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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의 산-앞산

문성식 2012. 11. 11. 10:37

대구광역시 남구
태조 왕건의 목숨을 구한 산

글 . 사진  조원구  사진작가  .협찬  TrekSta

서기 927년. 고려를 견제하던 후백제의 견훤은 고려와 동맹의 관계에 있는 신라를 공격한다. 신라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던 상황. 어느덧 견훤의 군사가 영천까지 이르자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고, 왕건은 원군을 보낸다. 하지만 견훤은 이들 역시 모두 격파하고 신라의 도성으로 진격해 함락시키고 만다.
견훤에 짓밟히는 신라. 경애왕은 도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친(親)고려정권의 제거가 목적이었던 견훤. 그렇기에 견훤은 발 빠르게 경애왕의 이종사촌인 김부(경순왕)를 왕에 앉혀 자신의 동맹으로 삼는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왕건이 아니었다. 고려 군사의 패전과 경애왕의 자진 소식을 들은 왕건은 신숭겸을 비롯한 자신의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직접 나선다. 공산, 즉 지금의 팔공산 기슭에서 견훤의 군사와 맞붙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다시 패하는 왕건. 이번에는 목숨마저 보존하기 어려워진다. 그때 장수 신숭겸이 나선다. 스스로 왕건의 갑옷을 입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자신이 왕건인양 적을 속여 왕건이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는 전사하는 신숭겸. 그렇게 신숭겸 덕에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탈출한 왕건이 숨어든 곳이 바로 ‘앞산’이다.

앞산 정상에서 본 남쪽의 전경. 왼쪽으로 주암산과 최정산, 그리고 오른쪽은 앞산에서 능선으로 이어진 청룡산으로, 청룡산은 비슬산으로 이어진다.

 

태조 왕건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고찰
앞산은 대구광역시 남구, 수성구, 달서구에 위치해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산림이 울창하고 크고 작은 여덟 개의 골이 있는 경관이 수려한 산이다. 수백 종의 식물은 물론, 천연림에 가까운 참나무 숲 10만여 평과 잣나무단지 24㏊ 5만여 본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연중 1,600여만 명이 즐겨 찾는다. 천혜의 산림욕장으로 등산로와 약수터가 모두 20여 곳이 넘을 만큼 대구시민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또한 앞산 내에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낙동강 승전 기념관과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충혼탑이 있다. 이 외에도 청소년수련원, 궁도장, 승마장, 남부도서관, 체력단련장 등이 각 마을에 고루 자리하고 있다.
앞산은 1832년에 편찬된 <대구읍지>에 의하면 본래 이름이 성불산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제 이름을 두고도 비슬산으로 불리었는데, 아마도 비슬산의 맥을 따라 그 준령이 대구 도심 앞까지 이어져있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앞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앞산이라는 이름은 대구의 남쪽 십리에 있는 관기(官機) 안산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관기 안산’이란 관청의 맞은편에 있는 산을 뜻하는데, 관청은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에 있던 대구 감영을 말한다. 따라서 앞산이라 부른 이유는 감영 앞 쪽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붙여졌거나 안산이라는 말이 앞산으로 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지금은 대구 시민들 모두 앞산공원이라 부른다.
이번 앞산 산행의 들머리는 안지랑골을 택했다. 안지랑골 입구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 대덕식당 건너편에서 버스를 내리면 채 5분이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깝게 자리한다.

안지랑골에 들어서서 길을 따르면 등산로가 그려진 숲길 안내판이 주차장 끝에 서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곳이 안지랑골 들머리다. 여기서 안내판 왼쪽으로 산을 오르는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른다. 꽤나 가파른 오르막길.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정자 하나. 이곳에서 다시 약 10분 가까이 힘겹게 오르면 콘크리트 포장길이 끝나면서 안일사에 닿는다. 안일사는 얼핏 보면 그리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작은 사찰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고려 태조 왕건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데 살펴보면 이곳뿐만이 아니라 팔공산 인근에는 유독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이곳 앞산에도 왕건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 ‘은적사’, ‘안일사’, ‘임휴사’ 이렇게 세 곳이나 있다. 지명은 물론, 이 사찰들이 왕건과 관계를 맺게 된 이유는 모두 왕건과 견훤이 벌였던 팔공산 전투 때문이었다.

