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12/14)|오늘의 말씀과 묵상

문성식 2011. 12. 14. 23:59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12/14)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스페인 폰티베로스의 에페스에서 태어났다. 요한은 19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여 뒷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살라만카에서 아빌라 성녀 데레사를 만나 수도회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다. 성인은 반대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받았고 유괴되어 톨레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성인은 이러한 체험으로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둔 밤』 등 수많은 영성 저술을 남겼다. 성인은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교회의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성인은 1591년 12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726년 시성되었고, 1926년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말씀의 초대
    빛과 어둠, 그리고 세상의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주님 밖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듭 강조하신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끊임없이 다른 우상을 찾기 때문이다(제1독서). 요한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보여 주신 여러 표징들을 말씀해 주신다. 당신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은 말이 아니라 당신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이다(복음).
    제1독서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5,6ㄴ-8.18.21ㅁ-25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내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 그분께 격분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 앞에 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ㄴ-23 그때에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세례자 요한이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서 정말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오실 분’이신지 아니면 또 다른 분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여쭙게 합니다. 요한은 왜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요? 예수님을 두고 이미 자신은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심을 인정했는데(루카 3,16 참조), 이런 의문을 가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이 기대하는 ‘오실 분’은 구약의 다윗의 왕국을 새로 세워 주시고, 열매 맺지 못할 나무를 넘어뜨리시고, 손에 키를 들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심판자로서 주님이셨습니다(루카 3,9.17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힘없는 스승이셨으며, 변변찮은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이나 돌보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요한은 예수님께서 정말 오시기로 한 분이신지 의심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라는 말씀으로 요한의 질문을 대신합니다. 곧 예수님의 심판은 분노와 징벌이 아니며 피조물이 불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아나는 구원을 말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이지요. 주님의 이 사랑을 오히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 같은 기득권자들입니다. 탐욕스럽고 냉정하고 베풀 줄 모르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마치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가 순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자 증오에 찬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는 것과 같습니다(사도 7,57 참조). 사실 심판은 그분의 사랑 앞에서 스스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눈먼 이들의 눈이 되어 주고 다리저는 이들의 다리가 되어 주는 사랑의 삶 속에 이미 있습니다. 사랑의 불꽃이 내 안에 타오르면 이미 그분과 하나의 불꽃이 되어 그분의 생명을 누리는 구원받은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불꽃처럼 우리 자신을 태우며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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