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묵상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요약) 8 - 김홍전 목사

문성식 2011. 8. 1. 00:16

 

 

하나님에 대한 묵상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요약) - 김홍전 목사

 

성경은 은혜의 방도이다 8.

 

하나님의 사자의 자격

교회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은

자기 사정에 따라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말씀은 이것이다' 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말씀은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가르치면

그것이 다 은혜의 방도이냐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닌데 교회라 자칭하는 일이 많으며

또 하나님의 사자가 아닌데 하나님의 사자라고 자칭하는 자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영도, 교사의 영도 없는데 말씀의 사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물론 선지자가 사람 마음대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의 영'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하는 것을 인식할 만한 정도의

명확하고도 특수한 은사, 카리스마라는 것이 그에게 움직였습니다. 

오늘날 선지자라는 말을 쓸 때 목사이면 다 선지자냐?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는 당연히 교사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선지자라 한다면

항상 시대의 앞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적응해서 당대의 사람들에게

시대적인 사명을 일러주는 사람이라야 선지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목사들은 대개 교사로서 역할을 하며,

그에게 선지자의 영이 없는데도 우리가 선지자로서 일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할 것 같으면 성경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자꾸 보아 가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이 아니라 역사라는 큰 흐름을 눈앞에 놓고 앉아서 새로운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당대를 짚어 가면서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 그런 은사의 영이 없는 사람들이

제도 안에서 무엇이 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은사의 영

여기서 '영'이라는 것이 반드시 성령님의 인격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의 '영'이라 하면 '선지자의 정신',

곧 선지자가 받은 영혼의 기능의 작용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특수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기에 '영'이라는 말로 씁니다.

성경에서 '영'이라는 말을 쓸 때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영을 나타내기도 하고,

일반적인 말로 정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를 억지로 성령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지자의 영이나 교사의 영과 같은 특수한 영이 없는 사람들이

제도 안에서 목사가 되고 교사가 될 때, 하나님께서

 '할 수 없다. 너희에게도 교사의 영을 조금 나누어주마' 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거짓 사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말씀의 권위, 강대의 권위를 흐려 놓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강대라는 것을 권위 있게 생각할 만한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특수한 영을 부어 주셔서,

그 카리스마를 가지고 강대에 설 때 말씀의 사자로서의 의미가 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그러한 실질보다는 제도와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나쁜 경향이 퍼져 있습니다.

애초에 경건의 능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올라서 있으니 권위가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목사라는 자리가 어떤 정도입니까? 아무나 다 목사가 되니 권위가 설 턱이 없는 것입니다.

카리스마는 고사하고 사람의 직위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하나님께서는 참된 교회를 역사를 통해서 면면히 땅 위에 늘 존재케 하시고

계속 흘러 나가게 하시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사자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 예언자가 나오면 그 선지자에 의해 배우고 궁구한

교사들이 충실하게 그 뒤를 습답해서 계속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가르침이 고갈되고 시대의 요구는 강해지며 문제는 착잡해지게 되어

지난 세기의 선지자의 말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새로운 예언자를 세우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가 전연 딴소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있던 근간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바울 선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히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여러 교사들이 그것을 계승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이 계속 변질되어 가자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이라는 위대한 예언자를 내세우셔서 진리를 바로 비추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 다시 변질되고 혼란에 빠지자

하나님께서는 개혁 시대에 위대한 예언자를 다시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위대한 예언자들이 나왔지만

그들이 전 시대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바울 선생의 말씀을 해명하는 데 주력했지

자기가 딴소리를 새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루터나 칼빈 선생도 어거스틴의 권위에 의존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옛것을 무시하고 새것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별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그만 운동들은 과거의 전통이나 위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생각할 만한 기능이 없으며, 심오한 은사들은 더더욱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말을 쓸 때도 주의해야 합니다.

특별히 칼빈주의라는 말에 대해 주의할 것은

그것이 칼빈 선생 한 사람만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혁 신학은 계승해서 면면히 흘러나온 것으로 모두 합해진 것이지

칼빈 선생 하나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교회의 경우는 다릅니다. 거기엔 루터 자신의 경험과 주장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루터 신학이라는 말은 쓸 수 있지만,

칼빈 신학이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틀린 말이며, 개혁 신학이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해서 깨달았을 때,

그래서 마음에 그 깨달은 바가 바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서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깨달은 만큼 속사람이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효과를 내지 못하면 많이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