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교리 논리적 체계
1. 불교의 진리체계 : 3법인(三法印) [제행무상(諸行無常) => 일체개고(一切皆苦) => 제법무아(諸法無我)], 제상비상(諸相非相), 제법공상(諸法空相), 오온개공(五蘊皆空), 아공법공(我空法空), 무념무상(無念無想), 중도무위(中道無爲) => 열반적정(涅槃寂靜)
2. 불교의 근본원리체계 : 4성제(四聖諦) [집(集) : 3독(三毒 : 貪瞋癡) => 고(苦) : 8고(八苦), 108번뇌(百八煩惱) => 도(道) : 3학(三學 : 戒定慧) => 멸(滅) : (자유, 행복, 자비, 평등, 평화)], 12연기(十二緣起)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5온(五蘊) [색(色) + 수상행 식(受想行 識)], 18계(十八界) = 12처(十二處) [6근(六根) : 안이비설신 의(眼耳鼻舌身 意) + 6경(六境) : 색성향미촉 법(色聲香味觸 法)] + 6식(六識) :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3. 불교의 수행체계 : 8정도(八正道) {3학(三學) : 계(戒)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 정(定) [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 혜(慧)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37도품(三十七道品)
* 37도품(三十七道品) : 4념처(四念處) [신수심법(身->受->心->法)] => 4정근(四正勤 : 律儀斷, 斷斷, 隨護斷, 修斷) => 4신족(四神足) [욕(慾), 정진(精進), 심(心), 사유(思惟)] => 5근(五根) [심(心)->정진(精進)->념(念)->정(定)->혜(慧)] => 5력(五力) [신(信)->정진(精進)->념(念)->정(定)->혜(慧)] => 7각지(七覺支) [념(念)->택법(擇法)->정진(精進)->희(喜)->경안(輕安)->정(定)->사(捨)] => 8정도(八正道) = 4 + 4 + 4 + 5 + 5 + 7 + 8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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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불교의 핵심교리를 크게 3부류로 나누어 놓았지만 사실 이들은 4성제(고집멸도) 안으로 다 수렴됩니다. 즉 불교의 핵심교리인 4법인(열반적정 포함), 12연기, 8정도가 4성제 안으로 다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4법인 중 제행무상은 집성제에, 일체개고는 고성제에, 제법무아는 도성제에, 열반적정은 멸성제에 들어가고, 12연기는 유전문(流轉門)에 대한 순관(順觀)은 집성제에, 유전문(流轉門)에 대한 역관(逆觀)은 고성제에, 환멸문(還滅門)에 대한 순관(順觀)은 도성제에, 환멸문(還滅門)에 대한 역관(逆觀)은 멸성제에 들어가고, 8정도(37도품)는 도성제에 들어갑니다. 5온, 12처, 18계는 4성제, 12연기와 제법무아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론입니다. 각종 수행이론들은 8정도 중 정정(사마타 선정수행)과 정견(위빠사나 지혜수행)과 정념 등에 다 들어갑니다.
4성제(四聖諦) [집(集) : 제행무상, 12연기 유전문 순관 => 고(苦) : 일체개고, 12연기 유전문 역관 => 도(道) : 제법무아, 12연기 환멸문 순관, 8정도(37도품) => 멸(滅) : 열반적정, 12연기 환멸문 역관]
(무명과 갈애, 집착으로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움이 생기니 지혜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고, 선정수행 등을 통해 갈애를 일으키지 않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윤회에서 해탈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4성제는 이러한 12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에 대한 역관과 순관이라는 두 가지 관찰법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진리이다.
12연기(十二緣起)[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집성제 - 12연기의 유전문(流轉門)에 대한 순관(順觀) : 괴로움(노사)의 근본원인이 무명임을 밝히는 관찰.
고성제 - 12연기의 유전문(流轉門)에 대한 역관(逆觀) : 괴로움의 원인을 단계적으로 역추적하여 그 근본원인이 무명임을 밝히는 관찰.
도성제 - 12연기의 환멸문(還滅門)에 대한 순관(順觀) :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근본적으로는 지혜수행을 통해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라는 것을 밝히는 관찰.
멸성제 - 12연기의 환멸문(還滅門)에 대한 역관(逆觀) :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역추적하여 그 방법이 근본적으로는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라는 것을 밝히는 관찰.
순관으로 보면 12연기의 유전문은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있고 내지 노사(老死)가 있다는 것이고, 환멸문은 무명(無明)이 멸하면 행(行)이 멸하고 내지 노사(老死)가 멸한다는 것이다. 즉 무명에서 노사가 연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유전문이고, 무명이 사라지면 노사의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환멸문이다.
역관으로 보면 12연기의 유전문은 노사(老死)는 생(生)이 있기 때문이고 내지 무명(無明)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고, 환멸문은 노사(老死)를 없애려면 생(生)이 없어야 하고 내지 무명(無明)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 12연기[十二緣起 :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
12연기(十二緣起) :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부처님께서는 12연기를 통해서 현재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흘러가는지, 몸과 마음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현재는 단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의 흐름 안에 있는 것임을 설명하시고, 그 안에 '나'라는 실체나, 변하지 않고 상주하여 세상을 이끌어 가는 절대자가 없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원인과 결과의 흐름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괴로움인데, 여기서 다시 미래의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고 있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결국 12연기의 윤회는 괴로움의 윤회이며, 또한 어떻게 하면 이런 괴로움의 윤회에서 벗어나는지 그 길도 함께 제시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무명(無明)을 바탕으로 행한 신구의(身口意) 3업(三業)이라는 원인이 있었고, 그 원인이 익어서 현재에 어떤 모습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시 이 결과에서 새로운 원인을 지어 다음 순간의 새로운 결과를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 매 순간이 원인에 따른 과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원인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한 괴로움의 상속도 함께 이어집니다.
12연기는 우리가 '나'라고 잘못 알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흐름을 통찰하여 '나'라는 실체는 없고 단지 원인과 결과의 흐름이라고 '나'의 실상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며, 매순간의 윤회와 함께 한 생의 윤회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1) 12연기 도표 보는 방법
12연기 도표는 미얀마의 큰 스승이신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나오는 도표입니다.
우선 12연기의 12요소를 1. 2. 3. 4.번 칸으로 네 부분으로 나눕니다.
1번 칸은 시제로는 과거이며, 현재의 원인입니다.
과거에 이미 무명으로 업을 지었고, 그것이 지금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명(無明)과 행(行)이 있는 칸입니다.
2번 칸은 시제로는 현재이며, 과보로 온 현재의 결과입니다.
즉 1번 칸의 무명과 행에 의해서 현재의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가 있는 칸입니다.
이 다섯 요소는 바로 현재의 몸과 마음이며, '12연기적 오온' 이라고 합니다.
3번 칸도 시제로는 현재이며, 현재의 결과에서 어떤 조건을 새로 가하여 미래의 원인을 만드는 칸입니다.
2번 칸의 몸과 마음을 나로 알고 갈애와 집착을 일으켜 새로운 업을 생성하는 칸입니다.
다시 말하면 2번 칸이 원인이 되어서 다시 3번 칸의 새로운 갈애(愛)와 집착(取)과 업을 생성(有)하여 다시 4번 칸인 미래 생의 원인이 됩니다.
또한 지금 이후의 바로 다음 순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4번 칸은 시제로는 미래이며, 현재의 행한 업으로 인해 일어날 미래의 결과입니다.
즉 3번 칸의 애, 취, 유가 원인이 되어 미래의 생(生)과 노사(老死)가 있는 칸입니다.
3번 칸에서 4번 칸으로 가는 것은 이생에서 다음 생으로 가는 한 생의 윤회가 있고, 3번 칸인 지금 이 순간의 애, 취, 유가 원인이 되어 바로 다음 순간에 2번 칸의 새로운 마음인 식으로 진행하는 것은 현생에서의 매순간의 윤회입니다.
다시 생긴 새로운 식은 즉시 명색, 육입, 촉, 수로 진행되어 매순간의 윤회를 이끌어갑니다.
이와 같이 윤회는 한 생의 윤회가 있고, 찰나생멸하면서 흐르는 매 순간의 윤회가 있으며, 이 윤회는 바로 괴로움이 윤회하는 것이며, 이 도표에는 이런 괴로움의 윤회를 벗어나는 지점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도표는 윤회의 원리를 중층적 구조로 설명하고 있으며, 고성제와 집성제의 연기를 설명하며. 그 이면에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도성제와 멸성제를 보여줍니다.
2) 연기의 중심축은 무명(無明)과 갈애(愛)입니다
12연기 도표의 중앙에는 무명과 갈애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무엇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여섯 감각기관이 여섯 대상을 만나면 대상을 인식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판단분별하고, 그래서 나에게 이익이 있으면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이익이 없을 것 같으면 피하거나 없애려는 마음을 일으켜, 즉시 신구의(身口意)로 업을 지으면서 매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조건의 의해 일어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5 무더기(五蘊)가 한 순간의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조건지어진 이런 연속적인 생멸의 흐름에 떠밀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나의 삶’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윤회의 중심축에 있는 무명의 힘입니다.
생의 시작부터 무명이 중심축이 되는 것은 수많은 전생부터 함께 했던 어리석은 마음의 습관이 상속 유전된 것입니다.
이 무명은 우리의 눈을 가려 좋은 것을 안 좋은 것으로 알게 하며, 나쁜 것을 즐겁고 좋은 것으로 알게 하며, 끊임없이 나를 위해 갈애를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님을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무명과 갈애가 한 순간을 만들고 지나가면 즉시 그 과보로 다음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12연기를 돌리는 수레바퀴의 핵심은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무명과 바라는 마음인 갈애입니다.
12연기의 시작은 무명인데, 이 무명은 과거 언제인지도 모르는 그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무명을 우두머리로 하여 갈애가 작동되고, 그래서 행한 업이 다시 어리석은 마음의 힘을 키우고 다시 갈애를 일으키는 구조로 연기의 회전은 쉬지 않고 굴러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할 목적으로 삶의 실상을 연기법으로 설명하시고,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를 계발하는 사념처(四念處 : 身受心法) 수행으로 8정도(八正道)를 닦아 연기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해탈 열반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윤회하게 하는 주범은 무명과 갈애이며, 그 심부름꾼은 업입니다.
만일 무명과 갈애가 지혜와 집착 없음으로 바뀌면, 이어서 심부름꾼인 업이 소멸되고, 그래서 윤회를 벗어나는 열반에 이릅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과 갈애의 소멸을 위해서는 지혜를 일으키는 사념처 수행을 해야 하며,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제법(오온)의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통찰하는 지혜가 생기고, 내가 없음을 알아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해탈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4념처 수행으로 8정도를 몸소 닦아나갈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실천이 따르지 않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상한 언어나 화려한 관념일 뿐, 번뇌를 벗어나게 하는 진리가 되지 못하며, 번뇌를 소멸하는 힘이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는 오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로부터의 해탈이며,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는 열반입니다.
3) 십이연기 도표 1번칸 : 과거 - 무명과 행
12연기 도표의 1번 칸은 시간상으로는 과거이며, 요소는 과거에 무명으로 지어 놓은 행위의 힘입니다.
4성제의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集聖諦)에 해당합니다.
1번 칸의 구성요소는 무명과 행(업의 형성)이지만, 그 바탕에는 갈애(愛)와 집착(取)과 업의 생성(有)이 깔려있습니다.
여기서 과거란 전생의 일도 되고, 또 이생에서는 이 순간 바로 이전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미 과거의 일이므로 현재는 실재(實在)하지 않지만, 현재는 그 과거가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미 엎어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엎어진 물을 잘 처리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곳이 1번 칸입니다.
그래서 1번 칸은 과거이며, 현재를 있게 한 원인이며,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입니다.
a) 그럼 무명(無明)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리석다는 말을 듣거나 스스로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할 일 있으면 대단히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세상에는 부처님과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명이 몸과 마음을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만일 무명이 완전 소멸했었다면 지금 몸과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무명은 어리석음으로 컴컴한 것, 밝지 못한 것, 업의 인과를 모르는 것, 삼법인(三法印)을 모르는 것,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四聖諦)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모르는 것을 바탕에 깔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업의 인과를 철저히 알았다면, 감각적 욕망에 휘둘려 지금 탐심(貪)이나 성냄(瞋)을 일으키겠습니까?
우리가 무상을 철저히 알았다면, 한 순간의 행복이 영원하길 바라고, 재산, 명예, 이익, 칭찬, 소유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또한 이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좋아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아를 철저히 알았다면, 내 생각 내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겠습니까?
매사에 내 것이라고, 나라고, 나의 자아라고 집착을 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오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고(苦)라는 고성제(苦聖諦)를 철저하게 알았다면 왜 지금보다 좀더 나은 다음 생을 은근히 기대하며 천상에 태어나길 바라겠습니까?
우리가 집성제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라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왜 매순간 갈애를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또한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하는 멸성제가 있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면서 열반은 부처님이나 실현하는 것으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쯤으로 미리 멀찌감치 접어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인 8정도를 안다고 하면서도 왜 실제로 열심히 8정도를 닦는 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어리석음, 무명 때문입니다.
법을 보는 눈이 없어, 아직 지혜가 완성되지 못하고, 아직 어리석기 때문에 무명이 그렇게 하도록 조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직 밝은 눈을 얻지 못하여 길을 잃고 컴컴한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컴컴한 곳에 작은 불을 밝히는 일을 시작하면 언젠가는 밝은 눈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b) 그럼 행(行)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무명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갈애를 일으켜 다시 오온을 만드는 업을 형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업의 형성이라는 행은 과거에 이미 지어놓은 자신의 업력으로, 자신이 과거에 반복해서 행했던 마음의 습관들입니다.
