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그러므로,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며, 그 법칙을 드러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계계승승(繼繼承承)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활동의 바른 길을 닦음이 되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우리말본] 머리말에서 발췌-
주시경의 민족주의적 언어관에 영향받아 국어 운동의 길로 들어서다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0.19~1970. 3.23)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는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189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나 1910년에 관립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면서 박동 보성학교 안의 국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의 강의를 받았다. 이 때 “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주시경 선생의 민족주의적인 언어관의 영향을 크게 받아 평생 국어 연구, 국어 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바로 이 해, 한일 합방이 되어 우리말은 ‘국어’의 지위를 잃고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으며 우리말은 ‘조선어’가 되었다. 선생은 국권상실로 관립한성고등학교에서 이름이 바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1915년에 졸업하고 관비 유학생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920년에 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하여 우리말을 가르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국어의 문법 체계를 세울 목적으로 어법 및 문법에 관한 [우리말본]의 초고를 만들기 시작하여 1937년에 완본으로 출판하였다. 남의 치하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면 우선 국어부터 보존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국어가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통일된 표기법이 있어야 하고 표준말이 정립되어 있어야 하며, 우리말을 집대성한 사전이 있어야 했다. 더 나아가 선생은 우리가 타민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면 문화가 진작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문화창조의 도구인 국어의 어법이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 해방이 될 때까지 옥중 생활
1926년, 선생은 [조선민족 갱생의 도(道)]라는 글을 발표하여 민족이 다시 살아나기 위한 실천적 이상주의를 고취하고, 도덕 경장, 경제 진흥, 고유문화의 진흥 등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 해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 [우리말본]의 저술을 계속하는 한편, 같은 해에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의 회원이 되어 <한글>지 창간, ‘한글날’ 제정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9년에는 우리 사회 각계의 유지 108인의 발기로 조직된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루어내기 위해 진력하였고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8년 선생은 이른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강제 퇴직되었다. 흥업구락부 사건은 일제가 중국 침략을 앞에 두고 민족주의 단체 회원들을 단속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실직해 있는 중에 선생은 한글을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짓기 시작하여 1942년에 출판하였다. 이 해에 그는 다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어문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로 규정하여 주요 회원들을 체포, 징역형에 처한 사건이다.
조선어학회.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관련 인사들은 2년에서 6년의 징역형을 받고 해방 이후에야 출옥하였다.
해방 직후 가장 시급한 과제였던 국어 교재 편찬과 교사 양성에 힘쓰다
해방이 되자 국어 정책에 관련된 일들이 더 시급해졌다. 학교 교육은 잠시라도 중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장 해방된 그 해 가을 학기부터 학교를 열고 교육을 해야 하는데, 일본어로 쓰인 교과서를 쓸 수는 없는 일이고 준비된 교재는 없었다. 따라서 우리말로 된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이 가장 급했다. 그 중에서도 시급한 것이 국어 교재였다. 한글의 창제는 서양의 산업혁명보다 더 큰 위대한 사건이라 일컫는 이들이 있거니와, 개화기에 와서야 비로소 민족적 자각과 함께 한글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으나 뒤이은 일제 통치로 인해 그대로 방치되었다. 글을 모르고는 산업이 부흥될 수 없고, 시민 사회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해방 당시에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선생은 함흥 감옥에서 해방을 맞아 8월 17일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함흥을 떠나 서울에 도착한 것이 19일, 그 바로 다음날인 20일에 동지들을 모아 ‘조선어학회’의 재건을 위한 회의를 열고, 9월 초에 조선어학회 안에 ‘국어교과서편찬위원회’를 구성, 국어교재 편찬에 착수했다. 동시에 조선어학회 주최로 교원강습회를 열어 교사 강습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국어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만을 쓰도록 강요되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한글을 가르치지 않아서 학생들 대부분이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것이 그때의 현실이었다. 설사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실시했다 하더라도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의 학생 수가 많지도 않은데다가 집안에서 한글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가정도 많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국어교재의 편찬, 국어교사의 양성을 서둘러야 했다. 특히 한글 교재는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선생이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서울에 돌아와서 즉시 ‘조선어학회’의 재건을 서두르고, 이러한 일에 착수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전 국민이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쓸 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지나서이다.
