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초대교회의 정통과 이단

문성식 2013. 12. 3. 21:41

초대교회의 정통과 이단

1. 머리말

 
초대교회는 콘스탄틴 황제가 리키니우스 황제와 함께 313년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여 승인할 때까지 약 280년 동안 삼중고에 시달렸었다.
그 삼중고란 유대교의 시기와 방해, 로마제국의 탄압, 그리고 이단의 난립이었다.

이단이란 말은 희랍어 hairesis에서 유래했는데 이 용어는 원래 '선택'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기독교가 시작될 무렵에 hairesis는 어떤 종교집단이나 철학학파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기독교에서 이단(heresy)이란 말은 정통교회로부터 이탈된 그릇된 종파와 그들의 가르침을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초대교회는 강한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단합과 일치를 이루었지만 교리적 측면에서는 처음부터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약성서 시대에는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신앙의 강조점과 특징이 달랐으며, 기독교가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 나갔을 때 희랍문화권에 속한 동방교회와 라틴문화권에 속한 서방교회는 언어와 사고방식, 그리고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지역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가르침이 나타났으며 교회는 교인들간의 결속과 화합을 유지하기 위해 감독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 시켰고 감독을 중심으로 바른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교회의 신앙을 위협하는 운동이나 가르침이 나타났을 때 교회의 지도자인 교부들은 그것을 반박하고 성서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정통교리를 정립하려고 했고, 때로는 교회회의를 개최하여 그들을 정죄하기도 했다.
본 고에서는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이단과 분파들의 운동과 가르침을 유형별로 소개하고 이에 대한 정통교회와 교부들의 대응을 알아봄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한다.
 
2. 초대교회의 이단과 분파
 가. 에비온주의(Ebionism) :기독교인의 율법준수 문제
 
기독교의 첫 교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이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게 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오던 유대교의 전통과 가르침을 어떻게 그리스도 신앙과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은(Jewish Christians) 아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을 고수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율법준수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바울을 적대시하게 되었고 그리스도 신앙을 유대교의 틀 안에서 견지하려고 하였다.
 
2세기 말에 활동했던 교부인 리용의 이레니우스는 에비온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음. 바울서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서 중에서도 유대적 성향이 짙은 마태복음만을 인정함. 유대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시함. 할례, 율법, 유대인의 생활방식을 준수함.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불신함. 구약성서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중시함.
터툴리안에 의하면 에비온주의자들은 예수를 '단지 한 인간(nudus homo)'으로 여겼다. 오리겐은 에비온주의자라는 말은 '가난'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으며, 그들은 성찬식 때 무교병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포도주 대신 물을 사용했으며 유대교와 같이 안식일을 준수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이방인 세계로 확산됨에 따라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소수가 되었고 기독교의 주류에서 소외되고 말았다.
 
20세기에 나타난 제칠일 예수재림교(Seventh Day Adventism)도 일면 에비온주의와 같이 율법준수를 주장하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재림교인들은 십계명의 가르침대로 일요일 대신 토요일을 성일로 지키기 때문에 안식교라고도 불리우며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하는 등 까다로운 구약성서의 음식규정을 그대로 지키기도 한다.
 
