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존재란 가까이 있고, 늘 있으면 그 소중함을 모른 채 지내기 일쑤다.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계획으로 가까이 있어 아름다움을 잊고 지낸 우리 국토의 소중함을 느낄 기회인 여행하기를 넣어 보는 건 어떨까? 유례없이 춥다는 올 겨울, 그럴수록 눈과 입이 즐거운 곳을 찾아 추위를 잊는 것이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여기, 국내여행 마니아들이 혹한도 잊을 만큼 멋진 명소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설경에 흠뻑 취해보고 싶은데 설악산까지 차를 몰고 가기엔 운전이 부담스럽고 무주 덕유산은 비용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조선왕조 500년 왕릉전시장인 구리 동구릉을 찾아라. 과천의 서울대공원만큼이나 넓은 동구릉은 경내가 ‘거대한 산소통’이라고 불릴 정도로 숲이 울창하며 나무마다 밍크코트 같은 설화를 뒤집어쓰고 있는 장면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절경이다.
동구릉 초입의 소나무군락. |
화해와 현재진행형의 공간인 왕릉
똑같은 왕릉이 볼 것이 뭐 있다고 핀잔하는 사람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고 자주 찾아도 단 한 번도 지루했던 적이 없이 끌린다. 한 분만 모신 단릉, 두 분을 따로 모신 쌍릉, 산줄기를 달리해 여러 분을 모신 동원이강릉, 두 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 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 등 동구릉은 다양한 능의 형식을 볼 수 있어 ‘조선왕조 500년의 왕릉 전시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화해의 공간인 왕릉. |
능의 형식을 배우고 나면, 왕의 생애를 더듬어봐야 하고, 왕비간의 질투, 반목, 사랑과 복수가 점철된 궁중 야사에 빠지다보면 하루해가 모자란다. 자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친정식구들을 권력자로 내세우기 위해, 궁녀에서 왕비로 신분상승을 위해, 궁궐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격전장이었다.
그렇게 왕비와 계비는 목숨을 담보로 싸우다가 죽어서는 왕 옆에서 평온하게 누워 있으니 왕릉이야말로 이승에서 시도하지 못한 화해의 공간이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다. 왕릉은 죽은 왕의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매년 6월 27일 기신제를 올리고 있을 정도로 진행형의 공간이어서 더욱 가치가 있다.
건원릉에서 열리는 기신제. |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 왕릉
동구릉은 태조의 건원릉부터 제24대 헌종의 경릉까지 한양 동쪽에 총 9개의 능을 말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40기 중에서 22%가 동구릉에 몰려 있는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상 명당이고, 역대 왕들이 선조들과 함께 묻히고 싶은 염원 때문이었다.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인 경릉. |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나 헌종의 ‘경릉’에 올라 주변 산세를 살펴보면 문외한이라도 좌청룡 우백호가 훤히 잡히고 왕이 머물렀다고 하는 왕숙천이 아늑하게 흐르며, 정면으로는 검단산이 아른거려 완벽한 풍수지리 교과서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오죽했으면 명나라 사신이 이 풍수를 보고 ‘천작지구(天作地區)’ 즉 ‘하늘이 만든 땅덩이’라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조선왕릉
9개의 능 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능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다. 이곳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이는데 왜 이씨 왕조가 500년 동안 줄줄이 후손을 거느렸는지 알게 된다.
왕릉의 기본형식을 배우면 답사가 더욱 재미있다. 왕릉 맨 앞에 서있는 붉은 홍살문은 귀신을 쫓고 신성함을 알리는 문이다. 바로 옆 ‘배위(拜位)’는 왕이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조상께 절을 할 수 있도록 편편하게 돌로 다져 놓았다.
정자각까지 박석길인 참도. |
그 뒤에 이어진 박석길은 ‘참도(參道)’라고 부르는데 자세히 보면 두 단으로 되어 있다. 왼쪽 높은 길은 귀신의 길이고, 낮은 길은 왕이 걷는 길이며 그 뒤로 신하가 따른다. 지붕을 하늘에서 보면 ‘정(丁)’자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제례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고종, 순종황제의 ‘홍유릉’은 황제 능이니 정자각 대신 일반 궁궐 건물 모양인 ‘침전’을 만들어 놓았다. 비록 황제의 권한은 미약하지만 죽어서는 황제의 능제를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랄까. 지붕 위의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부르는데 건물을 다 짓고 뭔가 허전해서 둘러보니 어처구니가 빠져서 ‘어처구니가 없다’란 말이 유래되었다.
조선왕릉의 시작, 건원릉
밍크숄을 걸친 듯한 건원릉 문인상. |
건원릉은 고려의 찬란한 불교 석조예술을 이어받아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며 다른 능에서는 보기 힘든 신도비까지 볼 수 있다.
봉분 위는 뾰족한 억새가 자라고 있는데, 태종이 고향인 함흥에 묻히길 염원한 아버지 태조의 뜻을 받들어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왕의 일생을 반영한 문인석, 무인석의 다양한 표정을 감상해도 좋고, 봉분을 지키는 수호신인 호랑이와 양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는 재미도 괜찮다.
