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가 작품

불꽃같은 여성화가-나혜석 (晶月,羅蕙錫)

문성식 2021. 12. 25. 15:29

불꽃같은 여성화가-나혜석 (晶月,羅蕙錫)




불꽃같은 여성화가

나혜석 (晶月,羅蕙錫) 화가의 작품세계

(1896년 ~ 1948년)

나혜석 (晶月,羅惠錫) 1896년 ~ 1948년)


해방 이후 「복덕방」·「태양을 먹은 새」·「시집가는 날」 등을 그린 화가.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명(兒名)은 나아지(羅兒只), 나명순(羅明順)이며, 아호는 정월(晶月)이다.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후 1918년 12월부터 박인덕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와 함께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과 함께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1][1]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체류 중 최린과 염문설이 돌았고 곧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과도 헤어지게 된다.

1935년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과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뛰어난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근대 여성이었으며,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하였다.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과 함께 이혼 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문재(文才)도 뛰어났으며,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2][2]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1930년 이당 김은호의 화숙인 이묵헌(以墨軒)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나혜석은 1896년 4월 18일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45번지)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나영완(羅永完)의 손녀이며, 시흥군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의 수성 최씨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요절, 弘錫, 景錫, 蕙錫, 芝錫) 매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나영완이 관직에 나가 출세했는데, 나영완은 호조참판(戶曹參判, 종2품)의 벼슬을 지내고 증조부 등에게는 증(贈) 호조참판 등 거듭 증직이 내려지는 등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나 참판 댁, 혹은 나부잣집이라 불렸다. 아버지 나기정은 구한말의 개명인사로, 대한제국 당시 수원면장[5],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 군수를 역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 공직에 있으면서 용인군 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나혜석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5남매 중에는 넷째,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09년에는 시흥 군수를 그리고 1912년에는 용인 군수로 있었다.

유년기 그에게는 이복 언니 나계석(羅稽錫), 여동생 나지석, 오빠 나홍석, 나경석이 있었다. 아버지 나기정의 서녀인 이복 언니 계석은 일찍 시집을 갔고, 큰오빠 나홍석(羅弘錫)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나기형(羅基亨)의 양자로 가게 되면서 혜석은 둘째 오빠 경석과 동생 지석과 함께 자라났다. 그중 경석은 늘 혜석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아버지 나기정은 깨인 인사였기에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고 나혜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 나혜석은 수원 화성,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침인 융건릉, 방화수류정, 서호를 찾아다니며 풍경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큰아버지의 양자로 간 큰 오빠 나홍석은 1909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로부터 신교육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6] 오빠 나홍석의 집은 수원면 남창리 55번지였다. 그는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아버지 나기정에게는 몇 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나혜석보다 연상인 이복 언니 나계석의 생모였고, 다른 첩은 나혜석과 비슷한 또래였다. 그가 사춘기일 때 아버지 나기정은 첩을 들였는데 이는 나혜석보다 한살많은 여자였고, 어머니 최시의가 어린 첩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자란 나혜석은 정조관념과 축첩제도, 가부장적 제도에 수많은 의문을 품게 된다.


청소년기

소녀기와 중학 시절

나기정은 첫딸 계석을 제외하고 딸, 아들 가리지 않고 모두 신교육을 시켰다. 다만 딸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나혜석은 아기, 막내딸 나지석은 간난이라 불렀다.[7] 아무리 개명 관료라도 봉건적 인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10년(융희 4년) 6월 수원 삼일여학교(수원 매향중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삼일여학교는 나혜석의 사촌오빠인 나중석이 1902년(광무 5년) 수원 보시동 북감리교회내에 설립한 사립삼일여학당으로 1909년(융희 2년) 삼일여학교로 변경하였다. 나혜석은 1910년 신학제에 의한 제1회 졸업생 4명중 한명이었다. 1910년 삼일여학교 재학 중 나혜석은 월간지 '개벽'을 위해 단색목판화를 제작하였다.[8] 나혜석의 단색목판화 '개척자' 제작 소식은 월간 '개벽' 13호에 게재되었다.[9] 여학교 시절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오빠가 후원했다.[6] 1910년 8월 삼일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여고 시절

그해 9월 1일 경성부에 있는 진명여학교에 편입학했다. 2년 연하의 여동생 나지석 역시 진명여학교에 진학하여 자매는 처음에는 통학하다가 나중에는 경성부 근처에 기숙사를 얻어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진명여학교 재학 중, 1912년 3학년 때는 7명의 같은반 동급생 중 급장(반장)이었고 1등을 했다.

