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상식
★. 법우(法友)란 무슨 뜻입니까?
법우란 같은 불법을 배우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 불자란 어떤 뜻입니까?
부처님의 제자란 뜻으로,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앞으로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부처님"이란 뜻은 무엇입니까?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진리를 밝게 깨달아
온갖 복과 덕을 모두 갖추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 염불이란?
거룩하신 부처님을 고요한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며,
부처님의 크신 공덕을 기리며,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 기도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부처님께 간절히 비는 믿음이며,
참되고 올바른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려는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 독경이란?
불경을 외우거나 읽는 것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리는 것입니다.
★. 법신(法身) : 부처님께서 얻은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을 법신이라하며 佛身이라고도 한다.
즉 우주진리의 본체.
★. 계(戒) : 3學(계·정·혜)의 하나요, 6度(6바라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하나요,
3藏에서 율장으로 불교도덕의 총칭이며 비구니(女) 348계, 비구(男) 250계가 있다.
계로써 마음을 편히 머물게 하는 바,
아침에 계를 받아 저녁에 파계하여도 계를 받아 지님이 좋다.
불교에 귀의하는 남녀(在家)는 5종의 계율(1.중생을 죽이지 말라 2.훔치지 말라
3.음행하지 말라 4.거짓말 하지 말라 5.술마시지 말라)을 지켜 불성을 증대하여야 함.
★. 정(定) :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
★. 혜(慧) : 심소(心所)의 이름으로 어리석고 우매한 마음에는 혜가 없다고 하며,
바깥경계에 대하여 邪正 득식을 하단하여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작용.
★. 해탈(解脫) :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경계에 이르는 것으로 열반이라고 하기도 함.
★.해탈지견(解脫知見) : 부처님은 자신이 참으로 일체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자재한 몸인줄 알고 있는 것.
★. 시방(十方) : 東·西·南·北·北東·南東·南西·北西·上·下의 열방향.
★. 삼세(三世) : 과거·현재·미래 또는 前世·現世·來世 시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法위에 세운 것.
현재 : 어떤 법이 생겨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동안.
과거 : 법이 멸했거나 그 작용이 그친 것.
미래 : 법이 아직 나지않고 그 작용을 하지 않는 것.
시방삼세 : 時空을 나타냄.
★. 보살(菩薩) : Bodhisattva(보리사트바)의 음역.
깨달음을 구하는 자. 세존의 전생에 있어서 이름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상구보리(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하화중생(下化衆生)>는
자리(自利) 이타(利他)의 이상적인 인간상.
★. 육바라밀(六波羅蜜)
1. 보시(布施) : 베푸는 것
남을 대할 때에는 주는 마음으로 대하여라.
그리고 보수없는 일을 연습하여라.
이것이 탐심(貪心)을 제거하는 보시(布施)바라밀이니라.
2. 지계(持戒) : 계율을 지키는 것.
항상 후회하는 일을 적게 하라.
부처님처럼 참되게 살 일이니
이것이 치심(恥心)을 제거하는 지계(持戒)바라밀이니라.
3. 인욕(忍辱) : 참는 것.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
부처님의 인욕(忍辱)을 배우고 깨쳐볼 일이니
이것이 곧 진심(瞋心)을 제거하는 인욕(忍辱)바라밀이니라.
4. 정신(精進) : 노력하는 것
옳거든 부지런히 실행하라.
쉬지않는 실천 가운데 도(道)의 문이 열리나니
이것이 게으름을 제거하는 정진(精進)바라밀이니라.
5. 선정(禪定) : 마음을 가라앉힘.
항상 마음의 중심을 잡아라.
중심이 있을 때 마음이 안정되나니
이것이 번뇌(煩惱)를 제거하는 선정(禪定)바라밀이니라.
6. 지혜(智慧) : 지혜를 밝히는 것.
고정관념을 버려라.
그리고 모든 것을 편견없이 보라.
이것이 무명(無明)을 제거하는 반야(般若)바라밀이니라.
★.부처님의 10대 제자는 다음과 같다.
1. 지혜가 가장 뛰어난 "지혜제일 사리푸타(사리불)"
2. 초능력을 가진 "신통제일 목갈라나(목건련)"
3. 괴로움을 잘 참고 실천하는 "두타제일 마하카사피(대가섭)"
4. 마음에 아무 걸림이 없는 "해공제일 수보뎨(수보리)"
5. 설법이 제일인 "설법제일 푸르나(부르나)"
6. 논의에 제일인 "논의제일 카타야나(가전연)"
7. 천안제일의 "천안제일 아니룻다(아나율)"
8. 계율을 지키는데 제일인 "지게제일 우팔리(우바리)"
9. 하지말라는 것을 잘 지키는 "밀행제일 라훌라(라후라)"
10. 기억력이 제일인 "다문제일
★. 공(空) : Sunyata의 번역. 아무것도 없는 상태. 물질적 존재는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
변화하고 있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체나 주체로서
또는 자성(自性)으로서 포착될 아무 것도 없다.
이 공성(空性)을 체득하면 근원적 주체로서 살게 된다. 곧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오온(五蘊) : Panca-skandha의 번역. 다섯을 모아서 쌓았다는 뜻.
일체존재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가지로 구성됨.
즉 우주, 만물의 일체, 인간본체
색(色) : Rupa의 번역. 물질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 형태가 있는 것.
통속적 해석으로는 파괴되는 것,
변화되는 것으로 형상과 색체까지 포함한 감각적인 물질의 일반을 가르킴.
수(受) : Vehana의 번역. 감각이라 번역하며 감수(感受)하기 때문에 수라고 함.
괴로움을 감수하고 즐거움을 감수하는 감각작용.
상(想) : Samjna의 번역. 표상(表象)이라 번역하고 요해(了解)하기 때문에 상이라 불리며
푸른 빛을 요해하고 붉은 빛을 요해하는 등 상상, 감상의 작용.
행(行) : Samskara의 번역. 의지
(정신작용이 일정한 방향으로 작용해 가는 면)로서 의지적 형성력.
식(識) : Vijna의 번역. 식별하여 안다로 외계의 사물을 식별하는 작용.
★.18계(육근,육식,육경)
1. 육근(六根) : 외부의 사물을 인식케하는 근원.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2. 육식(六識) : 육근이 일으키는 식(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
3. 육경(六境) : 육근이 일으키는 육식으로 인식하는 외부의 여섯가지 경계(境).
예를들면 안(眼)------본다------색(色)
그래서 육경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
육근 육경을 12處라 부르고 육근 육경 육식을 18界라 부른다.
★.제법(諸法) : Dharma의 번역. 사물을 지칭하는 뜻.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
인간을 구성하는 여섯가지 요소(눈 귀 코 입 몸 뜻)중에 제 6의 식(意識)의
대경(對境)이 되므로 법경(法境)이라고도 함.
★.무명(無明) : Avidya의 번역. 인간존재를 괴롭게하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을 가르킴.
원시불교의 근본교리 가운데 어리석음은 12인연(因緣)을 쫓아 윤회하므로
그 원인을 제거하여 해탈케 하려고 설해짐.
★.12인연(因緣)
1. 무명(無明) : Avidya 과거세에서부터 무한히 계속되어
오고있는 미혹의 근본인 무지(無知).
2. 행(行) : Samskara 과거세의 무명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선악의 행업(行業)
3. 식(識) : Vijnana 과거세의 업에 의해서 받은 현세 수태(受胎)의 일념.
4. 명색(名色) : Nama-rupa 태중(胎中)에 있어서의 마음과 몸.
5. 육입(六入) : Sad-ayatana 태내에서 자리 잡아가는 눈·귀·코·혀·몸 등의 五根과 意根.
6. 촉(觸) : Sparsa 출태(出胎)해서는 잠시 고락을 식별하기까지는 이르지 않고
물건에 부딪치는 작용만이 있다.
