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산수화

수월헌 임희지 (水月軒 林熙之)의 작품세계

문성식 2015. 9. 8. 20:00

수월헌 임희지 (水月軒 林熙之)의 작품세계

 

[조선후기 문인화가 :1765~?].

 

​수월당 임희지(水月堂 林熙之)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경부(敬夫), 호는 수월당(水月堂 ),  수월헌(水月軒) 또는 수월도인(水月道人)이다. 한역관(韓譯官 )출신으로 중인(中人)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의 일원이며 봉사를 지냈다.

 

 그의 묵란과 묵죽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임 있는 필치(筆致)와 담백하면서도 변화 있는 먹의 농담(濃淡 )의 의해 뛰어난 격조을 나타냈으며, 특히 묵란은 강세황보다 나았고, 김정희 이전의 화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나무(墨竹)와 난초(墨蘭)를 잘 그렸는데, 힘 있는 필치와 담백하면서도 변화가 있는 먹의 농담(濃淡)으로 뛰어난 격조를 나타냈다.  특히 묵란은 강세황보다 나았고, 김정희(金正喜) 이전의 화가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묵난도(墨蘭圖), 조선 19C 후반 지본수묵, 62.5 cm X 38.5 cm, 국립중앙벅물관

 

조희룡(趙熙龍)의 『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따르면 임흐지의 묵죽화는 당대의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과 비교 될 만큼 명성이 높았고, 난초 그림은 오히려 나았다고 하며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흘려섰다고 한다.  그의 난초 그림은 <묵란도>처럼 흐늘어져 뻗은 아리다운 춘란(春蘭)을 즐겨 그린 것으로, 어떤 고격(古格)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마음과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점에서 그 특징을 찾아 볼 수 잇다.

 

그는 스스로 제시(題詩)를 붙여 " 깨긋한 이파리에 흥을 붕이노니 마음을 같이한다. 이른들 어떠하리"라고 할 정도로 개성의표출로써 난초를 그렸다. 흔히 난초는 군자(君子)에비견되지만 떄로는 가인향(佳人香), 미인향(美人香)에도 은유되는데, 임희지의난초 그림은 여기에 그 본래의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희첩(姬妾)을거느리면서 말하기를  "나에데는 꽃을 기를 동산이 없으니 이사람을 좋은 꽃 한송이로 본다"고 한 애기에 걸맞는 풍모라고 하겠다. 화면 하단에 유려한 초서체로 '수월(水月)'이라고낙관(落款)하고 있다

 

조선화단의 기인 임희지(林熙之)  -꽃 한 송이(花一朶)
마당에 못을 파도 물이 고이지 않자 임희지는 쌀뜨물을 부었다. 그는 말했다.
"달빛이 물의 낯짝을 골라서 비추겠는가."  '물에 비친 달은 그의 호(水月軒)가 되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첩을 얻자 누가 나무랐다. 그의 변명이 기막히다.
"집에 꽃밭이 없어 방 안에 꽃 하나 들여놨다."
하고 다닌 행색은 더욱 가관이다. 달 밝은 밤, 팔 척 거구에 거위털을 입고 쌍상투를 튼 채 맨 발로 생황을 불고 다녔다는 그다. 풍류가 아니라 미치광이 놀음에 가깝다. 그의 짓거리로 보면 이 난초는 어설픈 情人이다. 축첩이 모자라 벽에도 걸었다. 그 심정 알아챈 옛 시인이 읊는다. '주머니 비어도 길거리에서 팔 수 없으니/ 그윽한 향기 그려 종이 위에서 보노라.' 손철주의 『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 53쪽쪽 』중에서

묵란도

 

 

 

임희지 <묵죽> 지본수묵 108x53.6cm 간송미술관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 

 

임희지의 대나무와 김홍도의 호랑이 합작품


 

풍죽도

 

조선시대 묵란화의 발전은 묵죽화나 묵매화에비하여 더딘 편이다. 실제 조선시대 묵람화가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현재 심사정과 표암 강세화으로 부터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나 표암은 잘 알려진 바대로 명.청대의 각종 화보를 바탕으로 남종문인화풍의 수용과 정착에 적극정이었던 만큼 묵란화를 그려내었다.  

