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독교 박해의 역사 11

문성식 2011. 6. 6. 14:18

기독교 박해의 역사 11

 

 3.박해의 종료.

 

2)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의 역사적 평가 기준에 따라 각기 다르다. 그 중에 특히 기독교 역사학자들과 기독교를 거부하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평가가 첨예한 대립을 이룬다.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기독교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추대한다. 그들은 심지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한다. 그들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하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사실상 종료되었고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전투 이전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을 때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전투에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출전하였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였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특히 밀비안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패퇴시킨 것과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을 하나님의 군대의 승리라고 말하며 따라서 콘스탄틴을<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황제><하나님의 황제><기독교의 수호황제>라고 명칭했다.

 

(2)일반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콘스탄틴을 영웅시 하는 것과는 달리 일반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종교인<특히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고 노련하고 출중한 정치적 역량을 가진 탁월한 정치가로 본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치밀한 계산적 정치 책략에 의한 고도의 정치 기술을 발휘하여 제국을 통치했다고 본다. 저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콘스탄틴이 추구한 종교적 정치 노선이다.

콘스탄틴은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까지 추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위하기 직전까지 여전히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인정했고 그 중에<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을 가문적 수호신으로 받들어 섬겼으며 심지어는 이방종교들의 제사장 역할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수도로 건설한 후에 그곳에 기독교적 유물들만 건설하거나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 산재해 있는 모든 종교들의 각종 종교적 유물들을 거의 다 옮겨놓았다. 때문에 일반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은 기독교인이나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정치가로서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수용하고 적절하게 아우르는 정책을 수용한 정치가 였다고 보는 것이다.

 

(3)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기회주의자이며 교활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평가한다. 저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할 때와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은 기독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계산된 사기극에 의한 승리라고 주장한다. 즉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과 환상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모두가 치밀하게 계산된 거짓말이고 사기라는 것이다.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콘스타틴은 당시에 이미 기독교인들에 대한 개념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황제들의 말로가 하나같이 비참하였고 특히 전임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시아와 갈레리우스가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이 직접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께 계시 받았다고 거짓 유포하고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만들어 전투대열의 선봉에 세움으로서 적군의 사기를 꺾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를 불운한 황제로 보았고 특히 리키니우스를 더욱 불운한 황제로 동정하였다. 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사실상 막센티우스나 리키니우스는 특별히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크게 학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틴과 대결하기 직전에 한때 기독교를 탄압하였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탄압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그를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리키니우스 통치 하의 기독교는 여러분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의 분파적 갈등과 다툼은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키니우스는 할 수 없이 친위대를 동원하여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을 진압했는데 이때에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리키니우스를 배척하고 콘스탄틴을 지지했다. 이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 지지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했는데 이로 인하여 콘스탄틴 지지자들은 점점 늘어가는 반면에 군대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었고 때문에 결국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객관적차원에서의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객관적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개인의 권력에만 집착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원로원과도 과감히 맞섰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조차도 제거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의 데키우스나 디오클레시안 황제들처럼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그들과 달랐다. 과거의 황제들은 로마의 전통적 종교 위에 로마의 영광을 세우려고 했지만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토대 위에 로마의 영광을 복원하려 하였다. 콘스탄틴의 이러한 정책은 원로원을 비롯한 귀족들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았고 심지어는 콘스탄틴을 제거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는 음모까지 있을 정도로 심각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힘으로 원로원을 제압하였으며 황제퇴위 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큰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함대 사령관이었다>까지도 과감히 처형하였다. 때문에 객관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로마를 사랑한 아름다운 황제로 평가한다.

 

(5)우리의 평가.

역사란 보는 사람의 견해에 의하여 얼마던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떠한 개념에서 어떠한 눈으로 보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반역이 혁명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혁명이 반란이 될 수도 있다. 충신이 역적이 될 수도 있고 역적이 충신이 될 수도 있으며 간적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영웅이 간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전승들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들 살펴보게 될 뿐이다. 때문에 과연 어떠한 견해가 바른 견해인지를 알 수 없으며 어떠한 상황이 사실적인 역사인지를 함부로 정립할 수도 없다. 따라서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역사에 많은 아름다운 역사를 제공한 콘스탄틴을 평가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편파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따라서 그 점을 미리 밝히면서 기독교 박해역사를 종식시킨 콘스탄틴과 당시의 기독교와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역사적 차원에서 조명한다. 아울러 다음부터 기록하는 것들은 모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추론일 뿐 그것이 정확한 실제적 역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들과 그의 정치적 결과들을 근거로 하여 콘스탄틴을 노련하고 탁월한 정치가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야심 찬 로마영광 재현의 꿈도 사실로 인정한다. 아울러 우리는 그가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전에 받았다는 계시도 인정한다. 역사가들의 전승들이 서로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다 함께 인정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내용이 똑같아야 한다는 이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의 계시를 다양하게 내려주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그가 분명한 기독교인이었음을 확신한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밀비안 전투에서 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콘스탄틴은 다만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어 로마제국을 과거의 화려하고 웅장하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로마제국이 되게 하려는 야심 찬 정치가였다. 그가 야만족 포로들을 경기장에서 무참하게 죽도록 한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보면 분명 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대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비난받을 수 없는 통치적 행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가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은 점과 이방 신상들을 섬긴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또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망서렸다거나 또는 계산된 정치적 계략에 의한 양다리 걸치기식의 비열한 태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의 삶이 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그가 비록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로마의 귀족으로서 수십 년간 생활해 온 그가 하루아침에 성경이 요구하는 차원의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대로마제국의 황제인 그가 순식간에 전형적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그의 신앙적 삶에 대하여 많은 욕심을 내서는 않된다.

또한 우리는 당시의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상반된 입장을 역사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제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이었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로마제국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분야들은 전통적인 로마의 귀족들에게 편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황제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로마에는 또한 수많은 종교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배려도 당연히 요구되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황제가 기독교라는 어느 한편에 치중하는 정치적 노선을 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가 이방종교들과 계속하여 꾸준히 교류를 가졌다는 것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그때에 콘스탄틴이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지 않고 보편적인 종교정책을 펼친 것에 대하여 그의 탁월한 지혜를 칭찬한다. 만약에 그가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여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을 탄압했다거나 또는 비잔틴 건설을 오직 기독적인 도시로 건설하여 다른 종교들의 접근을 일제히 차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분명 콘스탄틴의 몰락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며 더욱 극심한 기독교 탄압의 역사를 재현하는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는 지혜로움으로 그러한 정책을 펼쳤는지 아니면 다만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틴의 통치 하에서 기독교는 다방면에 걸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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