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2.jpg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월곡리에 있는 조선후기의 주택.

이 가옥은 조선후기인 영조 즉위년(1724년)에 당시 충청도 당진현감(唐津縣監)이던 박정택(朴廷宅)이 지었다는 집이다. 그러나 이 집은 그의 증손때에 현소유자의 고증조부가 사들여 주인이 바뀐 채로 5대째 살아오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도서류에는 도광(道光) 24년 갑진(甲辰)이라는 연호가 명기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헌종 10년(1844)에 해당한다. 이 매도서에 의하면 원래는 안채 6칸 반, 사랑채 4칸, 사당 3칸 반, 행랑채 4칸 반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안채만이 남아 있다. 다른 건물들은 모두 현대식으로 새롭게 다시 건축하여 원형의 모습은 찾기 힘들고 안채 또한 일부를 개·보수하여 고졸한 맛이 사라졌다. 현재 안채에 남아있는 상량문에는 “숭정 기원후 사병오 10월…(崇禎紀元後四丙午十月…)”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1844년 가옥을 매입한 후 1846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의 간살이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좌·우퇴를 갖고 있다. 가운데 3칸에는 전·후퇴를 두었는데, 전퇴는 개방된 툇마루로 사용하고 있고, 후퇴는 실내로 포함시켜서 사용하고 있다. 실의 구성을 살펴보면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는데, 좌측의 1칸 반은 하나로 터서 전후면 모두 부엌으로 하였고 가운데의 3칸은 앞쪽으로 우물마루를 달아내었으며 뒤쪽으로만 방을 두었다. 맨 오른쪽 칸은 겹집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우퇴를 두어서 앞쪽은 우물마루를 두었고 뒤쪽부분은 방으로 포함시켰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은 2짝의 판장문을 달았는데 문턱은 아래로 불룩하게 하여 드나드는 데 걸리지 않도록 고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모양새도 아름답다.

장대석을 낮게 한 단만 쌓아서 기단을 만들었다. 시멘트로 덮어버린 토방 위로는 다듬지 않는 막돌로 초석을 삼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안채 건물은 한식기와를 사용하였고 부연을 대지 않은 채 서까래만 달려 있는 홑처마를 얹은 팔작지붕 건물이다.

마당을 시멘트로 마감한 점이 아쉽지만 넓은 대지 곳곳에는 연자맷돌, 물확 등의 석물들이 남아있어서 옛 흔적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