도표 1번 칸의 행은 수없는 과거 생부터 바로 직전까지 신구의로 지어놓은 업들이며, 형성된 그 업이 지금의 내 모습(오온)을 만드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과거의 업을 캐내거나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단지 지금 경험하는 괴로움이나 행복을 자신의 행위의 결과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만일 이때 지금 경험하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화내거나, 또는 지금 경험하는 행복감을 너무 좋아하고 즐기려는 것은 지금 가장 잘못된 행을 하는 것으로, 괴로움의 과보를 받을 씨앗을 지금 심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괴로움이 있네!" 또는 "지금 행복한 느낌이 있네!"하고 알아차릴 대상으로 알아차려주는 것이 8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가장 선한 업의 씨앗을 심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비난할 때 즉시 반응하기보다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린 만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그 자리에서 바른 말과 행위라는 선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있는그대로 보는 밝은 눈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행위이며, 가장 바른 길을 가는 것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성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4) 12연기 도표 2번칸 : 현재 - 식. 명색. 육입. 촉. 수
12연기 도표의 2번 칸은 현재입니다.
과거를 원인으로 생긴 현재로 지금 자신의 모습입니다.
사성제의 측면에서는 고성제(苦聖諦)에 해당합니다.
즉 과거(1번 칸)의 집성제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현재에 고성제가 일어났습니다.
과거의 무명과 행이 원인이 되어 식(識)이 생기고, 이 식이 원인이 되어 명색이 생기고, 이 명색이 원인이 되어 6입이 생기고, 이 6입이 원인이 되어 대상과 부딪치는 촉이 생기고, 촉이 원인이 되어 느낌인 수(受)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재는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실재(reality)입니다.
즉 1번 칸의 무명과 행을 바탕으로 단번에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의 다섯 요소라는 결과가 생기며, 이런 다섯 요소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인 고성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a) 2번 칸의 시작은 식(識)입니다.
이 식(識)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생을 처음 시작하는 재생 연결식의 식(識)일 수도 있고, 재생연결식이 소멸하고 그 뒤에 매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끌어가는 선행하는 마음으로서의 식(識)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식(識)의 질에 따라 매 순간 몸과 마음은 새롭게 생멸하면서 흐릅니다.
재생연결식이 선심(善心)이면 인간이나 천인의 몸과 마음(名色)을 만들고, 재생연결식이 불선심(不善心)이면 그 마음의 질과 같은 세계인 4악도의 몸과 마음(名色)을 만듭니다.
재생연결식은 바로 전생의 마지막 호흡과 함께 일어난 마음이 사라지면서 그 마음의 과보로 일어난 현생의 최초의 마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생의 마지막 마음인 사몰심(死沒心)을 원인으로 해서 생긴 과보의 마음입니다.
이런 내용은 아비담마 논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비담마에는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분석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정신세계는 비 물질이라서 쉽게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혜안으로 보신 몸과 마음에 대한 분석을 근거로 실제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직접 알아차려 붓다의 가르침을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세계에 관한 것은 아비담마에 근거를 두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생의 시작을 일으킨 재생연결식도 그 찰나에 소멸하고, 즉시 존재지속심인 유분심(有分心, 바왕가 찌따, bhavanga-citta, 잠재의식, Life-continuum)이 일어납니다.
이 유분심(바왕가)도 찰나 생멸하면서 흐릅니다.
유분심이 흐르는 중에 6입(六入)과 6경(六境)이 촉하면 유분심은 잠간 끊기고, 현재의 대상을 아는 6식(六識)이 일어납니다.
이때 이 식(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수상행의 질에 따라 그 순간의 마음의 질이 결정되고, 이 마음의 질에 따라 그 다음 순간에 일어나는 명색의 질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식(識)은 현생에서는 매 순간의 새로운 오온을 생성하는 선행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현생을 시작하는 재생연결식은 바로 전생의 마지막 마음인 사몰심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한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는 전생의 사몰심입니다.
그러나 이 전생의 사몰심도 그 생의 일생 동안 지은 업의 힘을 원인으로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윤회를 거듭하는 삶은 끝없이 업의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면서 흐르는 것일 뿐, 그 안에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습니다.
윤회할 조건이 있어서 일어난 것이지 내 의지로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순간 마다 선행하는 마음의 질을 탐진치(貪瞋癡)가 없는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이 조건은 알아차림으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순간 깨어 있어 대상을 알아차리면, 마음(識)에 탐진치가 없고, 자연히 선한 식에서 선한 명색이 만들어지며, 또한 선업을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어지면 이생의 사몰심도 선심일 것이고, 그래서 그 과보인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도 선심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아비담마(논장. 법에 대하여, 몸과 마음에 대한 완벽한 분석)는 중생의 괴로움과 그 원인을 분석하여 밝히시고, 오직 중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괴로움을 치유하도록 할 목적으로 설하신 것입니다.
수행자는 직접 수행으로 몸과 마음에서 아비담마의 법을 확인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때 아비담마의 혜택을 보는 것입니다.
b) 도표 2번 칸에 식(識) -> 명색[名 + 色 = 수상행(受想行) + 색(色)]이 있습니다.
식(識)은 명색(名色, 마음과 몸)의 원인이 됩니다.
한 생을 시작하는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이나, 매순간을 선행하는 마음이나, 모두 그 마음에 의해 즉시 새로운 명색(마음과 몸)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어떤 대상에 대하여 화가 나면 즉시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얼굴은 붉어지고 혈압은 올라갑니다.
이것은 화를 낸 마음이 즉시 화로 물든 새로운 몸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또한 선한 마음으로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즉시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이것도 선행하는 마음에 의해서 새로운 명색(물질과 정신)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현생의 마지막 마음(사몰심)에서 무엇인가를 집착하면 그 집착하는 마음으로 인한 명색(몸과 마음)이 생깁니다.
만약 집에서 정성들여 키우는 강아지를 생각하다가 죽으면, 그 사몰심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은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강아지의 삶을 선택하여 강아지의 몸과 마음을 만들어버립니다.
즉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이 원인이 되어 다음 생을 강아지의 몸과 마음을 얻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평소에 색계 선정 수행을 해서 죽을 때 사몰심이 색계 선정의 마음이면, 그 사몰심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은 색계 선정의 마음상태가 되어 즉시 색계 천인의 몸과 마음이라는 결과를 얻습니다.
이렇게 식(識)은 윤회의 흐름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도 매 순간 알아차림으로 선심을 유지하여, 그 선심을 원인으로 매 순간 선한 몸과 마음이라는 선과보를 받으며, 그 선과보로 다시 선업을 행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이생에서도 계속 선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고, 죽을 때 선한 사몰심 상태에서 선한 재생연결식을 가질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생의 수행의 힘은 이생을 행복하게 하고, 또한 미래의 생을 이생보다 더 좋은 생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금생과 내생에서 수행으로 얻는 이익이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는 해탈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c) 도표 2번 칸에 명색(名色) -> 육입[六入, 육문(六門), 육근(六根), 여섯 감각기관]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긴 명색에는 당연히 여섯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 耳. 鼻. 舌. 身. 意)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명색을 원인으로 6입이 있습니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문(門)이지만, 보통의 경우 번뇌는 이 여섯 문(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6입(6문)을 상처로 비유하시고, 6입을 통해 들어온 번뇌는 상처를 곪게하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 결과 몸과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알아차림으로 6문을 지키는 것은 상처가 덧나지 않게 막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바로 괴로움의 소멸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d) 도표 2번 칸에 육입(六入) -> 촉(觸)이 있습니다.
우리는 6입이 있는 한 대상인 6경과 촉할 수밖에 없고, 그때 대상을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납니다.
e) 도표 2번 칸에 촉(觸)-> 수(受)가 있습니다.
이렇게 6입과 6경이 접촉하면, 즉 촉을 원인으로 수(受. 느낌)가 일어납니다.
이 느낌은 좋은 느낌, 싫은 느낌, 덤덤한 느낌, 정신적 즐거운 느낌, 정신적 괴로운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들은 바로 괴로움입니다.
우리들은 좋은 느낌을 추구하며 느낌에 따라 극락과 지옥을 왔다갔다 합니다.
그래서 좋은 느낌은 반드시 얻으려고 하며, 얻으면 다시 더 좋은 느낌을 추구합니다.
만일 얻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즉 느낌을 추구하지만 느낌은 만족이 없기 때문에 좋거나 싫은 모든 느낌은 괴로움입니다.
일어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어 괴로움이며, 내 마음대로 느낌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6입과 6경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느낌을 조건에 의해 일어난 한 찰나의 느낌으로 받아드립니다.
이 말은 느낌을 내 느낌으로 붙잡지 않고 조건에 의해 감각기관이 느낀 느낌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느낌을 집착하지 않고, 단지 느낌이라고 느낌을 객관화해서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느낌의 변화와 생멸을 통찰할 수 있고, 느낌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낌을 객관화해서 단지 느낌으로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살아온 습관과는 아주 반대의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하는 것이므로 강한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실패하고 어느새 느낌을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수심법 4념처를 반복하여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이미 느낌에 넘어가서 지금 그 느낌을 좋아하고 있었을 때라도 바로 그것을 알아차려 빠져나오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성숙되고, 웬만한 좋은 느낌에도 그 느낌이 나의 것이 아닌 줄 알아, 그냥 느낌자체로, 있는 그대로, 느낌의 생멸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때 무상의 지혜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2번 칸은 누구나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생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여기까지는 바꿀 수 없는 멍에입니다.
누구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매순간 일어나는 식(識)에 의해 몸과 마음(名色)이 영향을 받고, 다시 오관이 작용하여 새로운 번뇌거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2번 칸의 다섯 요소는 자꾸 3번 칸의 갈애와 집착과 업을 생성하도록 요구합니다.
12연기적 오온인 식, 명색, 육입, 촉, 수라는 조건은 알아차림이 없는 순간 이미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애, 취, 유로 느낌의 만족을 취하도록 자꾸 채찍질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12연기를 이해한 사람들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느낌을 그냥 느낌이라고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에서 다음 과정인 갈애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고, 느낌의 무상과 괴로움과 실체 없음을 통찰하여 깨달음으로 가는 8정도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알아차림의 힘으로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열반을 향해 나가는 작업을 실천하는 것이 8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12연기 도표를 참조해보십시오.
느낌과 갈애사이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로 난 화살표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 방향을 향해 한발한발 직접 걸어가는 자입니다.
5) 12연기 도표 3번 칸 : 현재 - 갈애. 집착. 업의 생성
12연기 도표의 3번 칸은 시제로는 현재이며, 성제로는 집성제입니다.
2번 칸의 다섯 요소가 다시 새로운 괴로움의 원인을 만드는 칸입니다.
3번 칸의 요소는 겉으로는 애, 취, 유로 세 개이지만 그 바탕에는 무명과 행이 받쳐주고 있어 사실 갈애, 집착, 업의 생성, 무명, 행이라는 다섯 요소가 3번 칸을 이끌어갑니다.
2번 칸의 식, 명색, 육입, 촉, 수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자동적으로 갈애와 집착과 업을 생성하도록 밀어부칩니다.
그래서 2번 칸의 오온을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한, 현재의 대상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으로 반응하며, 그것을 꼭 이루려는 집착을 하고, 그런 마음에 의해 말과 행동으로 업을 지어 새로운 현재를 만드는 원인인 업을 생성합니다.
갈애는 현재의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으로 대상을 따라가는 마음입니다.
또한 집착은 현재의 대상을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꽉 묶어두는 것입니다.
마치 뱀이 파리를 채가듯이 그 대상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집착은 어느새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며 신업과 구업을 짓게 됩니다.
일단 이렇게 업을 지으면 그 업을 일으킨 마음과 행위는 사라졌지만, 그 업력은 미래를 만드는 씨앗으로 저장되었다가 조건이 성숙되면 과보로 나타납니다.
즉 업의 힘은 자신의 물질과 정신을 따라다니며 과보로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어느 날 좋은 대상이나 싫은 대상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을 때 몸은 버리고 마음만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에서 함께 했던 몸은 물론 마음도 함께 소멸되고, 3번 칸의 업의 힘이 원인이 되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4번 칸인 미래(생. 노사)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의 나를 따라오는 것은 이생동안 쌓은 선업과 불선업의 업력만 따라 옵니다.
죽을 때 가져가는 진정한 재산은 이 생에서 행한 보시와 계율을 지켜 생긴 선한 업력을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가져가는 선한 업력의 양이 많으면 그만큼 다음 생은 풍요롭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차림을 하면 이미 그 순간에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깨어서 보게 하는 마음의 작용이므로,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 탐진치가 일어날 수 없어 정어, 정업, 정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구나 이런 알아차림이라는 심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계발하느냐, 잠자게 두느냐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생의 업력에 의해 저절로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전혀 어떤 다른 절대자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업의 씨앗과 열매, 원인과 결과라는 자연 법칙(法. 담마)만이 존재합니다.
또한 3번 칸의 애, 취, 유는 2번 칸의 현재의 오온에도 즉시 영향을 줍니다.
2번 칸과 3번 칸에는 양방향 화살표가 있습니다.
지금 일으킨 애, 취, 유에 의해 즉시 다음 순간 새로운 몸과 마음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대상을 촉하는 순간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즉시 갈애에 의해 집착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얻을 수 없어 화를 냈다면 즉시 2번 칸의 식(선행하는 마음)은 성내는 마음이 됩니다.