1934년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교수 시절 문과대 학생들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선생. <출처: 후손 제공>
‘한글 첫걸음’을 비롯한 각종 한글 교과서 50여 개 편찬
해방 후 약 한 달 후인 9월 21일에 선생은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군정청 안에 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구성되어 있었는데 선생은 그 중의 교과서편찬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때 ‘조선교육심의회’가 결의한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은 첫째로 초․중등학교 교과서는 모두 한글로 하되, 한자는 필요한 경우에 괄호 안에 넣을 수 있게 한 것이며, 둘째로 교과서는 가로쓰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어문정책의 큰 틀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0월, 한글만으로 쓰되 얼마 동안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한자를 병용한다는 내용의 ‘한글 전용법’이 국회를 통해 공포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말 출판물이 모두 한글만을 쓰되, 가로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이때 정한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으로 인한 것이다. 당시의 신문을 비롯한 모든 출판물은 모두 세로쓰기를 하고 있었고 한글보다 한자를 더 많이 쓰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시작된 한글만 쓰기와 가로쓰기를 일반 출판물 모두가 따라오게 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몇 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편수국은 그 주요 업무가 각종 교과서를 펴내는 일이다. 1945년 9월 21일에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1948년 9월 21일에 퇴임하기까지 만 3년 동안 선생은 그 유명한 ‘한글 첫걸음’을 비롯한 각종 교과서를 50가지 이상 펴냈다.
우리말 교과서를 한글로 편찬하자면 일본말이나 한자어로 된 용어들을 우리말로 다듬는 일을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지름, 반지름, 반올림, 마름모꼴, 꽃잎, 암술, 수술’이라고 하는 말들은 각각 ‘직경(直徑), 반경(半徑), 사사오입(四捨五入), 능형(菱形), 화판(花瓣), 자예(雌蕊), 웅예(雄蕊)’를 우리말로 바꾸어 만든 용어로써 선생이 편수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편찬한 교과서에 처음 등장하여 쓰이기 시작한 것들이다. ‘후미끼리, 벤또, 젠사이, 혼다데, 간스메’ 등 당시 흔히 쓰이던 일본어가 우리말인 ‘건널목, 도시락, 단팥죽, 책꽂이, 통조림’로 대체되었고 이 밖에 ‘짝수, 홀수, 세모꼴, 제곱, 덧셈, 뺄셈, 피돌기’ 등, 오늘날에는 익숙한 용어들이 당시에 선생의 손길을 거쳐 탄생되었다.
한자 대신 한글쓰기, 세로쓰기 대신 가로쓰기로
한편 선생은 한자 폐지를 주장하는 근거로, 한자는 워낙 수가 많은데다가 같은 글자가 여러 가지 뜻이 있고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여러 글자가 있어서 배우기가 몹시 힘들고 시간과 정력을 많이 낭비하게 된다는 것, 문맹자가 많고 무식한 대중이 많은 것은 바로 한자 때문이라는 것, 활자 인쇄를 하던 당시에 한자는 인쇄하기가 불편하고 타이프라이터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기 어렵다는 것, 과거 수백 년 동안 한자를 씀으로 인하여 우리말이 죽어 없어진 것이 많고 위축되었으며 어려운 한자 때문에 과거의 교육이 문자 교육에 너무 치우쳐 민족적 독창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 등을 들었다. ‘한글 가로쓰기’에 대해서는, 사람의 두 눈이 나란히 수평으로 나 있고, 그 눈은 가로 째져 있어 좌우로 보는 시야가 넓을 뿐 아니라 해부학적으로 보더라도 눈알을 움직이는 힘줄이 상하보다 좌우의 것이 더 튼튼해서 좌우운동이 상하운동보다 몇 배나 용이하다는 것, 팔꿈치의 운동 범위가 상하보다 좌우가 훨씬 크며 운동이 편리하고 빠르다는 것 등을 그 주장의 근거로 들었다. 물론 한글만 쓰기, 즉 ‘한글 전용’은 이미 서재필선생에 의해 <독립신문>에서 시도된 바 있고, 주시경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한글만 쓰기와 한글 가로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나라가 남의 손에 있던 그 시대에 그러한 생각을 실현할 수가 없었고, 아직은 그러한 생각에 이론적인 뒷받침도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외솔 선생이 바로 그들의 뜻을 이어 해방 후 이를 이론화하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을 한 것이다.
한글교육운동 책자 및 교재. 외솔 선생은 약 50여 권의 교과서를 집필하였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국어사전,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을 위해 노력
우리의 말과 글을 바로 세우기 위한 선생의 노력은 편수국 밖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1946년 9월에는 ‘한글가로글씨연구회’를 창립하고, 1947년 5월에는 저서 [글자의 혁명]을 출판하여 그의 주장을 사회에 널리 펴고 있었다. 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 일에도 힘을 쏟아 미국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얻어 출판의 길을 열었다. [큰사전] 발간은 1929년 10월에 사회 각계인사 108인이 모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여 시작한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표준말을 지정하여 한글맞춤법에 따라 편찬한 사전이다. ‘조선어사전편찬회’는 그 취지문에서 아래와 같이 뜻을 밝히고 있다.