7. 수(受) : Vedana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感受)하는 감각.
8. 애(愛) : Trsna 괴로움을 피하고 항상 증거움을 추구하는 욕망.
9. 취(取) : Upadana 자기가 원하는 것에 집착하는 작용.
10. 유(有) : Bhava 애와 취에 의하여 가지가지의 업을 만들고 미래의 결과를 만드는 작용.
11. 생(生) : Jati 태어남.
12. 노사(老死) : Jara-marana 늙고 죽음.
과거의 원인(無明·行) 현재의 결과(識·明色·六入·觸·受)
현재의 원인(受·取·有) 미래의 결과(生·老死)
무명이 없다함은 반야지(般若智)로서 무명을 관(觀)하면 무명의 성품이
본래 공(空)함을 보아 생멸상(生滅相)이 없음을 알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正覺)을 얻으신후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제일
처음설법한 곳은 녹야원(鹿若苑)이었다.
그때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하는데
사제(四제) 팔정도(八正道) 12인연(因緣)등이 주된 내용이다.
사제(四제)또는 사성제(四聖제)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는 뜻에서 제라한다.
★.사성제(四聖제)
고제(苦제) : 현실의 괴로움, 생,노,병,사,원한이 있는 자와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 등의 괴로움,
즉 이 몸이 전재하여 일어나는 모든 괴로움.
집제(集제) :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원인.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執着)이다.
탐내고(貪) 성내고(瞋) 어리석음(癡)도 덧없이
유전(流轉)하는 현상계의 인과를 설명함.
멸제(滅제) : 애욕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음.
도제(道제) : 도(道 Marga)는 이러한 멸을 얻기 위한
방법이며 실천수단이기도 하다.
흔히 팔정도라고 불리는 8가지 수행덕목이다.
★.팔정도(八正道)
1. 정견(正見) : 바르게 보고
2. 정사(正思) : 바르게 생각하고
3.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하고
4. 정업(正業) : 바르게 행동하고
5. 정명(正命) :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6. 정정진(正精進) : 바르게 노력하고
7. 정념(正念) : 바르게 외우고(기억하고)
8. 정정(正定) :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킴.
팔정도란 유(有)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의 수행법으로
원시불교의 근본교의를 이룬다.
★.열반(涅槃) : Nirvana의 음력. 일체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난 경지.
적멸(寂滅) 멸도(滅道)라고도 함.
★.야뇩다라삼먁삼보리(阿뇩多羅三 三菩提) :
Anuttara-samyak-sambodhi 위가 없는 완전한 깨달음.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의역함. 즉 완전한 깨달음을 말한다.
★.다라니(陀羅尼) : Dharani의 번역. 무량무변한 뜻을 지니고 있어
모든 악한 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을 가지는 것.
1. 지혜 혹은 삼매를 말한다.
2. 진언(眞言), 범문(梵文) : 인도 고전어를 번역하지 않고
음(音) 그대로 적어서 외우는 것.
3.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는 이유 : 원문의 전체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고
밀어(密語)라하여 다른이에게 비밀히 하는 뜻.
이것을 외우는 사람은 한량없는 말을 들어도 잊지 아니하며 끝없는 이치를 알아
공부를 도우고, 모든 장애를 벗어나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등
많은 공덕이 있으므로 다라니라 한다.
흔히 인도 고어인 범문이 짧은 구절은 진언(眞言)또는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陀羅尼)또는 대주(大呪)라 한다.
★.천수천안(千手千眼) :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 흔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고 하는 보살이다.
같은 보살의 이름인데 관세음보살이라고 할 때는
우리 인간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잘 들으신다는 의미이고,
관자재라고 할 때는 세상을 바르게 보는데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 불교의 명절(음력)
1) 4월 초파일(부처님 오신 날)
2) 2월 8일(출가재일)
3) 12월 8일(성도재일)
4) 2월 15일(열반재일)
5) 7월 15일(우란분재일, 백중재일)
★. '스님'이란 뜻은
스승님의 준말로 제자가 자기 스승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스승이 아니라도 출가하여 수도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 삼보(三寶)
불교의 三寶라 함은 우리의 참 생명과 행복을 지켜주는 것으로써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부처님의 제자(僧寶)를 뜻하며
모든 불교도가 한결같이 몸과 마음을 다해 받들어 의지해야 할 것이다.
★. 백팔팔번뇌란
안, 이, 비, 설, 신, 의 이 여섯가지 감각 기관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
이 여섯가지 경계를 각각 접하게 되니 6 * 6 = 36 가지의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36가지 번뇌가 과거, 현재, 미래,를 합하니(36*3=108) 백팔번뇌라 합니다.
★. 대승[大乘] 과 소승[小乘]
대승은 범어 mahayna의 번역으로 마하연나[摩訶衍那]. 마하연[摩訶衍]이라 음역하며
상연[上衍]. 상승[上乘]이라고도 한다. 소승은 hinayana의 번역이다.
승[乘]은 수레를 의미하며 미혹의 차안에서 깨달음의 피안에 이르는 교법을 가리킨다.
대승. 소승이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후 그의 언행의 전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좌부 불교가 주석적인 연구의 불교로 발전하여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살도를 설하는 불교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보살도를 추구하는 무리들이 자신들이 받들고 있는 교리를 높여 대승이라 부르고
기존의 불교를 소승이라 폄하한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기존의 불교도는 소승불교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상좌부 불교라 했다.
따라서 상좌부 불교의 입장에선 보살도 불교 즉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반론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상사적으로는 소승이 대승불교의 교학적 기초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소승은 자신의 해탈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조자도[自調自度: 調는 번뇌를 제도하여 없애는 것,
度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의 성문. 연각의 수행도며,
대승은 열반의 적극적인 의미를 인정하고 자리와 이타의 양면을
모두 갖춘 보살의 수행도를 의미한다.
소승의 대표적 경론은 아함부 경전을 비롯하여<사분율> <오분율> <비바사론>
<발지론> <구사론> <성실론> 등이 있고, 대승에는 <반야경> <법화경>
<중론> <섭대승론> <대승기신론> 등이 있다.
인도의 대승에는 중관. 유식. 여래장. 밀교 등이 있고,
중국의 대승에는 삼론. 열반. 정토. 선. 천태. 화엄 등이 있어
각 종파의 우월한 점을 내세우려 노력했다.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 일본. 몽골. 서장불교는 대승 불교로 분류되며,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불교는 소승불교로 분류된다
초기 대승불교운된의 순수한 종교적 정신이 사라지면서
중기 대승불교 이후는 소승과 대승의 구별이 관념화되었다.
★. 소임과 별칭
스님들에게는 각기 절에서 맡은 바 직책이 있다.
그 절의 모든 운영을 책임한 주지(住持) 스님,
모든 대중들의 수행과 위의와 법도를 지도하시는
조실(祖室) 스님.방장(方丈) 스님,
법문을 설하여 주시는 법사(法師) 스님,
경을 가르치시는 강사(講師) 스님,
또 주지 스님 아래서 일을 보는 총무 스님,
교무 스님, 재무 스님, 절 살림을 맡아 하는 원주 스님,
법당에서 부처님을 받들며 공양을 올리는 부존 스님 등
각기 스님에게 부여된 직책이 있다.
이때에는 법호가 있다 하여도 직책을 붙여서 조실 스님,
주지 스님, 부존 스님 등으로 부르게 된다.
큰스님의 법명을 부르지 않고 법호나 당호로
불러야 하지만 법호를 함부로 부르는 것도
송구하기 때문에 따로 호칭(呼稱)하는 것이 더 좋은 예의(禮義)다.
예를 들면 큰스님이 계신 곳의 이름을 붙여 ○○산 큰스님,
○○사(암) 큰스님 등 산 이름이나 절 이름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또 그 스님이 계신 건물의 이름을 따라서 ○○실 스님, ○○당 스님,
별당(別堂) 스님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방장 스님이나 조실 스님은 ○○ 큰스님이라 하며 나이 많으신
원로 스님들께는 꼭 노(老)자를 붙여 ○○ 노스님이라 하는 것이 예의이다.