성내는 마음은 다시 화로 인한 새로운 몸과 마음(명색)을 만듭니다.
그래서 혈압이 오르거나 신경성 소화불량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와 같이 2번 칸의 다섯 요소는 다시 3번 칸을 활성화시키고, 다시 3번 칸은 업을 생성하여 2번 칸의 다섯요소가 생기도록 원인을 제공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생에서는 2번 칸은 등잔불의 심지이며, 3번 칸은 등잔불의 기름입니다.
심지와 기름은 서로를 활성화해서 불을 계속 발생합니다.
만일 3번 칸의 기름이 떨어지면 2번 칸의 심지만으로는 등잔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2번 칸과 3번 칸이 양 방향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윤회를 매 순간 이어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2번 칸과 3번 칸 사이에서 윤회를 끊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2번 칸의 느낌에서 알아차림을 하여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집착과 업의 생성이 없고, 그 결과로 미래인 생, 노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괴로움의 소멸의 길인 8정도의 알아차림으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멸성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느낌을 알아차려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이미 알아차림을 놓치고 갈애로 갔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려 집착으로 가지 않아야 하고, 이미 집착으로 갔더라도 행위를 하기 직전에 알아차려 불선업을 제어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불선업의 힘보다 선업의 힘을 가지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힘은 불선심(탐진치)을 빨리 알아차려 불선업을 막아주고, 선심(관용, 자애, 지혜)으로 선한 행위를 하여 선업을 증장시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 선업조차도 다시 알아차려 나의 것이 아님을 통찰할 수 있어야 최고의 선업인 작용만 하는 마음으로 윤회의 원인을 제거하게 됩니다.
선심도 불선심도 선업도 불선업도 찰나 생멸하는 한 순간의 법으로 보아 그 무엇도 붙잡지 않는 지혜, 즉 나(我)라는 유신견(有身見)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말로 풀어서 쓰니까 복잡해졌습니다.
사실 최고의 선업을 행하는 것이 매우 간단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고 그 알아차림을 계속 이어가면, 그 순간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는 상태로, 이미 업이 되지 않는 작용만 하는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이라는 것은 알아차림(sati. 正念)으로 갈애(愛), 집착(取), 업의 생성(有)을 불선업보다 선업으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2번 칸의 오온을 가지고 있어도 3번 칸에서 불선업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3번 칸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최소한 3번 칸에서 애, 취, 유의 불선업을 미리 알고 제어만 해도 그 다음에 일어나는 4번 칸의 생(生)이나 2번 칸의 식(識)은 선한 마음이 되어 선한 명색을 만들어 주는 원인이 됩니다.
* 전법륜경(轉法輪經)
(잡아함경 권15/ 379. 전법륜경(轉法輪經))
송천축삼장 구나발타라 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바라내(波羅)의 선인이 살던 녹야원(鹿野苑)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다섯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시전(示轉, 見道, 上根)]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과거에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사유하라. 그러면 그때 눈[眼]·지혜[智]·밝음[明]·깨달음[覺]이 생길 것이다. [고성제]
이 괴로움의 발생·괴로움의 소멸·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과거에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권전(勸轉, 修道, 中根)]
다음에는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관한 지혜도 마땅히 또 알아야 한다. 이것도 과거에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사유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고성제]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이미 알았으면 마땅히 끊어야 한다. 이것도 과거에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집성제]
다음에는 괴로움의 발생을 소멸하는 것이니, 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이미 알았으면 마땅히 증득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도 과거에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멸성제]
또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이미 알았으면 마땅히 닦아야 한다. 이것도 과거에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도성제]
[증전(證轉, 無學道, 下根)]
다음은 비구들아,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이미 알고 이미 벗어났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도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고성제]
또 이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이미 알고 이미 끊어 벗어난 것이다. 이것도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집성제]
또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이미 알고 이미 증득하여 벗어난 것이다. 이것도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멸성제]
또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이미 알고 이미 닦아 벗어난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러면 그때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도성제]
비구들아, 내가 이 네 가지 진리를 세 번 굴린 12행[三轉十二行相]에 대하여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끝내 모든 하늘·악마·범(梵)·사문(沙門)·바라문(婆羅門) 등 법을 듣는 대중들 가운데에서 해탈하지도 벗어나지도 여의지도 못했을 것이요, 또한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네 가지 진리를 세 번 굴린 12행에 대하여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겼기 때문에, 모든 하늘·악마·범·사문·바라문 등 법을 듣는 대중 가운데서 벗어나게 되었고, 해탈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었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법을 말씀하셨을 때, 존자 교진여(憍陳如)와 8만의 모든 하늘들은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그때 세존께서 존자 교진여에게 말씀하셨다. "법을 알았느냐?" 교진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미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또 교진여에게 물으셨다. "법을 알았느냐?" 구린(拘隣)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미 알았습니다. 선서시여." 존자 구린이 이미 법을 알았기 때문에 이름을 아야구린(阿若拘隣)이라고 부르셨다. 존자 아야구린이 법을 알고 나자 지신(地神)들은 소리를 높여 외쳤다. '여러분, 세존께서는 바라내국(波羅國)의 선인이 살던 녹야원(鹿野苑)에서 세 번 굴린 12행의 법륜(法輪)을 굴리셨습니다. 이는 어떤 사문 바라문이나 하늘·악마·범들도 일찍이 굴린 적이 없는 것으로서, 유익한 바가 많고, 안락하게 하는 바가 많은 것입니다. 세간을 가엾이 여겨 이치로써 이롭게 하시고, 하늘과 사람들을 이롭고 편안하게 하여, 하늘 무리들은 더욱 불어나게 하고, 아수라의 무리들은 줄게 하셨습니다.' 지신이 외치고 나자 그 소리를 들은 허공신천(虛空神天)·사천왕천(四天王天)·삼십삼천(三十三天)·염마천(炎魔天)·도솔타천(兜率陀天)·화락천(化樂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들이 서로 이어가며 외쳐 그 소리를 전하였고, 잠깐 사이에 범천(梵天)까지 들리게 되었다. 범천도 그 소리를 받아 '여러분, 세존께서는 바라내국의 선인이 살던 녹야원에서 세 번 굴린 12행의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모든 사문 바라문과 모든 하늘·악마·범들이 들은 이 법은 일찍이 굴려진 적이 없는 것으로서, 유익한 바가 많고, 안락하게 하는 바가 많은 것입니다. 세간을 가엾이 여겨 이치로써 이롭게 하시고, 하늘과 사람들을 이롭고 편안하게 하여, 하늘 무리들은 더욱 불어나게 하고, 아수라의 무리들은 줄게 하셨습니다' 하고 외쳤다.
세존께서 바라내국의 선인(仙人)이 살던 녹야원에서 법륜을 굴리셨기 때문에 이 경을 전법륜경(轉法輪經)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雜阿含經卷第15/ 379 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如是我聞。一時。佛住波羅奈鹿野苑 中仙人住處。爾時。世尊告五比丘。
此苦聖諦。本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此苦集․此苦滅․此苦滅道跡聖諦。本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復次。苦聖諦智當復知。本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苦集聖諦已知當斷。本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復次。苦集滅。此苦滅聖諦已知當知作證。本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復以此苦滅道跡聖諦已知當修。本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復次。比丘。此苦聖諦已知。知已出。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復次。此苦集聖諦已知。已斷出。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復次。苦滅聖諦已知․已作證出。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復次。苦滅道跡聖諦已知․已修出。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
諸比丘。我於此四聖諦三轉十二行不生眼․智․明․覺者。我終不得於諸天․魔․梵․沙門․婆羅門聞法衆中。爲解脫․爲出․爲離。亦不自證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我已於四聖諦三轉十二行生眼․智․明․覺。故於諸天․魔․梵․沙門․婆羅門聞法衆中。得出․得脫。自證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爾時。世尊說是法時。尊者憍陳如及八萬諸天遠塵離垢。得法眼淨。爾時。世尊告尊者憍陳如。知法未。憍陳如白佛。已知。世尊。復告尊者憍陳如。知法未。拘鄰白佛。已知。善逝。尊者拘鄰已知法故。是故名阿若拘鄰。尊者阿若拘鄰知法已。地神擧聲唱言。諸仁者。世尊於波羅奈國仙人住處鹿野苑中三轉十二行法輪。諸沙門․婆羅門․諸天․魔․梵所未曾轉。多所饒益。多所安樂。哀愍世間。以義饒益。利安天人。增益諸天衆。減損阿修羅衆地神唱已。聞虛空神天․四天王天․三十三天․炎魔天․兜率陀天․化樂天․他化自在天展轉傳唱。須臾之間。聞于梵天身。梵天乘聲唱言。諸仁者。世尊於波羅奈國仙人住處鹿野苑中三轉十二行法輪。諸沙門․婆羅門․諸天․魔․梵。及世間聞法未所曾轉。多所饒益。多所安樂。以義饒益諸天世人。增益諸天衆。減損阿修羅衆。世尊於波羅奈國仙人住處鹿野苑中轉法輪。
是故此經名轉法輪經。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 팔정도(八正道)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 제타숲 장자의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삿됨(邪)과 바름(正)이 있으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겠다.
어떤 것이 삿됨(邪)인가? 삿된 견해(邪見)와 내지, 삿된 선정(邪定)이다.
어떤 것이 바름(正)인가? 바른 견해(正見)와 내지, 바른 선정(正定)이다.
1. 어떤 것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보시가 있고, 여래의 교설과 재(齋)가 있으며, [보시, 가르침, 수행]
선한 행위, 악한 행위와 선하고 악한 행위의 갚음이 있고, [인과응보]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고, [내세인정]
부모가 있고 중생의 태어남(生)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현세인정]
또한 아라한이 열반으로 잘 향하고 잘 이르러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스스로 알고 증득하여 나의 태어남은 이미 다하고(我生已盡), 범행은 이미 서며(梵行已立), 할 바를 모두 마친(所作已作) 곳에 완전히 머물러, 뒤의 몸을 받지 않음(不受後有)을 스스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해탈지견]
또한 괴로움에 관해서 확실히 통찰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관해서 확실히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확실히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해서 확실히 통찰하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 하느니라. [4성제]
2. 어떤 것이 바른 뜻(正志, 正思惟)인가?
탐욕을 여읜 뜻, 성냄이 없는 뜻, 남(중생)을 해치지 않는 뜻이다.
3. 어떤 것이 바른 말(正語)인가?
거짓말, 헐뜯는 말, 거친말(욕설), 쓸데 없는 말을 떠난 것이다.
4. 어떤 것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생명체를 죽이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으며, 잘못된 애욕행위를 떠난 것이다.
5. 어떤 것이 바른 생활(正命)인가?
의복, 음식, 와구, 탕약을 법다이 구하고, 법답지 않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6. 어떤 것이 바른 노력(正精進)인가?
하고자 함(欲)과 정진(精進)의 방편이니 번뇌를 떠나며,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항상 물러섬이 없이 행하는 것이다.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이나 좋지 않은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결심하고 노력하고, 전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잡아 애쓴다.
이미 일어난 악이나 좋지 않은 행위를 버리기 위해 결심하여 노력하고, 전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잡아 애쓰고,
이미 일어난 선한 행위는 머물러 흩어지지 않게 기르고, 충만하게 이루어 성취케 하려는 결심을 하여 노력하고 , 전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잡아 애쓴다.
[4정근과 같은 내용임]
7. 어떤 것이 바른 생각(正念)인가?
진리를 수순(隨順)하는 생각이니 헛되고 망녕되지 않는 것이다.
몸에서는 몸을 전심전력으로 마음집중하여 분명한 앎으로 계속 관찰한다.(無常,苦,無我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마음집중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
이와 같이 감각에서, 마음에서, 법에서는 법을 전심전력으로 마음을 집중하여 분명한 앎으로 계속 관찰한다.
그리하여 마음집중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
[4념처와 같은 내용임]
8. 어떤 것이 바른 선정(正定)인가?
마음을 어지럽지 않은 곳에 머물러 두고 굳게 거두어 가져, 고요히 삼매(三昧)에 든 한 마음(一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 사정경(邪正經)> 중 - 팔정도(八正道) -
잡아함경 28권 - 785. 광설팔성도경(廣說八聖道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위의 소경에서 설한 것과 같으며, 다만 그와 다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것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漏]가 있고 취함[取]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出世間)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만일 그가 보시[施]가 있고 주장[說]이 있음을 보고,……(내지)……이 세상에 어떤 아라한이 있어 후생(後生)에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세간의 바른 견해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호응하여, 법을 선택하고 분별하여 깨달아 앎을 구하고 지혜로 깨닫고 관찰한다.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바른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사람과 세속의 바른 뜻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뜻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뜻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바른 뜻은 번뇌를 벗어난 깨달음․성냄이 없는 깨달음․해치지 않는 깨달음이니, 이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뜻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뜻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그러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마음이 서로 호응하여, 스스로 결정하고 분별하여 그 뜻을 이해하고 헤아려 뜻을 세우나니,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뜻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3) 어떤 것이 바른 말[正語]인가?
