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풍경

경주 남산 사적지

문성식 2010. 9. 17. 01:12

경주 남산 사적지

 

 

 

 

 

 

 

 






대릉원의 고분











대릉원 천마총





대릉원의 미추왕릉





첨성대










내물왕릉 지대















계림





계림비각





월성의 노송림





월성의 석빙고





석빙고 내부





안압지











안압지의 야경











 

 

 

 

 석굴암 전경

  

 

불국사의 정원
 
 

불국사 전경

 

 

천마총

 

  첨성대
 
 
황룡사지
 
 포석정
 
 
선덕대왕 신종
 
  

1)보리사마애석불

 

 

2) 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일부분은 아직도 채색이 남아 있다)
 

 

경주남산에서 보물찾기놀이

[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여행을 하다보면 학창시절 보물찾기놀이라도 하듯 종종 찾는 데에 재미를 느낄 때가 있다. 폐사지에 홀로 서 있는 석탑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이 가장 크지만 다른 유물을 찾는 즐거움도 이에 못지않다. 지금이야 워낙 길 안내가 잘 되어 찾고자 하는 유물을 별 시행착오 없이 찾지만 예전엔 꽤나 수고를 감수했어야 했다.

경주남산엔 아직도 이런 즐거움이 남아 있다. 표지판을 보고 들어가도 막상 찾으려면 애를 먹는다. 보물찾기놀이 하듯 얼마간 찾아 헤매야 한다.

서 남산은 그래도 표지판이 잘 세워져 동 남산에 비해 '보물찾기'가 비교적 쉽다. 서 남산에서 제일 푸짐한 선물을 주는 보물은 배리 삼존불상. 삼릉골 '보물'을 먼저 찾고 마지막으로 배리삼존불을 찾아야 감동이 크다.

먼저 들를 곳은 삼릉과 경애왕릉. 삼릉은 아달라왕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데 남산의 능선과 삼릉의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그려 내는 정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삼릉은 충분히 들를 만한 곳이다.

▲ 삼릉 주변의 소나무 밭
ⓒ2006 김정봉
경애왕릉은 삼릉 옆에 있다. 객사한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가 장사지내는 반장(返葬)도 하지 않은 듯 경애왕이 최후를 맞이한 포석정을 바로 옆에 두고 묻혀 있다. 빨리 올라가 다른 유물을 봐야한다는 생각에 쫓겨 이 곳을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오래된 소나무 밭의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한참을 머물러도 질리지 않는다.

소나무 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것이 석불여래좌상. 흔히 목 없는 석불좌상이라 부른다. 비록 목과 팔이 잘려 나갔으나 결가부좌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의연하여 흡사 초연의 경지에서 열반을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여민 매듭과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 주름은 자연스럽고 섬세하다.

▲ 삼릉골 석불여래좌상, 흔히 목 없는 석불좌상이라 부른다
ⓒ2006 김정봉
얼굴 모양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려볼 수밖에 없는데 필시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 같다. 날카롭게 잘려 나간 모양이 누군가 계획적으로 파괴한 것 같아 더욱 안타깝게 하는데 그 주위를 한 아주머니가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었다.

이 불상을 중심으로 10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애관음보살상. 그 모습이 궁금하여 돌길을 박차고 오르자 환한 미소를 보낸다. 등 뒤로 가서 보살님이 보는 방향으로 똑같이 보기도 하고 밑에서 올려다보고 옆에 서 보기도 하지만 노여워하지 않고 그저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고 있다. 불그스레한 입술은 자연석 빛깔을 그대로 살려 냈다고 하니 절묘하기 그지없다.

▲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자연석을 그대로 살린 붉은 입술이 인상적이다
ⓒ2006 김정봉
파다가 지쳤는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선으로 윤곽만을 그려 넣은 마애선각육존불상. 세 번째 찾아낸 보물이다. 넓은 바위 면에 본존과 협시보살을 앞 바위와 뒤쪽 바위에 각각 새겨 놓았다. 본존불은 입상이고 양쪽 협시보살은 무릎을 꿇고 본존에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 삼릉골 마애선각육존불상(앞 바위),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2006 김정봉
내친 김에 또 다른 보물을 찾아 위로 가려는 욕구가 솟구쳤으나 올라오기 전에 애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남겨 둔 보물, 배리 삼존석불입상을 찾아 서둘러 내려왔다.