 

이는 당시 시대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현재나 표암보다 한 두 세대 후배였다는점과 여항화가 출신이라는 임희지의 신분적 배경과 취향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묵란>은  앞서의 <묵란도>와 달리 매우 파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뿌리를 다 드러낸 일종의 '노근란' 을 화폭애 담아내었는제 난엽 만큼이나 긴 뿌리를 화폭에 다 담아내려다 보니 난이 허공에 걸려있는 것 처럼 보이는 대담한 구도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실재감이 떨져 다소 기이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렇듯 독특한 형식과 작가의 개성을 우선시하는 작화 태도에서 청대 양주화파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해 보이지만, 확고하면서도 탄력있는 낙엽의 필치에서 느껴지는 엄정함과 청징함은 중국의 묵란화에서 찾아 보기 힘든 요소로 조선 고유 미담이 어우러진 결과이다

 

난근돠 조응하며 한껏 멋을 부린 '수월'의 관서 밑에는 '임희지인'이란 인문의 백문방형 인장을 찍엇다. 제시의 내용은 "한 해가 저물도록 캐가는 사람 없으니, 품은 향기 단지 스스로 알 뿐이다" 라는 주자의 <봉동장역부성남이십영>중 '간란'을 읊은 시의 일부를 옯겨 놓았다.

 

山中竹 金時習

바위 모퉁 위레 솟은 푸른 대나무 바위아래 땅에다 뿌리를 붙였구나

늙어 갈수록 더욱 굳어지는 절개 우수수 밤비를 머금었구나

綠竹出巖嵬 托根巖下土. 老去節兪剛 蕭蕭藏夜雨

뿌리는 뻗어 푸른 용으로 되고 가지는 짧아 봉황이 깃들지 않은 구나

줄기는 차다누 눈 서리를 능멸하나 그림자는 바람과 달의 희롱을 받는구나

根系化昌龍 枝短不棲鳳 幹凌雪霜侵 影受風月弄

도리어 안쓰러워라 깊은 골짜디서 자라 왕휘지 풍자르 f만나지 못한 것을

내가 와서 오랜 시간 배회하다. 휘파람 불며 시 읊으며 골짝 벗어남을 잊었다

일모경삽기 쇠쇠상마홍 사탄무지음 공산비총통

각한장심곡 흠우휘지풍 아래구배회 소음말출동

해가 저무니 가벼운 바람이 일어나 사각사각부딫이는 소리 들린다

그 소리 몰라줌을 탄식하는듯 빈 산에는 아쉬운 듯 서글퍼지는구나.

日暮輕颯起 衰衰相摩哄 似歎無知音 空山悲憁慟

 

 

임희지 <삼청도<三淸圖>> 지본수묵 57.1x42.4cm 고려대학교박물관

 

이 <난죽도>는 임희지의 호방한 풍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스듬히 뻗어나온 각진 바위 위로는 농담을 살린 대나무를 그리고, 그 아래로는 난을 활달하고 힘찬 필선으로 자신있게 묘사하였다. 농담의 대비 역시 대담하여 호방하게 자신의 일기(逸氣)를 잘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들을 뒷받침해 주는 내용의 화제(畵題)가 역시 활달한 필치로 왼쪽 여백에 적혀 있다.

“원장(元章:米芾)의 돌, 자유(子猷:王徽之)의 죽, 좌사(左史:屈原)의 난초, 이를 모두 일조(一朝)에 그대에게 주는데 그대는 무엇으로 보답을 하려는가? (元章之石 子猷之竹 左史之蘭 一朝贈君 何以報之)”

북송의 문인화가 미불(米芾, 1051-1107)은 괴석을 향해 절하며 경외로움을 표시한 것으로 잘 알려졌고,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휘지(王徽之, 388卒)는 대나무를 군자(君子)로 지칭하며 하룻밤도 대나무가 없는 곳에는 묵을 수가 없다고 한 인물이며, 충성심의 표현으로 멱라수(汨羅水)에 투신 자살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 343-277B.C.)은 아홉이랑(九畝)이나 되는 넓은 들에 난초를 심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고사(故事)를 모두 한 문장에 집어넣어서 석(石), 난(蘭), 죽(竹)을 일조(一朝)에 준다고 하였으니, 이 문장에서 일조는 각각 다른 조대(朝代)에 대비되는 한 조대(朝代)라는 뜻도 되고 단순히 하루 아침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
 

 

 

임희지 <묵죽> 지본수묵 120.9x28.3cm 간송미술관

 

 


 

노모도(老貌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