바른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말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말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말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그 바른 말은 거짓말․이간하는 말․나쁜 말․꾸밈말을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말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말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그렇게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삿된 생활인 입의 네 가지 나쁜 행과 다른 여러 가지 입의 나쁜 행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멀리 여의고 번뇌 없이 멀리 여의어 집착하지 않고, 굳게 지키고 거두어 지녀 범하지 않되, 때[時]를 벗어나지 않고 한계를 넘지 않는다.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말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4) 어떤 것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바른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행위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행위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행위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살생[殺]․도둑질[盜]․사음[]을 여읜 것이니, 이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행위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행위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그렇게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삿된 생활인 몸의 세 가지 나쁜 행과 다른 여러 가지 몸의 나쁜 행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번뇌가 없고 마음으로 좋아 집착하는 것 없이 굳게 지켜 잡아 지니고서 범하지 않되, 때[時]를 벗어나지 않고 한계를 넘지 않는다.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행위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5) 어떤 것이 바른 생활[正命]인가?
바른 생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생활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생활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생활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 하는가? 의복․음식․침구․탕약을 법답게 구하여 법답지 않은 것이 아니니, 이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생활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생활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그렇게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모든 삿된 생활에 대해 번뇌가 없고, 좋아 집착하는 것 없이 굳게 지키고 잡아 지녀 범하지 않되, 때를 벗어나지 않고 한계를 넘지 않으면,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생활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6) 어떤 것이 바른 방편[正方便]인가? [정정진]
바른 방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방편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방편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방편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의욕을 내고 정진하고 뛰어난 방편으로, 견고하게 세워, 정진수행을 능히 견디며, 마음을 거두어 잡고 언제나 쉬지 않는다. 이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방편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방편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그렇게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번뇌 없는 생각과 마음이 서로 호응하여, 의욕을 내고 정진하고 방편으로 정근하여 뛰어난 노력으로, 견고하게 세워, 정진수행을 능히 견디며, 마음을 거두어 잡고 언제나 쉬지 않는다.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방편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7) 어떤 것이 바른 생각[正念]인가?
바른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생각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생각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생각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한다고 하는가? 만일 생각[念]과 생각을 따름[隨念]과 생각을 소중히 함[重念]과 생각을 기억함[憶念]에 있어, 망녕되지 않고 헛되지 않으면, 이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생각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생각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그렇게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번뇌 없는 생각이 서로 호응하여, 만일 생각[念]과 생각을 따름[隨念]과 생각을 소중히 함[重念]과 생각을 기억함[憶念]에 있어, 망령되지 않고 헛되지 않으면,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생각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8) 어떤 것이 바른 선정[正定]인가?
바른 선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선정으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선정으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선정으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만일 마음이 머물되, 산란하지 않고 동요되지 않으며, 거두어 잡아, 고요히 그치고 삼매에 들어 한마음이 되면, 이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선정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선정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그렇게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호응하여 마음이 머물되, 산란하지 않고 동요되지 않으며, 거두어 잡아, 고요히 그치고 삼매에 들어 한마음이 되면,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선정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
1. 녹모강당에 모인 장로 비구와 비구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위성의 동쪽 동산에 있는 녹모강당(鹿母講堂)에서 깊이 깨달은 많은 장로 제자와 같이 머물고 계셨다. 존자인 사리불(舍利佛), 대목건련, 대가섭(大迦葉), 대가전연, 대구치라, 대겁빈나, 대순타, 아나율(阿那律), 이바다(離婆多) 및 아난(阿難) 내지 그 외 깊이 깨달은 장로 제자와 같이 계셨다.
[해설] 문헌에 의하면 붓다가 가르침을 설하면서 다니신 곳은 멀리는 서인도와 스리랑카까지 미쳤다고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고 직접적인 전도 행각의 범위는 갠지스강 중류에 한정된다고 보아진다. 즉 갠지스 강 남쪽의 마가다국, 북쪽 유역의 브리지 연합 릿차비족의 영토, 그리고 약간 북서쪽의 코살라국과 말라족, 콜랴족의 지방, 약간 남서쪽 야무나강과의 합류점에 가까운 바트사국 등이다. 이밖에 마가다국 동쪽에 인접해 있는 앙가국과 코살라국 서쪽에 인접해 있는 판차라국, 쿠루국에도 갔엇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붓다가 흔히 머문 곳은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와 코살라국의 쉬라바스티, 곧 사위성과 릿차비족의 수도 바이살리였다. 이들 세 곳은 당시 3대 강국의 수도로서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설법의 적지였다.
여기에 나오는 사위성은 푸라세나짓트 왕 치하에서 번영했던 곳이다. 이 성의 남쪽 교외에는 유명한 기원정사가 있었다. 동쪽에는 녹모강당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 붓다가 머물고 계셨다. 녹모강당은 '므리가라 마트리'가 기증한 강당이다. 녹모는 사위성의 장자인 녹자(鹿子)의 아내가 된 앙가국 장자의 딸 비샤카가 마치 남편녹자의 어머니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녹자모라고 하게 됐다고 한다. 이 녹자모는 석존의 교화를 도와 사위성의 동쪽에 정사를 지어서 바쳤다. 그리하여 그 정사를 녹자모강당이라고 한다.
여기에 사리불 등 수많은 여러 장로 제자들이 모여서 머물고 있었다.
사리불은 '사리푸트라'로서 붓다의 10대 제자 가운데 지혜가 제일이었다.
대목건련은 '마우드갈라야나'로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한 사람이다. 붓다의 10대 제자 중에서 신통이 제일이었다.
대가섭은 '마하카샤파'로서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데 바라문 태생으로 붓다가 성도하신 지 3년 뒤에 제자가 되었으며, 10대 제자 중에서 두타행이 제일이었다. 곧 의식주에 대한 탐착이 없는 철저한 수행자였다.
대가전연은 '마하카챠야'이니 붓다의 10대 제자 중에서 논의가 제일이었다.
대구치라는 '마하카우스티라'로서 사리불의 외삼촌이다. 변재가 뛰어나서 문답 제일이라고 한다.
대겁빈나는 '마하카핀나'로 비구의 이름이다.
대순타는 '마하륜다'로서 석존이 입멸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공양한 대장장이다.
아나율은 '아니룻다'로서 붓다의 10대 제자 중에서 천안 제일이라고 알려졌다. 붓다의 사촌동생이며 귀의한 후 붓다 앞에서 자다가 꾸지람을 듣자 자지 않고 여러 날을 수도하여 눈이 멀었으나, 그 뒤에는 천안통을 얻어서 천안 제일이 되었다.
이바다는 '레바타'로 붓다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비를 피해서 어떤 신사에 머물러 있다가 두 귀신이 송장을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사람의 몸이 거짓으로 모여 있는 것임을 깨닫고 출가했다고 한다.
아난은 '아난다'로서 붓다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지식이 많아서 다문 제일이라고 한다. 석가족 출생이다.
이런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강당에 붓다가 계셨다. 특히 이 모임은 장로 제자들이 중심이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장로는 학덕이 높고 불도에 들어온 지 오래된 이로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연로한 승이다. 지혜 제일의 사리푸트라(사리불), 신통 제일의 마우드갈라야나(목건련), 두타 제일의 마하카샤파(대가섭), 천안 제일의 아니룻다(아나율), 해공 제일의 수부티(수보리), 설법 제일의 푸르나(부루나), 논의 제일의 카차아나(가전연), 지계 제일의 우팔리(우바리), 만행 제일의 라훌라(라후라), 다문 제일의 아난다(아난다) 등 10대 제자와 지혜, 신통, 두타, 논의, 문답, 천안, 다문 등이 뛰어난 장로 7명, 그 외에 모두 각각 덕행이 뛰어난 장로들이 모여서 각각 여러 비구에게 설법을 한다.
2. 동짓달 보름날 밤의 강론
이때 여러 장로 비구들은 새로 배우는 비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장로 비구는 1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2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3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4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새로 온 비구들은 여러 장로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점차로 수승한 높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마침 보름이니 포살(布薩) 날이었다. 비구들이 대중에게 죄과를 고백하는 참회의 자자법회가 있어서 보름달이 둥글게 떠 있는 밤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이때 세존은 묵연히 앉아 있는 비구들을 둘러보시고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였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렇게 올바른 행에 부지런히 애썼노라. 비구들이여, 나는 이 올바른 행에 마음을 써서 애썼노라. 그러하니 그대들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서,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기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하라. 나는 이 사위성에서 '넉달 뒤의 코무디(Komudii(10-11월: 카티카 kattika 달)의 만월에 돌아오리라.' 하고 떠난 지 넉 달만에 다시 돌아왔노라."하시니 여러 비구들은 넉달 뒤의 코무디의 만월에 이 사위성으로 돌아오실 것이라고 듣고 세존을 뵙기 위해서 찾아왔다.
[해설] 이날은 마침 하안거의 마지막 날이었다. 여러 비구들이 부처님을 따라 여름 석 달 동안 유행하지 않고 수행 정진하던 것을 마치고 그동안 듣고 보고 의심나는 일 등을 대중에게 고백하여 참회하는 날이었다. 이 행사는 달이 둥근 보름달이나 새로 달이 뜨는 그믐날에 행해진다. 15일 간에 걸친 자신의 수도생활을 반성하여 대중에게 고백하고 가르침을 받는 행사였다. 이때 새로 입문한 비구들은 각각 나누어져 여러 장로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마지막으로 붓다의 설명을 들은 후 자신의 갈길을 정한다. 그리하여 세존은 대중에게 설법을 하신다.
석존께서는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 외에도 앞에서 말한 므라가라 마트리(鹿子母)가 기증한 동쪽 동산의 녹자모강당과 푸라세나짓트 왕이 여승들을 위해서 건립한 라자카 아마라(王圍精舍)에 머물고 계셨다.
석존은 성도하신 뒤 3년째 되는 해의 우기를 이곳에서 지내셨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20여 차례의 하안거를 쉬라바스티와 그 근처에서 지내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석존은 기원정사나 녹모강당에서 설법하신 일이 매우 많았고, 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아나파나사티 숫타도 여기에서 설하셨다. 때는 코무디 만월의 밤이요, 장소는 녹모강당이요, 청중은 여러 장로 제자와 비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 이런 곳, 이런 때에 설법을 하신다. 이때 장로 비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3. 한자리에 모인 스승과 제자들
여러 장로 비구들은 한창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장로 비구는 10명의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20명의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30명의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40명의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새로 온 비구들은 장로 비구들에게 배움을 받아서 점차로 수승한 높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마침 세존은 그날의 포살을 맞아 사 개월 뒤인 코무디 둥근 보름달이 뜬 밤에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해설] 석존께서 넉 달 뒤에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하고 다른 곳에서 유행하신 뒤 이곳 녹모강당으로 오셨다. 약속대로 석존이 오시니 여러 장로 비구를 비롯하여 많은 비구들이 각각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 그들의 수행은 법을 아는 일과 법을 닦는 일, 그리고 법을 지키는 일이다. 이렇게 세 가지 공부를 부지런히 한 후 회향하는 날이 된 것이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각각 반성하며 참회한다. 여기에서 석존의 인격을 그리워하며 여러 지방에서 모여든 수행자들이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고, 각각의 장로 비구들이 그들을 분담해서 가르쳤던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붓다는 자신에게 귀의한 사람들에게 지위고하나 출생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소중히 맞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치 자식과 같이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르침을 듣는 자'인 동시에 불자(佛子)라고 불려졌다. 이런 사람들이 경에서 말하는 제자이다. 그들은 오늘날의 스승과 제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 savaka'인 경우에는 집을 나온 비구와 재가자도 포함되나, 석존의 밑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자라고 불렀다.
4. 만인에 대한 붓다의 자비
이때 석존은 묵연히 앉아 있는 비구들을 둘러보시며 여러 비구에게 고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묵묵히 말을 하지 않는구나.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묵묵히 말을 하지 않는구나. 청정하고 참됨에 안온히 머물렀도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마땅히 우러러 받들며 공양 합장하여 모실 비구들이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더없이 거룩한 복전이니라. 비구들이여, 이 자리에 있는 비구들, 이 무리에게 베풀면 작은 베품도 많은 것이 되고, 많은 베품도 더욱 많아지는 이와 같은 무리로다.
비구들이여, 실로 그대 비구들이여, 여기 모인 그대 비구들은 이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희유한 무리들이로다. 여러 비구들이여, 실로 이 비구대중, 비구들이여, 여기에 모인 그대들은 그대들을 만나기 위해서 수없이 먼 곳으로부터 먹을 것을 갖고 찾아가더라도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여기에 모인 비구들은 이와 같은 사람이로다."
[해설] 불교는 당시 사회에서 굳게 자리잡고 있던 신분계급의 차별을 무시하고 교단에 귀의한 사람은 누구든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존귀하며 받들어모실 대상으로 대우했다. 그들은 어떤 이념에 의한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오로지 붓다의 자비와 지혜에 귀의했다. 교단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우상을 받드는 사람의 아내나 가족이 모두 죽어서 홀로 남은 가난한 과부, 추위와 더위에 못 견디고 달려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하층계급의 사람들만이 석존의 대자비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지배계급이나 상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도 붓다에게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과 코살라국의 파세나지 왕이 그랬고, 바라문인 가섭 형제가 천 명의 제자를 데리고 석존에게 귀의했다. 사밧티시의 급고독 장자는 숲을 기증했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모든 제자들을 한결같이 "비구여!"하고 다정히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을 한결같이 평등하게 존중하고 아끼고 받들었다.
경문에서는 붓다의 자상하고 따사로운 숨결이 느껴진다. 붓다는 모든 제자들을 무상의 복전으로 보셨고, 한없이 베풀어야 할 거룩함으로 보셨으며, 귀하게 받들어 공양할 지존한 존재로 보셨다. 무상의 복전이요, 더없는 복전이다. 복전이란 복덕을 낳는 밭이다. 흔히 불법승 삼보나 부모를 잘 받들면 베푼 대로 그 공덕을 받는다 하여 밭에 비유한다. 붓다의 교단에 들어온 이는 무한한 복의 밭을 가진다. 가장 거룩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베풀면 작은 것도 큰 것이 되고, 많은 것은 더욱 많아진다. 마치 밭에 곡식을 심으면 작은 씨앗이 점점 커져서 열매를 맺어 더욱 많은 곡식을 얻게 되는 이치와 같다.