 나. 몬타누스주의(Montanism);성령체험과 예수재림을 강조하는 예언운동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고 기다리면서 종말론적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예수재림의 지연과 함께 뜨거웠던 종말신앙은 그 빛이 퇴색하게 되었다. 몬타누스주의는 이렇게 신앙이 약화되고 경직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이방종교의 사제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A.D. 160년경 소아시아 프리기아에서 성령이 자신에게 임재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몬타누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예언(new prophecy)'이라고 하면서 방언과 열광적인 엑스타시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기존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임박한 종말에 대비하면서 결혼을 금지하고 금식과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으며 순교를 장려하였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프리기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마을에 임할 것 이라고 믿고 그곳에 모여 재림 예수를 기다렸다. 몬타누스에게는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라는 여사제가 통역자로 함께 활동했으며 이들은 몬타누스가 죽은 후 지도자로서 이 운동을 이끌었다. 3세기에 들어서서 몬타누스주의 운동은 큰 힘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후대에 서방 교회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이 이 운동의 엄격한 도덕생활과 금욕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합류하게 된 것이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177년 몬타누스를 정죄하였고, 교회의 결속을 위하여 감독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시켰다.
교부들은 몬타누스주의자들의 방언과 열광적 엑스타시의 체험을 비기독교적이라 비판했고, 특히 여사제들의 지도적 역할과 여성에 의한 성찬식과 세례식이교회의 전통에 어긋난다고 비판하였다.
 몬타누스주의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성령운동이라 불리울 수 있다.
그 후 비슷한 유형의 성령운동이나 예언운동이 계속 나타났으며 감독의 권한과 사도전통을 지키려는 기존 교회와는 계속 충돌하고 갈등울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정통 교회로부터 정죄받기는 했지만 몬타누스주의의 가르침은 대부분 정통 교회의 교리와 다름이 없었다.
현대의 여성신학자들은 특히 몬타누스주의에 나타난 여성의 사제직과 지도적 역할을 중시하고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 영지주의(Gnosticism) : 기독교적 요소를 포함한 종교 혼합주의
 
영지주의란 말은 '지식'을 뜻하는 희랍어 gnosis에서 유래하였다.
영지주의는 운동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유대교, 고대 희랍철학, 동양 신비종교가 뒤섞인 일종의 혼합주의적 사상체계(syncretism)로서 2세기부터 5세기까지 번성하였다.
영지(靈智)라는 말은 단순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지식(revealed knowledge)' 또는 '비전(秘傳)의 지식(esotericknowledge)'을 말한다.
영지주의 자들은 신의 계시와 구원의 비밀을 일반인들과 같은 육적 인간들(somatics)이나 기독교인들과 같은 혼적 인간들(psychics)은 알 수 없으며 오직 영적 인간들(pneumatics), 즉 영지주의자들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천상계(Pleroma : Fullness)에는 여러 계층의 신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열등한 신인 지혜(Sophia : Wisdom)로부터 신성이 흘러나와서 이 세상이 생겼다는 유출설을 가르친다.
물질과 육체를 열등하고 악한 것으로 여기는 이원론에 근거해서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오직 영혼과 신과의 연합만을 중시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영적 존재로서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의 몸에 들어왔으나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그의 몸을 떠났으며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사람은 인간 예수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단지 허상(dokesis : appearance)에 불과하다는 가현설(假現設 : docetism)을 주장했다.
 
교회들은 영지주의에 대항해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정통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성을 지닌 분으로서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했으며 우리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bodily resurrection)임을 역설하였다.
또한 유출설에 맞서서 우주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 : creation out of nothing)'되었으며 물질과 육체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것임을 가르쳤다.
 영지주의적 경향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계속 나타났으며 현대에도 구원의 신령한 지식이 따로 있다거나, 물질이나 육체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무시하고 탄압해야 한다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부인하고 영적인 존재라는 것만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볼 수 있으며, 기독교의 교리를 동양사상이나 신비종교와 접목시킨 종교혼합적 기독교가 나타나기도 한다.
 
 라.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 성서의 정경화(正經化) 문제
 
마르시온주의는 2세기 중반에 나타났던 가장 위협적인 이단이었다.
마르시온은 흑해 연안의 항구 시노페에서 감독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유한 선주였다. 그는 140년경 로마로 가서 로마교회의 교인이 되었으며 큰 액수의 돈을 헌금하여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마르시온은 이단적 가르침을 주장하였고 교회는 그를 144년 파문하였다. 
마르시온은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웠고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며 마르시온교회는 거의 1세기 동안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마르시온은 극단적인 바울 추종자였다.
그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분리시켰다. 왜냐하면 구약성서는 율법서에 불과하고 신약성서는 복음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서일뿐이며 구약성서의 신은 지고한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데미우르고스(deminurgos)라는 열등한 창조신에 불과하며 무지와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지닌 신이다.  반면에 신약성서의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한 참 하나님이며 우주적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 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현설을 주장하면서 물질과 육체는 악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육체를 지니지 않은 영적 존재라고 가르쳤다.
마르시온은 구약성서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신약성서 중에서도 목회서신을 제외한 10권의 바울서신과 사랑을 강조한 누가복음의 일부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유대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바울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진정한 사도라고 여겼다.
바울 서신과 누가복음 외에는 모두 유대교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교부들은 마르시온의 가르침에 대항해서 구약성서의 창조주 하나님과 신약성서의 사랑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며,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담긴 책이기 때문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마르시온의 정서 편집에 자극을 받은 정통교회는 성서의 정경화(canonization)작업을 진행시켰고 393년 북아프리카의 히포회의와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서 정경목록을 확정하였다.
 