배리 삼존불상을 얘기할 때 서산마애삼존불과 삼화령애기부처를 떠올린다. 모두 귀엽고, 천진하고, 해맑고, 부드럽고, 자애롭고, 친근하고, 앳되고, 아기 같고, 잔잔하고, 환하고, 인간미 넘치는 미소로 표현한다. 어느 한 가지 말로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저 글재주 없는 나로서는 '신비로운 미소'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보호각 때문에 햇살의 방향과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미소를 볼 수 없다지만 석양빛이 비스듬히 비추는 저녁 무렵이면 삼존불의 참 미소를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보호각이 철거된다고 하니 만시지감은 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 배리 삼존석불입상, 이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까? 귀엽고, 천진하고, 해맑고, 부드럽고, 자애롭고, 친근하고, 앳되고, 잔잔하고...
ⓒ2006 김정봉
중앙 여래상은 사각형 얼굴에 뺨을 부풀게 만들어 제법 근엄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얼굴에 비해 부실한 하체와 짧은 다리를 보는 순간 근엄한 분위기는 사라진다. 왼쪽 보살상이 삼존불 가운데 가장 섬세하게 조각되었는데 오른쪽 볼의 까만 자국은 삼화령 애기부처 왼쪽 협시보살상의 깨진 코가 생각나게 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가까이서 불상만을 보아 지루할 때가 되었다. 눈이 답답하고 지루한 기분이 들 때 찾게 되는 것이 탑이다. 남산동 삼층쌍탑을 찾아 발길을 서 남산에서 동 남산쪽으로 옮겨 본다. 통일전을 정면으로 보고 왼쪽 칠불암 방향으로 몇 백 미터 가지 않으면 남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서 있는 삼층쌍탑을 만난다.

▲ 남산동 삼층쌍탑, 남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서있다. 크게 보이는 것이 서탑, 뒤에 있는 탑이 동탑이다
ⓒ2006 김정봉
불국사의 다보탑석가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언뜻 보아서는 똑같은 탑이 한 쌍으로 서있는 것 같으나 기단부를 자세히 보면 다르다. 동탑(東塔)은 잘 다듬어진 여덟 개의 웅장한 돌을 어긋물리게 단층의 기단을 쌓은 반면 서탑은 이중기단을 쌓고 그 중 윗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을 조각해서 단조로움을 피했다. 동탑이 힘이 느껴진다면 서탑은 얌전하게 보여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 남산에 비해 인적이 드문 동 남산에는 미륵골, 탑골, 부처골의 골짜기가 있고 그 앞으로 남천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미륵골에 보리사가 있다면 탑골에는 부처바위가, 부처골엔 감실석불좌상이 있다.

남산동 삼층쌍탑을 등지고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먼저 닿는 곳이 보리사. 남산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서 깊은 절이나 대웅전을 비롯한 몇 채의 건물은 근래 신축하여 그다지 볼거리가 안 된다. 그러나 꼭 보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보리사 석불좌상이다.

석불사 본존불과 비교될 만큼 균형 잡히고 잘생겼다. 유리벽안에 고이 모셔진 석불사의 본존불과는 달리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모진 세월을 보낸 보리사 석불이 우리에게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문화재는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룰 때 더욱 아름답다. 항상 같은 조명과 온도, 같은 각도에서 보는 문화재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어두울 때나 환할 때, 춥거나 더울 때, 눈이 오거나 비가 올 때, 흐릴 때나 맑을 때, 그 때 그 때 제 모습을 달리하여 보일 때 더욱 감동을 주는 법이다.

▲ 보리사 석불좌상, 너무 잘생겨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2006 김정봉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선호를 따지자면 희미한 조명아래 유리벽 안에 답답하게 갇혀 근엄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석불사 본존불보다 태양빛 아래 확 터있는 공간에서 뒤쪽 바위에 쌓인 소나무 낙엽을 배경으로 소나무를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인간적이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석불이 난 더 좋다.

