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박해의 역사 12
4.로마제국의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역사.
많은 역사 학자들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를 보면서 많은 의혹을 품었다. 특히 기독교역사학자들은기독교에대한로마제국의박해를보면서참담한심정을토하였다.
저들의 공통적 의문은 참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찌하여 저토록 오랜, 그리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침묵하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살아 계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저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불신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불쌍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한편 사람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갖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박해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아니하고 여전히 섬기는 기독교인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특히 경기장에서 불에 타 죽거나 맹수들에게 찢기워 죽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밝고 평안하고 의연한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길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멸절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확장되어 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의문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모두를 막론하고 박해를 받던 당시의 사람들이나 그것을 역사 속에서 보고 알게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의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자로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시원하게 풀어 주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기독교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증명한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발전하는 기독교의 역사는 일반상식으로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박해가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기독교는 움츠러들어야 하고 기독교 성도들의 숫자도 줄어 들어야한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가공할만한 박해를 보면서 기독교인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없고 죽음과 고통을 이겨 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며 따라서 기존의 기독교 성도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기독교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그토록 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오히려 증가되며 뿐만 아니라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기독교가 오히려 확산 되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이다. 기독교의 발전이나 기독교인들의 증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에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의 발전이 영향을 받아 침체 되거나 또는 답보적 상태를 갖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박해에 대한 상대적인 자극을 받아 기독교 전체 또는 기독교 개인들의 신앙이 성장하거나 분투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발전과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박해를 비롯한 외부적인 것들에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진군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한 자들은 박해와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 나오게 되어있다.
때문에 로마제국의 그토록 극심한 박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해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왔고 기독교는 유유히 그 역사를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는 당시의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증명 받는다. 그토록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복음의 특전사들은 로마 전 지역을 비롯한 세계 전 지역에 교회들을 설립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했다. 그리고 진리의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록하였고 아울러 복음전파의 현장들에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각종 철학 사상가들과 사이비이단들을 비롯한 비진리자들의 끊임없는 교리적 공격을 진리로 변증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진리,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다듬어 정리해 나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에 따라 훗날에 성경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또한 조직신학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져 후세에 전승되는 역사를 이룩해 나갔던 것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주권적으로 기독교역사를 확장하고 진군 시킬 수 있었지 않느냐? 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얼마든지 기독교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특성과 또한 인류역사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어진 우문<愚問>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진행시키심에 있어서 주로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는 의도적, 고의적 차원의 주권적 역사를 창출하시는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허용적 차원에서 인간들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기독교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물론 기독교 역사에도 허용적 주권이 적용되며 일반 역사에도 고의적, 의도적, 주권이 적용된다. 그러나 특별한 역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 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이와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 고의적으로 그것을 창출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필요에 의하여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제국 당국자들이 로마를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고 유대인들의 박해나 로마시민들 및 이방종교인들의 박해 역시 그들의 입장을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발전적 진군을 위한 차원에서 그것들을 허용하셨고 적용하셨다.
2)기독교의 발전.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 개인들에게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들을 주었지만 결국은 하나님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을 크게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물론 네로와 같은 정신병자도 있었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정상적인 황제들이었고 개중에는 훌륭한 현제<賢帝>들도 있었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등등의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5현제>들에 포함되는 훌륭하고 영민한 황제들이었다. 또한 황제들의 박해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박해나 사적인 감정을 위한 박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로마제국의 영광과 평안을 위한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 의한 박해들이었다.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다양한 차원에서 암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제국을 위해서 기독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박해는 기독교를 멸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전역과 나아가서는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주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나 로마제국의 각 지역과 세계의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들을 세워 나감으로서 기독교는 자연적으로 로마제국 전 지역화, 세계 전 지역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입장에 의한 기독교박해는 일반 역사적 차원에서는 로마제국을 위한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기독교역사의 진군을 크게 추진하고 후원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제국 전체에서 행하여졌지만 로마시내의 박해는 극심했던 반면에 로마시외 각 지방의 박해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며 로마시로부터 멀어질수록 박해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러한 상황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고 장려하고 확장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서 당연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가 확장되고 발전하는 속도와 범위는 박해로 인한 확장과 발전 속도와 범위보다 상대적으로 더디고 제한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의 기본적인 특성은 대체적으로 어려움 속에서는 더욱 진취적이고 전투적인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누리고 즐기며 안주<安住>하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인간의 종교적 특성은 위기적 일 때에는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희생하는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비진리에 빠져 안주하고자한다. 따라서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입장이었다면 기독교의 세계화는 그 속도에 있어서 매우 완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비진리적인 것으로서의 확산이 되었을 것이다. 즉, 수많은 비진리적인 교리들의 난무 속에서 수많은 분파를 이루는 가운데 기독교 아닌 기독교들로 분산되어 졌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역사의 현장들이 증명해준다.
