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사적지
대릉원의 고분
대릉원 천마총
대릉원의 미추왕릉
첨성대
내물왕릉 지대
계림
계림비각
월성의 노송림
월성의 석빙고
석빙고 내부
안압지
안압지의 야경
석굴암 전경
불국사 전경
천마총
1)보리사마애석불
2) 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일부분은 아직도 채색이 남아 있다)
경주남산에서 보물찾기놀이 | ||||||||||||||||||||||||||||||||||||||||||||||||||||||||||||||||
[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여행을 하다보면 학창시절 보물찾기놀이라도 하듯 종종 찾는 데에 재미를 느낄 때가 있다. 폐사지에 홀로 서 있는 석탑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이 가장 크지만 다른 유물을 찾는 즐거움도 이에 못지않다. 지금이야 워낙 길 안내가 잘 되어 찾고자 하는 유물을 별 시행착오 없이 찾지만 예전엔 꽤나 수고를 감수했어야 했다.
경주남산엔 아직도 이런 즐거움이 남아 있다. 표지판을 보고 들어가도 막상 찾으려면 애를 먹는다. 보물찾기놀이 하듯 얼마간 찾아 헤매야 한다. 서 남산은 그래도 표지판이 잘 세워져 동 남산에 비해 '보물찾기'가 비교적 쉽다. 서 남산에서 제일 푸짐한 선물을 주는 보물은 배리 삼존불상. 삼릉골 '보물'을 먼저 찾고 마지막으로 배리삼존불을 찾아야 감동이 크다. 먼저 들를 곳은 삼릉과 경애왕릉. 삼릉은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데 남산의 능선과 삼릉의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그려 내는 정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삼릉은 충분히 들를 만한 곳이다.
소나무 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것이 석불여래좌상. 흔히 목 없는 석불좌상이라 부른다. 비록 목과 팔이 잘려 나갔으나 결가부좌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의연하여 흡사 초연의 경지에서 열반을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여민 매듭과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 주름은 자연스럽고 섬세하다.
이 불상을 중심으로 10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애관음보살상. 그 모습이 궁금하여 돌길을 박차고 오르자 환한 미소를 보낸다. 등 뒤로 가서 보살님이 보는 방향으로 똑같이 보기도 하고 밑에서 올려다보고 옆에 서 보기도 하지만 노여워하지 않고 그저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고 있다. 불그스레한 입술은 자연석 빛깔을 그대로 살려 냈다고 하니 절묘하기 그지없다.
배리 삼존불상을 얘기할 때 서산마애삼존불과 삼화령애기부처를 떠올린다. 모두 귀엽고, 천진하고, 해맑고, 부드럽고, 자애롭고, 친근하고, 앳되고, 아기 같고, 잔잔하고, 환하고, 인간미 넘치는 미소로 표현한다. 어느 한 가지 말로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저 글재주 없는 나로서는 '신비로운 미소'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보호각 때문에 햇살의 방향과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미소를 볼 수 없다지만 석양빛이 비스듬히 비추는 저녁 무렵이면 삼존불의 참 미소를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보호각이 철거된다고 하니 만시지감은 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가까이서 불상만을 보아 지루할 때가 되었다. 눈이 답답하고 지루한 기분이 들 때 찾게 되는 것이 탑이다. 남산동 삼층쌍탑을 찾아 발길을 서 남산에서 동 남산쪽으로 옮겨 본다. 통일전을 정면으로 보고 왼쪽 칠불암 방향으로 몇 백 미터 가지 않으면 남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서 있는 삼층쌍탑을 만난다.
서 남산에 비해 인적이 드문 동 남산에는 미륵골, 탑골, 부처골의 골짜기가 있고 그 앞으로 남천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미륵골에 보리사가 있다면 탑골에는 부처바위가, 부처골엔 감실석불좌상이 있다. 남산동 삼층쌍탑을 등지고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먼저 닿는 곳이 보리사. 남산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서 깊은 절이나 대웅전을 비롯한 몇 채의 건물은 근래 신축하여 그다지 볼거리가 안 된다. 그러나 꼭 보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보리사 석불좌상이다. 석불사 본존불과 비교될 만큼 균형 잡히고 잘생겼다. 유리벽안에 고이 모셔진 석불사의 본존불과는 달리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모진 세월을 보낸 보리사 석불이 우리에게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문화재는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룰 때 더욱 아름답다. 항상 같은 조명과 온도, 같은 각도에서 보는 문화재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어두울 때나 환할 때, 춥거나 더울 때, 눈이 오거나 비가 올 때, 흐릴 때나 맑을 때, 그 때 그 때 제 모습을 달리하여 보일 때 더욱 감동을 주는 법이다.