사람의 욕심은 재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왕 보리사에 왔으니 욕심을 부려 마애여래좌상까지 가 볼일이다. 주차장 주변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경사가 급한 오솔길을 올라 숨이 찰 즈음 위를 보면 마애석불이 반가이 맞아 준다. 주변은 협소하여 마애불을 카메라에 담기도 어려우나 마애불이 지긋이 내려다보는 배반평야와 옛 서라벌의 전망은 일품이다.

미륵골에서 남천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탑골. 탑골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높이가 9m, 둘레가 30m쯤 되는 큰 바위에 탑, 불상, 승려, 비천상과 사자상 등 30여 점의 형상을 새겨 놓았다.

▲ 부처바위 전경, 스님도 한컷
ⓒ2006 김정봉
부처바위를 찾아 처음 대하는 면이 북면, 바위 너머 언덕으로 된 부분이 남면, 가파른 언덕을 타고 솟아있는 부분이 동면이고 오른쪽 협소한 면이 서면이다. 북면은 부처바위의 중심이 되는 면으로 두 개의 탑을 좌우로 배치하고 가운데에 석가여래 좌상을, 탑 아래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좌측 탑은 9층, 우측은 7층 탑인데 9층 탑은 황룡사의 구층목탑의 원형으로 황룡사탑을 복원하는데 이 탑을 원용하였다 한다.

서면에는 마애여래 한 분과 비천상이 있고 동면에는 삼존불상과 수도승상, 그리고 6구의 비천상이 있는데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 흰 눈썹을 한 수도승이 인상적이다. 남면에는 삼존좌불상과 얼굴이 반쯤 파괴된 채 서 있는 여래입상이 있다. 삼존불은 마멸이 심해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잘 보이지 않으나 전체적인 윤곽이나 앉아 있는 모양이 그저 천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두 협시보살이 본존상에 살포시 기대듯 앉아 있는 게 3형제 인형처럼 보인다.

▲ 부처바위 남면의 삼존좌불상, 삼형제상(三兄弟像)이라고 부르고 싶다
ⓒ2006 김정봉
탑골에서 굽어 흐르는 남천을 따라 조금 돌아오면 부처골. 여기에 남산 여행의 하이라이트, 감실석불좌상이 있다. 부처골 입구에서 평지와 다름없는 언덕길을 10분 오르면 산죽이 무성한 숲이 나오고 '도깨비수막새 표지판'의 안내에 따라 산죽을 걷어치우고 올라가면 비좁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터가 나온다.

그 터에 뿌리를 내린 자연석을 폭 1.2m, 높이 1.7m, 깊이 60cm정도 파내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석불을 새겨 놓았다. 예전엔 절이 있어서 찾는 이가 많았겠지만 언제부터인지 홀로 남게 되어 외로운 나날을 보냈으니 연민의 정도 느껴진다.

멀리서 보면 할머니 같기도 하지만 가까이 보면 중년 나이 정도로 보인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수줍어하는 듯하나 눈을 감고 꽉 다문 입은 야무지게 보여 도저히 범할 수 없는 대상으로 보인다. 인자한 미소 속에 감춰진 야무진 모습은 외아들을 홀로 기른 어머니 같은 인상이다.

▲ 부처골 감실석불좌상, 멀리서 보면 할머니로, 좀더 가까이 가면 중년 부인으로, 더 가까이 가면 어머니로 보인다
ⓒ2006 김정봉
돌아가는 길에 남산에서 본 불상들의 인상을 떠올리며 표정을 지어본다. 아내와 애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배리삼존불, 보리사 석불좌상, 부처바위의 삼존불, 감실석불 등을 떠올리며 입을 굳게 다물어 보기도 하고 입 꼬리를 위로 살짝 올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떴다 해 본다.

