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독교 기본교리 제8장 인간(사람)

문성식 2021. 3. 5. 09:12

 

 

 

     기독교 기본교리 제8장 인간(사람)

 

 성경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은 인간론은, 같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과학의 지류인 인류학(Anthropology)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장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도덕성을 지닌 피조물 중 두 번째로 뛰어난 존재인 인간에 대해 상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사람의 기원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사람은 자신의 기원에 대한 사실들을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계시를 주신다면, 우리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 대해서도 친히 말씀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창 1:27, 2:7과 그 외 다른 말씀에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의 몸은 흔한 원소인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짐승과 비슷한데, 그 이유는 똑같은 환경에서 살고, 숨쉬고, 먹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그로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입증해 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사람은 몸과 혼과 하나님의 형상인 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비록 널리 인기를 누리고 있긴 해도 진화론은 "생명"이나 "물질"의 기원을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이 이론은 또한 식물체의 기원과 동물체의 기원, 그리고 인간의 기원에 대한 가설에 있어 어이없는 결함을 갖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무기물, 식물, 동물, 사람의 수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없애고 싶은 욕망이 진화론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차이점들을 간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아담이 첫 사람이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으신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아담 이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수 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나 또는 사람이 만든 물건을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을 닮은 생물이 아마 있었을 법도 하지만, 그것에는 아담에게 있었던 한 가지, 곧 영이 없었을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이 묘사하고 있는 고대의 생물체들에게 과연 영이 있었는지는 증명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묘사된 아담의 창조에 앞서서 수 천년 전에 "진짜 사람"이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는 화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창세기의 기사와 과학이론을 서로 조화시켜보려고 애쓰는 이론들도 많습니다. 이런 것 중 일부는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고 또 성경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그 외 나머지들은 인간이 지어낸 이론들에게 너무 많이 양보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물리적 혹은 물질적 존재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사람에게는 그 조성에 있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비물질적인 부분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이분론자(二分論者)라고 합니다. 이분론자들에게 있어 혼, 영, 양심, 마음, 통제력 등은 다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의 비물질적인 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삼분론자(三分論者)들이 있는데 이들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세 부분, 곧 몸과 영과 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습니다(살전 5:23, 히 4:12).

 

이 세 가지 외에 인간의 다른 특징, 곧 마음이나 양심 같은 것은 영과 혼이 하는 일이거나 아니면 둘 중 어느 쪽의 일면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삼분론은 이분론보다 더 단순하며 본 교재에서도 삼분론을 따르게 되겠습니다만, 앞에서 든 모든 용어들을 몸과 영과 혼, 이 세 가지 항목 안에 맞게 정확히 분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한 만일 완벽한 추론이 중요한 단어들 즉 "마음", "양심" 그리고 다른 것들인 "혼"이나 "영"으로 구성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엔 중복이라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분론자들이나 삼분론자들이 다 정통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 두 견해 사이의 차이점을 철저히 상고해볼 때 비교적 사소한 차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물질적인 부분인 (the body)은 과학적인 연구조사가 가능한 것이며, 몸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에디 부인(Mrs. Eddy - "크리스천 사이언스" 운동의 창설자)의 추종자들만이 부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놀라운 몸이라는 기계는 살과 피와 뼈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사람의 몸이 범죄함으로 인해 "우리의 낮은 몸"(빌 3:21)이 되었으며, 이 낮은 몸이라는 표현은 흠정역에서 보게 되는 "우리의 악한 몸"(our vile body)이라는 표현보다 더 정확한 것입니다. 이 낮은 몸은 병에 걸리고, 부패하여 죽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성도들은 그분의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전 15:53, 요일 3: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보증해줍니다. 슬픈 이야기지만, 악인은 단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심판받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요 5:28,29).

(the soul)은 각각의 생명체가 지닌 자의식(自意識)을 담당하고 있는 부분입니다(시13:2, 42:5,11). 혼은 하늘에 속한 것들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시 42:1,2), 세상에 속한 것과 감정적인 것들을 바라볼 수도 있으며, 육체의 욕구와 긴밀한 연관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흔합니다(신 12:15,20, 시 107:9, 잠 6:30, 사 29:8과 비교). 혼은 다양한 감정을 나타내는데, 예를 들면 절망(신 12:20), 미움(삼하 5:8), 분노(왕하 4:27), 기쁨(사 61:10), 괴로움(창 42:21), 슬픔(막 14:34) 등입니다.

이성적이고 윤리적이며 영적인 삶을 살게 하는 주체를 (the Spirit)이라고 부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영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만일 그렇다면 야고보서2:26은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만들 것입니다). 감정적인 반응 같은 것을 보인다는 점에서 모든 짐승들에게도 "혼"은 있지만 이들에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은 없습니다. 영은 혼과 분명히 다르면서도, 또 이 둘이 피차 나뉠 수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4:12는 말씀이 몸(관절과 골수)과 혼과 영을 찔러 쪼갠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천사처럼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가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비물질적인 부분의 기원과 번식

모든 사람은 자기가 신체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자신은 부모의 생식활동의 산물이며, 자기 부모도 역시 그 부모에 의해 출생했으며 그 위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첫 사람 아담(비록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부인합니다만)에게서 출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 신체의 기원 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과학이 임신과 자궁 속의 성장에 대해 면밀히 연구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의 비물질적인 속성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문제를 피하려고 인간에게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부분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그 비물질적인 부분들은 뇌와 같은 신체기관의 기능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그릇된 주장이며 전혀 비성경적입니다. 그렇다면 각 사람은 자신의 비물질적인 부분을 어디서 얻는 걸까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세 가지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재론(先在論)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모든 혼과 영들을 한꺼번에 만드셨으며, 이 영과 혼들은 자기들이 들어갈 몸이 만들어질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비성경적이어서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거짓 이단들과 거짓 종교들이 가진 생각일 뿐입니다.
창조론은 성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널리 믿고 있는 두 가지 견해 중의 하나입니다.

