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이 바뀌는 거리가 을씨년스럽다. 차가운 도심의 불빛, 어둠 뒤에 오는 바람엔 날이 섰다. 정리와 반성의 시간 앞에서 낙엽이 새 순으로 피어나는 이치를 떠올려 본다. 나 보다 먼저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향기가 그리워 길 위에 섰다. | |

연풍 천주교 성지부터 수옥정까지
연풍도 한 때는 지독한 산골짜기였나 보다. 1801년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을 탄압했던 이른바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교인들은 은거할 곳이 필요 했는데 연풍도 그런 곳이었다. 또한 그들은 연풍에만 머물지 않고 박해를 피해 더 깊은 산골을 찾아 길을 떠났다. 연풍에서 새재를 넘으면 문경이었다. 교인들은 새재를 넘어 문경, 점촌, 상주 등으로 퍼져 은거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 탄압의 불길은 더 거세졌고 이윽고 1866년 ‘병인박해’때 많은 신자들이 처형됐는데 그 사람들이 처형된 곳이 지금의 연풍 천주교 성지다.
처형 할 때 사용한 ‘형구돌’은 직경이 약 1m, 둘레가 4~4.5m 정도 크기이며 바위 가운데 앞면에 직경 25~30㎝, 뒷면에 직경 7㎝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다. 형구돌 중 하나는 서울 절두산 성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개는 연풍 천주교 성지에 남아 있다. | |

천주교 성지에 있는 형구돌. 천주교 신자를 처형할 때 쓰던 것이다.
성지에서 나와 면소재지를 벗어났다. 연풍중학교를 지나자 옛날 문경으로 넘어가던 고개인 이화령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그 가운데 섬처럼 남아 있는 옛 버스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충주에서 연풍을 오가는 사람을 위해 그곳에서 버스가 정차한다. 충주 방면으로 가는 새로 난 길과 충주로 가는 옛 도로, 이화령으로 넘어가는 길, 연풍 마을 앞으로 난 길 등 갈림길 사이에서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수옥정으로 가기 위해 충주로 가는 옛 도로로 걷기 시작했다. 매력 없는 아스팔트길을 6km 정도 걷는 일은 지루했다.
해거름 게으른 걸음으로 수옥정 폭포에 도착했다.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1700년대에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니 기록상으로는 사람들이 폭포를 알게 된 것은 최소한 300여 년 정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폭포는 글로 남은 역사 훨씬 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그 전부터 폭포를 오간 사람의 숱한 이야기가 물줄기 부서지는 소리로 들리는 듯 했다.
아주 오래 전 내 할머니도 이 폭포를 다녀가셨다. 폭포 앞에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젊은 시절 할머니 사진을 어릴 때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 폭포 앞에 서서 온몸으로 폭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폭포 아래 선 나는 사진 한 장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던 ‘웅웅’대는 소리가 멈추는 순간 폭포수 부서지는 소리가 우렁차게 가슴을 울린다. 그때서야 추억이 닿지 않은 시간 여행에서 깨어났다. 폭포를 남겨두고 우리는 비탈길을 걸어 폭포 위 상가단지로 올라갔다. 내일 경상도와 충북을 잇는 옛 길인 새재를 넘을 계획이다. 하룻밤 묵을 곳으로 새재의 첫 관문을 약 2.5km 정도 앞둔 이곳이 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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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길, 숲의 길
새 날 아침은 흐렸다.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을 잇는 산길 9km를 사람들은 ‘문경새재’라고 부른다. 상가단지를 출발해서 조령제3관문으로 가는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시멘트 포장길이었지만 숲과 계곡이 있어 걸을 만 했다. 고갯마루에 성벽과 문이 보였다. 제3관문을 지나자 숲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젖은 숲은 처음처럼 신선했다. 넓게 다져진 흙길도 있지만 그런 길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랐다. 그 길이 원래 옛날에 사람들이 다녔던 ‘과거길’이었다.
그 길에 ‘책바위 돌탑’ 이야기가 전해진다. 새재 인근 마을에 병약한 부잣집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그 병을 고치려면 그 집을 둘러싼 돌담의 돌을 허물어 새재 책바위 앞에 쌓아 놓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 그렇게 3년 동안 돌탑을 쌓으며 치성으로 기도를 올리니 몸이 좋아졌고 공부에 전념해서 장원급제 했다고 한다. 돌탑은 전설의 증거로 남아 있고 지금도 입시철만 되면 그 돌탑 앞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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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관문. 잘 닦여진 산길을 걸어 2관문, 1관문까지 걷는다. 걷는 것 자체가 행복한 길이다.
