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3절 한국불교 - 1. 삼국시대의 불교 - 3) 불교교학의 수용

문성식 2016. 11. 26.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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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1. 삼국시대의 불교
        3) 불교교학의 수용 고구려의 불교학 이른 시기에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고 중국의 왕조와 교류하였던 고구려는 불교학의 연구에서도 선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남중국의 고승 지둔과 교류한 것은 이미 당시에 불교학의 이해 수준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고구려 불교학의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고구려 국내에서 활동한 승려들에 관한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주로 외국의 불교계에서 활동한 승려들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 불교학의 내용을 엿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초기 불교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중국에서 삼론학(三論學)을 집대성한 승랑(僧朗)이다. 5세기 후반에 중국으로 유학한 그는 처음 북중국에서 삼론학을 공부하였고, 얼마 후 강남지방으로 옮겨 섭산(攝山)의 서하사(棲霞寺)에 머물며 삼론학을 강의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이 전한 대승중관사상의 삼론학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여 쇠퇴하고 있었고 대신 소승적 교학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비달마 교학과 성실학(成實學)이 각기 화북지방과 강남지방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랑은 삼론학의 이론을 깊이 연구하여 재정비함으로써 중국에서 중관사상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승랑의 삼론학은 이후 문도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수(隋)나라 때에는 천태학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수나라 때 삼론학을 집대성한 길장(吉藏, 549~623년)은 승랑에 의해 중국의 삼론학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고 평가하였으며, 스스로 그의 사상을 계승한 것을 자부하였다. 승랑은 고구려로 귀국하지는 않았지만 승랑에 의해 발전하게 된 삼론학은 이후 고구려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수나라 초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고구려의 인(印) 법사, 실(實) 법사 등이 삼론학을 강의했던 것으로 전하며, 유학한 승려들뿐 아니라 고구려 국내에서도 삼론학이 발전했다는 것은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의 승려들이 대부분 삼론학을 공부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595년에 일본에 들어간 혜자(慧慈)는 삼론학의 대가로서 성실학에도 밝았다고 하며, 620년대에 일본에 건너간 혜관(慧灌)과 도등(道登)도 모두 삼론학의 대가였다고 한다. 특히 일본의 제2대 승정(僧正)이 된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삼론학 외에도 여러 교학을 배운 고구려 승려들의 이름이 전한다. 6세기 말에 중국 강남지방에서 활약했던 지황(智晃)은 설일체유부의 교리에 밝았다고 하며, 천태산에서 지자(智者)로부터 직접 천태학을 배운 파약(波若, 562~613년)을 비롯하여, 열반학의 대가로 꼽혔던 보덕(普德) 등이 고구려 출신 승려였다. 고구려 내부의 불교학 연구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고구려 초기 수도인 환도성에서는 불교학 연구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원광(圓光)의 제자 원안(圓安)은 중국에 유학하기 전에 이 곳에 유학하여 불교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불교학 고구려와 비슷한 시기에 불교를 공인한 백제에서도 불교학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실제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특히 6세기 이전에 활약한 승려와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주로 성왕대 이후의 자료가 전하고 있다. 성왕 19년(541)에 남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 등의 경전에 관한 해설서를 구하였다. 당시 양나라에서는 열반경, 법화경, 유마경 등의 대승 경전이 널리 연구되고 있었고, 특히 열반경에 대해서는 여러 주석들을 모은 『열반경집해(涅槃經集解)』가 총 71권(509년 완성)으로 편찬되어 있었다. 중국에 유학한 백제 출신 승려로는 6세기 초반에 양나라에 유학한 발정(發正)과 6세기 후반 진나라에 유학한 현광(玄光)이 알려져 있다. 백제에서 활동한 승려로는 법화경 수행자로 유명한 혜현(慧顯)이 있다. 그는 수도 북쪽의 수덕사와 남쪽지방의 달나산(월출산)에서 법화경 독송의 수행을 실천하다 입적하였다. 전기에 의하면, 법화경을 독송한 공덕으로 사후에 시신이 모두 없어진 뒤에도 혀만은 오랜 기간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6세기 말 이후 일본에 건너가 쇼오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던 혜총(慧聰)과 관륵(觀勒)도 삼론학의 학자로 유명하였다. 