의 경우 성왕에서 법왕까지의 국왕들의 왕호가 불교적이다.
성왕은 전륜성왕의 약칭이며, 위덕왕은 불경에 보이는 위덕불(威德佛)에서 딴 것이고,
혜왕(惠王)과 법왕(法王)은 불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신라의 ‘불교식 왕명시대’와 겹치는 시기로
비슷한 때에 백제와 신라가 국왕에게 불교적인 이름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국왕의 왕호나 이름을 불교적으로 붙인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죽은 국왕을 추모하여 만든 탑에서 발견된 금동판에서
국왕을 원각(圓覺)대왕이라는 불교용어를 사용한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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