★. 연꽃(蓮花.蓮華)
연꽃은 진흙 못에서 피어난다. 물이 더럽고 지저분하여도 그 속에서 청정하고 아름답고
귀한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사바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님 가르침(佛法)에 비유되어
불교의 꽃으로 상징되고 있다.
또 무명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취되는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은 연꽃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청정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을 곧잘 연꽃에 비유했다.
연꽃을 일러 만다라화(曼茶羅華)라고도 한다.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오묘한 법칙이 연꽃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부처님이 들어 보인 꽃이 바로 연꽃이다.
또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있을 때
땅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태자를 떠 받들었다고 경전은 적고 있다.
인도에서는 연꽃을 진귀한 꽃으로 여겼으며, 청.홍.황.백련화 등으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 백련화는 번뇌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무구의 불법성에 비유되었다.
연꽃에는 각 부분마다 불교의 원리를 말하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활짝 핀 연꽃잎은 우주 그 자체를 상징하고, 줄기는 우주의 축을 의미한다.
연합에는 9개의 구멍이 있는데 이는 9품을 말하며 3개의 연뿌리는 불.법.승 삼보를 뜻한다.
연꽃의 씨는 천 년이 지나도 심으면 꽃을 피운다 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상징한다.
또 꽃이 피면서 열매가 생기는 것은 인과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연꽃은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을 상징하기도 한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불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이룩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많은 불교예술품들은 연꽃을 형상화하여 그 깊고 오묘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불보살의 좌대는 모두가 연꽃이다.
예술작품뿐 아니라 <묘법연화경> <화엄경>등 경전의 제목도 연꽃과 관련돼 있다.
★. 만자(卍字)
범어 Srivatsalksana (수리밧살크사나), 万字, 萬字, 卍字 라고도 한다.
吉祥海雲(길상해운), (길상희선) 이라고도 쓴다. 吉祥(길상)과 행운의 표시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의 하나로 불타의 가르침에 德相(덕상)이 있고
또 불타의 手足, 頭髮(두발)과 허리에도 있다고 한다. 이에 상당한 범어는
네 가지가 있지만 Srivatsa(슈리밧사)란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말은 모발이 말리어 겹치고 합해져 海雲같은 모양이란 뜻이다.
따라서 卍字란 吉祥萬德(길상만덕)이 모이는 곳을 뜻한다. 또한 卍字는
십자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교나 절을 나타내는 기호나 표시로 쓰이고 있다.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만자(右卍字)와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左卍字)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卍자를 입체적으로 형상화시켜서 세워 놓고 볼 때 앞에서 보면
卍 모양이 되지만 뒤쪽에서 보면 右卍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옛 조각에는 右卍자가 많으나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굳이 구별하지는 않는다.
★. 불교의 자비의 의미
자비란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고뇌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慈)란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이익과 안락을 보태주는 것이고,
비(悲)란 고통받는 사람의 불이익과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 불교에서 부르는 호칭
남자스님 : 비구스님
여자스님 : 비구니스님
사미계를 받은 예비남자스님 : 사미(행자)
사미니계를 받은 예비 여자스님 : 사미니
남자신도 : 거사, 처사 . 우바새
여자신도 : 보살. 우바이
★삼 귀 의
모든 종교에는 신앙의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불교에도 신앙의 대상이 있으니,
이를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라 한다.
우리 불자들은 이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첫 자각과 신앙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귀의(歸依)함이란 무엇인가?
귀의한다는 것은 곧 되돌아가 의지함이다.
삼보를 믿고 돌아가 그에 의지하며 생활한다는 것이다.
세간의 삿된 가치관과 사상 속에서 부처님의 바른 법 아래로 돌아와,
나의 모든 생명을 삼보에 바치며 그 삼보 속에 살며 삼보를 통하여
나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歸依佛 兩足尊)
여기에서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신
지혜와 자비를 모두 갖추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곧 인류에게 밝은 지혜와 바른 길을 보여주고 고뇌에서 벗어난
참된 행복을 일깨워 준 석존에 대한 지극하고 절대적인 믿음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佛의 개념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로 확대될 수도 있겠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歸依法 離欲尊)
여기에서 가르침이란 석존이 설한 가르침, 즉 바른 법(진리)을 뜻한다.
이 法도 후세에 내려오면서 그 뜻이 확대되어 후세에 성립된 모든 경전,
논장까지를 포함해서 일컫게 되었다.
탐욕의 구름에 뒤덮혀 빛을 잃은 고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그 구름을 헤쳐버림으로써 진리의 광명, 진리의 생명을 찾아
그 광명 그 생명과 하나되어 끝없는 열반에 자재하리라는 신심의 약속인 것이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歸依僧 衆中尊)
승가란 석존을 믿고 따르는 수행자이니,
곧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사부대중)를 가리킨다.
석존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면서 재가 신도는 세간을 여읜
출가 수행 스님들을 지극히 공경하고,
또 사부대중이 서로 믿고 의지함으로써 화합의 공동체를 이룩한다는 것이다.
★발원 서원
원(願)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바라는 것 즉 바램이 원일 것이다.
바램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는 우리 불제자라면
자기 자신만을 위하거나 세속적 이익과 욕망을 성취하는 바램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이웃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과 원을 세워봄이 마땅하리라.
관세음보살께서는 "만약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고통과 괴로움에 빠진 중생이
나를 부를 때는 반드시 그곳에 가서 구해내리라.
만약 그렇지 못할 때는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 는 원을 세우셨고
또 지장보살은 "지옥에 있는 중생을 모두 구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 는
크나큰 서원을 세우셨다.
이렇듯 불보살님들의 원은 많은 사람을 구해내고자 하는
마음이 서려 있어 우리를 감동케 하며 또한 기쁘게 한다.
이런 여러 불보살들의 별원(別願)을 크게 4가지로 정리하여
총원(總願)이라 이르니 이를 사홍서원(四弘誓願)이라 한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衆生無邊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煩惱無盡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法門無量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佛道無上誓願成)
서원(誓願)이란 불도(佛道)를 수행함에 있어 스스로 깨달음을 얻겠다고 맹세하고,
타인을 구제하겠다고 맹세하는 것 또는 그렇게 원하는 것이니,
이는 불교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요, 신행생활의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염 불
염불이란 부처님을 기억하며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온갖 번뇌를 소멸하고 정각을 얻어 니르바나(열반)에 이르기를 소원한다.
바른 깨달음을 얻어 위없는 진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성자(聖者)가 되는 것,
이는 곧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건립된 극락정토(極樂淨土)는 '청정하고 안락한 국토'라는 뜻으로
다섯가지 흐린 것(五濁)이 없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한 모든 괴로움이 없으며,
오직 즐거움만 있는 세계로서 생사 윤회하는 삼계(欲界. 色界. 無色界)를 뛰어넘은
영원한 낙토(樂土)임을 경전에서는 찬탄하여 마지 않는다.
극락정토는 모든 불·보살이 수용하는 청정한 보토(報土)인 동시에
중생들 또한 번뇌 업장만 소멸하면 금생과 내세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 보고,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상주불멸한 실상(實相)의 경계인 것이다.
이러한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온갖 번뇌를 소멸하고
정각을 얻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듯이 적은 선근(善根)과 적은 복덕(福德)으로는 불가능하니,
극락 왕생하기 위한 큰 선근과 거룩한 복덕으로 경전에서는 염불을 얘기하고 있다.