도를 닦아서 법을 알게 되면 복전을 닦은 것이요, 복전을 가지는 것이다. 불법은 수천만 겁에도 만나기 어렵다. 하물며 그런 불법을 닦으러 온 비구들 역시 수천만 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희유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다시 보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겠으며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부처님은 모든 제자들을 더없는 복전이요,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희유한 인연이므로 더없이 소중하고 거룩한 법의 맺음으로 보셨다. 이렇게 보고, 이렇게 말이 나오고, 이렇게 행해지지 않으면 깨달음이 아니다. 법을 본 자는 법을 행하게 된다. 법을 본 자는 말과 행동이 법 그대로 되고 자비스러운 말과 온화한 얼굴로 대하게 된다. 붓다가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신 이 첫 말씀을 우리는 깊이 귀담아 들어서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5. 무리 속에 있는 수많은 깨달은 자들
여러 비구들이여, 이 모임은 이와 같다. 이 비구들 중에는 아라한으로서 번뇌가 다하여 더없는 것을 얻어 마땅히 할 바를 하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스스로의 이로움을 얻어 맺혀 있는 것을 모두 없앤 비구가, 올바른 지혜로써 해탈한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비구 중에는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화생으로서 남김 없는 열반에 들어서 저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욕계의 세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탐진치를 엷게 하여 오직 한 번 이 세상에 돌아와 고를 모두 없앤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들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욕계의 세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예류과를 얻은 자, 나쁜 곳으로 가서 떨어지지 않은 자, 확실한 도가 이루어진 자, 올바른 깨달음으로 갈 비구들이 있다. 여러 비구여, 이와 같은 종류의 여러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해설] 붓다의 회상(會上)에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있어 이 중에는 수행이 높은 성자들도 많이 있었다. 이 중에는 아라한(阿羅漢)의 세계를 증득한 성자도 있고,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성자도 있고, 일래과(一來果)를 얻은 성자도 있으며, 예류과(預流果)를 얻은 성자도 있었다.
아라한과를 얻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더없이 안온함으로 가서 마땅히 하고 싶은 일을 행하는 힘이 생긴다. 여기에는 어떤 정신적인 집착도 없고, 자신의 지극히 참된 곳에 머물러서 더 바랄 것이 없게 되며, 지혜가 바르게 나타나 모든 걸림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수행이 극치에 이르러서 자기가 완성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세계를 얻은 사람을 진인(眞人)이라고도 하고, 마땅히 존경받을 만한 성자라고 하여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며, 번뇌의 적을 완전히 없앤 사람이라 하여 살적(殺賊)이라고도 하고, 다시는 번뇌로 고민하는 중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하여 불생(不生)이라고도 한다.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성자다.
또한 아라한은 인간의 정신이 최고의 이상에 도달한 것이므로 더 배울 것이 없는 세계라 하여 무학과(無學果)라고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올바른 지혜가 있고 올바른 행이 행해진다.
다음에 불환과는 중생이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번뇌, 곧 탐욕, 노여움, 나나 우리 등을 고집하는 아집, 계로 정하여 금하고 있는 사항을 그릇되게 이해하여 취하는 소견(戒禁取見), 인과의 도리를 의심하는 것 등이다. 이로 인해서 고통받고 있으므로 모두 없애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서 다시는 고통받는 번뇌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게 된 성자의 세계다. 이런 세계에 도달한 사람은 다시는 고통받는 욕계에 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불환과를 아라한과의 밑에 해당하는 단계로 본다.
일래과(一來果)는 욕계의 세 가지 번뇌, 곧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인간계와 천상계에 통하게 되니, 인간계에 있으면서 이를 얻으면 반드시 천상에 있다가 이 과를 얻으면 우선 인간으로 가서 다시 천상과 인간계를 한 번 왕래한다. 이는 일래라는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류과는 수행자가 천상계에서 얻는 세계이다. 고의 원인인 번뇌를 없앰으로써 고가 없는 성자의 길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단계다. 여기에 이르면 불교의 근본 진리인 고집멸도 사성제를 명료하게 보는 지혜가 열린다. 더 수행하여 이 단계를 지나 번뇌를 더욱 많이 끊으면 천상계에 태어나서 천상의 낙을 맛볼 수 있는 일래과에 이른다.
그러나 일래과에서는 아직 인간의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은 인간계로 돌아온다. 더 수행하면 모든 번뇌를 끊고 적정의 참된 즐거움을 몸으로 증득하는 불환과에 이른다. 여기에서 다시 더 나아가면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세계인 열반에 들어서 생과 사의 미혹의 유전함이 없는 성자, 즉 아라한에 이르게 된다. 경에서 말한 '나쁜 곳(지옥 등)에 떨어지지 않는 자'는 일래과를 얻은 자요, '결정된 자'는 불환과를 얻은 자요, '올바른 깨달음으로 갈 자'는 아라한과를 얻은 성자다. 이러한 성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 이 회상이다. 원시불교나 소승불교의 수행목표는 이 네 가지다. 그러나 대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살이나 부처의 세계가 설해지고 보살이나 부처가 되는 수행을 닦게 된다.
6. 37종의 수행을 갖춘 성자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사념처(四念處)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가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사정근(四正勤)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종류의 비구들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사신족(四神足)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같은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오근(五根)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들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오력(五力)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칠각지(七覺支)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여러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팔정도(八正道)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해설] 앞에서 말한 아라한과, 불한과, 일래과, 예류과의 세계는 우리가 불도를 닦는 첫 단계에서 들어가는 성문(聲聞)의 길이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행하여 자기완성을 목표로 해탈에 이르려고 애쓰는 출가한 성자들이다. 이들은 삼십칠도행을 닦아서 번뇌를 없애고 성자의 세계에 머물러서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은 사념처를 닦아서 이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사정근을 닦아서 이에 머물 수도 있고, 사신족을 얻은 이도 있고, 칠각지를 얻어서 머무는 이도 있고, 팔정도의 수행을 완성하는 이도 있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이들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성팔지도의 수습에 정진하여 이에 머물고 있는 성자들이 모여 있다.
그러면 사념처의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
흔히 불도를 닦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 다섯 가지 그릇됨을 없앤다.
곧 부정관(不淨觀)으로 탐욕을 없애고, 자비관(慈悲觀)으로 성내는 마음을 없애고, 인연관(因緣觀)으로 어리석음을 없애고, 계분별관(界分別觀)으로 실체가 있다는 아견(我見)을 없애고, 수식관(數息觀)으로 마음의 산란을 없애고[5정심관(五停心觀)], 염불관(念佛觀)으로 여러 가지 번뇌를 없앤다.
다섯 가지 그릇된 마음을 없애고 관법을 닦은 뒤에 사념처관을 닦는다. 사념처관은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하며 몸을 골똘히 생각하여 몸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신념처(身念處)의 수행을 닦는다. 또한 마음을 골똘히 생각하여 받아들여지는 모든 감수작용에서 마음에 즐거움을 주는 음행이나 자식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즐거움이나 재물로 인한 만족스러운 즐거움 등이 끝내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고(苦)가 됨을 아는 수행을 닦는다. 또한 골똘히 생각하여 우리의 마음을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늘 변화하며 생멸한다는 무상(無常)함을 관하는 수행을 닦는다.
또한 모든 사물을 골똘히 생각하여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다(無我)고 관하는 수행을 닦아서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영원불멸하다는 상(常)과 즐거움이라는 낙(樂)과 실체가 있다는 아(我)와 깨끗하다는 정(淨)의 잘못됨을 없앤 사람들이 있다. 이 수행에 있어서는 이들 다섯 가지를 각각 나누어서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고, 모두 다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지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남방에서 이 수행은 열반을 증득하는 방편으로 닦는다. 그래서 오정신관 다음에 이 사념처관을 닦아서 도를 깨닫는 길로 들어간다고 하여 《삼십칠도품경》에서는 첫 번째의 행법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념주는 지혜를 얻는 수행이다.
다음으로 사정근(四正勤)을 닦아서 부지런히 애쓰는 비구가 있다. 이는 네 가지 바른 노력이다. 나타나지 않은 악을 끊기 위한 노력, 이미 생긴 악을 끊기 위한 노력,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 이미 나타난 선을 더욱 증대하기 위해 힘쓰는 노력이다. 이런 노력은 태만심을 끊고 마음의 장애를 없애기 때문에 사의단(四意斷)이라고도 한다. 《삼십칠도품경》에서는 두 번째의 수행이라고 설해진다. 그러므로 이 사의단은 계의 수행에 해당한다. 이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이 이루어진 비구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
다음에는 사신족(四神足)을 닦아서 이에 머물고 있는 비구가 있다. 사신족은 네 가지 신족, 즉 네 가지 뛰어난 정신력이다. 사물을 투시해 그 실체를 아는 천안통(天眼通)을 얻는 수행과, 아무리 미세한 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청력(天耳通)을 얻는 수행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능히 꿰뚫어볼 수 있는 힘(他心通)을 얻는 수행과, 허공을 날 수 있는 신통력을 얻는 수행 등 네 가지 자재력을 얻은 비구들이 모여 있다. 이 네 가지 신통력은 정신집중으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사신족은 정(定)의 수행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오근(五根)의 수습으로 이에 머문 비구가 있다고 했다. 오근은 흔히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다섯이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에 있는 감각기능을 말한다. 이들은 각각 밖의 대상을 잡아서 이에 적응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삼십칠도품경》에서는 이런 신체기관의 기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는 다섯 가지 기능을 말한다.
이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는 번뇌를 누르고 올바른 길로 나가게 하는 뛰어난 힘이 있다고 한다. 바로 믿음(信)과 정진(精進)과 골똘히 생각하는 능력(念)과 정신집중(定)과 지혜(慧)이다. 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근이 바로 이들 다섯 가지 정신기능이다. 이들 오근은 번뇌를 없애는 힘이 되기 때문에 오무루근(五無漏根)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누(漏)란 번뇌를 말한다.
믿음이 확립되어 마음에 유순함이 생기고, 하고자 하는 일에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정진력이 생기고, 사물을 생각하고자 하면 언제나 골똘히 생각할 수 있으며, 정신이 집중되어 한결같이 부동심을 가지고 올바른 지혜로 사물을 분별하는 힘이 최고에 이르는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이 이루어진 사람은 다시 다섯 가지 힘을 얻는다. 곧 다섯 가지 근본능력의 힘을 말한다. 오근의 힘(五力)이 갖추어진 사람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게 된다.
칠각지의 수습에 머문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사념처에서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까지의 수행은 번뇌를 굴복시키는 수행이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수도위(修道位)에 속한다. 오력이 증대하면 번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머물면 드디어 깨달음이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돕는 일곱 가지라 하여 칠각지라고 한다. 이것은 '삼십칠도품' 가운데 제 6의 행법이다.
일곱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불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지혜로써 잘 살펴서 가려내는 데 7종이 있다는 뜻이다.
① 법을 살펴서 선악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擇法覺支),
② 수행할 때 마음의 삿됨을 버리고 용맹하게 바른 길로 정진하는 것(精進覺支).
③ 선한 법을 얻어서 마음이 기뻐하는 것(喜覺支),
④ 그릇된 견해나 번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알아서 거짓됨을 버리고 선근이 생하는 것(除覺支, 輕安覺支),
⑤ 외경의 집착을 없앨 때에 그릇된 추억을 버리는 것(捨覺支),
⑥ 정신집중이 되어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定覺支),
⑦ 항상 골똘히 생각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念覺支)이다.
마음이 혼침하면 ①-③으로 일깨우고, 들뜨면 ④-⑦로 다스린다. 이와 같이 칠각지가 이루어지면 진리를 여실히 보게 되고, 생사를 떠나서 열반에 들게 되므로 도에 이른다. 이것이 일곱 번째의 팔정도로서 설해졌다. 그래서 《삼십칠도품경》에서는 다음의 팔정도를 제7의 행이라고 하여 팔도지(八道支)라고 한다.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까지는 아직 번뇌가 있는 것이요, 칠각지와 팔정도에서는 번뇌가 이미 없어진 것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팔정도의 수행이 이루어진 세계는 어떠한가.
이 여덟 가지 길은 거룩한 진리 그대로 행해지므로 성팔지도(聖八支道)라고 한다. 《삼십칠도행경》에서는 팔직도(八直道)라 했다. 불교실천의 8종이다. 이는 중도(中道)이며, 정도(正道)이며, 성도(聖道)이다. 여덟 가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팔정도지(八正道支), 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이라고도 한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定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옛 번역에서는 《삼십칠도품경》에서와 같이 직견(直見), 직치(直治), 직어(直語), 직행(直行), 직업(直業), 직방편(直方便), 직념(直念), 직정(直定)이라고 했다.
이들 여덟 가지는 계(戒), 정(定), 혜(慧)에 배당시켜서 볼 수 있으니 붓다가 설하신 근본 법문이다. 이는 붓다의 근본교리이므로 사제(四諦), 십이인연설(十二因緣說)과 함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다.
정견은 지혜요, 인연법이요, 중도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이다.
