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127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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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강원 동해시 삼화동 산172 |
소재지 | |
지정일 | 1998.04.06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통일신라 |
소유자 | 삼화사 |
관리자 | 삼화사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삼화사(三和寺)는 신라 선덕여왕(新羅 善德女王) 11년(642)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創建)하고 흑연대(黑蓮臺)라 불렀다고하며(삼화사사적(三和寺事蹟)), 흥덕왕(興德王) 4년(829)에 창건(創建)하였다고도 전한다(강원도지(江原道誌)). 경문왕(景文王) 4년(864) 범일조사(梵日祖師)가 삼공암(三公庵)을 창건하였으며, 고려 태조(高麗 太祖)때 삼화사(三和寺)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소실(燒失)과 중건(重建)이 있었으며, 1977년 쌍용양회 동해 공장의 채광권내에 들어가자 현재의 위치로 이전복원되었으며, 원래의 사지(寺址)는 동쪽 1.3km지점에 위치하였다.
삼화사(三和寺)에는 최근에 건립된 대웅전(大雄殿)과 약사전(藥師殿)등 여러채의 건물이 있고, 1990년 5월 31일 지정(指定)된 철불(鐵佛)(문화재자료 제112호(文化財資料 第112號))과 삼층석탑(三層石塔)(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제113호)이 남아 있다. 석탑(石塔)은 2중기단(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다. 석회암제 석탑(石灰岩製 石塔)으로 전체적으로 많은 균열이 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4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짜여진 지대석(地臺石) 위에 비교적 높은 하층기단(下層基壇)을 올렸는데 저석(低石)과 중석(中石)을 1석(石)으로 만들었으며, 각면 1매씩 4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면석(面石)에는 1주의 탱주(撑柱)와 양우주(兩隅柱)가 모각(模刻)되어 있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은 2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면(上面)은 약간 경사지고 2단의 괴임을 두어 상층기단(上層基壇)을 받고 있다. 상대중석(上臺中石)은 4매의 석재로 만들었으며, 각 면에는 1주의 탱주(撑柱)와 양우주(兩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상대갑석(上臺甲石)은 1매석으로 만들었는데 상면(上面)이 약간 경사졌고 2단의 낮은 괴임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1매의 별석(別石)으로 된 탑신괴임석이 삽입(揷入)되어 있다. 탑신괴임석은 하면(下面)에 받침 모양을 각출(刻出)하여 반전(反轉)한 모습이며, 상면(上面)에 낮은 2단의 괴임을 두어 탑신부(塔身部)를 받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각층의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각각 1석으로 만들었는데, 옥신(屋身)은 1층에 비해 2·3층의 높이를 1/3정도로 줄여 만들고, 폭은 윗층으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줄였으며, 각 면에는 양우주(兩隅柱)를 정연하게 각출(刻出)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은 1·2층의 높이가 거의 같으나 폭을 조금씩 줄여 만들었다. 낙수면(落水面)은 경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추녀 부분에서 완만해져 지붕돌의 끝부분이 매우 얇으며, 전각(轉角) 부분에서 살짝 반전(反轉)되어 경쾌한 모습이다. 처마는 수평에 가깝고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은 4단씩이다. 옥개석 상면(屋蓋石 上面)에는 2단씩의 괴임을 두어 옥신(屋身)을 받고 있으나 3층은 1단의 괴임을 두어 상륜부(相輪部)의 노반(露盤)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놓여 있으나 풍화(風化)가 심한 상태이며, 그 위에 길쭉한 찰주(擦柱)가 꽂혀 있다. 찰주(擦柱)의 정상 가까이에는 보주(寶柱)가 잘 남아 있으나 다른 석재는 없다. 이 탑(塔)은 전체적으로 균정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기단부(基壇部)의 구성, 별석(別石)의 탑신괴임, 옥개석(屋蓋石)의 조성양식(造成樣式)과 수법(手法) 등으로 볼 때 탑의 조성 시기(造成 時期)는 신라 말기(新羅 末期)인 9세기 후반경(世紀 後半傾)으로 추정된다.