교부들은 정경화 작업을 하면서 진정한 사도들의 저작인가 하는 사도성(apostolicity), 사도들의 저작이 아닐 때는 그것이 사도들의 저작과 같은 내용과 품격을 지녔는가 하는 정통성(orthodoxy), 사도시대에 기록된 것인가 하는 고대성(antiquity), 그 책이 범 교회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보편성(catholicity), 그리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는가 하는 영감성 (inspiration)을 정경성의 기준으로 삼았다.
 
 
마. 아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문제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다.
기독교가 그레코로마 문화가 지배하는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이방인들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당시 플라톤주의(정확히 말해서 기원전 2세기로부터 주후 2세기까지 번성했던 중기 플라톤주의)에는 초월적 신과 세계 사이의 중개자로서 로고스가 존재한다는 사상이 있었고(특히 알레산드리아의 필로의 가르침) 또한 스토아주의에도 만물에 내재하는 지배원리로서 로고스가 있었다.
교부들은 요한복음 1장의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희랍철학의 로고스를 동일시하게 되었고 이러한 교리는 희랍철학에 익숙한 이방인들에게 설득력있게 파고 들었다. 그러나 로고스 기독론은 유대교 전통의 유일신 신앙과 영혼과 육체를 대립시키는 플라톤주의의 이원론과 갈등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그리스도도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유일신론이 아니라 이신론(二神論)이 아닌가, 또한 로고스와 예수 그리스도와는 어떤 관계인가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존경받는 장로였던 아리우스는 하나님은 유일신이심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성자 곧 로고스는 성부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로서 창조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성자는 삼위 하나님과 상이본질(相異本質: heteroousios : different substance)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선재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던 교인들은 반발을 하게 되었고,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이 로마제국 내에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막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틴 황제는 교회의 분열이 곧 로마제국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급히 감독들을 소집하여 교회회의를 개최 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야회의(325년)이다.
 
니케야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었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성을 확인하는 니케야신조가 결정되었다.
니케야신조의 중요부분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은 성부이시며 전능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만드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성부로부터 나셨고, 독생자이시며,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오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시며, 피조된 것이 아니라 나온 것이며(begotten not made),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 same substance)이시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가 존재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There was when he was not)거나 '그는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Before being born he was not)거나 '그는 무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He came into existence out of nothing)라고 말하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상이본질 또는 상이본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가변적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공교회와 사도교회는 정죄한다."
아리우스주의가 잠잠해지기도 전에 또 다른 기독론 논쟁이 일어났다.  라오디케아의 감독인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로고스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와 육신의 결합으로써 로고스가 예수의 인간 영혼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씀-육신의 기독론(Logos-sarx christology)을 폈다.
그는 예수에게는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가 없었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정통교회는 제2차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회의(381년)를 열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함께 완전한 인성을 선포하고 아폴리나 리우스를 정죄하였다.
 
5세기에 이르러 또 하나의 기독론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을 야기시킨 장본인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였다. 
그는 로고스는 화육시에 인간과 결합하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神-人(Theanthropos : God-human)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지닌 (God-bearing) 인간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Theotokos : Mother of God)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Christotokos : Mother of Christ)로 불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 속성의 교류)에 의한 본질적 결합을 거부하고 두 본성의 단순한 연결로 보았다.
 정통교회는 제3차 공의회인 에베소회의(431년)에서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였고 이어서 제4차 공의회인 칼케돈회의(451년)를 개최하여 다시 한번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임을 확정하였다.
 