연기 지망생들에게 경주 남산을 종주하면서 다양한 표정을 배우길 권하여 본다. 경주 남산은 최고의 연기 학원인 셈이다.
인간 세상에 내려 온 부처님 세상
경주 남산을 오른다. 해발 500m가 채 되지 않는 만만한 높이. 하지만 첫걸음부터 심상찮다. 뫼는 높지 않지만 품고있는 신라인들의 숨결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남산을 오른다는 것은 천년을 거스르며 오르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남산은 신라인들이 꿈꾸던 불국토였다. 118개의 불상과 96개의 석탑, 147곳의 절터. 산허리를 돌면 불상이고 산봉우리마다 석탑이며 골짜기마다 절터다. 한숨을 돌리고 나면 어김없이  불쑥불쑥 나타나 가슴을 뛰게 만든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은 바위 속에서 묻어나는 마애불의 미소다. 세월에 짓눌려 모양마저 온전하지 않지만 은은한 미소만은 잃지않았다. 그 많은 머리없는 불상에서도 미소는 여전했으리라. 머리없는 불상들은 천년의 세월동안 저마다 한 두 가지 사연들을 만들어냈다. 골짜기마다 전설이 넘쳐나는 이유다.

남산에 있는 불상과 석탑은 주변환경과 묘한 어울림을 만들어낸다. 곳곳의 마애불은 바위의 선을 최대한 살려 새겼다. 전혀 다듬지않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에 그림을 그리듯 하다가 갑자기 돋을새김으로 바뀐다. 부처님이 바위 속에 머물러 계신다고 믿어서일까. 남산의 부처는 바위에 숨기도 하고 바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석축만이 남아 흔적뿐인 절터엔 법당이 없다. 하긴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하나하나가 법당 아닌가. 골짜기 구석구석 미소를 머금고 앉아있는 불상들이 곧 법당이다. 불상을 새기고 탑을 쌓듯 신라인들은 그렇게 공덕을 쌓아왔다. 그래서 남산은 산이 아니다. 산의 높이는 신라인들의 공덕의 높이다. 등산이 아니라 답사하듯 남산을 올라야하는 까닭이다.

 
 

 

경주의 남산 8 경

냉골암봉

남산 서쪽, 금오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내리 뻗은
산맥이 우뚝 멈춘 곳. 그 곳이 바로 냉골 암봉이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찾는 이의 가슴까지 씻어
주는 골짜기라 하여 냉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요즘은 삼릉골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남산에서 가장 많은 불상과 마애불을 품고 있어 찾는 사람 또한 가장 많은 골짜기이다. 가파른 골짜기를
오르노라면 소나무 옆 바위틈에서 나타나는 불보살상,
마지막 오르막을 힘차게 올라서면 나타나는 마애여래
대좌불, 지금 막 바위 속에서 나투어 근엄하면서도
후덕한 모습으로 망산과 벽도산, 삿갓봉을 지긋이

굽어보고 계신다. 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넓은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바둑바위이다.
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두던 곳이고, 그 옆에는 봉황이 춤을 추던 금송정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냉골암봉은 바로 옆에 있는 상사바위와 어우러져 남산 제일 절경을 이루고 있다.


칠불암과 신선암

고위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맥이 다시 한번 용솟음
치는 곳에 봉화대가 있고, 그 아래 천길 절벽 아래에
칠불암과 신선암이 자리잡고 있다.


동해 대왕암에서 솟아오른 태양이 석굴암대불을
비추고 다시 솟아오른 태양이 가장 먼저 비추는 곳,
도솔천에서 내려오신 미륵보살이 유유히 노니시는 곳,불국정토 남산을 장엄하고 있는 일곱 분의 불보살이
천사백년을 지키고 계신 곳.
이곳을 우리는 남산의 또한 절경으로 꼽는다.

 

천룡고원

하늘 위에 병풍을 두른 평원이 있고, 하늘 위에서는 천룡이 용트림하는 곳. 이곳이 바로 남산의 세 번째 절경이다.


천녀와 용녀의 전설이 살아있고, 열반의 염원이 용솟음 치는 곳. 이 곳은 옛 신라시대부터 '고사'라는 절이 있었고,
고려 때는 최재안이 성수천장과 국태민안을 위하여 중창한 천룡사가 자리한 곳이었다.

용장계곡

긴 노루목은 맑은 물을 돌 사이로 흘러내리고 매월
당의 사랑가와 기개는 돌이며 나무며 구르는 흙에
조차 배어있다. 산은 탑을 이고 하늘을 열었는데 한
여인은 열반길로 향하네.
고개를 들면 용장사 탑이 아득한 수미산 위에 걸쳐져
있고, 너른 바위 반석 위를 돌아가는 물에 다 쉬어
놓고 보면, 그대로가 자연이 되어 계곡이 되고, 맑은
물이 되고, 바위와 탑이 되어 버린다.