정사유는 모든 사유분별은 실다운 것이 없으며, 생각하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가 없다고 여겨 집착하지 않는다. 일체의 사유분별이 평등하기 때문에 집착할 바가 없다.
정업은 올바른 행위를 말한다. 말이나 몸, 마음의 움직임이 모두 걸림 없는 정업이다. 이러한 모든 움직임은 허망하고, 실다움이 없고, 악업이나 선업에도 끌리지 않으며, 행한 바나 지은 바가 없으니 정업이다.
정명은 올바른 생활이니 모든 생활이 삿되지 않아서 인연법 속에서 살며, 옳고 그름에 머무르지 않고, 청정한 지혜로써 살고, 행하는 생활이다.
정어는 올바른 말이니 실다운 말만을 하여 제법의 실상을 나타낸다. 모든 말이 청정한 구업을 짓도록 한다.
정정진은 정심(定心) 속에서 노력하니 고나 낙에 집착하지 않고, 근심과 기쁨에 끌리지 않으며, 악법을 용감히 떠나고 선법에도 애착 없이 한결같이 용맹하게 노력한다.
정정은 올바른 선정이니 선정에 들어서 흔들리지 않고, 들뜨거나 가라앉지 않는다.
또한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인연법을 알아서 선과 악의 일어나는 바를 알고, 선법의 인연에 따라서 스스로 선정에서 유희하여 행함에 자재하고 출입에 걸림이 없다.
이와 같이 37종의 행이 닦아지면 열반에 이른다.
열반이란 번뇌가 없는 곳이다.
그러면 왜 37종을 모두 닦아야 하는가.
37종의 도행은 처음 수도하는 사람이 도로 들어가는 도정이다.
수행자는 먼저 스승에게 도를 닦는 방법을 물어 그 길을 배운다.
그리하여 먼저 마음가짐을 다져야 한다.
이것이 사념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노력하면 사정근이 된다.
부지런히 닦아서 정진하면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고 뜻대로 움직인다.
이것이 사신족이다.
마음이 섭심되어 내 뜻대로 되면 마음의 힘이 생긴다. 이것이 오근이다.
그 힘이 더욱 증진하여 능히 번뇌를 끊으면 오력이다.
힘을 얻으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선법을 모아 나의 것으로 삼으니, 이것이 칠각지다.
이렇게 하여 진리가 내 것이 되면 열반의 세계에 머물러서 모든 삶이 진리를 떠나지 않고 무위삼매에서 자재하게 된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경에는 이런 세계에 도달한 성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7. 보살도를 닦는 성자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慈)를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자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남의 고를 없애주는 비(悲)를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자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남과 같이 기뻐하는 기쁨(喜)을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자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차별심을 버림(捨)을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해설] 여기서는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은 성자가 설해진다. 사무량심은 자비희사의 네 가지 마음으로 이는 무량중생에게 베풀어 주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한결같이 간직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이 성자이다. 사무량심은 사등심(四等心)이라고도 하는데, 가없는 인연을 맺게 되는 경계에 따르기 때문에 사무량심이라고 하고, 마음이 그 인연이 되는 경계에 따르기 때문에 사등심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마음은 무량중생인 경계에 따라서 베풀어지는 평등심이며 자비희사의 네 가지 마음이다. 이 네 가지가 이루어져서 일체 중생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덕(德)이다. 그래서 이를 사덕(四德)이라고도한다.
자(慈)는 빨리어로는 메타 metta요, 범어로는 마이트리 maitri(maitra)다. 어원적으로는 친구, 친분을 뜻하고, 비(悲)는 카루나 Karuna이니 동정, 연민의 뜻이 있다.
자는 남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을 주려는 적극적인 마음이요, 비는 남의 괴로움이나 해로움을 없애주려는 적극적인 마음이다. 따라서 자비는 순수하며 사랑의 기본이다. 마치 부모가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만인을, 일체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또한 희(喜)는 다른 이가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게 하여 같이 즐거워한다. 사(捨)는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가깝거나 먼 구별을 두지 않고 같이 평등하게 대한다.
이러한 네 가지 마음은 처음에는 자신과 관계 있는 이에게 일으키고, 점차 모든 이에게 미치게 한다. 이런 마음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대립을 없애고, 집착을 떠났을 때 일어나는 마음들이다. 이의 실천이 보살도이다.
집착을 떠나 평등하게 남을 보고 나아가서 남을 도와주면서 기뻐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바로 열반에 이른 마음에서 일어난다. 자비는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대립을 떠난 절대적인 사랑이요, 희와 사는 너와 나의 대립을 떠난 절대적인 사랑이다. 열반의 세계는 너와 나, 미움과 사랑 등의 대립관념을 초월하여 모든 생명이 다같이 사는 부처님의 마음이다.
이런 사무량심을 닦는 수행자는 벽지불을 넘어서 보살도가 이루어진다.
8. 집착을 떠난 성자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부정관(不淨觀)을 수습하고 애쓰며 노력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무상관(無常觀)을 수습하고 애쓰며 노력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해설] 좌중에 부정관과 무상관을 닦아 간직하려고 애쓰는 비구가 있음을 찬양한 것이다.
부정관은 우리의 몸이 깨끗하지 않음을 아는 관이다. '깨끗하다'는 '더럽다'의 반대 개념이다. 불교에서는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라 번뇌가 있고 없음에 따라서 더러움과 깨끗함이 나누어진다. 즉 번뇌가 있는 마음을 더럽다고 하고 번뇌가 없는 마음을 깨끗하다고 한다. 그래서 번뇌로 물들은 더러움, 즉 염오심(染汚心)이라고 한다.
번뇌는 우리의 몸에 의해서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구성이나 작용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이에 매이지 않게 한다. 이것이 청정이다. 번뇌는 집착이기 때문이다. 몸이 부정하다고 하여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로 이루어지고 인연으로 모여 있으므로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의미를 떠나서 존재한다. 이를 절대적으로 잘못 알고 집착하기 때문에 멋대로 깨끗하다고 생각하여 집착한다. 몸은 이미 고나 낙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늙고 병들면 고민에 빠진다. 모든 고는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부정관으로서 깨끗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없애면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고가 없어져 열반에 이르게 된다.
무상관도 이와 같다. 무상관은 우리의 마음을 관찰하여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음은 실체가 없으므로 어떤 것이 나의 마음인지, 어떤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인지, 악한 마음인지, 선한 마음인지 알 수 없다.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서 일어나고 없어지므로 걸릴 것이 없다. 움직이며 변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여서 열반의 세계로 간다.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五蘊)은 인연에 의해서 생하고 멸하므로 무상이요 고요 무아임을 알면, 적정의 세계 속에서 고를 떠나 낙에 머물고, 무상을 떠나 상에 머물고, 무아를 떠나 참된 나에 머문다. 이것이 열반의 세계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어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니 고가 있을 수 없다. 고가 없으니 스스로 고요한 적정락이 있게 된다. 이를 무루(無漏)의 낙(樂)이라고 한다.
9. 안반수의 호흡의 요지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마음을 두는 것을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마음을 두는 것을 수습하여 널리 익히면 큰 효과를 얻고 큰 공덕이 있나니라. 여러 비구여, 입출식념(入出息念)을 수습하고 널리 익히면 사념처를 만족하게 한다. 사념처를 수습하고 널리 익히면 칠각지가 원만해진다. 칠각지를 수습하고 널리 익히면 명(明)과 신통과 해탈이 원만해진다.
[해설] 여기서는 입출식념(入出息念), 곧 아나파나사티 anapanasati를 설한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에 마음을 두는 관법을 잘 익히면 몸이나 마음에 곧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미 앞에서도 누누이 말했듯이 몸에 있어서는 생리적인 효과로 산소의 공급과 일산화탄소 등의 배출양이 많아져서 혈액을 깨끗이 할 뿐만 아니라, 모든 기관을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신경을 안정시켜서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효과 외에 더 큰 정신적인 공덕이 있다. 곧 사념처를 원만하게 한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호흡의 나가고 들어옴에 마음이 같이 머물면 몸이나 감수작용, 마음이나 법에 따라서 마음이 끌리지 않으므로 그것과 하나가 되어 고요하고 순일하며 있는 그대로 인연에 따라서 생멸하니 사념처에 원만해진다. 입출식념은 행하고 머물고 눕고 앉음에 항상 마음이 대상과 떠나지 않고 같이 하여 들어오는 숨 속에서 신, 수, 심, 법이 있는 그대로 나와 하나가 되고, 네 가지에 걸리지 않고,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적정인 삼매를 얻어서 심신이 움직이지 않는 속에서 승묘한 법 그대로의 세계에 머문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즐겁게 머물게 된다.
이것이 사념처의 원만이다. 경에서는 성주(聖住), 범주(梵住), 여래주(如來住)라고도 한다. 이러한 사념처가 원만하게 되면 나아가서 칠각지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칠각지가 잘 익혀지면 명(明), 곧 궁극의 지혜를 얻어서 해탈한다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입출식념을 잘 익히면 지혜를 얻어서 해탈, 곧 열반적정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닦을 것인가. 이에 대한 방법도 상세히 설해진다.
10. 해탈로 가는 호흡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입출식이 수습될 것이며, 어떻게 널리 익혀질 것이며, 어떤 큰 효과와 공덕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있는데,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고, 혹은 빈집으로 가서 결가부좌하여 몸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나타내서 머물게 한다. 그러면 실로 생각이 있어서 숨이 들어오고 생각이 있어서 나간다.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숨을 길게 들어오게 한다.'고 깨달아 알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나가게 한다.'고 깨달아 알고,
짧게 입식하여 '나는 짧게 입식한다.'고 깨달아 알고,
짧게 출식하여 '나는 짧게 출식한다.'고 깨달아 알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으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으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집중하여 머물게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집중하여 머물게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무상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무상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탐욕을 떠남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탐욕을 떠남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멸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멸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떠나서 나감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떠나서 나감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입출식념을 널리 익히면 큰 효과와 큰 공덕이 있도다.
[해설] 여기서는 숨을 들어오게 하거나 나가게 하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과 숨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널리 모든 것에 미치게 하는 수련을 닦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를 '널리 익힌다.'고 했다. 이 경의 장점은 널리 익히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함경》에서는 이렇게 입출식념이 널리 익혀지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잡아함경》제26의 《아리비타경(阿梨琵咤經)》에서도 이를 설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은 다르다.
이와 같이 널리 익히는 것은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의 여섯 자기 중에서 관(觀)에 해당한다. 관은 집중한 상태로 인체의 모든 것을 관하니, 집중력이 확대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몸만이 아니라 몸 이외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집중력을 확대할 수 있다. 이러한 수련을 강조한다. 숨에만 정신을 집중하기도 어려운데, 마음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숨이 그에 따라서 길게, 혹은 짧게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각지하기는 더욱 어렵다. 몸을 움직일 때에도 마찬가지다. 가령 뛰면서 숨이 길게 혹은 짧게 나가고 들어옴을 각지하고, 천천히 걷거나 앉아 있어가 누워 있으면서 이렇게 익힌다.
처음에는 고요한 곳에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익혀야 한다. 숲속이나 나무 밑이 좋다. 혹은 빈 집에 홀로 앉아 결가부좌하고 숨을 길게 혹은 짧게 출입시키면서 정신을 숨에 집중한다. 첫 단계에서는 이런 방법을 행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기 쉽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숨의 길고 짧음을 임의대로 자유롭게 하면서 이에 마음이 머물게 한다.
다시 여기에서 몸의 움직임,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지각하면서 호흡한다. 몸의 움직임이 크게 될 수도 있고 고요할 수도 있으나, 이에 따라서 숨의 나가고 들어옴이 같이 따르고 몸의 움직임의 크고 작음이 각지된다.
이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다시 나아가서 마음에 나타나는 기쁨이나 즐거움, 또는 괴로움 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출입식에 마음이 머물게 한다. 마음의 집중력이 증장되어 나의 것으로 된 단계이니 환(還)의 단계에서 가능하다. 내 뜻대로 집중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으로 밖의 모든 것은 것을 감지하거나 감각하면 호흡에 마음이 집중된다. 마음의 집중력이 확대되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주체가 되었으니 인연에 따라서 나타난 기쁨이나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마음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단계가 이른바 견성(見性)이다. 자신의 자성을 보아 내가 확고히 섰으니, 나와 대상은 인연에 따라 상응한다. 이것이 묘적(妙適)이요, 청정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드디어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그에 끌리지 않게 된다. 마음을 움직일 때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힐 때든, 어느 때나 항상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숨이 조절되고 정신이 이에 머물게 된다. 주와 객이 하나 되어 객체는 없고 주체만이 있는 세계다. 오히려 주체 속에 객체가 섭수되어 하나가 된다.
이때는 일체가 나다. 여기에는 더없는 즐거움이 있고, 이 즐거움은 절대적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부동심이나 적정 그대로이니, 삼매 속에서 뛰어난 기쁨(勝喜)을 즐기면서 유희한다. 이것이 적정이니 정(定)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점에만 머물러 즐기면 안 된다.
여기에도 머물러 있지 않고 마음의 자재함을 얻어야 하니, 이것이 해탈이다. 오고 감이 아닌 속에서 자재로이 오고 가야 한다. 머무름이 아닌 속에 머물고, 고요가 아닌 속에 고요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해탈의 세계다. 이러한 세계는 무상한 마음의 움직임 속에서 그 마음에 따라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있다. 들어오는 숨에 집착하지 않으니 들어온 숨이 다시 나가고, 나간 숨이 다시 들어온다.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들어오고 나감이 자연스럽다. 움직이는 대로 따른다. 무상한 마음 속에는 무상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이 상태가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해탈이다.
