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1.jpg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
 
외암리(外岩里) 마을 동쪽에 위치한 이 집은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으로서 크게 2개의 군(群)으로 이루어졌다. 아마도 큰집과 작은집으로 나누었을 것이다.

건축연대는 19세기 말로서 구한말(舊韓末) 규장각(奎章閣)의 직학사(直學士)와 참판(參判)을 지낸 이정렬공(李貞烈公) 퇴호(退湖)가 고종황제로 부터 하사(下賜)를 받아 지은 집이라 전(傳)한다.

큰 집은 전체적으로 므형으로 배치를 해서 전면에 솟을대문을 놓고 다음에 사랑채, 안쪽에는 안채를 배치했다. 건물의 축은 미향(未向)으로 맞추었는데 대문채는 약간 서쪽으로 틀어서 사랑채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했으며 대신 중문간(中門間)을 곳간채 동남문에 둬서 측면에서 꺾여 들어가도록 하였다.

안채는 10칸 ㄱ자형집으로서 간살이 중부방식(中部方式)으로 이루어졌다. 가로간은 전퇴이고 세로간은 맞걸이이다. 간살이는 서남쪽으로부터 2칸 부엌, 안방, 웃방, 골방의 차례로 배열되고 꺾어져서 2칸대청, 반칸(半間) 크기의 건넌방, 그리고 반칸크기의 작은부엌(봉당), 맨 끝에는 머릿방의 순으로 놓였으며 대청과 건넌방 앞퇴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었다. 이 집에서는 머릿방이 시설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구조는 1고주5량이며(대청중앙은 긴보 5량으로 하고 샛기둥을 세워 처리)납도리집인데 전면 처마도리에만 장혀를 사용해서 보강했다. 도리는 모를 굴린 네모꼴이고 보의 단면은 둥근꼴이다. 대공은 사다리꼴 판대공이며 종도리 아래에는 장혀를 받치고 소로를 끼워서 헛창방을 보냈다. 댓돌은 자연석 바른층쌓기 두벌대 높이이고 낮은 덤벙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몸채의 양쪽으로 합각을 만들었으며 날개전면은 박공으로 만들었다.

10176.jpg 사랑채는 5칸 一자 전퇴집이다. 간살이는 동쪽으로부터 2칸 큰사랑, 대청, 작은사랑으로 배열되며 앞퇴는 동쪽으로 부터 골방, 고방(우물마루)에 시설되었고 나머지 3칸길이는 툇마루이다. 구조는 1고주5량이며 납도리집인데 역시 전면처마도리와 종도리에만 장혀를 받쳤다. 보의 단면은 대략 양변치기를 한 달걀꼴이며 대공은 긴 네모꼴 판대공이다. 댓돌은 자연석 허튼층쌓기 두벌대 높이이고 커다란 덤벙주초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합각으로 처리했다.

곳간채는 안마당의 동쪽에 배치되었고 사랑채와의 사이는 바람벽과 유사한 담을 쳐서 정면으로의 진입을 막고 있다. 간살이는 一자 맞걸이 5칸집인데 맨 앞이 대문간이고 다음은 헛간과 광이다. 또한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사당은 안채의 서북쪽 모에 놓이는 바 단칸(單間) 전퇴집이며 박공지붕으로 만들었다. 건축연대가 더 떨어져서 20세기 초 정도로 보인다.

대문채는 一자형 8칸후퇴집으로서 중앙에 솟을대문이 된다. 간살이는 헛간과 구들로 이루어졌는데 뒷퇴는 모두 토방이다.(문간채에 퇴를 두는 예는 극히 드물다.)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했다.