용장계곡은 남산에서 가장 긴 계곡이며, 사철 맑은
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 내린다.


용장계곡은 다시 열반골, 은적골, 법당골, 절골, 탑상골, 연화대골, 이영재골, 못골 등으로 갈라지며,
이골에는 용장사지를 비롯하여 22곳의 절터와 6구의 불상과 11기의 탑이 있다.



황금대

금오산이 북서쪽으로 뻗어 냉골암봉을 이루고, 다시 북으로 내리 달려 포석암반이 이루어진 곳에 바위 절벽을
이루었으니 황금대이다.


석양이 온 바위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곳. 너르고 완만한 골짜기가 불현듯 솟아 봉우리를 세우니 온통 기암과 괴석을
주변에 데려다 놓았다. 한 사람이 서면 탑이 하나 솟은 듯하고, 두 사람이 서면 쌍 탑인 듯, 여러 사람이 서면 기러기
행렬 같은 탑 모둠이 된다. 경주시내가 그를 높여보고 좌우 능선들은 협시보살이 되었다.

 

 

남산부석

남산은 온통 하늘이라 버선발로 춤을 춘다.
동남산 어디에서든 하늘 춤을 추며 덩실 떠있는 부
석은 과연 신의 조화다. 어찌 보면 절을 하는 듯,
어찌 보면 흥겨운 고개 춤을 추는 듯하다.
상사바위와 친분이 많은 듯하고 아슬아슬한 자신 앞에
제법 너른 터도 마련해 바람과 행인이 함께 쉬어가게
한다. 간혹 피리 부는 누군가가 하늘의 여흥을 더해
준다.


남산에서도 국사골은 바위와 깊은 계곡이 어우러진
절경이다.
이 골짜기 가장 높은 곳 사자봉 바로 아래에는 하늘에 떠있는 바위가 있다. 옛날 두 사람이 명주실을 마주잡고 돌았는데
끊어지지 않고 빠져 나왔다 한다. 어찌 보면 부처님 머리 같고, 어찌 보면 버선 같아 불두바위, 버선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신라 삼기팔괴중 하나이다.

 

늠비봉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 거기에 단아하게 하늘을
이고 오층탑이 섰다.
별 치장도 없고 큰 몸짓도 없이 그 모습 그대로다.
어쩌면 몸이야 다소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그대로다.


소담한 봉우리에 단아한 탑 하나. 바위산을 하층기단
으로 삼고 불쑥 솟은 오층탑. 그 주위로 산 능선이
나비처럼 날개를 펼치고 있다.


금오산이 북동쪽으로 뻗어 내려 불쑥 솟은 곳에 금오정이 있고, 그 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다 바위 봉우리를 이루었으니 늠비봉이다.


포석계곡의 중앙을 지키면서 부엉더미와 황금대,
냉골 암봉, 금오봉, 해목령 등에 둘러싸여 서라벌을
굽어보는 위치가 가히 절경이다.



삼릉 송림

늘 푸른 소나무 숲 터널. 붉은 몸으로 하늘 향해 뻗은
모습과 아름드리 빽빽한 기상이 오가는 이 모두의
피로를 씻어준다.
뭇 사람과 인사를 나누듯 구불하기도 하고 쏴한 바람
소리는 가슴을 후련히도 씻어준다.


삼릉숲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릉과 개울건너 55대 경애왕릉이 있는 송림이며, 일찍이
왕릉으로 비정되어 보호되어 왔기에, 솔숲 또한 150여
년 남산을 지켜오고 있다.

 

경의로운 세계도시 경주

 서기 7세기경, 지구상의 모든 도시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곳은 어디였을까?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
 그곳은 바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신라의 수도 경주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기때 수도가 17만 8936호로 나와있다.
 1호가 한가구를 뜻한다고 보았을때, 최소한 70만 이상의 대도시였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 경주 총인구의 2배가 넘는 숫자였다.
  따라서 이 기록을 과장된 것으로 보고나, 혹은 戶가 사람숫자 1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기록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살펴 보자.