여기에 이르면 탐욕은 떠나고 고는 멸했으니 어디에도 집착 없는 자재로움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따라 숨이 나가고 들어옴에 있어서, 즉 숨에 따라서 걸림이 없는 마음이 얻어진다. 여기에서는 마음과 숨이 항상 함께 하면서도 마음의 안온함이 열반을 떠나지 않으니, 여기에 또한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
11. 신념처(身念處)에 대한 가르침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입출식을 수습하고 널리 익혀서 사념처를 원만케 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입식한다'고 깨달아 알고,
길게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내쉰다.'고 깨달아 알고,
짧게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입식한다.'고 깨달아 알고,
짧게 내쉬면서 '나는 짧게 내쉰다.'고 깨달아 알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 하고 익히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몸을 따라서 관하면 전일한 정진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것을 몸 속에 있는 모든 몸이라고 부른다. 곧 입출식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때 비구의 몸에서 몸을 따라서 관하고, 전일한 정진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고 머문다.
[해설] 몸과 감수작용과 마음과 법의 네 가지를 원만히 깨달아 아는 수행을 할 때 숨의 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는 방법이 설해진다. 먼저 호흡의 집중만이 아니라 널리 온몸에 미치게 하는 관법이다. 신념처행(身念處行)이다. 호흡 속에서 몸에 마음을 집중하는 이러한 수행을 하면 몸의 부정함을 깨달아 알게 된다.
이 수행은 호흡할 때, 길거나 혹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쉬면서 그 숨이 길거나 짧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기본이다. 곧 호흡과 마음이 같이 있게 된다.
이 호흡이 이루어지면 마음을 온몸으로 돌려서 온몸을 각지하면서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쉬는 연습을 한다. 숨의 길고 짧음을 아는 동시에 몸도 각지한다. 이때는 마음이 호흡을 떠나지 않고 몸도 떠나지 않는다. 즉 마음과 호흡과 몸이 하나가 된다.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이 몸에 머물러서 몸의 각 부위에 따르게 된다.
이때는 마음이 한결같이 몸과 같이 있으려는 정진이 있고, 이에 따라 몸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생겨 부정함을 알게 되고, 몸의 생과 머뭄과 멸을 두루 생각하게 되어 이에 대한 탐욕이나 근심이 조복된다. 이로써 신념처(身念處)의 행이 원만히 이루어진다.
이때의 내 몸은 몸 속에 머물고 있는 나와 더불어 같이 한몸이다. '나'는 속에 있는 나의 몸이다 .나의 주체인 참된 나, 나의 주체인 주인으로서의 '나'는 속에 있는 나의 몸이다. 이 주체적인 나는 바로 입출식이다. 바로 '나'란 존재가 입출식을 있게 한다. 이렇게 되면 호흡이 바로 내가 된다. 나는 호흡이요,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이 나의 삶이다. '호흡이 곧 나'라는 자각에 이르러서 참된 신념처의 원만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가 닦아진다.
몸에 대한 수행은 마음이 몸의 각 부위에 머물고 , 다시 몸의 움직임의 크고 작음에 머물러서 호흡이 떠나지 않게 하는 수행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몸에 대한 집착이나 탐욕, 근심이 없어진다. 몸의 부정함을 올바르게 알기 때문이다.
12. 수념처(受念處)에 대한 가르침
비구들이여, 비구가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힌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서 받아들임을 따라서 관하면 그때 전일한 정진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것을 모든 받아들임 속의 받아들임이라고 부른다. 곧 모든 입출식에 마음을 잘 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 받아들임을 따라 관하면서 그때에 전일하게 정진하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해설] 수념처행(受念處行)의 가르침이다.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우리의 감수작용, 곧 기쁨이나 즐거움 등과 같이 하여 그것을 깨달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숨의 출입에 따라서 마음 속에 기쁨이나 즐거움이 받아들여졌다면, 그 기쁨이나 즐거움은 즐거움도, 기쁨도 아님을 알게 된다.
경에서의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서 받아들임을 따라 관하면서'는 모든 감수작용을 감수되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호흡이 같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때 받아들여진 그 감수작용은 고요한 마음에 비친 직간의 힘에 의해서 달라진다. 즐거움이나 기쁨이 느껴진 그대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올바른 앎이다. 그러므로 이에 탐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에서 '세간에 있어서의 탐욕이나 근심이 조복된다.'고 했다. 세간적인 탐욕이나 근심은 받아들이는 느낌 그대로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이 집중되어 그것의 길고 짧음을 깨달아서 아는 마음은 이미 세간을 떠난 마음이다. 항상 흔들리고 집착하는 마음이 세간이기 때문이다. 호흡에 생각이 같이 따라서 고요함과 움직이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의 감수작용은 기쁨이나 즐거움이면서도 세간적인 차원을 떠나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이것이 도이다.
그래서 경에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임 속에 있는 받아들임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일반적인 감수작용과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인 기쁨과 즐거움이다. 감수작용인 수(受)는 수이면서 앞의 수와는 다르다. 세간적인 수가 아니라 출세간적인 수이다. 속(俗)으로서의 수이면서 진(眞)인 수이다.
이때는 속의 수가 진의 수로 바뀌었으니 어찌 근심이나 탐욕이 있으랴. 기쁨이나 즐거움이 기쁨이며 즐거움이면서도 그에 탐착하지 않고, 없어져도 근심하지 않는다.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서 그런 마음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근심과 탐욕이 따르는 수를 부정하고 다른 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앞의 수가 바뀌는 것이다. 곧 조복이다. 앞의 수와 뒤의 수는 서로 떠나지 않으면서 앞의 수가 뒤의 수로 바뀐다. 이를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올바른 앎이 있고 한결같은 정진이 있으며 인연법을 생각하여 떠나지 않는 억념(憶念)이 있다.
13. 심념처(心念處)에 대한 가르침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나는 마음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지극히 기쁘게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지극히 기쁘게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집중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집중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해탈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해탈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힌다.
이와 같이 마음을 따라서 관하면 그때에 비구여, 전일한 정진과 올바른 앎과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생각함을 잃거나 옳지 않은 앎이 있는 입출식념의 수습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음을 따라서 관하면 전일한 정진과 올바른 앎,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해설] 마음을 따라서 관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마음은 항상 움직이면서 변하므로 무상하다. 마음은 마치 숨의 들어오고 나감과 같이 항상 움직이면서 생과 멸을 되풀이한다. 마음의 실상은 호흡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음과 호흡이 하나가 된 세계에서는 호흡의 출입식이 무상하면 마음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흡의 무상함을 알면 마음의 무상함도 알게 된다. 마음은 볼 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마음과 호흡이 같이 하고 있을 때에는 마음도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마음을 깨달아서 아는 것은 관이라고 한다.
마음은 이처럼 실체가 없으면서도 있으며 항상 움직이고 있다. 마음에는 기쁨이 있고 고정된 적정의 상태와 해탈도 있다. 이와 반대로 마음에는 괴로움과 산란함도 있으며 집착의 매임도 있다. 마음의 실상을 알면 마음의 본래 상태가 기쁨이고 적정이며 해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되었을 때는 괴롭고 산란해지며 집착에 매인다.
그러므로 수행은 본래의 마음을 찾는 것이다. 흔히 본래의 마음은 청정하다고 한다. 청정은 곧 기쁨이요 적정이며 해탈이다. 마음의 조복과 신심이 청정이라고 말해진다. 번뇌가 조복되고 고가 없으니 기쁨이요, 무루(無漏)의 본심에 돌아왔으니 적정이요, 다시는 윤회에 들지 않으니 해탈이다.
마음은 몸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몸이 호흡을 떠나서 있을 수 없듯이, 그러므로 호흡과 마음이 청정한 세계에 머물면 열반이다. 호흡은 몸을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안정시킨다. 마음의 안정은 이런 기쁨이나 적정, 해탈에 이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일시적인 안정은 안정이 아니다. 호흡이 나를 떠나지 않고 마음이 나를 떠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이런 세계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안반수의경》에서는 자신으로 돌아온 환(還)에서 정(淨)으로 나간다고 했다. 환이란 주체의 확립이다. 주체가 확립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주와 객이 둘이 아닌 세계로 나가게 된다. 무아는 확립된 주체를 통해서 주체가 객체와 하나가 되어 주와 객을 나눌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주와 객이 자재롭게 조화되는 세계이다. 무아는 주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무아(無我)는 무심(無心)이다. 무심은 뛰어난 기쁨이 있고 고요함 속에 머물러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14. 법념처(法念處)에 대한 가르침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는
'나는 무상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무상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탐욕이 떠나는 것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탐욕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멸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멸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출리(出離)를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출리를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힌다.
이와 같이 제법에 있어서 법을 따라 관하면서 비구들이여, 그때는 전일하게 정진함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탐욕과 근심을 끊었음을 지혜로써 보고 잘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제법에 있어서 법을 따라서 관하면 그때는 전일한 정진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입출식을 수습하고 널리 익혀서 사념처를 원만하게 하나니라.
[해설] 법념처(法念處)에 대한 교설이다. 법념처는 모든 사물이 실체가 없음을 관하여 아는 것이니,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는 곧 무상(無常)이다. 무상이기 때문에 무아요, 무아이기 때문에 무상이다. 형상으로 나타나는 작용으로 보면 무상이요, 그 본체로 보면 무아이다.
무상이며 무아인 제법은 결국 열반으로 간다. 이것이 공(空)이다.
공은 용수(龍樹)가 말했듯이 세 가지로 나뉜다.
연기의 도리 그대로 실현된 공성(空性)sunyatayam bbuta과
연기의 도리 그대로 희론이 적멸되는 공용(空用)sunyatayam prayojanam과
연기의 도리로 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공의(空義)sunyatayam artba이다.
공성은 곧 열반적정(涅槃寂靜)이요,
공용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며,
공의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무아로서의 제법이 세간적 시설(施設)인 세속의 법으로 존재한다. 이는 또한 고(苦)로서 잇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대할 때에 이렇게 관하면 올바른 앎이 있을 뿐 탐착이나 근심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법념처의 수습도 숨의 입출 속에서 행해진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법이기 때문이다.
15. 칠각지(七覺支)에 대한 가르침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사념처를 수습하고 널리 익혀서 칠각지(七覺支)를 원만하게 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의 몸으로 몸을 따라 관하면서 전일하게 정진함과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에 있어서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물면 그때는 생각이 세워져서 없어지지 않을 때 염등각지(念等覺支)를 수습하면 원만하게 수습된다. 이와 같이 생각이 있어서 머물면서 저 법을 지혜로서 살펴서 보고, 살펴서 알아 두루 생각하게 된다.
[해설] 사념처를 수습하여 칠각지를 원만하게 하는 방법을 설한다. 칠각지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7종의 행법으로 불도를 수행하는 방법이다. 이 중에서 먼저 염각지(念覺支)를 수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염각지는 염등각지라고도 하는데 불도를 수행함에 있어서 항상 잘 생각하여 마음이 적정에 머물고 지혜가 밝게 나타나게 한다.
실제로 이런 수행은 생각을 일으켜서 한결같이 바르게 서게 한다. 먼저 몸을 따라 관하여 이에 머물러 몸에 대한 올바른 앎이 이루어지고 탐욕과 근심 등이 조복되어 머문다. 이때 마음을 세워서 잊지 않고 머물게 하고, 생각이 떠나지 않게 하여 잊지 않으면 염등각지를 닦는 행법이 된다. 이러한 염등각지를 닦아서 생각이 끝내 잊혀지지 않으면 염등각지가 원만히 이루어진다.
염등각지는 생각이 깨달음을 떠나지 않고 한결같이 머무는 수행이다. 이를 수행하려면 먼저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마음을 일으키려면 몸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이 몸에 머물게 해야 한다. 생각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머무르면 마음이 세워진 것이니, 이 마음을 굳게 하여 한결같이 머무르게 하면 염등각지가 이루어진다. 경에서는 '몸에 있어서 몸을 따라 관하여 전일하게 정진한다.'고 했다. 방편으로 염등각지를 닦은 것이다. 염등각지를 닦으면 몸이나 마음의 실상을 지혜로 살펴서 올바르게 알게 된다.
이를 염등각지의 원만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지도론》에서는 '보살은 일체법에 있어서 생각하지도 않고 억념하지 않으니, 이것이 염각분이다.'라고 했다. 진정한 염각지는 생각을 일으켜서 한결같이 머물게 하나 진실로는 그 생각이 있으면서 없으므로 생각하지 않고 억념하지 않는 속에 한결같은 생각이 세워져 있다고 하겠다.
16. 사물을 두루 바르게 분별하는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이와 같이 생각이 머물면서 저 법을 지혜로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알고 두루 생각하면 택법등각지가 부지런히 행해진다. 그때에 비구가 택법등각지를 수습하면 택법등각지(擇法等覺支)가 수습되어 원만해진다.
[해설] 택법등각지, 곧 택법각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택법각지란 제법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깨달아 아는 수행이다. 이 수행을 하려면 먼저 어떤 사물에 마음을 집중하여 한결같이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사물을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되고, 알게 되며, 그 사물의 생멸이나 변화를 두루 살펴 분별하는 힘이 생긴다. 그러면 제법을 분별하여 실상을 깨달아서 아는 수행이 행해지고 택법등각지가 행해진다.