이 집의 특징은 돌담으로 공간을 구획한 것인데 대문간 앞으로 돌담을 내쌓아 집안으로의 진입로에 깊이감을 주며 중문간 앞의 아담한 마당, 장독대 주위의 나지막한 돌담은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한다. 또한 집안의 살림살이도 비교적 그대로 보존되어 사랑채의 가구배치등은 옛 우리 조상들의 생활방식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작은집은 큰집 바로 아래에 위치해서 큰집과 전혀 별개로 배치되었다. 이 집 역시 전체적으로는 므형의 배치로서 전면에 문간채, 뒤쪽에 안채와 사랑채를 튼ㅁ자로 놓았는데 몸채의 축은 서남방(西南方)으로 하고 문간채는 거꾸로 사랑채를 향하도록 동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

안채는 6칸ㄱ자형 후퇴집으로서 세로간, 가로간 모두 후퇴를 두었다. 다만 부엌 아랫퇴를 만들고 가로간 뒤에는 처마 밑을 이용하여 헛기둥을 세우고 살림공간을 확장하였다. 간살이는 앞에서 부엌, 복판에 안방, 사잇방, 웃방의 차례로 배열되고 꺾어져서 2칸대청, 끝에는 상하 건넌방이 만들어졌다. 건넌방 앞에는 조그만 누마루가 놓이고 앞면에는 간결한 난간이 시설되었다. 세로간 서쪽 퇴에는 뒤로부터 고방, 뒤툇마루, 골방으로 이용된다.

구조는 1고주5량이며 대청중앙만 긴보5량이다. 납도리에 장혀를 받쳤고 보의 단면은 양변치기한 달걀꼴이며 기둥머리에 단이를 끼워 보를 보강했다. 대공은 사다리꼴 판대공이며 댓돌은 장대석 모양의 자연석 쌓기 외벌대 높이이고 덤벙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합각지붕이다.

사랑채도 7칸ㄱ자형집인데 전면만 전퇴를 두었다. 가로칸의 뒷퇴는 처마 밑을 이용하여 헛기둥 세워 증축한 것일뿐이다. 공간의 구성은 민가방식으로서 오히려 남도식(南道式)이다. 서쪽으로 부터 사랑아랫방, 부엌, 큰사랑방, 작은사랑방, 대청 뒤로 꺾어져서 중문간, 문간방의 차례로 배치되었으며 앞퇴는 서쪽으로부터 툇마루, 부엌방(골방), 고방, 2간(間)길이 툇마루의 순으로 배열되었다. 고방의 앞에는 분합문이 시설되었는데 겨울이나 큰일 때는 과방(果房)정도의 용도로 쓰다가 여름에는 툇마루로 이용하는 이중기능인 듯 싶은데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예이다.

구조는 1고주4량으로서 전면의 지붕길이가 길게 계획되었다. 납도리이며 장혀는 받치지않았고 대공은 동자주꼴이며 지붕은 우진각 초가집이다. 댓돌은 자연석 허튼층쌓기 두벌대 정도 높이인데 안쪽은 겨우 한겹만 놓았다. 덤벙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문간채는 一자 맞걸이(양쪽에 퇴칸을 둔) 4칸 초가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시설을 하고 왼쪽에 방과 뒷간, 오른쪽에 3칸 헛간을 배치했다. 댓돌은 거의 생략되고 덤벙주초위에 네모기둥을 올렸는데 연대가 20세기 초로 내려오는 건물이다.

곳간채는 안채 동쪽에 약간의 거리를 띄워서 세로로 배치되었다. 一자 맞걸이 3량, 골기와 우진각지붕집이다. 간살이는 북쪽2칸의 광과 헛간으로 이루어졌다. 자연석 외벌대 댓돌을 쓰고 낮은 덤벙주초 위에 세웠다.

사당채는 곳간채 뒤쪽에 약간 서쪽으로 내밀어 배치되었다. 단간(單間) 전퇴집이고 박공지붕집이다. 건축연대 역시 20세기 초정도로 여겨진다.

집에 정원시설이란 따로 찾아볼 수 없지만 대문으로부터 사랑채와 중문간, 안채에 이르기까지 징검돌이 놓였다. 이것은 남도지방(南道地方)에서 흔히 생활의 편의상 쓰는 방법이다.
 

중요민속자료 195-1

아산외암리참판댁(1)

 

중요민속자료 195-1-1

안채

 

중요민속자료 195-1-2

사랑채

 

중요민속자료 195-1-3

문간채

 

중요민속자료 195-2

아산외암리참판댁(2)

 

중요민속자료 195-2-1

안채

 

중요민속자료 195-2-2

사랑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