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존재란 가까이 있고, 늘 있으면 그 소중함을 모른 채 지내기 일쑤다.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계획으로 가까이 있어 아름다움을 잊고 지낸 우리 국토의 소중함을 느낄 기회인 여행하기를 넣어 보는 건 어떨까? 유례없이 춥다는 올 겨울, 그럴수록 눈과 입이 즐거운 곳을 찾아 추위를 잊는 것이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여기, 국내여행 마니아들이 혹한도 잊을 만큼 멋진 명소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울릉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눈이 내리는 곳이다. 한해 강수량의 40% 가량이 겨울철에 눈으로 내린다. 한번에 1m 내외의 적설량을 기록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눈 많은 울릉도의 한복판에 우뚝한 성인봉 역시 설경이 아름답다. 우리나라의 어떤 명산보다도 풍성하고 화사한 풍경을 보여준다. 운이 좋으면 나뭇가지마다 얼어붙은 눈꽃이 서로 부딪히며 맑은 풍경소리를 내는 진풍경도 감상할 수 있다.
성인봉 정상 아래의 전망대에서 사방을 조망하는 등산객들. |
성인봉에 오르는 네 가지의 방법
성인봉(984m)은 울릉도의 전부다. 울릉도가 성인봉이고, 성인봉이 곧 울릉도이다. 그러므로 성인봉 정상을 밟아보지 않은 울릉도여행은 반쪽에 불과하다. 성인봉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태곳적부터 한번도 훼손되지 않고, 천연의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원시림이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성인봉의 등산기점은 크게 네 곳이다. 그 중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에서 동남릉을 타고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같은 길로 하산하는 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된다. 하지만 대원사 입구나 KBS중계소에서 시작되는 도동코스는 경사가 매우 가팔라서 눈 쌓인 겨울철에는 오르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므로 겨울철에는 나리분지에서 산행을 시작해 정상에 올랐다가 도동이나 안평전 방면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비교적 무난하다.
계단이 파묻힐 정도로 많은 눈이 쌓인 성인봉 등산로. |
성인봉 정상은 해발 1000m가 안되지만, 실제 등산하는 높이는 강원도 내륙의 1500m 이상 되는 고봉에 뒤지지 않는다. 해수면과 가까운 곳에서 등산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등산기점과 정상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3km에 불과할 만큼 등산로의 경사가 급하다.
또한 해양성기후 지역이어서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등산로가 또렷한 데다가, 이정표나 쉼터 등의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겨울철에도 아이젠, 스패츠, 등산용 스틱, 방한모와 방한복, 장갑 등을 제대로 갖추고 무리하지 않으면 안전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겨우내 설국으로 탈바꿈하는 나리분지
겨울철에 성인봉 등산의 기점으로 활용하기 좋은 나리분지까지는 정기 노선버스가 운행된다. 하지만 폭설로 인해 버스가 끊기는 날이 적지 않다. 그럴 경우에는 북면 소재지인 천부~나리분지 구간보다는 추산~나리분지 구간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좀 더 수월하다.
울릉도에서 가장 넓은 평지인 나리분지는 칼데라(Caldera:분화구) 속에 위치한다. 울릉도가 형성될 당시에 강력한 화산폭발로 생긴 분화구 안에 화산재가 쌓임으로써 지금과 같은 나리분지가 만들어졌다. 그 뒤에 다시 나리분지에서 화산이 폭발함으로써 알봉분지가 형성되었다.
나리전망대에서 바라본 나리분지의 겨울 풍경. |
유달리 많은 눈이 내리는 나리분지는 겨울철 내내 새하얀 설국(雪國)을 이룬다. 때마침 음력 보름밤이면 문자 그대로 '월백 설백 천지백'(月白 雪白 天地白)의 은세계로 탈바꿈한다. 나리분지에서 성인봉 정상까지의 거리는 약 4.2km이다. 그 가운데 나리분지에서 알봉분지를 거쳐 신령수까지 2㎞쯤 되는 구간은 평탄하다.
너도밤나무와 곰솔(해송)이 뒤섞인 천연림 속으로 조붓한 숲길이 이어진다. 숲의 청징한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듯해서 발걸음조차 가볍다. 게다가 숲이 울창하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사계절 트레킹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알봉분지에는 울릉도의 전통 투막집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어 잠시 둘러볼 만하다. 투막집 앞의 드넓은 억새밭은 새하얀 설원으로 변신했다. 투막집을 둘러본 뒤에 10여 분쯤 더 걸어가면 울창한 너도밤나무숲 한복판에 자리잡은 신령수 샘터에 당도한다. 바위틈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신령수의 물맛이 일품이다. 깨끗하고 시원한 샘물 한 모금을 들이키는 순간,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듯하다.
알봉분지에 남아있는 울릉도의 전통 투막집. |
우리나라 유일의 천연기념물 원시림지대
신령수를 뒤로하고 본격적인 원시림지대에 들어선다.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된 성인봉 원시림지대는 해발 600m 이상의 숲을 가리킨다. 이곳 원시림에서 가장 흔한 것은 너도밤나무이다. 육지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나무이다. 줄기는 미끈한 잿빛이지만 잎과 열매가 밤나무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성인봉 원시림에는 너도밤나무말고도 섬단풍, 우산고로쇠, 섬피나무, 두메오리 같은 울릉도 특산의 활엽수와 고비, 고사리, 관중 등의 양치식물,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산나물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그 덕택에 숲의 분위기가 한층 깊고도 그윽하다.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지면 태곳적의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해발 700m 지점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알봉분지와 나리분지. |
신령수를 지나면서부터 등산로의 경사는 눈에 띄게 가팔라지고 눈은 더욱 깊어진다. 이윽고 가파른 나무계단 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폭설에 파묻혀 난간 기둥의 일부만 간신히 드러나 보인다. 그나마 보이는 난간기둥이 길 표시를 대신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다보면, 어느새 가슴 뻥 뚫릴 만큼 조망이 상쾌한 전망대에 도착한다.