우리는 지금 영남과 충청 이북을 잇는 문경새재길을 충북에서 경북 쪽으로 거꾸로 걷고 있는 것이다. 옛날 영남지방 선비들이 입신양명을 꿈꾸며 과거를 보러 갔던 길이 이 길이며, 그 중 더러는 과거에 합격해서 금의환향했던 길이기도 하겠다. 오솔길을 걷다 보면 큰길을 만난다. 큰길을 걷다가 또 오솔길을 만나면 그 길로 접어든다. 내리막길이라 힘들지 않는데 목이 마르다. 막걸리 한 잔 생각날 때쯤 되는 거리를 걸었을 때 어김없이 식당이 우리를 반겼다. 옛날 같으면 주막이 있었을 법 한 자리다. 실제로 새재에 주막이 있었는데 지금은 옛 주막 모습 그대로 초가를 지었다. 하지만 복원만 했을 뿐이지 아무것도 팔지 않는 빈 집이다.
조령제2관문 앞에 이르니 솔 숲 쉼터가 보였다. 솔바람이 시원하다. 2관문을 지나자 계곡의 수량은 많아졌고 계곡 또한 그 위용과 아름다움이 제법 꼴을 갖췄다. 길 가에 ‘용추약수’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계곡으로 내려서니 물이 졸졸 흐르는 약수터가 나왔다. 제2관문을 지을 당시인 조선 선조 때 군사용 식수로 사용하던 ‘샘물’터였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흙과 돌에 묻혀있던 것을 2003년에 발견 복원했다고 한다.
이 길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청에 있던 사람들이 출장을 다닐 때 숙박과 식사를 해결했던 원터가 남아 있다. 또 길가에 울창한 숲을 보호하고자 했던 ‘산불조심비’가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고갯길 넘으며 삶을 꾸려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달랬던 계곡 물소리가 그 옛날 그 소리로 살아 있었다. 약수로 목을 축이고 팍팍한 다리 두드리며 다시 걷는다. 옥빛 계곡에서 휴식 같은 휴식을 즐기며 더 쉬었다 가고 싶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다 걷고 난 뒤에 그 옛날 과거에 합격해서 ‘금의환향’했던 옛 사람의 마음으로 편안하게 고향 같은 밥상 한 번 받아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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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자가용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IC - 연풍 성지
*대중 교통 충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연풍까지 버스 18회 운행.(40분 소요) 청주시외버스터미널과 괴산시외버스터미널(시내버스터미널에서도 운행)에서 연풍 행 버스 운행.(운행 횟수가 많지 않다.)
숙소 연풍 면소재지에 여인숙과 여관이 있다. 수옥정 위 마을에 민박집이 있다.
먹을거리
올갱이국 괴산 시외버스터미널 주변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에 올갱이국 파는 식당이 띄엄띄엄 있다. 주재료인 올갱이(표준말은 ‘다슬기’)를 아욱 된장국에 넣어 끓인 요리다. 맛이 구수하다. 도토리묵밥 수옥정 위 마을에서 판다. 육수에 도토리묵을 채 썰어 넣고 김치, 김 가루, 깨소금 등을 고명으로 얹어 나온다. 공기밥이 따로 나오는데 보통 도토리묵 국물에 말아 먹는다. 도토리묵 향이 은은하게 나면서 김치의 칼칼한 맛과 김과 깨소금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졌다.
주변 여행지 출발지점인 연풍에서 괴산 방면 약 15km 거리에 있는 칠성 쌍곡계곡이 유명하다. 또 충주 방면 약 13km 거리에수안보 온천지구가 있다. 도착지점인 조령제1관문에서 약 30km 거리에 있는 가은읍 선유동계곡이 멋있다. 선유동 계곡 가기 전에 문경석탄박물관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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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 좋은 시기 : 가을
주소 : 출발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87-2 (지도보기)
도착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288-1
경로 : 네이버 테마지도 보기
총 소요시간 : 9시간
총거리 : 17km
준비물 : 편안한 운동화. 물 한 병. 햇볕 가릴 모자. 땀 흘린 뒤 보온할 옷.
옛날 영남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을 가던 길, 조선 말 천주교 신자들이 탄압을 피해 넘었던 새재길을 걷는다. | |
찻길 6km를 걷는 것은 지루하지만 나머지 길은 폭포와 계곡 숲이 있는 길이므로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는다. 수옥정 폭포부터 조령제3관문까지 약 3.8km가 오르막길이고 이후에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숲의 향기에 취해 옛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놓으면 총 17km의 코스가 어렵지 않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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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장태동
- 여행기자를 거쳐 2003년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살고 있다. 전국을 걸어 다니며 글 쓰고 사진 찍는다. [서울문학기행], [아름다운 자연과 다양한 문화가 살아 있는 서울·경기], [맛 골목 기행], [서울 사람들], [대한민국 산책길] 등의 책을 썼다. 이름 없는 들길에서 한 번쯤 만났을 것 같은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