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12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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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강원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4 |
소재지 | |
지정일 | 1998.04.06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통일신라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인제군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계사지(寒溪寺址)는 인제에서 양양으로 통하는 한계령(寒溪嶺)(44번 국도) 중턱의 장수대에 위치하고 있다. 사지(寺址)의 앞으로는 한계령에서 발원한 한계천(寒溪川)이 흐르고 뒤로는 안산(鞍山)(해발 1430.4m)과 그 산줄기가 병풍처럼 싸안고 있다.
한계사(寒溪寺)는 한용운(韓龍雲)선생이 편찬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의 백담사사적(百潭寺事蹟)에 따르면 신라 진덕왕(新羅 眞德王) 원년(元年)(647)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 10년(690) 소실(燒失)되어 성덕왕(聖德王) 18년(719)에 중건 하였고, 또 원성왕(元聖王) 원년(元年)(785) 소실되어 동왕(同王) 6년(790)에 한계사 아래 30리 지점으로 이건(移建)하고 운흥사(雲興寺)라 하였으며, 고려 성종(高麗 成宗) 3년(985) 다시 소실되어 고기(古基)의 북쪽 60리 지점으로 이건(移建)하고 심원사(深源寺)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절이 소실되면 이건(移建)하고 사명(寺名)을 선구사(旋龜寺)(1433), 영취사(靈鷲寺)(1466)등으로 개명(改名)하였고, 조선 세조(朝鮮 世祖) 2년(1457)에 현재의 백담사(百潭寺)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1984년에 강원대 박물관이 실시한 금당지(金堂址)와 석탑지(石塔址) 일부에 대한 발굴조사결과에 의하면 「지정(至正)18년(1358)」,「숭정(崇禎) 13년 기묘(己卯)(1639)」,「순치을미(順治乙未)(1655)」,「강희(康熙) 3년 갑진(甲辰)(1664)」,「강희(康熙) 22년 계해(癸亥)(1683)」등의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사적기(事蹟記)에 의한 원성왕(元聖王) 원년(元年)(785)의 소실후에도 여러차례의 중건이 있었으며, 적어도 17세기말까지는 존속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지(寺址)는 초석(礎石)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다수의 건물지(建物址)를 비롯하여 삼층석탑(三層石塔) 2기, 불상(佛像), 불상대좌(佛像臺座), 광배(光背), 석등(石燈), 옥개석(屋蓋石), 배례석(拜禮石), 석사자상(石獅子像), 난간석(欄干石) 등 많은 석조물(石造物)이 남아 있다. 석탑(石塔)은 금당지(金堂址) 앞에 금당지(金堂址)를 중심축(中心軸)으로 할 때 동쪽에 치우쳐서 1기(基)(남3층석탑(南3層石塔))가 있고, 다른 1기(북3층석탑(北3層石塔))는 금당지로부터 서북쪽으로 45m정도 떨어진 구릉 위에 세워져 있다. 2중기단(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형 석탑(石塔)이다. 지대석(地臺石)은 5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構築)하였으며, 하층기단(下層基壇)은 하대저석(下臺低石)과 중석(中石)을 붙여 1석(石)으로 만들고, 각면 1매씩 총 4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각 면석(面石)에는 3구(軀)씩의 안상(眼象)을 배치하였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은 2매로 만들었는데 상면(上面)에는 상층기단(上層基壇)을 받기 위한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괴임을 두었다. 상층기단(上層基壇)의 중석도 4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각 면석에는 탱주(撑柱) 1주와 양우주(兩隅柱)를 두었으며, 다른 장식은 없다. 상대갑석(上臺甲石)도 2매로 만들었는데 하면(下面)에는 부연(副緣)을 두었으며, 상면(上面)에는 2단의 각형괴임을 두어 탑신부(塔身部)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각층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각각 1석(石)씩으로 만들었다. 