 현재 경주에는 대규모의 집자리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것을 뒷받침 해줄만한 기록도 보이고 있다.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삼국사기에 영흥사에 화재가 나 민가 350채가 한꺼번에 불탔다란 기록이 있다. 이것을 보아도 당시 주택 밀집도는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꾸준한 인구유입등으로 인하여 인구의 증가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신라는 택지의 면적을 제한하는 한편,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신라는 정방형의 대도시 계획을 경주전체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분에 따라 진골 즉 왕족은 24척,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하도록하였다. 따라서 일반인의 경우에는 12척을 넘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경주 시가지 전체를 8000평 규모의 정사각형 블록으로 나누었다. 신라시대에는 이러한 블록을 坊(방)이라 블렀는데, 경주시내에는 이러한 방이 총 360개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경주시 동천동 유적군과 황룡사지에 인접한 왕경지구에서도 8000평 정도의 정방형 모양의 대규모 유적지자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 유적지에는 일정한 거리마다 우물과 출입문터가 발견되었고 十(십)자 모양으로 정비된 도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경주시가지에 대한 기록은 틀림없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추산해 보면 8000평 규모의 1방에는 150채가 들어설 수 있고, 360방으로 환산하면 5만 4천가구에 21만 에서 27만 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여기에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서울 경주에 이러한 방이 1360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나머지 1천방에는 15만 안팍의 가구가 살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중심지에 인구 밀도가 다소 높다고 볼때 17만 8936호설은 사실로 간주하여도 결코 지나친 주장이 아니다.

 당시 신라가 작성한 문서(신라장적, 혹은 민정문서로도 불림)를 보면, 소나 말 그리고 뽕나무 숫자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정확하게 조사한 까닭은 세금징수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정밀한 문서를 작성한 신라에서 가구를 조사하였다면 오차가 백단위 이상으로는 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사찰에는 순수하게 수도를 하기위한 승려뿐 아니라, 사원세력이 점차 정치화되면서 상당수의 학식을 갖춘 귀족자제들도 불교에 입문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술이라기 보다는, 일연의  감수아래 고도의 학식을 갖춘 승려집단이 자료를 모아쓴 공동저술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기이편은 김부식의 주도아래 편찬된 삼국사기중, 그 내용이 신빙성이 없다하여 누락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당시까지 전해져온 삼국시대 역사서를 그대로 참조하여 인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아무튼 1360방중 360방이 있던 지역은 경주지역 중에서도 중앙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귀족이나 부유층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예로 신라 49대 헌강왕이 신하에게 묻기를
 "지금 민가에선 모두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을 때 밥을 짓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하자 신하가 대답하길
 "신도 그렇게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나라는 평안하니 모두 성덕이 소치입니다."라고 했다.

 이 기록은 경주의 융성함이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긴 하지만, 어느시대이든 빈부의 격차는 있게 마련이고, 그 시대 모든 사람이 360방 안에 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360방 안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 외각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어쩌면 도시정비차원이라던가 당시 엄격한 신분 구조상, 최소한의 골품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세력만이 살 수 있었던 구역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18만여호를 이루는 경주 전체의 가구수도 충분히 존재 할 수 있다. 물론 70만이 넘는 인구가 어떻게 30만 이하로 급감할 수 있는가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1000년이 넘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당시 경주는 토착세력의 높은 출산률을 바탕으로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삼국통일로 촉발된 인구집중 현상을 가만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삼국통일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신라의 치안력이 미치는 범위는 제한적일수 박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구 백제와 고구려는 전쟁직후 벌어지는 치안부재현상이라던가 공황을 격어야만 했을 것이고, 이러한 것이 인구격증의 또다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80만까지 늘어났던 경주는, 고려의 통일로 변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왜구의 잦은 침략에 노츨되면서 차츰 인구의 감소세로 접어든다. 하지만 경주는 우리나라 남쪽의 주요한 거점도시이자, 문화도시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경주는 현재에도 그 도시 자체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을 뿐더러, 서기 600년에서 800년 사이 약 200여 년간 세계 최고의 도시라는 지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안압지 첨성대 그리고 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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