기독교가 박해 하에 있을 때에도 물론 비진리적 교리들과 분파와 분당들이 난무하였지만 그것은 미약하고 지엽적인 것으로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떤 영역 어떤 사회에서도 언제나 있게 되는 흔하고 보편적인 현실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박해가 끝나고 신앙적 평안이 허용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전개되어진 기독교역사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참담한 신앙적 순교위에 세워진 기독교역사는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타락되고 변질되어져 갔으며 수많은 비진리적 교리들의 출현 속에서 수많은 분당과 분파로 갈라지고 흩어지는 역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3)박해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로마제국의 박해를 허용하셨다. 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하여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가혹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 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견뎌내기 힘든 고통과 수난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비통하고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고통 받은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리 길어도 잠시의 일이며 최고의 고통은 고문이나 형벌 등등에 의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이라고 할 때에 그것을 상태적인 차원에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한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당시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에 대하여 참으로 많고 영원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상급과 면류관들을 선물로 하사 하신다. 성경은 도처에서<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을 받은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상급들과 면류관들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들은 잠시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상 받았음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무한하고 영원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급과 면류관의 선물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최소한 네 가지 기본적인 이유에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의 찬양과 경배를 영원히 드려야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하고 완전한 최상의 하나님나라 국민으로 세워 주셨으며
둘째는 창조주하나님, 통치주하나님, 섭리주하나님, 심판주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으며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세워주셨으며
넷째는 이 모든 것들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내려오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와 같은 고난을 겪으시었는데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단 한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말로나 글로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만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4)박해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로마제국의 박해에 동원된 황제를 비롯한 모든 자들은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거니와 기독교역사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의 비참한 말로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갈레리우스황제의 회개가<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선포한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그에 대한 댓가를 내생<來生>에서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지만 그전에 이미 금생<今生>에서도 필연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네로,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세베루스, 갈레리우스 등등의 최후이다. 네로는 신하의 칼에 엎어져 자살했고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아들에 의하여 암살되었으며 셉티미우스세베루스는 황후와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고 갈레리우스 역시 중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외의 황제들도 모두 한결같이 비참한 말로<末路>를 당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그와같은 불변의 진리를 보고 들어 알고 있는 자들<심지어는 기독교 지도자들>중에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결코 핍박하고 탄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와같은 자신의 행위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저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종에게 감히 순종하지 않는 악한 자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핍박과 탄압의 양상은 달라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고 슬프게 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반대한 악한자들, 핍박자들, 탄압자들, 박해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 할 것이며 내세의 심판뿐만 아니라 현세에서의 심판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5)사단의 심정.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불쌍하고 가엾은 사단의 처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역사적 이야기들이지만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종료된 순간 사단은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었을까? 초기 기독교에 무자비한 박해들이 진행되었던 배후에는 사단의 극성스러운 활약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사단은 아마도 박해의 극심한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면서<이제 거의 끝나간다><조금만 더>를 연발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이번만은 절대로>라는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고 기독교승리의 팡파레가 온 천하에 울려 퍼질 때에 사단, 그는 어떠한 모습,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목숨 걸고 고군분투한 3백여 년의 사투에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고 박해에 총 동원된 졸개들은<이번에도 또?>라는 한심한 눈으로 사단을 바라다보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연전연패,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승부, 사단은 어쩌면 졸개들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좌절감과 무력감에 젖어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서 그 처참한 일생을 마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단은 영적 존재라 하나님께서 조치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죽을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을.....아! 가엾은 사단이여! 불쌍한 사단이여!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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