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6] 짧았던 교구장 비서 시절
순박한 교우들과 눈물의 이별하고 대구로
어머니가 그토록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당 회장님이 소개해 준 젊은 부인을 식복사로 들여 몇 달을 아무 탈 없이 살았다. 남편이 전장에 나가 있어 홀로 안동으로 피난 내려온 새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본당에 와서 머무시겠다는 기별이 왔다.
'어떻게하지…. 젊은 여자를 절대 식복사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머니가 아시면 무척 상심하시겠는 걸. 아냐, 그래도 어머니가 와 계시면 남들 보기에도 좋을 것 같다.'
성탄절을 앞두고 어머니가 오셨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달 동안 식복사에 대해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무사히 넘어가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을 놓았는데 어느날 낯선 부인이 사제관에서 밥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쭸더니 어머니는 "새댁이 아프단다"라고 태연스레 말씀하셨다. 낯선 부인은 새댁이 몸을 추스리는 동안 잠시 와 있는 줄로 알았다.
며칠 후 내방 창문을 통해 그 새댁이 시내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아프다는 사람이 멀쩡하네'라고 중얼거리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어머니께 다시 여쭸더니 어머니께서 그 새댁을 내보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래도 그렇지 홀홀단신 피난온 아낙네를 무작정 내보내면 당장 뭘 먹고 살아요? 제가 본당신부입니까, 어머니가 본당 신부입니까?"
할 수 없이 다음날 그 새댁을 불러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수중에 있는 것을 몽땅 털어 주었다. 결국 '젊은 식복사 소동'은 그렇게 해결되었다. 그후 남편에게 소박맞은 일본 여자를 식복사로 들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아기 둘을 데리고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타이르고 수중에 있는 돈을 톡톡 털어 준 적이 있다.
본당사목에 한창 재미를 붙이는가 했더니 교구장 비서로 발령(1953년 4월)이 났다. 나는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에서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는 1년반 동안 '소박한 꿈'을 꾸고, 그 꿈을 키웠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 신자들의 영혼구령은 물론 가난까지 구제하겠다는 꿈이었다. 어디가서 돈을 끌어다 일자리를 만들어주면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삶인 가족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이 들대로 든 순박한 교우들의 눈물과 그 꿈을 뒤로 하고 대구로 왔다.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주교님(1902~1954)은 내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나를 어릴 때부터 알고 계시던 분이라 당신이 입던 옷을 곧잘 물려주시고, 내가 실수를 하면 스스럼없이 "바보같은 녀석!"이라고 혼을 내셨다. 워낙 아버지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야단을 쳐도 전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한 번은 최 주교님이 주신 돈과 양복을 도둑맞은 적이 있다. 분명히 방문을 잠그고 주교님과 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돌아와보니 도둑이 홀랑 털어가 버렸다. 그 바람에 주교님께 "바보같은 녀석"이라는 소리를 또 들었다.
비서 역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주교님이 대구지역에 주둔한 미군부대를 방문하시면 짧은 영어실력으로 통역을 하고, 외출 때면 가끔씩 수행하는 정도였다. 특히 최 주교님은 혼자 다니시는 경우가 많아 내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고등학생 단체 지도신부를 자임했는데 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가 그때 경북고등학교 학생이었다.
하루는 견진성사에 다녀오시는 최 주교님의 안색이 황달(黃疸) 환자처럼 누렇게 뜨고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해성병원이라는 작은 병원으로 모시고 갔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공군 군의관으로 대구에 내려와 계신 박병례 박사(성모병원 초대원장)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병원을 급히 들락거렸다. 주교님 병실에서 나오는 의사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어두웠다.
의사들이 암(癌)인 것 같다고 내게 살짝 귀띔해 주었다. 난 암이라는 병명을 그때 처음 들었다. 주교님은 밤이 되면 무척 고통스러워하셨다.
박병례 박사는 "좀 더 확실하게 알려면 개복(開腹)을 하는 수 밖에 없는데 수술 도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말했다. 수술을 하려면 주교님께도 그 사실을 알려야 했는데 차마 주교님 면전에서 그 말씀을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구 원로 신부님들도 고개를 저으셨다.
결국 내가 병실에 들어갔다.
"주교님…. 주교님. 저… 암진단이 나왔습니다. 의사들 말이 수술을 받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만의 하나 모르니까 유언을 남기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주교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난 50대의 건장한 주교님께 유언을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무척 괴로웠다. 처절한 느낌까지 들었다. 나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주교님은 다른 신부들을 제쳐두고 내게 교구 재산내역을 알려주면서 그걸 책임지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병이 워낙 깊었던 탓에 주교님은 수술후 며칠을 못 버티시고 54년 12월14일 영면하셨다. 그분의 비서인데다 내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상주(喪主)같은 심정으로 장례를 치렀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주교관 담벼락 뒤에 있는 번지도 없는 낡은 집을 수리해서 모시고 살았는데 중풍에 걸려 몇달간 고생을 하셨다.
어머니는 평소 "나는 사순절 둘째 영복날 죽으련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 신자들은 묵주기도 묵상주제인 환희·고통·영광을 갖고 월요일을 '첫환희', 화요일을 '첫통고(고통)', 수요일을 '첫영복(영광)', 목요일을 '둘째 환희'라고 불렀는데 둘째 영복날은 토요일이 되는 셈이다.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 사순절 둘째 영복날 죽으면 천당에 간다라는 속설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걸 믿으시고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둘째 영복날, 어머니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셨다. 그 불편한 몸으로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내리더니 그걸 갖고 성당으로 걸어 가셨다.
[평화신문, 제739호(2003년 9월 7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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