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금식의 성서적 배경

문성식 2013. 12. 9. 22:20

금식의 성서적 배경

 

 

1. 역사적배경

구약에서 금식이 요구되는 경우는 연중 단 일회로서 속죄일 뿐이다(출 20:10; 레 16:1-34; 23:26-32; 35:9; 민 29:9-11). 이 날은 음식을 금하여 몸과 영혼에 고통을 가하면서 회개하여 죄를 씻고 속죄제를 올린다 .따라서 금식의 성서적 의미는‘참회를 위한 고행" 과 그를 통한‘죄로부터의 정결’이다.

그래서 율법으로 요구된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참회가 요구될 때(삼상 7:6; 욘 3:5), 위기에 처해 간절하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할 때 (삼하 12:21-23; 에 4:16) 사람들은 금식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과 소원을 표현했다. 그 외에 애도(哀悼)를 위한 금식도 있었다(삼상 31:13).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며 하나님께 구하는 금식이 일년에 네 번 있었다(슥 8:19).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금식하는 사람들은 죄, 죽음, 또는 어려움 등으로 인한 마음의 "슬픔"을 표현한다 .

 

1세기를 전후해서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한 주에 두 번씩 자발적인 금식을 했다(눅 18:12; 디다케 8:1). 그 관행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개인과 세상의 죄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담은 경건과 헌신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마 6:16; 눅 18:12). 일반 대중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관습은 당시 경건을 추구하던 사람들에 의해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당시 세례 요한 제자들의 규칙적인 금식은‘회개의 전파"와‘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구하는 의미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예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던 마가 공동체도 규칙적인 금식을 실행했다는 것이 20절에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금식을 놓고 왈가왈부했던 종교적 갈등은 마가 공동체의 것이 아니라 예수 당시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

 

2. 성서의 내용

일반 대중보다는 특별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룹의 사람들인 바리새인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 기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사하게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하는 종교적 무리로 이해되었을 예수와 그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이들이 예수께로 와서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18b 절). 마가복음 2장의 일화들이 모두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 사이의 긴장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질문 또한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의구심으로 인한 불평이었을 것이다. 헬라 원문에서는 질문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주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로서 당시에 금식을 하고 있던 이들이 힐난조로 던진 질문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그들의 금식은 율법의 명령은 아니었고 좀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자발적인 열심을 반영하는 관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발성은 어느새 고정된 전통의 의식으로 전환되어 다른 이들의 경건과 의를 가늠하는 판단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것을 본다. 아마도 저들은 이미 금식을 수행하는 동기와 목적에 충실하기보다는 그것 자체의 준수에 많은 것을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그렇게 본래의 취지를 망각하여 수단이 목적으로 전화 (轉化)된 인간의 전통에 별반 심각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왜곡하고 경건의 근본 정신을 화석화한 인간의 전통이라면 오히려 벗어 버려야 마땅하다 .더구나 메시아 예수의 때는 금식의 계절이 아니었다.

 

예수는 지상에 있을 때 금식과 금욕의 사람으로 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을 받을 정도로 잔치와 축제의 메시아였다(마 11 :19; 눅 7:34).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의 잔치를 수반하는 환희와 행복의 사건으로 비유된다. 이곳 본문에서는 예수가 즐거운 혼인 잔치의 신랑으로 제시된다. 유대의 혼인 잔치는 음악과 시끌법석한 행렬이 이어지는 기쁨과 축제의 현장이다(마카비 상 9:37 이하).
예수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하는 사건은 그 자체로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는 혼인 잔치의 기간이다. 예수의 존재는 인간의 모든 암울한 억제를 타파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강력한 진입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분명히‘회개"를 외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막 1:15). 죄를 위한 참회와 가슴을 치는 애통함,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의 결단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회개로 시작한 그 나라의 삶 자체가 침침한 억제와 구속(拘束)의 소극적 퇴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회개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활력이 넘치는‘새로운 창조"(고후 5:17; 갈 6:15)이다.

신랑과 같이 있는 혼인 잔치에서 인상을 찡그리며 금식을 하는 우스꽝스러운‘신랑의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창조적 활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왜곡된 종교인들에 대한 패러디 (parody)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슬픔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어두움과 그늘에 대한 부정은 자못 강경하다.‘금식하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다. 오히려 분명하게 “금식할 수 없다”(19 절)고 한다. 슬퍼해서는 안 되고 기뻐해야만 된다.

 

3. 금식의 관행으로 시작된 논쟁

첫 번째 비유는 낡은 옷의 해어진 곳을 깁기 위해 새 천을 대면 그것이 낡은 옷 자체를 끌어당겨 완전히 망가뜨린다는 내용이다. 이 비유 상으로 볼 때, 헌 옷을 구제하는 길은 헌 옷감을 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가 헌옷을 살리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 요점은 새 천으로 상징되는 예수의 새 질서가 옛 질서에 붙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데 있다. 두 번째 비유도 같은 진리를 가리킨다 .예수로 인해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는 새 포도주이기 때문에 옛 가죽 부대로 상징되는 옛 유대교가 그 혁신적인 역동성을 담지 못한다 .새 포도주를 담으려 했던 옛 가죽부대는 터져서 자신을 손상하고 만다. 두 비유 모두 새 질서를 견디지 못하여 ‘해어짐’이 심해지거나 (21 절), ‘터져 망가지는"(22 절) 구(舊)유대교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까지는 두 비유가 같은 내용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은 두 번째 비유를 마감하면서 예수 운동에 새 질서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아포리즘 ’을 더한다 .이것은 첫 번째 비유와는 상관이 없다. 개역성경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로 번역했으나 원문에서는 동사가 없이 형용사와 명사가 반복되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가 되어 운율이 있는 슬로건이 된다 .

새 질서와 새 제도를 필요로 하는 예수운동의 방향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혁신성을 지닌 예수 운동은 유대교라는 구제도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새 포도주요, 새 천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유대교라는 옛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새 부대로 상징되는‘교회"와 "그리스도교’라는 새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된다.

 

4. 맺음

금식 기도는 생명을 걸고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굶으면 죽는다. 먹기를 금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토록 절박한 기도라는 뜻이다. 이 기도마저도 밥을 먹지 않는 모양은 있으나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믿음은 없어졌다. 본문은 당시 유대교가 여러 갈래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 외에는 금식을 하고 있었다.

 

즉 전통적 방법대로 살고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안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도 40 일이나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금식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금식 기도를 절기에만 한다든가 조금 기도하고 많이 한 것처럼 보인다든지,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을 형식화하고 또 다른 인간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금식 기도를 금하신 것이다 .그런 식의 신앙생활은 이제 끝내야 한다는 뜻이다.

낡은 시대에는 그럴 수 있으나 생명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하신 뜻을 보면 금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금식하는 시간이라든가 목적에 문제가 있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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