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탈해왕

문성식 2010. 9. 3. 10:10

 

탈해왕(脫解王, 재위57~80)은 신라 왕실 3성(姓) 가운데 석(昔)씨를 여는 첫 왕이었다. 용성국 출신으로 신라에 들어와 왕이 되었으니, 그는 신라에서 꿈을 이룬 신라 드림의 한 표본이다. 이주민으로 권력을 잡은 예는 이미 앞서 박혁거세의 경험이 있으므로, 탈해에게 박혁거세는 롤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물론이거니와 박씨에 비해서도 석씨의 왕위 계승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탈해 집안의 성공과 좌절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수많은 일화의 주인공,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왕위에 올라

신라 제4대 임금 탈해왕을 소개하는 [삼국유사] 기이 편은 그에 관한 일화로 가득 차 있다. 이 무렵의 왕을 소개하는 자리에 이토록 다양한 일화가 수놓아지기로는 탈해왕 같은 경우가 없다. 참으로 아득한 시절의 주인공은 마치 어제 살았던 사람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탄생의 과정이 신이로운 것은 그렇다 치자. 용성국의 왕과 왕비인 부모가 자식을 얻고자 기도 드리기 7년 뒤 큰 알 하나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여느 영웅탄생 신화와 비슷하다. 모두들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바다에 버려지는 다음 순서는 영웅이 당하는 초년 고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가야국을 찾아 수로왕과 내기를 벌인다든지, 신라의 아진포에 이르러 아진의선에게 보살핌을 받는다든지, 기묘한 꾀를 써서 호공의 집을 빼앗는가 하면, 물을 떠 오던 부하가 먼저 한 모금 맛보려다 낭패를 당한다. 그렇게 소설 같은 에피소드가 줄을 잇는다.

 

아마도 그 절정이 노례왕과 벌인 치아 숫자 내기가 아닐까 한다. 노례는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왕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유사]에서)

 

탈해는 제2대 남해왕의 사위였다. 왕은 아들인 노례보다 나이나 지혜가 위인 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정작 탈해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내기를 해서 처남을 먼저 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노례가 죽고 나서야 탈해는 왕위에 올랐다. 이런 과정에는 사실 정치적인 함수가 복잡하게 끼어들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차치하고, 화려한 에피소드가 누벼지는 까닭을 톺아나가다 보면,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소망과 소문의 실체를 더듬게 된다. 한마디로 탈해는 신라가 낳은 첫 번째 ‘화제의 인물’이었다. 어쩌면 하늘에서 박 속에 담겨 알로 내려왔다는 박혁거세를 능가한다. 사람들은 과연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열광했던 것일까.

 

 

아진포를 둘러싼 논쟁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에는 월성 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거기 더하여 핵 폐기장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발전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너른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공원 한구석에는 오래된 소나무로 뒤덮인 작은 기와집이 한 채 눈에 띈다. 탈해왕이 바다 건너 도착한 곳임을 기념한 비각이다. 탈해왕이 이른 곳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진한(辰韓) 아진포구(阿珍浦口)’, [삼국유사]에 ‘계림동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라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아진포’라 적었으니, 세 권의 책이 전하는 지명은 모두 같다.

 