신라의 원효스님께서는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만 지극한 마음으로 외면
서방 극락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염불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칭명(稱明) 염불 : 부처님의 명호(이름)를 부르는 염불
·관상(觀像) 염불 :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모습)를 생각하는 염불
·관상(觀想) 염불 : 고요히 앉아서 부처님의 지혜 공덕을 생각하는 염불
·실상(實相) 염불 : 부처님의 법신 곧 일체 만법의 본바탕은
있는 것(有)도 아니고 공(空)한 것도 아닌 중도의 실상임을 생각하는 염불
일체 만유의 근본 자성이 아미타불이요,
극락정토 역시 같은 자성인 청정심으로 이루어진 경계이니,
마음이 오염되면 그에 상응한 삼계 육도에 윤회하는 고뇌를 벗어날 수 없으며,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오면 금생과 내세를 가리지 않고
상락아정(常樂我淨)한 극락정토의 청정한 행복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기 도
지금 우리의 불교 모습을 '기복불교'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부처님으로부터 복을 구하는 모습이
미신적이며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불교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기도(祈禱)는 기원(祈願)이라고도 하며 불·보살의 가피력을 빌어 재앙을 없애고
복이 늘도록 비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본래 기도를 하지 않았으나
서원·본원 사상이 생기면서 자신이 지은 공덕을 남에게 베풀어줌으로써
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어 후대로 내려오면서 여러가지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세월이 흐르면서 불자들은 위없는 진리의 깨달음을 여시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쉬지 않고 정진했던 석존에 대한 흠모와
우러름이 기도의 형식으로 변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온 우주 공간에 구원의 손길을 보내고 계시며,
지금 내 마음과 부처님 마음이 일맥으로 통한다는 것을 믿고
부처님께 일심으로 귀의하며 간절히 소망하면,
부처님의 구원의 가피력을 입어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집중하여 기도하면
업장이 소멸되며 기원이 성취된다.
이는 사실이며 우리는 실례를 수많은 기도 영험을 통해 우리 주위에서 보아왔고 들어왔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마음가짐이며 회향하는 정신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되어 존재하고 있으므로
나 혼자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불행하면
아무리 나 혼자 불행해지지 않으려 해도 불행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행복을 기원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행복을 기원해야 하며
설사 나의 행복을 기원했다 하더라도,
기도의 가피를 입으면 이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회향하면 되는 것이다.
나의 행복으로부터 이웃의 행복을 함께 함도 훌륭한 일 아닌가.
아울러 더 나아가 우리는 부처님과 같은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여
마땅히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쉼없이 중생들을 향해
자신을 희생시키며 나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는 자력적 기도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해이해진 믿음을 다지고 확인하는 기회이며 서원·발원의 시간인 것이다.
★선(禪)
선(禪)이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佛性)을 발견하고 부처와 자신이
둘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안정시켜 혼탁한 의식과 거칠고 불순한 감정을 없앰으로써
자신의 본성, 불성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선의 목적이다.
교(敎)가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다 직선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부처님의 교법 안에 있는 선을 관선(觀禪)이라 하고
부처님의 교법 밖에 있는 선을 참선(參禪)이라고 한다.
관선이란 마음으로 지극하게 생각해서 보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
사념처(四念處)라는 수행법이 있다.
사념처에 의해 나의 마음을 관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이나
물질에 대해 집착할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관선에 대비되는 참선은 중국에서 확립된 부처님 설법 밖의 수행법으로,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默照禪)이라는 두개의 큰 가닥이 있다.
묵조선은 묵묵히 자기 마음자리를 돌아보는 수행법이고,
간화선은 화두에 의지하여 닦는 선법으로 화두선(話頭禪)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간화선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선을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니,
온갖 더러움과 어리석음에 싸인 중생이 본래 우주와 하나인 영체, 즉 부처라고
일컬어지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닦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무시선(無時禪)이라.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일상 생활
그대로가 곧 선일수 있으니,
선을 닦는 마음으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도 훌륭한 선인 것이다.
우린 가끔 삶의 허망감에 빠진다. 어제까지 아무 일없이 즐겁게 만났던 사람을
하루 아침에 교통사고로 그를 여의어야 했을때...,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생계를 위한 삶을 살며
삶에 지쳐 이 힘든 삶을 왜 살아야 하나! 하며 한숨 지으면서... 우린 삶의 무의미성에 빠진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잘 해줄 수 있는 수행법으로 선 수행법이 선용(善用)되어 왔다.
기도·염불·간경 등 여러 바라밀과 더불어 이를 열심히 행한다면
분명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관념적 대답이 아닌 몸으로 증득되는 대답을. 또한 설사 나의 뿌리를 찾지 못하더라도,
다만 하루 10분만이라도 모든 세속적인 끄달림을 여읜채 내 소리에 귀 기울이며
더 나은 삶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곧 창조적 시간이 되지 않겠는가.
★사 홍 서 원
1.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이 한 사람도 없는 정토세계를 이루겠습니다.
2.어떤 경우에도 괴로움과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정진하겠습니다.
3.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하며 모두 배우겠습니다.
4.일체중생과 더불어 꼭 성불하겠습니다.
★오 계
"나 없는 세상에서 너희가 의지해야 할 곳은
오직 자신의 본성과 나의 가르침인 계 뿐이니라.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하셨습니다.
첫째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모든 생명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키겠습니다.
출신성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피부빛깔이나 종족에
관계없이 신체장애나 남여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명의 존엄성을 불자는 굳게 믿습니다.
둘째 도둑질을 하지 말라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키겠습니다.
인간의 귀천은 그 행위에 의해서만 결정되므로 정당한
노동에 의하지 않고 소비하는 것은 중생의 노고를
도둑질하는 것이 되므로 성실한 삶을 살 때만이
삼륜이 청정한 보시행임을 불자는 굳게 믿습니다.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인간은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키겠습니다
스스로 마음과 육신을 청정히 지킬 때만이
욕망으로인해 존엄한 인격이 노동의 도구나 성적 도구, 전쟁의
도구로 전락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음을 불자는 굳게 믿습니다.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항상 진실만을 추구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키겠습니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하여 거짓으로 중생을 현혹해서는 안되며
올바르게 살려는 끝없는 구도적 자세만이
일체의 거짓과 허상을 타파하고 진실을 볼 수 있음을 불자는 굳게 믿습니다.
다섯째 술을 먹지 말라
맑고 안정된 소견을 가지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키겠습니다.
거짓가치에 물들어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시키는
중독성 물질의 섭취나 거짓 문화를 즐기지 않는 것이
올바른 소견으로 살아가는 길임을 불자는 굳게 믿습니다
격류를 건너는 떼목과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오계를 받아 지키어 청정한 삶을 살겠습니다.
거짓된 삶을 오래 살기 위하여 비굴하게 사느니보다는
하루를 살고 죽더라도 오계를 지키는 진실한 삶을 살겠습니다.
★수 계
불교 신행생활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언제일까.
깨달음의 순간..... 지극한 기도에 불보살의 감응이 오는 순간.....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를 염송하며 연비를 받는 순간.....
계는 무소유에 입각하여 절대적 가치인 생명을 기준으로 삼았기에
우리들 삶의 절대적 가치기준이 된다.
과거의 악업을 되풀이 하지 않고 나와 남이 함께 선업을 쌓아 고통을 극복하고
불세계로 가기위한 행동의 지표가 바로 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계는 거짓 가치를 버리고 올바른 가치를 구현하는 삶을 살겠다는 서약인 것이다.
삼보에 귀의하며 승가의 큰 다섯가지 규율을 내 삶의 지표로서 받아 안으며
늘 몸에 지닌다는 약속이다. 이는 이리 저리 방황하다 이제 불법을 만나
올바른 삶을 살아가겠다는 거룩한 맹세이니,
곧 육신을 바꾸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요, 수계식을 통해
나 혼자만의 결심이 아니라 만인에게 공포함으로써
같은 가치관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동참을 선언하는 것이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不 殺 生]
생명이란 절대자유와 절대평등의 불성을 실현하는 주체이며 불성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그대로 목적이 된다. 생명의 존엄성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니,
그 어떤 이유로도 생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차별받거나 핍박이나 억압을 받아서는 안된다.