석호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며 전혀 무섭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조선 민화에 그려진 호랑이를 보는 듯 절로 미소가 번진다.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한다는 의미와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는데 각각 4기가 밖을 향해 능을 수호하고 있다.
봉분 앞에 밥상처럼 생긴 것은 ‘혼유석(魂遊石)’이라고 부르는데 임금의 혼이 노는 공간으로 일반인들은 봉분 앞에 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지만, 혼유석에는 제물을 차리지 않고 아래 정자각에서 상을 차린다. 죽은 임금은 혼유석 위에 앉아 후손들이 올리는 제사를 지켜본다고 한다.
혼유석 아래 받침돌인 고석에는 귀면이 새겨져 있다. |
혼유석 아래 귀면 모양을 하고 있는 고석이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데 험상궂은 얼굴의 귀면은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새겨놓았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시대에 따라 색다른 표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비장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입이 찢어져라 웃기도 하고 서글피 울고 있는 석물도 있다. 심지어 경릉의 무인석은 6.25때 총탄세례를 받은 상흔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니 능도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나보다. 선조 능인 목릉은 전쟁으로 석공들이 죽거나 일본에 잡혀가 석물의 예술미가 현저히 떨어진다. 이것도 시대의 아픔이라고 생각하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태조의 건원릉이나 영조의 원릉은 왕의 치세를 말해주듯 힘이 넘쳐 난다.
원릉의 정자각. |
한 폭의 수묵화, 설경이 좋은 포인트
설경을 사진에 담겠다면 눈이 녹기 전에 찾는 것이 좋은데 다른 능과 달리 아침 6시(동절기 6시 30분)에 문을 열기 때문에 그림 같은 풍경은 물론 솔숲 아래 떨어지는 햇살을 볼 수 있다.
우선 입구에 자리 잡은 동구릉 역사문화관에서는 왕릉의 조성방법, 배치도, 능의 특징 등 자료사진과 영상물을 통해 기초지식을 배우면 유익한 답사가 될 것이다. 입구에서는 재실까지는 노송들이 자라고 있어 눈이 살포시 쌓이면 산수화를 대하는 듯 절경을 만나게 된다.
동구릉 역사문화관. |
현종과 그 비 명성왕후를 모신 숭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해 그동안 생태보호를 위해 출입을 막았지만 2013년 1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몇 십년동안 미개방능이기에 손 때가 묻지 않고 노거수들이 많아 설경이 볼만하다.
숭릉의 정자각(보물 제1742호)은 조선왕릉에서 볼 수 있는 단 하나뿐인 팔작지붕으로, 다른 왕릉 정자각의 맞배지붕에 비해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있던 당시 태어난 현종은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다.
원릉에서 휘릉가는 길. |
이밖에 원릉에서 휘릉 가는 길은 쭉쭉 뻗은 소나무가 많아 연인들이 눈을 밟으며 데이트하기에 좋다. 건원릉에서 목릉으로 진입하는 길 옆으로 서어나무 군락지가 있어 오솔길을 따라 숲산책 하기에 그만이다. 목릉은 능침을 개방하고 있어 가까이서 석물들의 표정을 살펴볼 수 있다.
*입장시간과 입장료
하절기(03~10월) 06:00~18:30,동절기(11~2월) 06:30~17:30
입장료는 18세에서 64세까지는 1천원, 그 외에는 무료다. 매표소에서 관람포인트와 왕의 생애가 담겨진 리플렛을 챙기면 답사시 도움이 된다. http://donggu.cha.go.kr 동구릉 관리소 031-563-2909
*길안내
1호선 청량리역과 7호선 상봉역에서 202, 88번 시내버스를 타면 동구릉 앞까지 갈 수 있다. 청량리에서 30분 소요되며 상봉역에서는 15분이 소요된다. 2호선 강변역에서 1, 1-1, 9-2 버스를 타면 40분 소요,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 6번을 타면 10분이 걸린다. 승용차는 강변북로-토평IC-서울외곽순환도로-구리IC-43번 국도 퇴계원방면-동구릉
*맛집
동구릉에서 퇴계원쪽으로 차로 3분쯤 달리면 한정식 두메골(031-573-5558)이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1만원짜리 한정식이지만 생선, 전, 찌개, 나물 등 음식이 풍성하고 깊은 맛을 자랑한다. 소풍갈비(031-563-6208)는 갈비탕과 불고기 백반을 잘하며, 버스정류장 동태마을(031-554-5553)은 속이 얼얼한 동태찜을 먹을 수 있다.
글·사진/이종원 여행작가
(사)한국여행작가협회 정회원, 여행동호회 ‘모놀과 정수’(cafe.daum.net/monol4 1만6천명) 대표. <대한민국 숨겨진 여행지100><우리나라 어디까지 가봤니56><한국의 숨어있는 아름다운 풍경> 등 개인서적과 20여 권의 공저가 있다. 2008년 터키문화원 사진공모전 대상 수상. 2012년 ‘한국관광의 별’ 단행본 부문 대상 수상.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 원고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