“인류의 행복은 문화의 향상을 따라 증진되는 것이요, 문화의 발전은 언어, 문자의 합리적 정리와 통일로 말미암아 촉성되는 것이다. 어문의 정리와 통일은 제반문화의 기초를 이루며 인류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국어사전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유한 언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우리가 고유한 언어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독립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도 필요했었다. 이 사전 편찬회를 발기한 사람들은 안재홍, 조만식, 유억겸, 백낙준등과 같은 당시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과 이광수, 주요한같은 문인들, 이극로, 정인보, 이윤재, 김윤경, 이희승같은 학자들 108명이었고, 비밀 후원회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어학회가 원고를 작성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큰사전]이 1947년 10월 9일에 첫째 권, 1949년 5월에 둘째 권이 나왔다. 선생은 이 편찬회의 준비위원이며 집행위원이었고, 이 사전은 선생의 문법체계를 따라 편찬한 것이다. 한편 선생은 시급한 국어교사의 수급을 위해 자격증을 가진 국어교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임시로 차린 ‘세종 중등교사 양성소’에서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사범교육을 받고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도 국어문법을 가르쳤다. 한편 1949년에는 ‘한글전용촉진회’의 위원장이 되어 한글 전용의 실현을 위해 진력했다. 한글 전용을 위한 그의 노력은 그 후로도 타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글 사용빈도 조사’를 통해 체계적인 한글 연구에 기여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1년 1월 20일에 다시 문교부 편수국장에 취임하였다. 두 번째로 편수국 일을 보는 중에 그는 우리말에 쓰이는 글자와 낱말의 사용빈도 조사를 하였다. 그가 편수국장 일을 그만둔 후인 1955년에 문교부에서 낸 [우리말에 쓰인 글자(한글, 한자)의 잦기 조사]와 1956년의 [우리말의 말수 잦기 조사]가 바로 그것이다. 한글의 사용빈도 조사는 타자기 등의 자판에 어떤 글자를 어떤 위치에 배열할 것인지를 정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통계 자료다. 한글의 기계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생이 아니고는 발상이 어려운 작업이었다. 한자의 사용빈도 조사 역시 한자를 많이 쓰던 당시에 한자를 줄여 쓰자면 상용한자 제정 등에 꼭 필요한 정보이다. 단어의 사용빈도 조사는 초․중등학교의 단계적인 교재를 만드는 데도 반드시 있어야 할 자료이다. 저학년 교재에 사용빈도가 낮은 어려운 단어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 공식적인 학습 교재뿐만 아니라 유치원, 초등, 중등 학생들을 위한 일반 읽을거리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사용빈도가 높은, 쉬운 단어부터 시작해서 차츰 단계별로 그 정도를 높여가야 한다. 진정으로 국어 교육을 걱정하지 않고서는 생각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국내에서 어휘의 사용빈도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극히 최근에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이후이다. 그만큼 선생은 시대를 앞서 있었다.
외솔 선생의 묘. <출처: 후손 제공>
1953년 4월에 현행 맞춤법이 너무 어려우니 이를 폐지하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이전의 옛 철자법으로 고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총리의 훈령이 공포되고 그에 따른 맞춤법 간소화 안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발표됨으로써 이른바 ‘한글파동’이 일어났다. 즉, ‘믿고, 믿어’를 ‘밋고, 미더’로, ‘같이’를 ‘가치’로 쓰라는 것인데 각계각층의 격렬한 반대로 약 2년 만에 없던 일이 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선생은 1954년 1월에 편수국장을 그만두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떠났던 연희대학교로 돌아가 다시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 간소화 안을 반대하자면 문교부를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연희대학교의 교수로 돌아와 연구생활을 하는 한편,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1951), [한글의 투쟁](1954), [나라사랑의 길](1958), [나라 건지는 교육](1963), [한글만 쓰기](1970) 등의 저서를 연달아 내면서 한글 전용, 우리말 다듬기, 나라 사랑, 국어교육 등에 관한 주장을 펴내 국어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말년에 [우리말본]에 짝할 우리의 옛말 문법 책을 집필하던 중 1970년에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여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을, 1970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
- 1910년 조선어강습원 입학
- 1915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입학
- 1920년 경상남도 동래보통학교 교원 취임
- 1929년 [우리말본] 출간
-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 취임
- 1955년 연희대학교 부총장 취임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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