우린 생명의 외경을 통해 자비의 종자를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뭇 생명의 절대존엄, 이는 붇다의 첫 일성이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 [不 偸 盜]
이는 인간의 성실성에 대한 가치를 말한다. 진실한 노동의 대가, 정당한 대가를 바람을 말하리라.
또한 '주지않거든 취하지 말라'는 계본과 함께 물욕을 줄이라는 계본일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적게 소유하는, 나의 이익을 바라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며,
또한 선업의 공덕으로 더 많은 사람을 보살펴주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탐욕에 기반을 둔 가치를 갖고 있는 한 우리는 도둑의 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쉽게 일하고 보다 많은 대가를 받으려는
가치관에 갇혀 있는 한 도둑의 죄업을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소유, 그것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함께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不 邪 淫]
이는 쾌락을 얻기 위해 인간을 도구 삼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음탕한 마음을 제거하며 청정의 종자를 키워 나가야 함을 말함이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不 妄 語]
이는 인간의 진실성에 대한 가치를 말한다. 우리의 자성(自性)은 진실과 참 그 자체이다.
우린 그러한 진실함을 통해 우리 마음을 한 티끌도 끼지 않은
저 맑은 명경지수와 같이 맑혀가며 참됨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삶은 수많은 믿음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우리의 탄탄한 신뢰속에 이 사회는 운영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거짓말은 우리 이웃을 져버리는 일이요,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상대의 지혜를 흐리게 하며,
지혜의 눈이 흐려지면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없게 되고
끝내는 방황하며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남에게 악업을 짓는 동기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니
그 죄업은 더욱 크리라. 우린 진실함을 지키는데 게으름 없이 정진해야겠다.
술을 먹지 말라 [不 飮 酒]
술은 지혜를 흐리게 한다고 한다. 우리의 자제력을 흐트러뜨리며 바른 판단을 방해한다.
우린 술을 삼가며,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지 말며 지혜의 종자를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계(戒)는 목숨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 그러나 계를 지킨다는 것은
계의 올바른 정신을 지킨다는 것이지 계의 자구(字句)를 그대로 지키라는 것은 아니다.
즉 계의 상징성 역사성에 비추어 그 근본정신을 찾고 생명의 계인
'불살생계'를 중심으로 상황에 따라 파계가 인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를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계를 굳이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은 한 두 번의 파계가 습관화 되어
항시 변명으로 흐를 소지가 있음을 우려함이다.
아무리 옳은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 행위 자체가 다 합리화 될 수는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계를 파했을 때는 느끼는 즉시 그 자리에서 참회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을 해야 한다.
우린 계가 우리의 행동을 억압하는 사슬이 아닌 계를 지킴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불자가 되어야 겠다.
★참 회
참회란 과거로부터 지어 온 잘못은 물론 현재 생활하는 가운데
지은 모든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또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부처님 앞에 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회란 무엇인가?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 뉘우쳐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육조단경 참회품]
우리는 항상 변함없이 몸을 움직이고, 생각하며 말을 합니다. 이중 어느 하나도 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쉬지 않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말로서 행하는 모든 것이 업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것도 업 (業)이고 혼자서 공상하는 것도 업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더 할말이 없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업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우리는 업을 만드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이루어 놓은 업이 옳고 그른지는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분위기나 상황에 따라 판단하거나, 우리 자신에게 너무나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를 받고 그 계에 맞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살다보면 계에 비추어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 합리화해서 그냥 넘겨버리면 안됩니다.
내가 행한 업중 지나간 나의 잘못된 업에 대해서 뉘우쳐야 합니다. 이것이 참(懺)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잘못을 지었을 때만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이것도 어찌보면 합리화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잘못을 지었을 때 뉘우치고, 그와 같은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다음에는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야합니다.
이렇게 뉘우치며 앞으로의 일을 조심하는 것이 회(悔)입니다.
매일매일 자신이 지은 잘못을 참회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올바른 삶의 모습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불공의 의의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 내면의 믿음을
외형적 의식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식으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물질적 공양과 정신적 공양이 있으니,
이를 불공(佛供)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을 믿고 그 공덕을 찬양하며 자비에 의거하여
더욱 기쁜 마음으로 정진하고 바르게 살 것을 다짐하는 구체적인 믿음의 표현이
후세에 오면서 향, 꽃, 차, 과일 등의 음식을 불전에 올리고
개인적인 복을 비는 일정한 형식을 이루게 된 것이다.
부처님 전에 절을 올리고 헌물을 하는 이러한 모습들은 단순한 기복이 아닌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고 믿음을 다짐하여 자기 소유의 것을
이웃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향·촛불과 같은 삶으로
향과 초는 자기 몸을 태움으로써 아름다운 향기와 광채를 발산한다.
향은 여러가지 모양과 빛깔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함께 태울 때 그 연기는 하나로 된다.
이것은 이기심과 자만심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화합함을 뜻한다.
그리고 초는 자기의 몸을 태움으로써 밝은 빛을 내어 어둠을 밝힌다.
이것은 아름다운 자기 희생인 것이다.
부처님 전에 향을 사르고 촛불을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닦아 마음의 향기를 배어 내며 어둠을 밝히는 삶을 살겠다는 굳은 서원의 표현인 것이다.
마음의 등불을 밝히며....
우린 초파일 때 사찰에 가서 연등을 밝힌다. 인류에게 밝은 지혜와 바른 길을 보여주며
고뇌에서 벗어난 참된 행복을 일깨워 준 거룩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흠모하며
당신의 탄생을 축복하고픈 마음일 것이다. 아울러 등이 어둠을 밝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깨달아 마음의 어둠을 쫓고 실천함은 물론 이를 널리 전하여
이 세상을 두루 밝히겠다는 서원을 세우며 연등을 밝히면 부처님이 더 예뻐하지 않으실까.
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提 下化衆生(먼저 깨달음을 구하고, 다음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경전속의 불교 용어
★.사 성 제(四聖諦)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진리의 법을 닦아 행하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괴로움의 진리이니, 그 이치는 끝이 없어서 생각으로
도달할 수도 없고 말로도 다할 수 없다.
둘째는 괴로움의 집기의 진리이니, 그 이치는 끝이 없어서
생각으로도 다할 수 없고 말로도 다할 수 없다.
셋째는 괴로움의 멸함의 진리이니, 그 이치는 끝이 없어서
생각으로도 다할 수 없고 말로도 다할 수 없다.
넷째는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의 진리이니,
그 이치는 끝이 없어서 생각으로도 다할 수 없고 말로도 다할 수 없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진리인가(苦聖諦).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란
나는 괴로움·늙는 괴로움·앓는 괴로움·죽는 괴로움과 근심·슬픔·번민의 괴로움과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니,
통틀어 말하면 다섯 가지 취한 근간의 괴로움이다. 이것을 괴로움의 진리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집기의 진리인가(集聖諦).
이른바 괴로움의 집기의 진리란 애정이 탐욕과 어울려 마음이 항상 집착하는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집기의 진리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멸함의 진리인가(滅聖諦).
이른바 괴로움의 멸함의 진리란 그 애욕이 아주 없어져 남음이 없고
다시는 새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멸함의 진리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의 진리인가(道聖諦).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의 진리란 곧 성현의 여덟 가지 길이니,
이른바 바른 소견(正見)·바른 생각(正思)·바른 말(正語)·바른 업(正業)
·바른 생활(正命)·바른 노력(正精進)·바른 기억(正念)·바른 집중(正定)을 말한다.
이것을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의 진리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이 네 가지 진리는 진실함이요 허망하지 않고
세존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라 한다.
