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13.jpg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북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 높이 6.2m.

 

이 탑은 백제시대 석탑을 모방한 같은 유의 많은 석탑 중에서도 가장 충실하게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을 모방하고 있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와 탑신부(塔身部), 그리고 상륜부(相輪部)의 세 부분으로 형성되었는데 기단부를 받고 있는 지대석(地臺石)은 몇 장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결구하여 2단을 이루고 있으나 현재는 상층의 1단 하대만이 보이고 그 밑의 부분은 파묻혀 있다.

 

기단부는 1층으로서 4매석으로 구성된 하대석(下臺石) 위에 놓였는데 네 모서리에 방형의 돌기둥을 하나씩 세우고 그 사이에 면석(面石)을 다른 돌로 다듬어서 세워 모두 8매석으로 기단 면석을 조립하였다. 각 모서리의 방주(方柱)는 마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도 같은데 약간의 배흘림이 있어 전체의 형태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위의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덮였는데 하면의 부연(副椽 : 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나 상면의 굄대가 없으며 기단부 전체의 규모는 탑신부에 비하여 좁아서 안정감이 없다.

 

탑신부의 초층탑신은 네 모서리에 큼직한 방형 석주를 1주씩 세우고 그 사이에 별개의 석재로 조성한 벽면석(壁面石)을 끼웠는데, 전체가 ‘상촉하관(上促下寬:위는 좁고 아래는 넉넉함)’의 형태를 이루었으며 다른 조식은 없다.

 

2·3층의 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와 너비가 지나치게 감축되었으며 1석으로 조성하고 있다. 각 층의 탑신석 위에는 높직한 2단의 받침가구가 있는데 초층에서 하단은 4매석으로 각형(角形) 받침을 만들고 상단도 역시 4매석으로 된 소로〔小累〕 모양의 부재를 얹어 정림사지오층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옥개석은 현재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이 부재도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규모가 축소됨에 따라 그 구성석재가 줄어들고 있다. 초층옥개석은 8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고 형태는 평박할 뿐 아니라 매우 넓어서 기단부보다도 광대해졌다.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개되다가 네 모서리에 이르러 약간의 반곡(反曲)을 이루고 전각(轉角)에서는 반전(反轉)을 보이고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고 네 모서리의 우동형(隅棟形)은 전각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나 합각머리는 예리한 선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 정상에는 1매의 판석을 한 단 놓아 그 위층의 탑신을 받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은 2층 이상에서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2층 이상에 이르러서는 그 규모의 차이 때문에 옥개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다.

 

상륜부는 완전하지 않은데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크고 작은 석재가 겹쳐 놓이고 그 위에 방형의 보개(寶蓋)가 있으며 다시 방형의 석재가 놓였으나 이 형태는 원래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석탑은 각 부의 양식과 건조수법에서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의 세부양식을 충실하게 모방하였으나 기단이 협소하고 2층 이상의 탑신석들이 지나치게 감축되고 각 층 옥개석이 지나치게 커서 안정감을 잃고 있다. 각 부재의 치석 및 구조·형식 등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