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손병희(孫秉熙, 1861. 4. 8~1922. 5. 19)

문성식 2015. 5. 31. 00:37

손병희 천도교측 대표로 3.1 독립선언의 중추적 역할을 하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 선생이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 중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제 3대 교조로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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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孫秉熙, 1861. 4. 8~1922. 5. 19)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여1882년 동학에 입문하였다. 그리하여 동학 제2세 교조 최시형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으며 이후 동학을 이끌어갈 역량을 길러갔다. 입교 10년만인 1894년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신 사회건설을 주장하며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자 일약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통령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혁명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하기에 이른다. 선생이 이끄는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하고 충남 논산에서 전봉준과 남접군과 함께 남북접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동학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갔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남북접연합군은 일본군의 불법개입으로 인해 공주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동학혁명운동의 열화 같은 의지는 좌절되고 선생은 원산, 강계 등지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세 교조로 취임하여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다가 1901년에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구국의 길 모색,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일본에서의 경험은 선생으로 하여금 종래 동학혁명에서 보여주었던 무력항쟁의 노선에서 계몽운동으로 방략을 변경하는 기점이 되었다. 선생은 일본에서 권동진, 오세창, 박영효 등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며 새로이 구국의 길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2차에 걸쳐 총 64명의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유학을 주선하고 신문물에 대한 안목을 키우게 함으로써 민족의 동량(棟樑)을 육성코자 하였다. 또한 1904년에는 갑신개화혁신운동을 추진하여 교도들에게 단발을 지시하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해 간다. 아울러 심복인 이용구를 국내에 파견, 진보회를 결성케 하여 신생활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삼았다.

일본에 망명중인 선생 등 천도교 간부들의 사진(1904) 망명 시절은 아직 천도교의 출현 전으로, 동학 제3교주였던 선생은 박해를 피해 유학생 24명과 간부 등을 데리고 일본에 망명하였다. 아랫줄 오른쪽이 선생.

이러할 즈음 한국에 대한 주도권 쟁탈을 놓고 야심에 찬 러시아와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한국은 순식간에 전쟁의 도가니가 되었고 한국인의 피해는 극심한 것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동원, 인력동원은 결국 우리의 몫이었다. 어느 편이 이기던 우리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 전쟁이 조국독립의 호기로 파악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고 이 기회를 이용, 부국강병의 대책을 세워 국가만전(國家萬全)을 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진보회를 앞세워 농민층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을 규합해갔다. 그러나 사육에 눈이 먼 이용구가 이끄는 진보희는 선생의 뜻과는 달리 친일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로 변신하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매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선생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함으로써 친일화된 진보회와의 단절을 서두르는 한편 이듬해(1906년) 귀국한다. 이후 선생은 사태수습을 위해 일진회에 가담한 이용구 등 천도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국내에 돌아온 선생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일진회에 의해 잠식당한 천도교의 교세를 만회하여야 할 뿐 아니라 심각한 재정문제도 눈앞의 급무였다. 그리하여 우선 교회만회를 위해 정교분리정책을 실시하였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정치적 문제를 떠나 교세확충에 전력하기로 한 것이다. 재정은 신도들의 성미(誠米)로 차츰 호전되기 시작했다.

민족교육사업을 위해 보성학교, 동덕여학교 등 인수

문화사업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던 선생은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운영하여 교육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은 여기에 만족할 수만은 없었다. 원래 민족의식에 뿌리를 둔 천도교에서 살아온 그였다. 좀 더 민족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계몽운동으로 눈을 돌린다. 각급 학교에 의연금을 지원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해 갔다. 또 보성사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천도교월보>를 발행하여 문화사업에 대한 관심도 늦추지 않았다.

당시의 국내상황은 1904년 망국사태를 인식한 의병의 궐기가 눈부셨고 한편으로 교육, 문화 등 국민계몽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천도교단의 입장에서 볼 때 대체로 동학과는 사상이 상충되는 의병에 합류하기는 어려운 처지였고(개별적으로는 의병에 가담하는 동학교도가 있었다) 더욱이 1894년 동학혁명운동을 통해 무력투쟁에 의한 실패의 경험을 겪은 처지에서 또다시 무력항쟁의 방략을 구사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천도교의 실상이었다. 따라서 선생이 교육, 문화사업을 통한 구국의 길을 걸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된다.

선생은 1907년 김연국을 거쳐 박인호에게 대도주직(大道主職)을 이양하여 천도교 서무를 관장케 하고 자신은 교세확장에 진력하는 한편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문창, 보창, 명신, 양영 등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을 더욱 확대해 갔다.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이끌다

1918년에 접어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발맞추어 꾸준히 독립운동의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계획이 유학생 송계백을 통해 국내에 전달되고 이어 광무황제(고종)가 급붕(急崩)하자 국내에서도 독립선언방식의 운동계획이 급속히 추진되기에 이른다. 독립선언방식을 채택한 것은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측근들에게 독립운동의 세부추진계획을 일임하였다. 이들은 박영효, 한규설 등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거족적인 항일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뜻과 같이 않았다. 그리하여 방향을 전환, 독자적인 독립선언계획을 추진하던 기독교측과 연합하기로 하고 기독교계의 남강 이승훈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어 만해 한용운을 통해 불교계의 동참이 이루어졌으며 유교계와의 연계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또 연희전문, 보성전문, 세브란스 의전 등 각 학교학생들이 추진하던 독립운동계획도 이에 통합하여 바야흐로 전민족적 거사의 준비는 무르익어 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

이들 각계 인사들은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이윽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고 천도교계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2만1천여매(3만5천매라는 학설도 있음)의 선언서 인쇄를 마치었으며, 전국 각지로의 배포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선생을 필두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의 민족대표들이 서명함으로써 모든 준비는 갖추어진 셈이었다.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으로 정하였다. 원래 광무황제의 인산(장례일)은 3월 3일이었는데 이사 당일에 거사하면 장례식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하여 3월 2일로 하려 했으나 이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기독교측의 반대로 토요일인 3월 1일로 거사일을 확정한 것이다.

독립선언식 이후 체포되어 2년 옥고 치러

거사일인 3월 1일, 29인(33인중 4명 불참)의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여 선생의 주도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은 만세삼창을 끝으로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피체되었다. 이들이 점화한 3.1독립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3.1독립운동의 영향은 국내외 각지에서 8개에 달하는 임시정부의 출현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통합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그 중 대한민간정부(기호지방)와 대한국민의회 정부에서 각각 선생을 대통령에 선임한 것도 이러한 민중의 신망에 바탕한 것이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당시 선생은 62세였다.

선생의 친필 유묵

선생의 생애는 참으로 한국근대사의 큰 줄기를 이룬 것이었다. 때로는 혁명가로, 때로는 사상가요, 민족의 지도자로 손병희 선생은 늘 앞장서 걸었다.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되었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독립된 국가의 앞길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손병희 이미지 2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