모든 중생으로서 두발 갖이·세발 갖이·네발 갖이나,
애욕의 세계·색의 세계·색이 없는 세계·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계의 여러 중생 중에서 여래가 최상이신 데,
여래가 이 네 가지 진리를 성취하셨기 때문에 네 가지 진리라고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을 네 가지 진리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언제나 나고 죽음 속에 있어서 다섯 길을 바퀴돌게 된다.
이제 나는 이 네 가지 진리를 얻었기 때문에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갔으며,
이 진리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나고 죽는 근본을 끊어,
다시는 후생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여실히 알았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증일아함경 제17권 】
★.팔정도(八正道)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뉜錯母뵈? 제타숲
장자의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삿됨과 바름이 있으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겠다.
어떤 것이 삿됨인가. 삿된 견해와 나아가서는 삿된 선정이다.
어떤 것이 바름인가. 바른 견해와 나아가서는 바른 선정이다.
어떤 것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보시가 있고 여래의 교설과 재(齋)가 있으며,
선한 행위, 악한 행위와 선하고 악한 행위의 갚음이 있고,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고,
부모가 있고 중생의 태어남(生)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아라한이 열반으로 잘 향하고 잘 이르러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스스로 알고 증득하여 나의 태어남은 이미 다하고(我生已盡) 범행은
이미서며(梵行已立) 할 바를 모두 마친(所作已作)곳에 완전히 머물러
뒤의 몸을 받지 않음(不受後有)을 스스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괴로움에관해서 확실히 통찰하고, 괴로움의 원인에관해서 확실히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길을 확실히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길에 관해서 확실히 통찰하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바른 뜻(正思惟)인가.
탐욕을 여읜 뜻, 성냄이 없는 뜻, 남(중생)을해치지 않는 뜻이다.
어떤 것이 바른 말(正語)인가.
거짓말,헐뜯는 말, 거친말(욕설), 쓸데 없는말을 떠난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생명체를 죽이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으며, 잘못된 애욕행위를 떠난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생활(正命)인가.
의복, 음식, 와구, 탕약을 법다이 구하고, 법답지 않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노력(正精進)인가. 하고자 함(欲)과 정진(精進)의 방편이니 번뇌를 떠나며,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항상 물러섬이 없이 행하는 것이다.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이나 좋지 않은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결심하고 노력하고
전력을 기울려 마음을 다잡아 애쓴다.
이미 일어난 악이나 좋지 않은 행위를 버리기 위해 결심하여 노력하고
전력을 기울려 마음을 다잡아 애쓰고.
이미 일어난 선한 행위는 머물러 흩어지지 않게 기르고,
충만 하게 이루어 성취케 하려는 결심을 하여 노력하고 ,전력을 기울려 마음을 다잡아 애쓴다.
어떤 것이 바른 생각(正念)인가. 진리를 수순(隨順)하는 생각이니 헛되고 망녕되지 않는 것이다.
몸에서는 몸을 전심전력으로 마음집중하여 분명한 앎으로 계속 관찰한다.(무상,고,,무아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마음집중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
이와같이 감각에서,마음에서,법에서는법을 전심전력으로 마음집중하여
분명한 앎으로 계속 관찰한다.(무상,고,,무아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마음집중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
어떤 것이 바른 선정인가(正定)인가. 마음을 어지럽지 않은 곳에 머물러 두고
굳게 거두어 가져, 고요히 삼매(三昧)에 든 한 마음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잠아함, 사정경(邪正經)]
★.오 온(五蘊)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色)은 항상됨이 없다. 혹은 인으로, 혹은 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색이 생기더라도
그것도 또한 항상됨이 없느니라. 항상됨이 없는 인과 항상됨이 없는
연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모든 색이 어떻게 항상됨이 있겠느냐.
이와 같이 느낌(受)·생각(想)·결합(行)·식별(識)도 항상됨이 없는 인연으로 생긴
그것들이 어떻게 항상되겠느냐.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색은 항상됨이 없고, 느낌·생각·결합·식별도 또한 항상됨이 없느니라.
항상됨이 없는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거룩한 제자로서 이렇게 관찰하면 그는 곧 색을 싫어하고, 느낌·생각·결합·식별을 싫어하느니라.
싫어하면 즐겨하지 않고, 즐겨하지 않으면 해탈하며, 해탈하면 지견이 생기나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스스로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 줄을 아느니라.”
이때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잡아함경 제1권 ]
★.십이연기(十二緣起)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의 제타숲 동산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인연법(因緣法)을 설명하리니 잘 기억하고 그 행을 닦아 익혀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분부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인연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무명을 연하여 결합이 있고, 결합을 연하여 식별이 있으며,
식별을 연하여 이름과 색이 있고, 이름과 색을 연하여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있으며,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연하여 부딪침이 있고, 부딪침을 연하여 느낌이 있으며,
느낌을 연하여 갈애가 있고, 갈애를 연하여 취함이 있으며, 취함을 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연하여 남이 있으며, 남을 연하여 헤아릴 수 없는 늙음·앓음·죽음과 근심·고통·번민이 있다.
이리하여 다섯가지 근간의 몸을 이루었느니라.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괴로움을 모르고 그 집기와
그 멸함과 그 멸하는 길을 모르는 것이니 이것을 무명이라 한다.
결합[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결합에는 세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셋인가. 이른바 몸의 행, 입의 행, 의지의 행이니 이것을 결합이라 하느니라.
식별[識]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식별이니,
여섯 가지란 이른바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식별이다. 이것을 식별이라 한다.
이름[名]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네 가지 색이 없는 근간이니,
즉 느낌의 근간, 생각, 결합, 식별의 근간이니, 이것을 이름이라 한다.
색[色]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사대와 사대로 이루어진 몸이니,
이것을 색이라 하며 이름은 각각 다르므로 이름과 색이라 하느니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處]이란 무엇인가. 주관적인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니,
이것은 이른바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감각기관이다. 이것을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라 한다.
부딪침[觸]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부딪침 몸이다.
여섯 가지 부딪침이란 즉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부딪침이니 이것을 부딪침이라 하느니라.
느낌[受]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세 가지 느낌이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 이것을 느낌이라 한다.
갈애[愛]란 무엇인가. 이른바 세 가지 갈애 몸이 그것이니,
애욕의 갈애, 존재의 갈애, 존재 없음의 갈애이니라.
취함[取]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네 가지 취함이 그것이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즉 탐욕의 취함, 소견의 취함, 계율의 취함, '나'의 취함이다.
이것을 네 가지 취함이라 한다.
존재[有]란 무엇인가. 이른바 세 가지 존재이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애욕의 존재, 색의 존재, 색이 없는 존재이니 이것을 존재라 한다.
남[生]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남이란 어느 집의 태에 들어 갖가지 존재를 받아
다섯 근간을 얻고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받는 것이니 이것을 남이라 하느니라.
늙음[老]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들의 몸에서 이가 빠지고
머리털이 세며 기력이 쇠하고 감관이 무르녹으며,
수명이 날로 줄어들어 본래의 정신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죽음[死]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들이 받은 몸의 온기가 없어지면서 덧없고
변하여 다섯 친척이 각기 흩어지며 다섯 근간의 몸을 버리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라. 그러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라 하느니라.
이것이 인연법으로서 그 이치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모든 부처 여래가 큰 자비를 일으켜 베풀어야 할 일을 나는 이제 마쳤다.
너희들은 나무 밑이나 한 데서나 혹은 무덤 사이에서 이것을 생각하고 좌선을 하면서
두려워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지금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느니라"
그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증일아함경 제48권 】
★.중 도(中道) 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나알리부락 깊은 숲 속의 대빈사(待賓舍)에 계셨다.
그때에 존자 산타가전연은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 쪽에 물러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바른 소견이란 어떤 것이 바른 소견입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바른 소견을 시설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산타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가지의 의지함이 있으니 혹은 유(有)요 혹은 무(無)다.
