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22_0084.jpg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영국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3m.

 

영국사는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명종 때인 12세기에 원각국사에 의해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고종 때 안종필이 왕의 명을 받아 탑, 부도, 금당을 새로 짓고 절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 하였다. 뒤에 다시 공민왕에 의해 영국사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약 500m 되는 곳에 속칭 망탑봉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있고, 이 정상에 삼층석탑 1기가 건립되어 있다.

망탑봉이라는 이름은 사찰이나 동네에서 모두 똑같이 부르고 있는데 언제부터 호칭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봉우리에 석탑이 건립된 뒤부터 탑을 바라본다는 연유에서 붙여진 것 같다.

 

거대한 화강암반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암석 상면을 평평히 다듬고 자연암을 그대로 이용하여 기단을 조성하였다. 즉, 암반 상면 중앙에 돌출된 형태의 네모난 기단부가 마련되었는데, 다듬은 암상(巖床)에 2단의 높직한 각형받침을 각출(刻出)하고 그 위에 면석을 조성하였다.

 

단층기단으로서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를 각출하고 중앙의 1탱주(撑柱)로 양쪽으로 나눈 구간에 안상(眼象) 1구씩을 조각한 통형(通型)으로, 상단 둘레에 갑석의 표현이 뚜렷하며 상면에는 아무런 받침이 없고 그대로 탑신이 놓였다.

탑신은 신(身)·개(蓋)가 별석(別石)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층의 옥신석(屋身石)에는 양 우주가 정연히 각출되었고, 특히 층마다 상부가 하단부보다 약간씩 좁혀져서 주목된다. 초층옥신 하단에 1단의 각형굄이 조출되었는데, 이것은 기단부 갑석 상면에 탑신받침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신으로 새긴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초층옥신 각 면에는 중심 하부에 동일한 규격으로 문비(門扉)가 돋을새김되었는데 그 형태는 일반적 양식이 아니고 상·하부의 양단이 돌출된 액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면은 문양이 없어서 흥미롭다.

 

20100622_0091.jpg초층옥개석은 옥개받침이 5단인데 하부 3단은 별석으로 조성하였다. 추녀가 직선이고 낙수면(落水面)이 평박한 편이며, 전각에 반전(反轉)이 있으나 풍경공(風磬孔)은 없다. 정면(頂面)에는 각형 1단의 옥신받침이 각출되었는데, 그 위의 2층 옥신 하단에 새겨진 1단의 각형받침과 겹쳐져 마치 2단의 받침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2층옥개석은 받침이 4단이며 정면에 옥신굄 1단이 각형으로 조출되었고, 그 위의 3층옥신에는 양 우주 외에 아무런 조식이 없다. 3층옥개석은 옥개받침이 4단이고 정면에 각형(角形)의 노반(露盤)받침이 1단 각출되었으며, 그 상면 중앙에는 지름 4.5㎝, 깊이 3㎝의 둥근 찰주공(擦柱孔)이 만들어져 있다.

 

현재 노반석은 결실되고, 다만 1석으로 조성된 연봉형의 보주(寶珠)가 놓여 있을 뿐이다. 각 층 옥개석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퉁이의 전각에도 반전이 뚜렷하여 경쾌하다. 한편, 각 옥신의 상부가 좁혀졌으므로 석탑 전체의 형태는 안정감이 있으며 더욱 단정하고 아름답다고 하겠다.

 

그러나 석탑의 조성양식으로는 정형(定型)의 규범에서 약간씩 벗어남을 보이고 있다. 곧 단층기단인 것과 그 갑석의 수법이 약화된 점, 그리고 옥개받침과 옥신굄의 각출이 정연하지 않으며 각 옥신석의 비율이 같지 않은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