아진포는 지금의 어디인가. 비각이 서 있는 곳은 양남면 나아리이다. 사방을 토담으로 쌓고 목조와가(木造瓦家) 사방 1간의 비각은 1845년(헌종 11년)에 만들어졌다. 그 안에 비석이 서 있는데, 높이 130cm, 폭 45cm, 두께 25cm로, 비문은 이종상(李鍾祥)이 글을 짓고 이재립(李在立)이 글씨를 썼다. 그렇다면 이때부터 이미 아진포는 나아리라고 믿었던 것일 게다. 그런데 같은 양남면 안에 하서리가 있다. 나아리에서 남쪽으로 바로 붙은 마을이다. [삼국유사]에서 말한바 ‘하서지촌’은 지금의 하서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아진포는 오늘날의 양남면 하서리가 그곳 아닌가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논란이 되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아진의선이라는 사람의 정체이다. 요컨대 아진의선은 ‘아진포에 사는 의선’이라고 풀 수 있고, 그의 신분을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어미’라 한 것은 사제의 임무를 맡은 고위급의 여성으로, 혁거세의 배후에서 든든히 받쳐주었으며, 이런 롤 모델에 따라 두 번째로 배출된 이가 탈해였다는 것이다.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있는 비각. 아진포가 여기라고 여겨 세워진 비각이다. 월성원자력발전소 공원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1845년에 처음 만들어졌다(양남면 나아리 신라 석탈해왕 탄강 유허비각). <출처 : 고운기>

 

 

화제의 인물 탈해가 가진 정치이념

박혁거세가 출신지 세탁을 철저히 한 데 비해 탈해는 고스란히 신분이 노출되어 있다. 그것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다. 기왕 신분을 노출할 바에는 차라리 구체적으로 알리려 했는지 모른다. 이것이 그에게 수많은 일화가 따르고 화제의 인물이 된 원인이다.

 

높이 130cm, 폭45cm, 두께 25cm로, 비문은 이종상(李鍾祥)이 글을 짓고 이재립(李在立)이 글씨를 쓴 비석(유허비각 안의 비석). <출처 : 고운기>


먼저, [삼국유사]에서는 탈해가 태어난 용성국의 정치체제를 탈해의 입을 통해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28 용(龍)이 사람으로 태어나 5~6세부터 왕위에 이어 올라 만백성들이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도록 하였습니다. 여덟 단계의 성골(姓骨)을 가졌는데,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 왕위에 올랐지요.” [삼국사기]는 용성국을 다파나국이라 했으며 일본 동북 1천리에 있다 하였고, [삼국유사]도 이 기록을 받아 주석에 달았다.

 

연구자에 따라 용궁으로 보는 견해와, 다파나국에서 추정하여 서역의 한 작은 나라라는 견해, 동북 1천 리라는 거리로 볼 때, 서역 자체가 아니라 서역에서 신라로 오는 중간, 중국 중남부 해안 지역으로 보는 견해까지 나온다. 그러나 용성국을 상상의 나라라고 보고, 탈해가 말하는 제 나라의 정치체제는 기실 자신이 앞으로 세우고 싶은 나라의 정치체제라 생각한다. 만백성이 성명을 바르게 닦도록 하고, 왕은 차별을 두지 않고 그 자리에 오른다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그것은 아진의선의 수제자 박혁거세를 따라 왕에 오르고자 경주에 온 탈해가 지닌 정치이념이었다. [삼국사기]에서는 탈해는 처음에 고기를 낚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한 번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어머니가 일러 말하기를 “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며 골상이 매우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라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는데, 아울러 지리도 알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어머니란 아진의선을 말할 것이다. 의선은 혁거세를 키웠듯이 탈해를 키웠다.

 

 