취함[取] 때문에 부딪쳐지고, '취함'이 없으면 마음이 경계에 매이더라도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게 되어, 내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두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하는 대로 두어, 그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나니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며
이것을 여래가 시설한 바른 소견이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세간의 집기를 바르고 참되게 알고 보면,
혹은 세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을 것이요, 세간의 멸함을 참다이 알고 보면,
혹은 세간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일러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무명을 연하여 결합이 있고‥‥‥내지 아주 커다란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존자 산타가전연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중 도(中道) Ⅱ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그리하성 칼란다 대나무 동산에 계셨다.
때에 집을 나온 어떤 바차 종족은 부처님께 나아와 합장하고
문안을 드린 뒤에 한 쪽에 물러앉아 여쭈었다.
"어떠하나이까. 세존이시여, 내가 있습니까."
이때에 세존께서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물었으나
세존께서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으셨다.
때에 바차는 생각하였다. '나는 세 번이나 물었으나
사문 고오타마는 대답하지 않으신다. 나는 그만 돌아가리라' 그때에
존자 아난은 부처님 뒤에서 부채로 부쳐 드리고 있다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 바차는 세 번이나 여쭈었는데 세존께서는 왜 대답을 하지 않으시나이까.
그것은 저 바차로 하여금 '사문은 내가 묻는 것을 대답하지 못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더하게 하지 않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하셨다.
"내가 만일 '나'가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가진 삿된 소견을 더하게 할 것이요,
만일 내가 나는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가진 의혹을 더욱 더하지 않겠느냐.
본래부터 '나'가 있었는데 지금 끊어졌다고 말하여야 하는가.
만일 본래부터 '나'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상견(常見)이요.
지금부터 끊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단견(斷見)인 것이다.
여래는 그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 서서 설법한다.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는 것이다'고. 즉 무명을 연하여 결합이 있고
내지 남·늙음·앓음·죽음과 근심·슬픔·고통·번민이 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잡아함경 제34권 ]
★.십 업 (十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 슈라바스티국에 노니시면서 제타숲 동산에 계셨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받거나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중에는 몸으로 일부러 짓는 세 가지 업이 있다.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한다.
입에는 네 가지 업이 있고, 뜻에는 세 가지 업이 있다.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한다.
어떤 것이 몸으로 일부러 짓는 세 가지 업 (身業)으로서,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인가.
첫째는 산목숨을 죽이는 것 (殺生)이니, 지극히 악해 피를 마시고 그것을 해치고자 하며
중생과 내지 곤충까지도 사랑하지 않는다.
둘째는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 (偸盜)이니,
남의 재물에 집착하여 도둑질할 뜻으로 그것을 취하는 것이다.
셋째는 사음 (邪 )이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어머니의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부모의 보호하는 바 있으며,
혹은 자매(姉妹)의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형제의 보호하는 바 있으며,
혹은 아내의 부모가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친친(親親)의 보호하는 바 있으며,
혹은 같은 성(姓)의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남의 부녀로서 채찍의 벌을 받는 두려움이 있으며,
이름을 빌린 여자 내지 화환으로 장식한 여자가 있으니, 이러한 여자를 범(犯)하는 것이다.
이것을 몸으로 일부러 짓는 세가지 업이라 하고,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입으로 일부러 짓는 네 가지 업 (口業)으로서,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인가.
첫째는 거짓말 (妄語)이다. 그는 대중 가운데 있거나 권속들 가운데 있거나
혹은 왕가(王家)에 있어, 만일 그를 불러 ‘너는 알거든 곧 말하라’고 물으면,
그는 모르면서 안다 하고 알면서 모른다 하며,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 하고
본 것을 보지 않았다 하며, 자기를 위하거나 남을 위하고
혹은 재물을 위해,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간하는 말 (兩舌)이니, 남을 갈라서게 하고자 한다.
여기서 듣고 저기에 말해 이것을 부수고자 하고, 저기서 듣고 여기에 말해 저것을 부수고자 한다.
모인 자는 떠나고자 하고 떠난 자는 다시 떠나, 그러면서 당파를 즐기며 당파를 칭찬해 말한다.
셋째는 추한 말 (惡口)이다. 그가 만일 말을 하면,
말 기운은 추악하고 악한 소리는 귀에 거슬러, 여럿이 기뻐하지 않고 여럿이 사랑하지 않으며,
남을 괴롭게 하여 안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 그는 이러한 말을 한다.
넷째는 꾸며대는 말 (綺語)이다. 그는 때 (時)가 아닌데 말하고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며,
뜻이 없는 것을 말하고 법이 아닌 것을 말하며, 지식(止息)이 아닌 것을 말한다.
또 다시 지식 아닌 일을 칭찬하고, 때를 어기어 잘 가르치지 않으며, 또한 잘 꾸짖지도 않는다.
이것을 입으로 일부러 짓는 네 가지 업이라 하고,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의지로 일부러 짓는 세가지 업 (意業)으로서,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인가.
첫째는 탐냄 (貪愛)이다. 남의 재물과 모든 생활의 기구를 항상 엿보고,
구하고 바래어 나의 소득으로 만들고자 한다.
둘째는 미워하고 성내는 것 (瞋 )이다. 마음에 미움을 품어 이런 생각을 가진다.
‘중생은 죽어야 하고 묶어야 하며, 재물을 빼앗아야 하고 파면시켜야 하며,
배척해 쫓아내야 한다’고.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도록 한다.
셋째는 삿된 소견 (痴暗)이다. 그의 소견은 거꾸로 되어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보시(布施)도 없고 재(齋)도 없으며, 주설(呪說)도 없다.
선과 악의 업도 없고 선악 업의 과보도 없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도 없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 세상에는 진인(眞人)이 사는 좋은 곳도 없고,
이 세상 저 세상에 잘 가고 잘 향하며,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증득하고 성취하여 노니는 것도 없다.’고.
이것을 의지로 일부러 짓는 세 가지 업이라 하고,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중아함경 제3권 ]
★. 십 이 처(十二處)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고오타마시여, 이른바 일체란 어떤 것을 일체라 하나이까."
"일체란 곧 열두 가지 포섭처〔十二入處〕이니,
눈과 색·귀와 소리·코와 냄새·혀와 맛·몸과 촉감·의지와 법이다. 이것을 일체라 하느니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사문 고오타마의 말하는 일체를 버리고 따로 다른 일체를 세우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으로서, 듣고도 알지 못하여 그 의혹만 더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율의 아닌 것에 머무르면
이들 모든 비구는 긴 밤 동안에 큰 고통받으리.
이 모든 율의에서 언제나 부지런히 닦아 익히고
바른 믿음으로 마음이 하나 되어 모든 번뇌가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라.
눈으로써 색을 보면 마음에 맞고 맞지 않는 것 있네.
마음에 맞아도 욕심을 내지 말고 마음에 안 맞는다 미워하지도 말라.
귀로써 모든 소리 들으면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을 것 있네.
생각할 만한 것도 즐겨해 집착 말고 생각할 것 못된다 미워하지도 말라.
코로써 냄새맡아 보는 것 혹은 향기롭거나 더럽네.
향기로움과 더러움에 마음을 평등이 하여 욕심내지 말고 언짢아도 하지 말라.
먹는 바 여러 가지 음식에서도 또한 맛난 것 있고 나쁜 것 있네.
좋아하는 맛에도 탐욕을 내지 말고 나쁜 맛이라 또한 가리지 말라.
즐거운 촉감이 몸에 닿아도 거기에 빠져서 헤매지 말고
괴로운 촉감이 닿아도 너무 밉다는 생각을 내지 말라.
평등하게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서 멸하기 어려운 것을 멸하게 하라.
내 마음으로써 관찰하는 바 이것이나 저것의 온갖 모양을
참답지 않게 거짓으로 분별하면 욕탐은 갈수록 더욱 더하리.
저 모든 나쁜 것 깨달아 알고 욕심을 멀리 떠나 편히 머물러라.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거두어 잡아
여섯 가지 인식대상에 부딪쳐도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악마의 원수 무찔러 항복받고 나고 죽음을 건너 피안에 이르리라.