칼케돈 신조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성자, 곧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에 있어서도 완전 하시며 마찬가지로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신 참 하나님이요, 영혼과 육체를 지닌 참 인간임을 고백한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며 인성에 있어서는 죄없으신 것 외에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는 만세 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 곧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에게서 나셨다. 성자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시다. 두 본성의 구별은 결합으로 인하여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두 인격(prosopa)으로 나뉘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특징은 한 인격(prosopon)이며 한 위격(hypostasis), 곧 성자요 하나님의 독생자요 말씀이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호되고 결합된다."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곱틱교회, 아비시니아교회, 야고보교회, 아르메니아교회 등은 그리스도는 오직 한 본성만을 지닌다(單性論:monophysitism) 고 주장하여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분열이 일어났다.
또한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은 페르시아의 에뎃사에 거점을 두고 아시아 지역을 향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이 전한 기독교는 인도에 전파되었으며 이어서 당태종 시절에 중국에 전파되어 경교(景敎)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바. 노바티안주의,도나투스주의;교회의 순결성과 통일성에 대한 문제
 
초대교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감독을 중심으로 통일과 단합을 이루어 나갔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교회가 감독을 중심으로 결속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공교회(Catholic church)가 있는 것처럼 감독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때로는 분열이 생기기도 하고 분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데시우스 황제의 로마제국 전역에 걸친 기독교 탄압(249-250년)이 있은 후 로마교회는 박해기간 동안 배교했던 교인들을 어떻게 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분열이 일어났다.
로마 감독인 코르넬리우스는 배교자들에게 일정기간 참회를 하도록 한 후 교회로 받아 들이자는 온건한 입장을 취한 반면, 사제인 노바티안은 교회는 거룩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배교자들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 하면서 스스로 감독이 되어 분파를 형성했다.
이에 후대에 교회론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카르타고의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코르넬리우스를 지지 하였다.
키프리안은 에베소서 4장 4-5절에 기초해서 "하나의 거룩한 교회"(Una Sancta Ecclesia : one Holy Church)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안에 있고 교회는 감독안에 있다. 그러므로 감독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교회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감독을 중심으로 결속할 것을 호소했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을 와해시키는 분파는 교회가 될 수 없으며 그곳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 Outside the church, no salvation)는 강한 주장을 폈다. 교회론 논쟁은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대박해 이후 다시 일어났다.
 
도나투스를 지지하는 북아프리카의 교인들은박해 때 로마군인들에게 성서를 넘겨 주거나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한 배교자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없으며 배교했던 감독들에 의한 안수나 성례전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진정한 교회는 순결한 교회이어야 하며, 교회는 흠이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주장을 폈다. 교회의 분열이 생기자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의 가르침을 예로 들면서 교회의 순결성보다는 통일성이 우선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교회에는 심판날까지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으며, 성례전은 사제가 아닌 그리스도에 의해서 집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제의 순결성에 의존하지 않으며 성례전 그 자체로 효력이 있다(ex opere operato : from the performance of the work)는 사효론(事效論)적 입장을 취했다.
결국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로마군대에 의해서 진압되었고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르는 교회가 승리하게 되었다.
 