사람의 욕심은 재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왕 보리사에 왔으니 욕심을 부려 마애여래좌상까지 가 볼일이다. 주차장 주변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경사가 급한 오솔길을 올라 숨이 찰 즈음 위를 보면 마애석불이 반가이 맞아 준다. 주변은 협소하여 마애불을 카메라에 담기도 어려우나 마애불이 지긋이 내려다보는 배반평야와 옛 서라벌의 전망은 일품이다. 미륵골에서 남천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탑골. 탑골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높이가 9m, 둘레가 30m쯤 되는 큰 바위에 탑, 불상, 승려, 비천상과 사자상 등 30여 점의 형상을 새겨 놓았다.
서면에는 마애여래 한 분과 비천상이 있고 동면에는 삼존불상과 수도승상, 그리고 6구의 비천상이 있는데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 흰 눈썹을 한 수도승이 인상적이다. 남면에는 삼존좌불상과 얼굴이 반쯤 파괴된 채 서 있는 여래입상이 있다. 삼존불은 마멸이 심해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잘 보이지 않으나 전체적인 윤곽이나 앉아 있는 모양이 그저 천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두 협시보살이 본존상에 살포시 기대듯 앉아 있는 게 3형제 인형처럼 보인다.
그 터에 뿌리를 내린 자연석을 폭 1.2m, 높이 1.7m, 깊이 60cm정도 파내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석불을 새겨 놓았다. 예전엔 절이 있어서 찾는 이가 많았겠지만 언제부터인지 홀로 남게 되어 외로운 나날을 보냈으니 연민의 정도 느껴진다. 멀리서 보면 할머니 같기도 하지만 가까이 보면 중년 나이 정도로 보인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수줍어하는 듯하나 눈을 감고 꽉 다문 입은 야무지게 보여 도저히 범할 수 없는 대상으로 보인다. 인자한 미소 속에 감춰진 야무진 모습은 외아들을 홀로 기른 어머니 같은 인상이다.
연기 지망생들에게 경주 남산을 종주하면서 다양한 표정을 배우길 권하여 본다. 경주 남산은 최고의 연기 학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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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남산 8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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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두던 곳이고, 그 옆에는 봉황이 춤을 추던 금송정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냉골암봉은 바로 옆에 있는 상사바위와 어우러져 남산 제일 절경을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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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에 병풍을 두른 평원이 있고, 하늘 위에서는 천룡이 용트림하는 곳. 이곳이 바로 남산의 세 번째 절경이다. 천녀와 용녀의 전설이 살아있고, 열반의 염원이 용솟음 치는 곳. 이 곳은 옛 신라시대부터 '고사'라는 절이 있었고, 고려 때는 최재안이 성수천장과 국태민안을 위하여 중창한 천룡사가 자리한 곳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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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계곡은 다시 열반골, 은적골, 법당골, 절골, 탑상골, 연화대골, 이영재골, 못골 등으로 갈라지며, 이골에는 용장사지를 비롯하여 22곳의 절터와 6구의 불상과 11기의 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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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이 북서쪽으로 뻗어 냉골암봉을 이루고, 다시 북으로 내리 달려 포석암반이 이루어진 곳에 바위 절벽을 이루었으니 황금대이다. 석양이 온 바위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곳. 너르고 완만한 골짜기가 불현듯 솟아 봉우리를 세우니 온통 기암과 괴석을 주변에 데려다 놓았다. 한 사람이 서면 탑이 하나 솟은 듯하고, 두 사람이 서면 쌍 탑인 듯, 여러 사람이 서면 기러기 행렬 같은 탑 모둠이 된다. 경주시내가 그를 높여보고 좌우 능선들은 협시보살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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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고 빠져 나왔다 한다. 어찌 보면 부처님 머리 같고, 어찌 보면 버선 같아 불두바위, 버선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신라 삼기팔괴중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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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로운 세계도시 경주
서기 7세기경, 지구상의 모든 도시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곳은 어디였을까?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
그곳은 바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신라의 수도 경주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기때 수도가 17만 8936호로 나와있다.