석재(石材)의 특성상 풍화가 심해 부분적으로 훼손된 부분은 있으나 기단부(基壇部)에서 찰주(擦柱)까지의 전체 모습이 잘 남아 있는 중요한 탑(塔)이다. 현재 높이는 480cm(찰주 제외시(擦柱 除外時) 362cm)이다. 이 탑은 사찰 이전후(寺刹 移轉後) 1979년 12월 2일 대웅전 앞의 좁은 화단으로 이전하였으나 균열이 심하고 사찰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맞지 않아 1997년 4월 25일 현위치로 이전복원(移轉復元)하기 위하여 해체하였는데 상층기단(上層基壇)의 중심부(中心部)에서 목함(木函)이 발견되었다. 이 안에서는 납석제 소형탑(蠟石製 小形塔) 25기와 청동제 불대좌편(靑銅製 佛臺座片) 2점, 철편(鐵片) 6점 등이 발견되었고, 문종이에 묵서(墨書)한 기록 1매(枚)가 함께 들어 있었다. 소형탑(小形塔)은 완형이 거의 없고 대부분 파손된 것이었으며, 묵서 내용(墨書 內容)은 1979년 이전시(移轉時)의 것이었다.
옥개석(屋蓋石)은 1·2층의 높이가 거의 같으나 폭을 조금씩 줄여 만들었다. 낙수면(落水面)은 경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추녀 부분에서 완만해져 지붕돌의 끝부분이 매우 얇으며, 전각(轉角) 부분에서 살짝 반전(反轉)되어 경쾌한 모습이다. 처마는 수평에 가깝고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은 4단씩이다. 옥개석 상면(屋蓋石 上面)에는 2단씩의 괴임을 두어 옥신(屋身)을 받고 있으나 3층은 1단의 괴임을 두어 상륜부(相輪部)의 노반(露盤)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놓여 있으나 풍화(風化)가 심한 상태이며, 그 위에 길쭉한 찰주(擦柱)가 꽂혀 있다. 찰주(擦柱)의 정상 가까이에는 보주(寶柱)가 잘 남아 있으나 다른 석재는 없다. 이 탑(塔)은 전체적으로 균정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기단부(基壇部)의 구성, 별석(別石)의 탑신괴임, 옥개석(屋蓋石)의 조성양식(造成樣式)과 수법(手法) 등으로 볼 때 탑의 조성 시기(造成 時期)는 신라 말기(新羅 末期)인 9세기 후반경(世紀 後半傾)으로 추정된다.
석재(石材)의 특성상 풍화가 심해 부분적으로 훼손된 부분은 있으나 기단부(基壇部)에서 찰주(擦柱)까지의 전체 모습이 잘 남아 있는 중요한 탑(塔)이다. 현재 높이는 480cm(찰주 제외시(擦柱 除外時) 362cm)이다. 이 탑은 사찰 이전후(寺刹 移轉後) 1979년 12월 2일 대웅전 앞의 좁은 화단으로 이전하였으나 균열이 심하고 사찰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맞지 않아 1997년 4월 25일 현위치로 이전복원(移轉復元)하기 위하여 해체하였는데 상층기단(上層基壇)의 중심부(中心部)에서 목함(木函)이 발견되었다. 이 안에서는 납석제 소형탑(蠟石製 小形塔) 25기와 청동제 불대좌편(靑銅製 佛臺座片) 2점, 철편(鐵片) 6점 등이 발견되었고, 문종이에 묵서(墨書)한 기록 1매(枚)가 함께 들어 있었다. 소형탑(小形塔)은 완형이 거의 없고 대부분 파손된 것이었으며, 묵서 내용(墨書 內容)은 1979년 이전시(移轉時)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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