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연중 제2주간 수요일(1/18)|오늘의 말씀과 묵상

문성식 2012. 1. 18. 22:21




연중 제2주간 수요일(1/18)







    (일치 주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과 이루는 일치를 권장하면서, 1964년 11월 21일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을 선포하였다. 교령은 분열이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교회는 이 정신에 따라 해마다 1월 18일부터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하여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말씀의 초대
    소년 다윗은 필리스티아의 전사와 맞서 싸운다. 어린 다윗의 손에 들린 것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였지만 다윗은 그를 무찌른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은 다윗의 믿음이 그를 이긴 것이다(제1독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 이는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하고 질문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다(복음).
    제1독서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필리스티아 사람을 이겼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32-33.37.40-51 그 무렵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 필리스티아 사람도 방패병을 앞세우고 나서서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시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도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향하여 전열 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누르고 그를 죽였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다윗은 달려가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밟고 선 채,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사람은 살아가면서 적어도 두 가지 이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두 여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1열왕 3,16-28 참조). 진짜 어머니는 아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참으로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아들을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가짜 어머니는 칼로 아이를 잘라 아이가 죽더라도 반쪽만이라도 챙기겠다고 말합니다. 참된 선택의 기준은 사랑에 있고 그 사랑은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진퇴양난의 고비를 어떻게 맞으시는지 보고 싶었으며, 예수님을 고발할 적당한 구실도 찾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면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위반한 것이 되고, 안식일 법을 지키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율법이냐? 사랑이냐?” 이 두 가지가 서로 상충될 때 어느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선택의 때에 행동 방침을 주시지 않고 근본 규범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행동한 것, 또는 행하려고 하는 것의 근본 동기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결단하는 것이 식별입니다. 그런데 식별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함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흘러 넘치는 주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