1호가 한가구를 뜻한다고 보았을때, 최소한 70만 이상의 대도시였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 경주 총인구의 2배가 넘는 숫자였다.
따라서 이 기록을 과장된 것으로 보고나, 혹은 戶가 사람숫자 1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기록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살펴 보자.
현재 경주에는 대규모의 집자리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것을 뒷받침 해줄만한 기록도 보이고 있다.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삼국사기에 영흥사에 화재가 나 민가 350채가 한꺼번에 불탔다란 기록이 있다. 이것을 보아도 당시 주택 밀집도는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꾸준한 인구유입등으로 인하여 인구의 증가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신라는 택지의 면적을 제한하는 한편,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신라는 정방형의 대도시 계획을 경주전체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분에 따라 진골 즉 왕족은 24척,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하도록하였다. 따라서 일반인의 경우에는 12척을 넘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경주 시가지 전체를 8000평 규모의 정사각형 블록으로 나누었다. 신라시대에는 이러한 블록을 坊(방)이라 블렀는데, 경주시내에는 이러한 방이 총 360개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경주시 동천동 유적군과 황룡사지에 인접한 왕경지구에서도 8000평 정도의 정방형 모양의 대규모 유적지자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 유적지에는 일정한 거리마다 우물과 출입문터가 발견되었고 十(십)자 모양으로 정비된 도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경주시가지에 대한 기록은 틀림없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추산해 보면 8000평 규모의 1방에는 150채가 들어설 수 있고, 360방으로 환산하면 5만 4천가구에 21만 에서 27만 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여기에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서울 경주에 이러한 방이 1360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나머지 1천방에는 15만 안팍의 가구가 살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중심지에 인구 밀도가 다소 높다고 볼때 17만 8936호설은 사실로 간주하여도 결코 지나친 주장이 아니다.
당시 신라가 작성한 문서(신라장적, 혹은 민정문서로도 불림)를 보면, 소나 말 그리고 뽕나무 숫자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정확하게 조사한 까닭은 세금징수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정밀한 문서를 작성한 신라에서 가구를 조사하였다면 오차가 백단위 이상으로는 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사찰에는 순수하게 수도를 하기위한 승려뿐 아니라, 사원세력이 점차 정치화되면서 상당수의 학식을 갖춘 귀족자제들도 불교에 입문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술이라기 보다는, 일연의 감수아래 고도의 학식을 갖춘 승려집단이 자료를 모아쓴 공동저술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기이편은 김부식의 주도아래 편찬된 삼국사기중, 그 내용이 신빙성이 없다하여 누락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당시까지 전해져온 삼국시대 역사서를 그대로 참조하여 인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아무튼 1360방중 360방이 있던 지역은 경주지역 중에서도 중앙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귀족이나 부유층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예로 신라 49대 헌강왕이 신하에게 묻기를
"지금 민가에선 모두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을 때 밥을 짓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하자 신하가 대답하길
"신도 그렇게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나라는 평안하니 모두 성덕이 소치입니다."라고 했다.
이 기록은 경주의 융성함이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긴 하지만, 어느시대이든 빈부의 격차는 있게 마련이고, 그 시대 모든 사람이 360방 안에 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360방 안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 외각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어쩌면 도시정비차원이라던가 당시 엄격한 신분 구조상, 최소한의 골품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세력만이 살 수 있었던 구역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18만여호를 이루는 경주 전체의 가구수도 충분히 존재 할 수 있다. 물론 70만이 넘는 인구가 어떻게 30만 이하로 급감할 수 있는가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1000년이 넘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당시 경주는 토착세력의 높은 출산률을 바탕으로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삼국통일로 촉발된 인구집중 현상을 가만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삼국통일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신라의 치안력이 미치는 범위는 제한적일수 박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구 백제와 고구려는 전쟁직후 벌어지는 치안부재현상이라던가 공황을 격어야만 했을 것이고, 이러한 것이 인구격증의 또다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80만까지 늘어났던 경주는, 고려의 통일로 변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왜구의 잦은 침략에 노츨되면서 차츰 인구의 감소세로 접어든다. 하지만 경주는 우리나라 남쪽의 주요한 거점도시이자, 문화도시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경주는 현재에도 그 도시 자체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을 뿐더러, 서기 600년에서 800년 사이 약 200여 년간 세계 최고의 도시라는 지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안압지 첨성대 그리고 계림
출처 :미녹시기 원문보기▶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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