나혜석은 1906년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하면서 '명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진명여학교에 편입한 이후 돌림자를 넣어 '혜석'으로 개명했다.[7]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제3회 졸업생 7명 중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중등학교 졸업생이 신문에 소개될 만큼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드물었다.[7] 역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혜석은 수려한 외모와 우수한 성적으로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사실이 「매일신보」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하이틴 스타가 되었다. 1913년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고교 졸업과 유학

학창시절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이던 1913년 경성부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일본 유학을 하고 있던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여자 미술대학 전신인 여자 미술학교 유화과(油?科)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오빠 나경석이 추천한 학교가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였다. 일본 유학의 배경에 대해서는 오빠 나경석의 권고 외에도 '신미술인 양화를 전공하기 위해서[2]'였다는 설도 있다. 나혜석은 어렵게 일본 유학을 떠난 만큼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우수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동경에 유학하는 조선 여학생 수효는 30명에 이르나 번화한 도회 문물에 접촉함과 부모의 감독을 가까이 받지 못하는 까닭으로 모두 성적이 좋다고 이르기 어려우나,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학업을 닦기 위하여 만리 해외에 괴로움을 달게 여김은 청년 남자가 도리어 부끄러이 여길 바이라.

그중에도 제일 학업 성적이 남보다 출중한 여자 유학생은 여자미술학교 생도 나혜석, 여의학교(女醫學校) 생도 허영숙 일본여자대학교 부속 고등여학교 졸업생 김수창 등 세 규수이다.


작품 출품 활동

1922년부터 고희동 등과 함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농가’와 봄을 출품하였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봉황성의 남문’이 4등 입선했다. 1924년 제3회 선전에 ‘가을의 정원’ 등을 출품하여 4등 수상했다.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낭랑조(娘娘朝)’로 3등 수상하고 이듬해 제5회 선전에는 천후궁(天後宮)’이 특선하였다.

1925년에는 ‘원한(怨恨)’을 조선문단 4월호에 발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였다. 1927년 제6회 선전에 ‘봄의 오후’를 출품하고 남편과 세계 일주를 시작하였다. 1929년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하여 수원 불교포교당에서 귀국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화가촌', '어린이' 등을 출품하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정원' 을 출품하여 다시 특선을 수상했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금강산만물상', '소녀', '창에서' 등을 출품하였다. 1922년부터 1932년까지 그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21년 3월 19~20일 첫 개인전에 선보인 정물화




1931년 제10회 선전 특선작 ‘정원’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특선작 ‘천후궁'









1919년 <초 하룻날> 매일신보 만평



'이상을 직시하는 계명자' <계명> 삽화



어느날 1933년



나부, 1927~1928,



봄의 오후, 1927,











[출처] 나혜석의 작품세계 작성자 ohyh45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1933년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의 나부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강변> 유채, 23 X 32cm, 개인소장



<만주 봉천 풍경>, 1924, 합판에 유채, 23.5 x 32.5cm 개인 소장



이화원, 캔퍼스에 유채, 44 x 51.5cm, 개인소장



<파리 풍경>,1928, 채 23.5 x 33cm 개인 소장



<프랑스 마을 풍경> 1928년, 유채, 30 X 45.5cm, 개인소장



< 스페인 항구> .1928년, 합판에 유채, 37 X 44cm, 개인소장



<스페인 국경> 1928, 목판에 유채 23.5 x 33cm 개인 소장



<스페인 해수욕장> 1928, 32.5 x 43cm



<무희> 1927~28, 41 x 33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녹동 풍경



<선죽교> 목판에 유채 23 x 33cm, 개인소장



<수원 서호> 목판에 유채 30 x 39cm



화홍문 년대미상



<인천 풍경>1933,유채 15.8 x 22.7cm



<별장>, 1935,목판에 유채 22.5 x 33cm 개인소장



<화녕전 작약>, 1935,목판에 유채 34 x 24cm 용인 호암미술관



다솔사 1935년, 합판에 유채, 54 X 69cm, 개인소장



나혜석의 마차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1928년 무렵 그린 걸로 추정되는 풍경화(6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