★.육바라밀(六波羅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약 능히 모든 재물을 아끼지 않고 항상 남에게 이익될 일을 하며,
있는 대로 따라서 보시하되 다소를 묻지 않으며, 굶주리는 세상에서는 음식을 즐기어 주되,
은혜 갚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 상이 있는 자면 이 사람은 곧 보시바라밀(布施)에 공양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몸과 입과 뜻을 청정하게 하고,
항상 부드러운 마음을 닦아서 죄과를 짓지 않으며, 설사 잘못하여 지었더라도
항상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착한 일에 기쁜 마음을 낼지니라.
중생을 보면 사랑하는 생각을 내며, 항상 인자한 마음을 닦고 모든 것을 가엾어 할지니라.
선남자여, 이 상이 있는 자면 이 사람은 능히 계바라밀(持戒)에 공양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약 중생이 설사 악한 일로 가해하더라도 한 생각도 성내는 마음이 없이 하며,
끝까지 악으로 갚지 않아야 하며, 만약 와서 뉘우치고 사과하거든 곧 받을지니라.
성을 냈거든 부끄러워하고 무서워하며 후회하는 마음을 낼지니라.
선남자여, 이 상이 있는 자면 이 사람은 능히 인욕바라밀(忍辱)에 공양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약 사람이 능히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큰일의 공덕을 지을 때
힘을 쓰는 것처럼 작은 일을 경영할 때의 마음도 역시 이와 같이할지니라.
일을 할 때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때와 때 아님을 보지 말며, 자신을 경홀히 하지도 말지니라.
그리고 착한 법을 닦을 때 다른 말을 따르지 않게 할지니라.
선남자여, 이 상이 있는 자면, 이 사람은 능히 정진바라밀(精進)에 공양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약 사람이 능히 몸과 입과 뜻을 청정히 하고 공한처에 있기를 좋아하여,
혹은 굴이나 산이나 숲이나 빈집에 있으면서 심란하고 시끄러운 것과 침구를 좋아하지 않고,
세간의 일을 듣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먼저 부드러운 말을 하며, 즐기어 선정의 과보를 말할지니라.
선남자여, 이 상이 있는 자면 이 사람은 선정바라밀(禪定)에 공양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약 사람이 온갖 세간의 일을 배우되, 탐.진.치에 마음으로 탐하여
즐기지 않아서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며, 능히 부모와, 스승과 스님들과
나이 많은 이와 덕이 있는 분들에게 공양하며, 방일하지 않고 먼저 부드러운 말을 하며,
자기가 남보다 나아도 교만하지 않아야 하며,
괴로움을 받아도 근심하지 않고 즐거움을 받아도 기뻐하지 않을지니라.
선남자여 이 상이 있는 자면 이 사람은 능히 반야바라밀(般若)에 공양하는 것이니라
[ 우바새계경 ]
★.출 가
출가라 하면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스님이 되어 모든 세속적인 생활을 버리고
철저히 구도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출가를 한다고 하면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부처님은 출가시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친족을 떠나 온 까닭은
뒤에 큰 이익을 얻으려 꾀함이니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길이 미움과 사랑과 이별을 멸케 함이니라" <불본행집경>
이 말에서 부처님의 출가가 부처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부처님의 출가를 살펴보면 부처님은 싯달타 왕자시절에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싯달타 왕자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밑에서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이웃의 강국인 코살라국 사이의 마찰과
사촌인 데바닷타와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싯달타 왕자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전에서 보면 싯달타 왕자는 도성의 4대문에서 각각 노인과 병자와 장례행렬
그리고 사문을 보고 마침내 사문이 되기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은 싯달타 왕자의 고민과 그 해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싯달타 왕자는 운명적으로 우리에게 지워진
삶과 죽음으로부터의 영원한 해탈을 추구하여 출가하신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과감한 선택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출가를 우리를 둘러싼 문제로부터의 도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싯달타왕자의 출가는 도피가 아닌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왕자의 지위와 부를 버리고 떠난 과감한 선택이었습니다.
왕자로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부족함과 어려움이 없는 지위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며 그것을 인내해야 하는 지위를 선택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출가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와 결심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출가가 있었기에 싯달타왕자는 출가를 해 사문이 되어 왕궁인
카필라바스투와 세상에서는 잊혀졌지만, 깨달음을 얻어
현재 부처님이란 이름으로 우리들 곁에 영원히 살아계신 것입니다.
★.열 반
이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시각이 가까와 온 듯했다.
부처님은 무수히 모여든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물어 보셨다.
"그 동안 내가 한 설법의 내용에 대해서 의심나는 점이 있거든 묻도록 하여라.
승단이나 계율에 대해서도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제자들은 한 사람도 묻는 이가 없었다. 부처님은 거듭 말씀하셨다.
"어려워 말고 어서들 물어 보아라. 다정한 친구끼리 말하듯이 의문이 있으면 내게 물어 보아라."
이때 아난다가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수행자들 중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문을 지닌 사람이 없습니다."
아난다의 말을 들으시고 부처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라.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위에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라.
함께 내 교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 말씀을 남기고 부처님은 평안히 열반에 드셨다.
진리를 찾아 왕자의 자리도 박차고 출가하여 견디기 어려운 고행 끝에
지혜의 눈을 뜬 부처님, 사십오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해
몸소 자비를 구현한 부처님은 이와 같이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육신의 나이 여든으로 이 세상을 떠나갔지만 그 가르침은
어둔 밤의 등불처럼 중생의 앞길을 밝게 비추고 있다.
이 지상에 인류가 살아있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도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안거(安居)
안거는 범어 바르사(Varsa)의 번역으로 비(雨),
장마철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며 지금의 결제를 뜻한다.
고대 인도의 수행자들은 여름 비오는 계절 동안 활동에 의하여
무 의식적으로 저질러지는 살생을 막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서 행활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초기 불교 수행자들은 우기(安居)를 관계치 않고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철저하게 무집착·무소유의 생활과 중생구제의 실 천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즈음 부ㅊ님의 제자 중 문제성이 심한 육군비구(六群比丘)들이 우기에 편력하다가
강물에 범람하여 의복(衣服)·발우·좌복 등을 물에 띄워 잃어버렸는가 하면
미생물과 초목?? 밟음으로써 세속(世俗)의 뜻있는 거사(居士)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행(行)이 순결하고 자기각성(自己覺省)을 위하여 애쓰는 비구들은
수행자의 이미지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세상(世上)의 여론을 부처님 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육군비구여, 너희들의 행동은 청정한 것이 아니요,
사문(沙門)의 위의(威儀)가 아니며, 출가인의 법이 아니다.
거사들이 너희들의 잘 못을 지적하다가 삼보(三寶)를 비방하는 죄를 짓게 되었다." 하고
꾸짖으신 후 "비구들이여! 이제부터는 안거를지키도록 하라.
각자의 방과 침구 를 정돈하라. 누울 자리가 없으면 앉아서 하라.
앉을 자리가 없으면 서서 하라. 그대들이 안거를 위하여 왔을 때 바로 안거가 이루어진다.
비구들이여! 마땅한 곳을 골라 미리 말하고 안거하라.
수행에 장애 가 되는 일이 생기면 곧 떠나라.
안거 중 불가피한 일이 있으면 7 일 동안 출타를 허락하노니 기간 내에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비구들이여! 안거를 미리 약속하고 지키지 않거나 안거 중 까닭없 이 떠나거나
대중의 화합을 파하거나 약속한 7일 안에 돌아오지 않 으면 법랍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안거를 지키기 않았기 때 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사분율 37권)
현재 한국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과 10월 15일부터
1 월 15일까지 두 차례의 결제를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결제 기간은 한 곳에 모여 산문(山門) 밖의
출입을 금 하고 수행 정진에 몰두하도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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