왕굴 갈림길에서 왕굴로 가는 길목의 거대한 돌무더기 탑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고 신숭겸의 계책으로 겨우 탈출한 왕건은 추격병에게 쫓기다 앞산 큰골에 이르러 대나무 숲의 작은 동굴에 숨게 된다. 왕건이 동굴에 숨자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왕거미가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치니 추격병들은 그걸 보고는 동굴에 누구도 숨지 않았다 믿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렇게 추격을 피한 왕건은 이후 굴에서 3일을 숨어 지내다 멀지 않은 곳의 사찰로 몸을 피한다. 훗날 왕건이 당시의 고승 영도대사에 명해 자신이 숨었던 동굴이 있는 곳에 사찰을 짓게 하는데, 이 동굴은 현재 ‘왕굴’이라 불리고 지어진 사찰은 지금의 은적사다.
3일 후, 동굴을 떠난 왕건은 안일사를 찾는다. 그런데 사찰의 원래 이름은 유성사였다고 한다. 왕건은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무는데, 그동안 편안하고 평안하게 지냈다 해서 유성사를 안일사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안일사에서 남쪽으로 500미터 떨어진 산기슭에도 작은 굴이 하나 있는데, 이 굴 역시 왕건이 머물렀다 해서 ‘왕굴’이라 불리고 있다.
안일사에서 3개월을 머물던 왕건은 다시 인근의 다른 사찰로 옮기게 된다. 달비골에 자리한 임휴사다. 이 사찰 역시 왕건이 비로소 편히 쉬고 간 절이라 해서 임휴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고려 태조 왕건의 아픔과 오랜 역사를 안고 있는 고찰이지만, 지금의 안일사와 임휴사 건물들은 모두 후대에 새로 지어졌다. 그래서 왕건의 자취는 물론, 원래의 모습 또한 찾아볼 길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아름다운 소나무길이 있는 단비골
힘겹게 올라야하는 콘크리트 임도는 안일사 앞에서 끝나고 나무와 돌로 계단을 이루고 있는 숲길로 이어진다. 역시 조금은 힘겨운 오르막이지만 숨이 차오르는가 싶을 때쯤, 걸음은 전망대와 왕굴로 나뉘는 갈림길에 닿는다.
안일사에 왕굴까지는 500미터. 그렇다면 갈림길에서 왕굴까지는 400미터나 될까? 하지만 갈림길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는 돌무더기 탑을 지나고부터 왕굴까지는 계속해서 가파른 오르막이라 땀을 꽤 흘려야 한다. 갈림길에서 왕굴까지 약 15분이 소요된다.

비슬산까지 이어지는 앞산 주능선. 뒤로 보이는 통신탑이 선 곳이 앞산 정상부. 하지만 출입할 수 없다.

왕굴 앞은 조금은 넓은 공터로 작은 벤치가 하나 놓여있고 옆의 바위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면 거짓말처럼 시야가 트인 바위 위에 서게 되는데, 이곳의 전경도 꽤나 멋진 편이다. 이곳에서 능선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지만, 전망대로 가기 위해서는 되돌아 내려오는 것이 더 빠르다.
왕굴에서 되돌아 내려온 갈림길에서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반듯하게 정비되어 부드러운 경사로 산허리를 돌아 오른다. 왕굴 가는 길에 비하면 그저 산책로와 다르지 않다고 할 만큼 전망대 직전의 짧은 계단을 제외하면 수월한 걸음으로 갈림길에서 채 20분을 오르지 않아 전망대에 닿는다. 그렇다고 계단이 힘겹게 놓인 것도 아니다. 계단 역시 높이나 경사가 낮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앞산 전망대에 서면 어느 한 곳 막힘이 없이 대구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보인다. 얼마 전 세계육상대회를 앞두고 조성한 시설이라는데, 여름밤이면 더위도 피하고, 야경도 즐길 겸해서 찾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인기가 좋은 곳이다.
전망대를 뒤로하면 잠시 후 케이블카 승강장을 만난다. 낙동강 승전 기념관이 있는 앞산공원까지 약 800미터를 운행하는 케이블카다. 그리고 다시 몇 분을 걸어 역시 한여름 밤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는 마천각을 지나 산불감시초소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산길다운 길이 펼쳐진다.
그렇게 산길을 걸어 10분을 가면 산성산과 달비골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있는 삼거리다. 바로 앞산의 정상 아랫부분으로 정상에 오르려면 여기서 달비골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철조망에 가로막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정상부에 설치된 통신시설 때문에 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조망을 따라 정상의 아랫부분으로 돌아서 숲을 벗어나면 비로소 능선에 서게 된다.
숲을 나와 능선에 서면 왼쪽이 정상 방향. 하지만 이곳도 역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어 올라갈 수가 없다. 내려가지 않으면 되돌아가야 한다.
가파른 경사의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멀리 아래를 보면 큰 바위 위에 태극기가 매어진 국기 게양대가 서 있다. 바위까지는 약 5분 거리로 이 바위에 오르면 왼쪽으로는 주암산과 최정산이, 오른쪽으로는 청룡산을 넘어 멀리 비슬산까지 조망된다.
능선 길은 너덜과 바위, 그리고 키 작은 나무뿐이다. 국기가 매어있는 바위에서 달비골과 청소년 수련원 갈림길까지는 채 1km가 되지 않는 짧지만 아름다운 길이다. 푸르게 펼쳐진 하늘을 이고 굽이치는 앞산의 능선은 물론, 사방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다.
그렇게 국기봉에서 20여분 능선을 걸으면 달비골과 청소년 수련원으로 갈리는 하산 기점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서의 하산은 청소년 수련원이 아닌 달비골로 하는 것이 좋다.
사실 달비골로의 하산길은 군데군데 조금은 가파른 경사에 너덜 구간도 적지 않고, 간혹 바위도 만나게 된다. 산을 내려와서도 버스를 이용하려면 상당거리를 걸어야하는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하산하는 내내 지나게 되는 제멋대로 휘어져 자라 오히려 멋스러운 우거진 소나무 숲은 여느 산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능선을 벗어나 하산길로 소나무 숲을 30분여 지날 무렵 나무 사이로 멀지않게 위치한 고즈넉한 사찰이 보이고 이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임도는 바로 임휴사로 오르는 진입로다. 여기서 임도를 따라 바로 내려가도 되겠지만, 왕건이 편히 쉬었다 갔다는 임휴사에 들러 한 걸음 쉬었다 가도 좋을 듯하다.  ⓜ

앞산 전망대는 여름밤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시민이 찾는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