호공의 집을 빼앗다

학계에서는 혁거세의 박씨 족단(族團)이 신라 6촌보다 상대적으로 앞선 문화를 가지고 경주에 들어와 이들을 통합시킨 것으로 본다. 그때가 서기 2~3세기경이다. [삼국사기]가 말하는 신라의 건국 시기보다 늦다. 남해왕 때에 비약적인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탈해의 석씨 족단과 결합을 하였다. 이 탈해의 석씨 족단은 울산 방면의 철산지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으로 본다. 이것을 상상하게 해 주는 일화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탈해가 지팡이를 잡고 노비 둘을 이끌고서, 토함산 위로 올라가 돌무덤을 쌓고 7일 동안 머물렀다. 성안에서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 봉우리를 보니 마치 초승달과 같아 오래 머물만한 형세였는데, 내려가 살펴보니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간사스럽지만 꾀를 내기로 하였다. 집 곁에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집에 가 짐짓 꾸짖는 투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 선조 때 집이오.” 호공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말다툼이 일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자 관아에 아뢰었다. 관리가 물었다. “무엇으로 네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우리 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는데, 잠시 다른 지방에 가있는 사이 남이 들어와 산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따라 해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탈해는 이 집을 차지해 살게 되었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놓고 자신의 연고권을 강변했다는 것은 그가 경주에 출현하면서 철이 세력 획득의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설화적으로 나타냈음에 틀림없다. 아울러 이 일로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큰 공주인 아니부인(阿尼夫人)과 짝을 지워준다. 이는 석씨 족단이 박씨 족단과 맺어져 그 후원을 받게 됨을 말한다. 사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이보다 앞서 탈해는 가야에 가 수로왕과 겨루기를 하지만 참패한 채 쫓겨나왔다. 선후관계를 따져 이어보았을 때, 탈해가 가야와의 싸움에 실패하고 신라의 도움으로 재기하는 줄거리이다.

 

 

탈해에게 닥친 앞뒤의 위협

탈해는 남해왕 5년에 그의 사위가 되었고, 7년에 대보가 되어 왕이 맡긴 국정을 총괄하였다. 수로왕에게 쫓겨나와 아진 의선에게 겨우 받아들여졌던 그였기에 신라에서의 성공은 그에게 각별했다. 그러기에 이번에는 결코 실수가 없도록 신중하고 치밀했다. 장인이 왕위를 물려받으라 했으나 굳이 처남인 노례왕에게 양보한 이야기는 앞서 소개하였다. 사실 이것은 양보라기보다 탈해의 노회함이었다.

 

탈해는 왕위에 오른 이듬해 호공을 대보에 앉혔다. 호공은 탈해에게 집을 빼앗겼던 바로 그이다. 10년 뒤, 박씨 족단의 사람들을 주(州)∙군(郡)으로 나눈 지방의 자리에 각각 주주∙군주로 앉혔다. 모두 자신의 왕권을 확고하게 하려는 계산된 국정운영 아닌가. 그렇게 단단히 지킨 앞문이었건만 뜻밖에 뒷문에서 탈해를 위협하는 다른 일이 생겼다. 바로 김알지의 출현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주의 호공이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시림(始林) 한가운데에 매우 밝은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우는데, 구름 속에 황금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궤짝에서는 빛이 새 나왔다.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우는 것이었다. 호공은 탈해왕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왕이 친히 숲에 와서 궤짝을 열어보고, 어린 사내아이가 누워 있자 안아서 싣고 궁궐로 돌아왔다. 이 아이가 알지이다.

경주시 동천동의 탈해왕릉. 사적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고운기>

 

이 기록과 [삼국사기]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삼국유사]는 이 일이 탈해왕 4년(60년), [삼국사기]는 탈해왕 9년(65년)에 일어난 것으로 썼다. 이 정도는 무시해도 좋으리라. [삼국유사]의 마지막 대목에는 “왕이 좋은 날을 가려 태자에 책봉하였지만, 알지는 뒤에 바사(婆娑)에게 양위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이다. 탈해에게는 일성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왜 알지를 태자에 책봉했을까, 그리고 알지는 무슨 연유로 유리왕의 아들인 바사를 왕위에 오르라고 양보한 것일까.

 

이는 박씨와 석씨 사이의 연합에 모종의 문제가 생겼음을 암시하는지 모른다. 탈해가 뒷문까지 단단히 잠그지 못한 것 같다. 실로 탈해를 포함해 석씨 왕은 8명, 신라 56명의 왕 가운데 겨우 15%이고, 그나마 16대 흘해왕(310~356)을 끝으로 그 뒤로는 나오지도 않았다. 17대 내물왕 이후 탈해의 후손은 정치적으로 도태되고 말았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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