해발 700m 지점에 설치된 이 전망대에서는 미륵봉과 송곳산, 그리고 성인봉 북쪽 기슭의 빽빽한 원시림과 알봉분지가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성인봉 정상 아래의 전망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리분지도 이곳에서는 고스란히 들어온다.
성인봉 기슭에서 채취되는 우산고로쇠 약수. |
전망대에서 10여분쯤 더 올라가면 나무계단이 끝나고 등선에 올라선다. ‘뺍재이등대’라 불리는 이 지점부터는 한결 완만해진 능선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쌓인 눈은 더 깊고 풍성하다. 이 길에서는 밑동이 몇 아름이나 됨 직한 고목들이 자주 눈에 띈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속이 뻥 뚫린 섬피나무 고목도 보인다. 다시 급경사의 계단길이 시작될 즈음에 성인정 샘터에 도착한다. 성인봉 정상에서 약 500m 아래에 위치한 샘터이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눈속에 파묻혀 있어서 물맛을 보기가 쉽지 않다.
얼음꽃이 들려주는 천상의 하모니
성인봉 정상 근처의 원시림에 만발한 얼음꽃. |
샘터에서 정상 직전까지는 몹시 길고도 가파른 계단길이다. 길 양쪽에 빼곡하게 늘어선 나무들마다 하얗게 핀 눈꽃이 장관을 이룬다. 그런데 한줄기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칠 때마다 어디선가 맑고 청아한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멈춰 서서 가만히 귀기울여보니 눈꽃 핀 나뭇가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뭇가지마다 핀 눈꽃이 얼어붙어 얼음꽃으로 변했는데, 그 얼음꽃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천상의 하모니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연신 쏟아내는 것이었다.
‘聖人峰’(성인봉) 표지석만 우두커니 서 있는 성인봉 정상(984m)은 의외로 밋밋하다. 키 작은 잡목과 무성한 섬조릿대에 둘러싸여 있어서 조망조차 답답하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20m쯤 떨어진 곳에 따로 전망대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마가목나무가 울타리처럼 에워싼 전망대에서는 잿빛 나무들로 울창한 원시림과 푸르디푸른 쪽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984m의 성인봉 정상. |
산은 오르는 것보다도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게 마련이다. 성인봉도 마찬가지다. 올라온 길보다 더 가파른 내리막길이 지나야 한다. 특히 눈 쌓인 겨울철에는 내리막길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할 위험성이 훨씬 더 높다. 그러므로 발걸음은 더욱 신중하게 내딛어야 한다. 또한 매우 경사가 급한 비탈길에서는 반드시 주변의 나뭇가지나 밧줄을 손으로 잡거나, 앞뒤 사람들끼리 손을 맞잡고 천천히 내려가야 한다.
●여행정보
성인봉 등산코스(겨울철에는 1~2시간 더 소요됨)
나리분지 코스 나리분지(2㎞)→신령수(2㎞)→성인정(0.5㎞)→성인봉(1㎞)→팔각정(3.1)㎞→대원사 입구. 약 4시간 20분 소요.
대원사 코스 대원사 입구(3.1㎞)→팔각정(1㎞)→성인봉(0.5㎞)→성인정(2㎞)→신령수(2㎞)→나리분지. 약 5시간 20분 소요.
KBS중계소 코스 KBS중계소(2.6㎞)→팔각정(1㎞)→성인봉(0.5㎞)→성인정(2㎞)→신령수(2㎞)→나리분지. 약 5시간 소요.
안평전 코스 안평전 산장휴게소(1.5㎞)→바람등대(0.8㎞)→성인봉(0.5㎞)→성인정(2㎞)→신령수(2㎞)→나리분지. 약 3시간 30분 소요.
교통
울릉도행 여객선은 강릉항, 동해 묵호항, 포항 등에서 출발한다. 수도권에서는 강릉항이나 묵호항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1, 2월에는 여객선의 결항율이 대단히 높으므로 일기예보를 꼼꼼히 확인한 뒤 예약하고, 여행일정도 넉넉하게 잡는 것이 좋다.
산마을식당의 산채비빔밥과 산채전. |
울릉도의 관문 도동항에서는 울릉도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일주버스가 약 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나리분지로 가려면, 도동항에서 일주버스를 타고 북면 소재지인 천부리까지 간 다음, 1일 9회 운행하는 나리분지행 승합버스(문의/ 우산버스054-791-7910)로 갈아타야 한다. 대원사나 KBS중계소, 안평전 등은 택시를 이용해야 된다.
숙소
나리분지에는 산마을식당(054-791-4643), 뿌리깊은나무민박(054-791-6117) 등의 민박집이 있다.
그리고 일주도로와 가까운 추산마을에는 전통가옥펜션인 추산일가(054-791-7788)와 유럽식목조펜션인 울릉아일랜드민박(054-791-8888)이 있다. 그중 산마을민박식당은 산채백반, 산채비빔밥, 토종닭백숙, 산채전, 감자부침 등을 맛깔스럽게 내놓는 맛집이기도 하다.
글·사진/양영훈 여행작가
(사)한국여행작가협회 전 회장, 현재 대외협력이사. 월간 <샘이깊은물>기자를 그만둔 뒤로 20년 동안 국내 전문 여행작가의 외길을 걷고 있다. 총 5종의 교과서에 글과 사진이 수록되었으며, 총 10권의 개인저서와 10여권의 공저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