이 시기의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삼론학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는 계율도 중시하였는데 584년에는 일본의 비구니들이 정식으로 계를 받기 위하여 백제로 유학을 왔으며, 관륵은 일본에서 승단의 계율을 강조하여 초대 승정에 임명되었다. 백제의 계율학과 관련해서는 성왕대에 겸익(謙益)이 인도에 유학하여 부파불교의 율장을 가지고 귀국하여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미륵불광사사적기」에 의하면 겸익은 526년에 바닷길을 통해 중인도로 들어가 그 곳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서 5년 동안 불교학을 배운 후 율장의 범어 원본을 가지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겸익은 함께 온 인도 승려와 협력하여 범어 율장을 한문으로 번역하였고, 백제 승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그 내용을 해설하는 36권의 율소(律疏)를 지었다고 한다. 중국 이외 지역의 승려가 직접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독자적으로 율장을 번역하였다는 것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획기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겸익이나 그가 번역한 율장에 관한 내용은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유일한 자료인 「미륵불광사사적기」의 출처도 아직 분명하지 않다. 겸익의 행적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신라의 불교학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불교의 수용이 늦었지만 불교학의 전개에 관한 자료는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불교가 수용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각덕(覺德)은 진흥왕 10년(549)에 양나라 사신과 함께 귀국하면서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왔고, 진나라에 유학하였던 명관(明觀)은 진흥왕 26년(565)에 귀국하면서 불경 1,700여 권을 가지고 왔다. 또한 17년 동안 진나라에서 공부하고 진평왕 24년(602)에 귀국한 지명(智明)은 승려들에 대한 수계 의식을 설명하는 저술을 지었다. 부처님의 사리와 경전이 전해지고, 승려들의 출가 수계에 대한 의식이 정리됨으로써, 비로소 불법승 삼보를 갖추게 된 신라의 불교학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라 불교학의 선구자는 진평왕 때 활약한 원광(圓光, ?~630년)이었다. 6세기 후반에 남중국의 진나라에 유학한 원광은 원래는 유교를 공부하려 하였지만 우연히 사찰에서 설법을 들은 후 곧바로 출가하여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당시 진나라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던 성실론과 열반경, 반야경, 아비다르마 등을 연마하여 성실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옮겨 당시 새롭게 대두되고 있던 섭론학(攝論學)을 연마한 후 진평왕 22년(600)에 신라로 돌아왔다. 원광은 귀국 후 처음에는 청도의 운문산 가서사(嘉栖寺)에 머물면서 점찰법을 통해 대중들을 교화하였다. 점찰법은 청정한 마음으로 간자(簡子, 나무막대)를 굴려서 자신의 전생의 업보를 점친 후, 그 결과에 따라 참회 수행을 하고 선행을 닦으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가서사를 중심으로 한 원광의 교화가 유명해지자 왕실에서는 그를 중앙으로 초청하여 정치적 자문을 구하고 수나라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 문서의 작성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출가하기 전 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러한 왕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출가자로서의 윤리와 세속인으로서의 윤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가서사에 머물 때에 가르침을 구하러 찾아온 귀산과 추항 등의 청년들에게 보살계 대신 속세의 사람들이 지킬 계율로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시한 것도 이러한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원광 이후 신라 불교학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자장(慈藏)이었다. 자장은 진골 출신으로 전기에 의하면 아들이 없던 그의 아버지가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여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출가를 결심하여 고골관(枯骨觀)을 닦았고 출가자가 되기 위하여 재상의 자리도 거절했다고 한다. 선덕여왕 5년(638)에 사신을 따라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유학한 그는 계율학과 섭론학 등을 수학하고 선덕여왕 10년(643)에 대장경 1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자장은 귀국 후에 왕실과 황룡사에서 섭론과 보살계를 강의하였고 왕실의 후원 아래 대국통(大國統)에 취임하여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유학을 통해 계율에 정통하게 된 그는 승려들에 대한 계율의 교육과 감찰을 강화하여 승려들의 생활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였으며, 왕을 비롯한 재가 신자들에게도 보살계를 베풀었다. 이처럼 계행을 고취시켜 불교교단의 위상을 높인 행적으로 그는 호법(護法)보살로 불리게 되었다. 자장은 또한 황룡사 탑를 비롯하여 각지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여 사리신앙을 유포하였고, 아미타신앙에도 관심을 가져서 『아미타경소』와 『아미타경의기』를 저술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