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그리고 성

세상에는 두가지 여자만 있다

문성식 2011. 6. 9. 17:16
 


1990년 그해, 그 도시에는 아무나하고 자는 여자가 있었다. 1990년 그해, 그 도시에서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는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두 문장은 1992년에 출간된 박일문의 장편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 제2부 ‘길의 노래’ 의 첫 부분이다. 이 두 페이지 지면에서 얘기하려 하는 건 아무한테나 주는 여자와 아무한테나 안 주는 여자의 심리와 그것을 보는 우리의 기분이다. 사실 이번 주제는 잡지 에디터를 지망하는 어느 총명한 여자가 제공한 것이다. 에디터는 그녀가 던져준 작은 질문을 붙잡자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나왔던 여대생 ‘디디’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그녀가 바로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디디와 자고 싶으면 그녀 앞에서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털어놓으면 된다. 그리고 그녀가 요구하는 밥이나 담배, 술 같은 것들을 사주면 된다. 그렇다고 그녀가 너절한 여자는 아니다. 오히려 섹스를 하면서 엘리엇의 시를 읊고, 도서관에서 <사회주의 운동사>를 읽는 세련된 여자다. 그녀를 헤픈 여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 나름의 규범이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의식이다. 디디는 자신을 쿨섹스주의자라고 밝힌다. 번식만이 아니라 쾌락과 커뮤니케이션이 성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디는 극단적으로 ‘쿨’한 90년대식 캐릭터다. 그래도 그때 에디터는 아무한테나 주는, 그러면서도 세련된 그녀에게 빠졌다. 그녀는 ‘육보시(肉報施) 콤플렉스’라고 불러도 좋을, 모든 남자들의 판타지 그 자체다. 어쩌면 에디터는 디디라는 캐릭터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디디 같은 여자가 있을 것만 같았고, 그런 여자를 만나게 될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너무 당연하게도 그런 여자는 없었다. 에디터가 아는 여자들은 디디처럼 아무한테나 주지 않았다.

 


아무한테나 안 주는 그녀들을 크게 몇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줄 수는 있는데 아깝거나, 겁이 나서 안 주는 여자들이 있다. 한번 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저 그런 남자한테 주기는 아깝다는 거다. 아무한테나 주는 걸 두려워하는 여자들은 정서적인 허무함을 경계한다. 썩 내키지 않는 남자와 몸을 부비다 추스려 털고 일어날 때 가슴에서 뚝뚝 떨어지는 그 허무함이 두려운 거다. 아무한테나 안 주는 여자들의 또 한 가지 심리가 있다. 좋아하는 남자한테 자기 알몸을 보이는 게 두렵다는 거다. 불 끄고 하자고 조르는 여자들은 부끄러워서 그렇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출렁거리는 뱃살이나 작은 가슴 때문에 그럴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아무한테나 안 주는 또 다른 부류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거라고 포장되지만, 실은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거나 ‘너는 내 운명’일 수밖에 없는 진짜 사랑을 해본 여자들이다. 이런 여자들은 같이 술 잘 마시고 순순히 남자 집까지 입장했어도 결정적 순간에 단호하게 거부하곤 한다. 경제 관념이 밝은 여자들도 아무한테나 안 준다. 섹스를 시장 논리로 보면, 표면적으로는 여자들의 ‘공급’보다는 남자들의 ‘수요’가 더 많다. 그녀들은 자기 몸값을 올리려고 그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늘 수지를 따진다. 에디터의 취재에 응해준 주위 여자들은 이 밖에 처녀성이라도 지키고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 신비감을 남기고 싶어하는 여자, 어릴 때 성폭행을 당했던 여자들도 아무한테나 안 주는 여자로 꼽았다.

아무한테나 안 주는 여자들이 있는 곳에서 아무한테나 주는 여자들이 모인 곳으로 가려면, 강을 하나 건너야 한다. 그런데 그 강의 바닥에는 자존감과 콤플렉스가 있다. 이 두 가지가 양쪽을 나누는 강에 있는 이유는, 그 마음 때문에 강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오르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세서 ‘어딜 감히 너 정도 남자가’ 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강에서 나와 아무한테나 안 주는 여자들이 있는 곳에 상륙한다. 그런가하면 똑같이 자존감은 세지만 ‘이런 남자한테 한번 줘도 나한텐 흠집 하나 안나’ 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아무한테나 주는 여자들이 있는 쪽으로 오른다. 콤플렉스도 비슷하다. ‘난 부족하고 모자라서 아무한테도 줄 수 없어’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러니까 아무한테나 줄래,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해?’가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제 아무한테나 주는 여자들이 있는 동네로 건너보자. 사실 아무한테나 주는 여자들의 마음이 더 궁금하다. 그런 여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여자는 남자에 비해 아무 이성하고나 자기 힘들게 프로그래밍되었으니까.