 사. 펠라기우스주의;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과의 관계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인가?  초대교회의 교부들, 특히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영지주의의 결정론(determinism) 또는 숙명론(fatalism)에 대항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저스틴의 말대로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죽은 후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한 행위에 따라 공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보상이나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 태생인 펠라기우스(약350-425년)는 서방교회의 교부였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동방교회의 가르침과 수도원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는 창조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을 알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  죄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범하는 것이며, 인간이 선천적으로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펠라기우스는 가르쳤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자유의지로 선이나 악을선택할 능력은 아담의 타락과 함께 잃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죄의 종이 되었으며 더 이상 선을 사랑하고 선택할 능력을 잃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선에 대한 인간의지의 회복은 오직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카르타고회의(418년)와 제3차 에베소공의회(431 년)에서 정죄받게 되었다.
그후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은사의 역사 없이는 인간의지가 스스로 선을 택하기 불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한 예정론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결정론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고올지방 출신의 존 카시안(약 365-433년)은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지의 도덕적 노력을 강조하려고 하였다. 
그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에서 구원을 위한 은사의 내적 역사의 필요성을 수용했다.  그러나 은사의 역사 이전에 인간의 의지가 선을 추구하는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서방교회는 오렌지회의 (529년)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 은사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해서 자유의지가 회복됨을 인정하여 결정론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 회의는 모든 선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이고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의 선택은 이차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과의 관계는 끊임없이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은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sola gratia : 은총만으로)을 강조했으며, 반면에 펠라기우스, 아르미니우스, 웨슬리 등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을 중시하였다.
 
3. 맺는말
 
현대사회의 특징중의 하나는 문화와 종교의 다원화 현상이다. 시대와 지역의 특성과 전통에 따라 종교와 문화와 윤리는 다양하게 추구되고 실천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어느 한 교파를 정통이라고 고집하거나 어느 한 교리를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삶의 길을 서로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정통과 이단은 때로는 문화적 차이나 권력다툼에서 비롯되기도 했고, 때로는 다수와 소수 사이의 힘겨룸 속에서 결정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또 서방교회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개신교로, 개신교는 수많은 교파로 나뉘어 있다.  이런 다양성 속에서 절대적 진리 또는 절대적 교리를 고집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이단으로 정죄받는다고 해도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현대사회에서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사회생활이나 활동에 아무런 제약이나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정통(orthodoxy : right teaching)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흔히 바른 기독교 신앙의 척도로서 성서와 전통을 든다.  성서가 정통신앙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동방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는 66권의 정경과 함께 외경에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로마 카톨릭교회는 외경인 제2 마카비서 12장에 근거해서 연옥설을 주장한다. 영국 국교회와 루터교는 외경을 인정하면서도 정경보다는 낮은 위치에 둔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외경을 사용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같은 성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각 교파의 진보성이나 보수성에 따라 성서내용이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많은 이단 종파들도 성서를 정경으로 인정하고 사용한다. 
개신교는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자들의 표어를 따르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서와 함께 공의회의 결정이나 교황의 교령에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공의회의 결정이나 신조 또는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이 정통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로마 카톨릭교회와 개신교가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반면 동방교회는 니케야신조를 사용하고 있다.  또 각 교파마다 루터교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트의 신앙고백 등 개별적인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장로교의 중요한 교리인 예정론을 감리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나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스콜라신학을 비판한 마틴 루터는 똑같이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근거하면서도 서로 다른 내용의 교리를 주장한다.
각 교파마다 예배의식도 다르며, 성찬론에 있어서도 로마 카톨릭 교회는 화체설(化體說), 루터교는 임재설(臨在說), 장로교는 영적 임재설을 믿는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정통과 이단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인가?
어떤 신앙이나 교리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주장될 수 있는가?  이제 기독교 교파간의 교리적 차이를 더 이상 바른 신앙과 그릇된 신앙으로 나누기는 힘들게 되었다.  정통과 이단의 구분은 힘있는 다수와 힘없는 소수의 구분이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권력다툼에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교리적 차이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각 교파 또는 각 교단의 정체성(identity) 확립이라는 맥락에서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인을 현혹하여 정상적 삶에서 이탈하게 하거나 반사회적 활동이나 비윤리적 행동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혹세무민하는 종파는 사이비 종교로 규정짓고 경계해야 한다.
교회는 성서에 나타난 구원의 진리를 바로 알고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2천년의 역사를 통해 면면이 이어 내려온 신앙의 전통을 바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용석 / 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교회사). 한국신학대학(Ph. B.) 과 한국신학대학원(Th. M.), 그리고 유니온신학대(S.T.M., M. Phil., Ph. D.)에서 교회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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