옥신석(屋身石)은 1층에 비해 2·3층의 높이를 1/3정도로 줄여서 만들었으며, 각면에는 양 우주를 각출(刻出)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은 윗층으로 갈수록 폭만을 약간씩 줄였으나 높이는 비슷하다. 1·2층 옥개받침은 5단인데 가장 아랫쪽의 받침을 낮게 만들었으며, 3층의 옥개받침은 4단으로 높이와 폭이 일정하다. 추녀밑은 직선을 이루고, 낙수면(落水面)의 경사도 급하지 않으며,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두어 윗층의 옥신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이 탑은 사지(寺址) 서남쪽에 위치한 동부산장(東部山莊) 옆으로 옮겨져 있던 것을 1984년 발굴시 지대석(地臺石)이 발견되어 원래의 자리인 현위치(現位置)로 옮겨 복원하였는데 하대중석(下臺中石) 1매, 상대중석(上臺中石) 1매, 3층 옥개석(屋蓋石)은 신재(新材)로 보완하였으며, 원래의 3층 옥개석은 다른 석물들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新羅石塔)의 양식(樣式)으로 하층기단(下層基壇)에 안상(眼象)이 배치(配置)되어 있고, 상층기단(上層基壇)의 탱주(撑柱)가 1주(柱)로 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의 수가 3층은 4단으로 줄어 있고, 1·2층은 5단이지만 가장 아랫쪽의 받침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는 등 9세기 중엽이후의 석탑에서 보여주는 양식적 특징(樣式的 特徵)을 잘 갖추고 있다. 현재 총 높이는 331.8㎝이다. 이 탑(塔)은 전형적(典型的)인 신라석탑 양식(新羅石塔 樣式)의 일반형 석탑(一般形 石塔)으로, 9세기 중반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조성(造成)된 것으로 추정되어 강원지역(江原地域)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時期)의 것이다. 탑(塔)의 형식(形式)이 9세기 석탑의 특징(特徵)을 잘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정연한 모습에서 미술사적(美術史的)인 측면(側面)에서도 가치(價値)도 큰 탑(塔)이다. 또한 서북 구릉(西北 丘陵)위의 석탑(石塔)(북3층석탑(北3層石塔))과 같은 사찰(寺刹)에 위치하면서도 기단 면석(基壇 面石)의 안상 배치(眼象 配置), 옥개(屋蓋)받침의 변화 등 부분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석탑(石塔)의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資料)이다. 당초에는 쌍탑(雙塔)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동쪽에 치우쳐 세운 점이 특이(特異)하다.
한계사(寒溪寺)는 한용운(韓龍雲)선생이 편찬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의 백담사사적(百潭寺事蹟)에 따르면 신라 진덕왕(新羅 眞德王) 원년(元年)(647)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 10년(690) 소실(燒失)되어 성덕왕(聖德王) 18년(719)에 중건 하였고, 또 원성왕(元聖王) 원년(元年)(785) 소실되어 동왕(同王) 6년(790)에 한계사 아래 30리 지점으로 이건(移建)하고 운흥사(雲興寺)라 하였으며, 고려 성종(高麗 成宗) 3년(985) 다시 소실되어 고기(古基)의 북쪽 60리 지점으로 이건(移建)하고 심원사(深源寺)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절이 소실되면 이건(移建)하고 사명(寺名)을 선구사(旋龜寺)(1433), 영취사(靈鷲寺)(1466)등으로 개명(改名)하였고, 조선 세조(朝鮮 世祖) 2년(1457)에 현재의 백담사(百潭寺)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1984년에 강원대 박물관이 실시한 금당지(金堂址)와 석탑지(石塔址) 일부에 대한 발굴조사결과에 의하면 「지정(至正)18년(1358)」,「숭정(崇禎) 13년 기묘(己卯)(1639)」,「순치을미(順治乙未)(1655)」,「강희(康熙) 3년 갑진(甲辰)(1664)」,「강희(康熙) 22년 계해(癸亥)(1683)」등의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사적기(事蹟記)에 의한 원성왕(元聖王) 원년(元年)(785)의 소실후에도 여러차례의 중건이 있었으며, 적어도 17세기말까지는 존속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지(寺址)는 초석(礎石)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다수의 건물지(建物址)를 비롯하여 삼층석탑(三層石塔) 2기, 불상(佛像), 불상대좌(佛像臺座), 광배(光背), 석등(石燈), 옥개석(屋蓋石), 배례석(拜禮石), 석사자상(石獅子像), 난간석(欄干石) 등 많은 석조물(石造物)이 남아 있다. 