사랑하는 남자한테는 잘 주는 경우, 섹스를 너무 좋아하는 경우는 논외로 치자. 그렇지 않고도 아무한테나 주는 여자들의 몇 가지 부류를 보면 우선, 유혹하고 유혹 받는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기복을 즐기는 대범한 여자가 있다. 돈이나 지위, 계약 같은 걸 얻기 위한 정치적인 섹스를 하는 여자도 계산이 맞으면 아무한테나 준다. 이미 한번 해본 여자도 그렇고, 몸 준다고 마음까지 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자, 그거 한번 해보겠다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 남자를 동정하는 여자도 그렇다. 또 있다. 섹스를 즐거운 다이어트라고 생각하는 여자, 섹스에서 정서적인 충족까지 기대하지 않는 여자, 나이를 먹으면 성적 매력이 떨어지는 걸 아는 여자다.

여기서 일부러 빼놓은 여자들이 있다. 남자들마다의 육체적, 정신적 차이가 주는 맛의 ‘다름’을 즐기는 여자들이다. 에디터도 남자여서 그런지, 이런 ‘차이’를 즐기는 건 대개 남자라고 생각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토마스가 좋은 예다. 사랑과 섹스를 별개로 생각하는 전직 외과의사인 그는 여러 여자와 섹스하면서 각각의 육체가 가진 미묘한 차이를 즐기고, 거기서 섹스의 의미를 찾는다. 그런데 우리 주위 여자들도 이미 그런 차이를 즐기면서 아무한테나 주고 있었다. 쿨섹스주의자 디디는 바로 우리 옆에 있었던 거다. 어느 후배는 에디터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난 심각한 비주얼만 아니라면 일단 시도해보는 쪽이야. 그가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섹스의 맛이 궁금하니까.” 얼마전 에디터가 여차저차해서 만난 어떤 스물 네 살 아가씨와의 대화도 들려주고 싶다.

“아무한테나 주는 여자, 아무한테나 안 주는 여자. 이 둘 중에 넌 어느 쪽이니? ” “아무 남자한테나 줄 수 없어요. 왜냐면 지적으로나 재력으로나 감각적 재능으로나 어떤 자극을 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기 어려우니까. 여자도 꼴려야 할 수 있어요.” “그럼, 아무한테나 안 주는 쪽이구나?” “그렇지만 아무하고나 잘 수 있어요. 어떤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건 그 남자의 몸을 읽는 일이니까. 그럴 때의 남자 몸은 하나의 고유한 텍스트예요. 난 오르가슴을 느낄 때 남자를 도구로 삼아. 그럴 때 작은 거, 큰 거, 다양한 각도로 휜 거 모두의 차이를 느껴보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겨울에 발정 났을 때는 달라면 다 줬어.” 그날 밤, 에디터는 그녀에게 물었다. “나라는 텍스트는 어땠어?” “오빠는 개 같아. 도기(doggy) 스타일이야.” 에그머니나, 놀래라. 커뮤니케이션과 차이를 즐기는 그녀는 디디의 현신(現身)이 아닐까?

사실 여자는 주고, 남자는 먹는다고 생각하는 건 동물적이고, 1차원적이다. 지금까지 썼던 아무한테나 준다, 안 준다는 표현도 문제 있다. 사실 잘 준다, 잘 안 준다로 쓰는 게 더 정확하다. 에디터는 잘 주는 여자와 잘 안 주는 여자의 심리를 우선은 흥미본위로 다루고 싶었다. 그래서 편협한 시각과 자극적인 표현을 감수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거래하듯 ‘주고받는’ 섹스가 아닌 ‘인권’으로서의 섹스를 얘기하고 싶었다. 한 삼십 년쯤 전에 네덜란드의 어느 국회의원이 국가가 공무원이나 자원봉사자를 고용해서 장애자들이나 노인의 억눌린 성욕을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었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섹스를 인권의 하나로 본다면 국가가 인권을 박탈당한 국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사고를 ‘생활 속의 진보’ 라고 본다면 비약일까. 마치 69체위를 하듯 섹스를 서로의 기본적인 권리와 욕구를 해결해주는 행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러면 섹스는 ‘주고받는’ 거래 관계에서 ‘나누는’ 평등 관계로 발전한다. 동감한다면 이제 열심히 나누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