창조론은, 사람이 출생하기 전의 어느 단계에서(보통 잉태할 때라고 봄) 하나님께서 사람의 비물질적인 부분을 지으시며, 사람이 출생할 때 그 비물질적인 부분(영혼)이 몸속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혼은, 반드시 몸이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럽혀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똑같은 비물질적인 본질을 전혀 가지지 않으셨기 때문에 죄가 없이 완전하시다는 것을 변호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견해에도 문제점들은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 자기 부모의 비물질적인 특징들을 그토록 많이 물려받는가 하는 점과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단지 신체상으로만 관계가 있다면 어떻게 "동족의 구속자"가 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죄가 없는 생명을 만드셔서 이내 더럽혀지게 하시고 그 사람으로 "타락"하게 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타락한 혼을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은 틀림없으며 창조론자들도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영혼 전이설(靈魂轉移說:이 낱말은 단지 "전수하다"는 뜻임)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안에 인간의 전부, 곧 물질적, 비물질적 부분을 다 한 번에 완전하게 지으셨으며, 이 인간의 본성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으로부터 하와의 전체를 지으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위해 따로 혼을 지으셨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후 그 지으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고 되어있습니다(창 2:1-3). 만일 사람의 비물질적인 부분이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전달되는 수단이 없다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비물질적인 부분에 대한 창조의 일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영혼 전이설은 우리가 "아담 안에" 있고 본질적으로 사망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롬 5:12, 고전 15:22).

 

이것은 또 "각 사람들이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다"(창 46:26, 히 7:9,10)는 가르침도 잘 설명해줍니다. 하지만 영혼 전이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완전한 본성을 다 가지시고도 어떻게 죄를 피하셨나 하는 점입니다. 마리아 "무염(無染)"이론은 비성경적이며, 단지 이 문제를 마리아로부터 한 세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해서 그 부모 된 이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과 누가복음 1:35의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동정녀의 태 속에 기적적으로 잉태되시던 바로 그 순간에 모든 정죄함과 타락으로부터 거룩하게 되셨음이(구별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너무나 많은 면에서 예외가 되시기에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 마음이 그다지 동요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경건한 성경학자들은 창조론과 영혼전이설을 옹호해 왔으며 두 견해 중 어떤 것도 다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책감, 죄, 책임감 등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의 유전에 대해서 모든 사실들 특히 성경을 상고해보면 영혼 전이설이 가장 좋은 설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 이분법과 삼분법을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벌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여기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위치

시편 8편에서 우리는 사람이 천사보다는 낮게 지음받았지만(5절), 짐승보다는 더 높은 존재라는 것을 배웁니다(6-8절). 사람 중에도 지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하듯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 도시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고전 11:3). 이 말씀은 왜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어있으며 또한 왜 지역교회의 모임에서 순종의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여자가 나중 지음 받았으며 또 먼저 범죄 했다는 점이 위에서 말한 위치에 처하게 된 이유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 임금들과 다스리는 자들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벧전 2:13,14, 롬 13:1).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머리십니다(히 2:6-9). 또한 계시록 3:14를 보게 되면 우두머리란 뜻의 "근본"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은 오는 세대에 친히 만유를 아버지께 드리시게 됩니다.

사람의 자유의지

하나님은 일정한 한도 이내에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올바른 선택을 할 책임이 있다는 것도 의식하는 "인격체"입니다. 물론 사람은 물리적인 세상에서 제한을 받는 존재입니다. 날 수도 없고 어떤 한계를 넘는 속도로 달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라 함은 사람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자기 나라의 법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있어서도 사람은 자유롭게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또한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한 가지 작은 제한조건이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짓거나 짓지 말라는 의무를 부과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닌 "자유의지"로 인해 아담은 옳은 일을 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옳지 못한 일을 택함으로써 아담은 죄의 성품, 즉 죄를 지으려는 성향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죄의 성품은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유전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의 사회상을 볼 때에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역할

하나님은 왜 사람을 지으셨을까요? 오래된 신앙고백을 보면, "인간의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고 영원히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친히 사람을 사랑하시고 또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피조물은 단지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직, 그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그 사랑을 자제할 수 있는 자에게나 가능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신령과 진정으로 자기에게 기꺼이 예배하려 하고 또 간절히 예배하고 싶어 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 4:23,24).


사람이 지음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사단과의 관계에서 보게 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킬 목적으로 사람을 범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벌하시면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게 될 것이라는 사단의 생각은 어쩌면 옳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은 죄로 인해 그 사랑을 나타내실 범위가 더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사단의 고소는 영원히 잠재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셀 수 없이 많은 구속받은 자들과 더불어 영원토록 거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사랑하셨기에 이들도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요일 4:19).

사람의 책임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계획 속에 들어있는 특별한 부분을 맡기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죄의 성품을 물려받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옳은 것을 선택하고 그른 것은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담의 죄악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받습니다. "철저한 타락"이란 말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면제하기는커녕 우리에게는 구원을 얻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과 구주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타락이라는 것은 각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악하다거나, 혹은 같은 사람들에게 전혀 "선행"을 베풀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선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카누는 강에서 타기에는 멋지지만 바다를 건너는 데에는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품위 있는 시민이 되면 사람의 존경은 받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를 천국에 갈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