석탑(石塔)은 금당지(金堂址) 앞에 금당지(金堂址)를 중심축(中心軸)으로 할 때 동쪽에 치우쳐서 1기(基)(남3층석탑(南3層石塔))가 있고, 다른 1기(북3층석탑(北3層石塔))는 금당지로부터 서북쪽으로 45m정도 떨어진 구릉 위에 세워져 있다. 2중기단(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형 석탑(石塔)이다. 지대석(地臺石)은 5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構築)하였으며, 하층기단(下層基壇)은 하대저석(下臺低石)과 중석(中石)을 붙여 1석(石)으로 만들고, 각면 1매씩 총 4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각 면석(面石)에는 3구(軀)씩의 안상(眼象)을 배치하였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은 2매로 만들었는데 상면(上面)에는 상층기단(上層基壇)을 받기 위한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괴임을 두었다. 상층기단(上層基壇)의 중석도 4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각 면석에는 탱주(撑柱) 1주와 양우주(兩隅柱)를 두었으며, 다른 장식은 없다. 상대갑석(上臺甲石)도 2매로 만들었는데 하면(下面)에는 부연(副緣)을 두었으며, 상면(上面)에는 2단의 각형괴임을 두어 탑신부(塔身部)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각층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각각 1석(石)씩으로 만들었다. 옥신석(屋身石)은 1층에 비해 2·3층의 높이를 1/3정도로 줄여서 만들었으며, 각면에는 양 우주를 각출(刻出)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은 윗층으로 갈수록 폭만을 약간씩 줄였으나 높이는 비슷하다. 1·2층 옥개받침은 5단인데 가장 아랫쪽의 받침을 낮게 만들었으며, 3층의 옥개받침은 4단으로 높이와 폭이 일정하다. 추녀밑은 직선을 이루고, 낙수면(落水面)의 경사도 급하지 않으며,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두어 윗층의 옥신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이 탑은 사지(寺址) 서남쪽에 위치한 동부산장(東部山莊) 옆으로 옮겨져 있던 것을 1984년 발굴시 지대석(地臺石)이 발견되어 원래의 자리인 현위치(現位置)로 옮겨 복원하였는데 하대중석(下臺中石) 1매, 상대중석(上臺中石) 1매, 3층 옥개석(屋蓋石)은 신재(新材)로 보완하였으며, 원래의 3층 옥개석은 다른 석물들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新羅石塔)의 양식(樣式)으로 하층기단(下層基壇)에 안상(眼象)이 배치(配置)되어 있고, 상층기단(上層基壇)의 탱주(撑柱)가 1주(柱)로 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의 수가 3층은 4단으로 줄어 있고, 1·2층은 5단이지만 가장 아랫쪽의 받침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는 등 9세기 중엽이후의 석탑에서 보여주는 양식적 특징(樣式的 特徵)을 잘 갖추고 있다. 현재 총 높이는 331.8㎝이다. 이 탑(塔)은 전형적(典型的)인 신라석탑 양식(新羅石塔 樣式)의 일반형 석탑(一般形 石塔)으로, 9세기 중반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조성(造成)된 것으로 추정되어 강원지역(江原地域)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時期)의 것이다. 탑(塔)의 형식(形式)이 9세기 석탑의 특징(特徵)을 잘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정연한 모습에서 미술사적(美術史的)인 측면(側面)에서도 가치(價値)도 큰 탑(塔)이다. 또한 서북 구릉(西北 丘陵)위의 석탑(石塔)(북3층석탑(北3層石塔))과 같은 사찰(寺刹)에 위치하면서도 기단 면석(基壇 面石)의 안상 배치(眼象 配置), 옥개(屋蓋)받침의 변화 등 부분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석탑(石塔)의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資料)이다. 당초에는 쌍탑(雙塔)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동쪽에 치우쳐 세운 점이 특이(特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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