택법등각지를 잘 행하면 제법의 올바른 분별이 이루어지고 사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얻어지며 그릇된 집착이 없어진다. 이것이 택법등각지의 원만이다. 다시 말해 칠각지 중의 택법등각지는 바른 법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한결같이 깨달아서 아는 수행이다. 이를 정구제법각의(精求諸法覺意)라고도 하며 한결같이 정성껏 구하여 제법을 분별하고 깨달아서 아는 마음이 된다.
용수는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를 '일체법 중에서 선법, 불선법, 무기법(無記法)을 잘 살펴서 알려고 하나 얻을 수 없다. 이를 택법각분이라 한다.'고 했다. 제법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깨달아서 안다고 하나, 결국 선법도 없고, 불선법도 없고, 무기법도 없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비로소 택법각지가 원만해진다.
17.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저 법을 지혜로서 살펴 자세히 알고, 두루 사유하기 위해서 집착 없이 부지런히 정진을 닦으면, 정진등각지(精進等覺支)가 부지런히 닦여져서 그때 비로소 비구는 정진등각지를 수습하여 원만해진다.
[해설] 내 몸이 부정하고 내 마음이 무상하며 일체의 사물이 실체가 없이 인연에 따라서 생멸을 거듭하니, 영원한 존재가 어디 있으며 절대적인 존재 또한 어디 있으랴. 이러한 나와 세상을 알면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이 목숨, 저 일체 사물의 순간적인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시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세월을 허송할 것이며, 이 목숨을 가벼이 생각할 수 있으랴. 오늘 이 삶은 과거 무량한 삶의 연장이요, 영원한 미래로 이어질 삶이다. 그렇기에 더없이 고귀하고 존엄하다.
삶의 완성을 위해 부지런히 닦아 소원을 이루려면 몸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어 비로소 견고해진다. 생명의 무상함을 알지 않고서는 마음을 한결같이 굳게 정진하지 못한다. 심신이 견고해야 정진이 이루어진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일체의 법이 실체가 없어 연기의 법에 따라서 상이 상이 아님을 알면 그 때 정진등각지가 이루어진다.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지런히 정진등각지를 행해야 한다. 정진 없이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정진은 선에 대한 노력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을 분별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면 선으로 나아가게 되고, 선을 알면 선을 향해 나가려는 노력이 있게 되니, 이것이 정진등각지다.
윤회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선을 행해야 하며, 세간의 달콤한 맛에 끌려서 탐착하면 게을러진다. 게을러지면 마음과 몸이 헤이해져 견고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정진은 택법등각지의 원만에서 비롯된다. 택법각지가 원만히 된 자에게서 집착 없는 정진이 있다. 그래서 경에서 '저 법을 지혜로서 자세히 관찰하고 자세히 알아서 두루 사유하기 위해서 걸림 없는 자의 정진이 행해지면 정진등각지가 있게 된다.'고 하였다.
18. 집착 없는 기쁨을 얻는 경지
한결같이 정진에 애써 노력한 사람에게는 집착 없는 기쁨이 생한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정진에 애쓴 비구에게 집착없는 기쁨이 생하면 희등각지(喜等覺支)가 정근되고 그때 비구가 희등각지를 수습하여 원만해진다. 기쁨에 몸도 평안하고 마음도 고요하다.
[해설] 기쁨이 한결같이 간직되는 희등각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희등각지는 마음에서 기쁨이 솟아나 바라는 바가 얻어진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여 마음 속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기쁨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때는 마음도 적정의 즐거움을 느끼고 몸도 평안하여 근심이나 기쁨의 상이 없어지고, 일체의 작법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 기쁨은 인연에 의해서 생했기 때문에 행하는 모든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일 집착이 생한다면 이는 무상에 집착한 것이다. 무상에 집착하면 그것이 무너졌을 때 근심이나 고통이 생긴다. 범부는 전도된 망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무엇인가에 집착한다. 상(常)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상(無常)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런 기쁨을 깨닫는 것이 희등각지다. 도를 닦는 자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도 중에 각 단계의 뛰어난 세계에서 진리를 깨닫고 기쁨을 맛본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진리를 관해 즐긴다. 마치 사람이 땅을 파서 물을 보고 기뻐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기뻐하며 더 깊이 파들어간다. 즉 기쁨이 나타남으로써 더욱 즐겨 깊게 파들어간다. 더 팔 필요 없이 깊게 파면 거기에서 감미로운 물을 마실 수 있다. 희등각지는 정진각지 다음의 4단계에서 얻어지는 세계다. 희등각지에서 얻어지는 집착 없는 기쁨은 다음 단계인 경안등각지(輕安等覺支)를 수습하게 한다.
19. 심신이 경쾌하고 안온해지는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기쁨을 얻어서 몸도 평안하고 마음도 고요하면 그때 비구가 경안등각지(輕安等覺支)를 닦아서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 몸이 평안하고 마음이 안온하여 안락하게 된 자는 마음이 안정된다.
[해설] 마음에 기쁨이 솟아서 수행이 더욱 정진되면 심신이 유순하게 쉬게 된다. 즉 경안등각지의 단계에 이른다. 이 단계에서는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평안하여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인연을 떠나 어떤 것도 얻음이 없다. 그래서 제각지(除覺支)라고도 한다. 이때 느끼는 경쾌한 깨달음은 다시 몸과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몸과 마음의 안정이 극치에 이르면 삼매를 얻게 된다. 따라서 경에서 '몸이 평안하고 마음이 안온하여 안락하게 된 자는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마음의 안정이란 정(定)이니 삼매이다. 정은 몸과 마음의 안정이 극치에 이르러서 흩어짐이 없고 한결같이 고요하다.
20. 마음이 고요한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에게서 몸이 경안하고 마음이 안쾌하여 마음이 고요하면 그때 비구가 정등각지(定等覺支)를 닦아서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적정에 든 마음을 잘 관찰하여 깨닫는다.
[해설] 마음의 적정(寂靜)이 극치에 이르면 정(定)이 된다. 바로 삼매(三昧)이다. 정에 들어가면 일체의 사물에 집착함이 없고 의지할 바가 없으며 오직 고요한 마음만이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린 세계라 하여 사등각지(捨等覺支)라고 한다. 이때는 마음이 고요 속에서 일체의 사물을 집착 없이 관찰할 뿐이다. 사등각지는 마음이 고요한 정등각지가 잘 수습된 단계이다. 마음의 적정 속에서 생각하고 보고 움직이면서도 한결같이 고요한 상태가 등(等)이다. 정등각지는 정이 평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단계이다. 언제 어디서나, 또는 어떤 것에 있어서나 적정 그대로 있음을 스스로 깨달아 안다.
21.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이와 같이 마음의 고요함을 잘 관찰하여 사등각지(捨等覺支)를 닦아서 익힌다. 그때야 비로소 사등각지가 원만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사념처를 수습하고 널리 닦으면 칠각지를 원만히 하나니라.
[해설] 모든 집착과 의지할 바가 없이 마음에서 모든 것이 버려진 단계인 사등각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등각지는 마음이 고요함의 극치에 이르러서 얻어지는 세계다. 집착이 없고 의지할 곳이 없이 모두를 버렸다고 하나 그 버린 마음도 보지 않는다. 버렸다는 생각이 있으면 버린 것이 아니다.
사등각지에서는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보지 말아야 한다. 이때야 비로소 음심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의 때가 없어졌음을 스스로 알게 되고, 뜻하는 깨달음의 세계가 나타났으니 나 자신을 찾은 것이요, 나를 수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호각지(護覺支)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사념처(四念處)의 원만한 수습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사의단(四意斷),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등이 널리 닦아져서 원만하게 된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와 같은 삼십칠도품이 설해지는가. 보살은 이들을 모두 공(空)이라고 관한다. 37종의 수행은 바로 공의 세계이다. 공의 세계를 알고 증득하면 모든 희론(戱論)이 멸하여 해탈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무상관(無常觀), 고관(苦觀), 무아관(無我觀), 생멸관(生滅觀), 불생불멸관(不生不滅觀), 유관(有觀), 무관(無觀), 비유비무관(非有非無觀) 등.... 일체의 집착이 없어진다. 연기의 법은 무상(無常), 무연(無緣), 무작(無作), 무희론(無喜論)으로서 항상 적멸하여 참된 법의 모습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을 설하여 무상도 희론임을 알게 하고, 고를 설하여 고와 낙이 희론임을 알게 하고, 무아를 설하여 유와 무가 모두 희론임을 알게 하고, 생과 멸을 통해서 불생과 불멸을 알게 하고, 유와 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을 설하여 모두 희론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37종의 도행을 설했다. 그러므로 삼십칠도행의 수습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인 인연을 알고 인연법을 따라서 열반의 즐거움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붓다의 자비심에 의해서 설해진 것이다.
22. 해탈을 향하여
그러면 비구들이여, 칠각지를 어떻게 닦아 익히고, 어떻게 널리 닦으면 지혜와 해탈을 원만하게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비구들이여, (고를) 떠남과 탐심과 (고의) 멸에 의해 버리고 떠나는 곳으로 향해 가는 염등각지(念等覺支)를 닦아서 익히고, 택법각지(擇法覺支)를 닦아서 익히고, ..... 내지 ...... 정진등각지(精進等覺支)를 닦아서 익히고, ... 내지 ....... 희등각지(喜等覺支)를 닦아서 익히고, ...... 내지 .....(고를) 떠남과 탐심과 (고의) 멸에 의해서, 버리고 떠나는 곳으로 향해서 가는 사등각지(捨等覺支)를 닦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칠각지를 이와 같이 닦고 익히면 지혜와 해탈을 원만하게 하나니라. 세존께서 이처럼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세존의 설법을 따라 기뻐하며 받들었다.
[해설] 이상에서 설한 칠각지를 어떻게 익혀서 지혜와 해탈을 얻게 되는가를 다시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사념처로부터 칠각지에 이르는 수행을 가르쳤으며 마지막으로 칠각지가 닦아지면 지혜와 해탈의 세계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원시불교 경전에 속하는 이 경에서는 스스로를 등명으로 삼고 자기 자신의 진실인 법에 귀의하여 게으르지 않게 스스로 닦아서 행하라고 가르쳤다. 여기에 설해지고 있는 37종은 서로 다르면서도 떠나지 않으니 하나가 원만히 닦아지면 다른 것도 원만히 닦아진다. 계(戒), 정(定), 혜(慧)의 세 가지는 한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6년 고행을 버리고 즐거운 길을 택한 붓다는 우리의 한마음을 이렇게 설했다.
'나는 안락함에 의해서 이 안락함을 얻었노라.'고 했으니 붓다의 수행은 안락하고 즐거운 길이며 어떤 극단이 아닌 중도(中道)의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붓다는 최초의 설법인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 팔정도(八正道)를 설했으나 열반에 들기 직전에는 《삼십칠도품경(三十七道品經)》을 설했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제까지 말한 내가 얻은 법을 너희들은 모두 잘 가지고 행하여 고요히 생각하고 널리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법은 '삼십칠도품'이니라." (《잡아함》의 《유행경》)고 했다. 초전법륜에서는 팔성도만을 설했고 입멸 직전에는 사념처 등 29종의 행법을 더 설한 것이다. 이 29종은 붓다가 때와 장소와 근기에 따라서 분류하여 스스로 실행하고 남에게도 실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이니 이들의 행법은 팔정도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나누어서 설하면 37도품이 되고, 37도품을 집약하면 팔정도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들은 모두 계, 정, 혜의 세 가지로 섭수된다.
여기서 번역하여 해설한 《남전대장경》에 있는 《아나파나사티 숫타》에는 팔정도가 설해져 있지 않다. 이로 보아 이 경전은 붓다가 입멸하기 직전에 비구들에게 설한 모든 가르침을 요약하고, 수행 방법과 목표를 간결하게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이 경전이 《아나파나사티 숫타》라고 되어 있듯이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 속에서 이들 29종의 수행이 이루어짐을 가르친 것이다.
실로 부정관을 닦아서 탐욕을 끊고, 사무량심을 닦아서 노여움을 끊고, 무상관을 닦아서 아만을 끊고, '아나파나사티'를 닦아서 무념무상의 세계로 들어가서 일체의 의식에 매인 각상(覺想)을 끊는다. 의식이 숨의 나감에 따라서 멸하고 숨의 들어옴에 따라 일어나서 무념무상으로 이어지게 되면 여기에 열반적정의 즐거움이 있다.
* 위 해설 중 4신족(四神足)에 대한 설명은 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해설서에서는 4신족(四神足)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 일반적 해설
- 사신족(四神足, 四如意足) -
1) 욕신족(欲神足) : 뛰어난 명상을 얻으려고 원함.
2) 근신족(勤神足, 精進神足) : 뛰어난 명상을 얻으려고 노력함.
3) 심신족(心神足) : 마음을 가다듬어 뛰어난 명상을 얻으려고 함.
4) 관신족(觀神足, 思惟神足) : 지혜로서 사유관찰하여 뛰어난 명상을 얻음.
* 좀 특이한 해설
사신족은
첫째 신신족(身神足)이요,
둘째는 구신족(口神足)이요,
셋째는 의신족(意神足)이요,
넷째는 도시족(道神足)이다.
생각이 날아가서 생각이 멸을 바라지 않으면 도에 따르지 않는다. 사이제발(四伊提鉢)의 넷은 수, 이제(伊提)는 그침이요, 발(鉢)은 신족이다. 날으려 하면 곧 난다. 어느 때는 정진하여 앉아서 7일이면 곧 얻고, 혹은 7개월 혹은 7년이다.
이에는 네 가지가 있다.
몸이 법대로 움직여지는 신신족,
말이 법대로 행해지는 구신족,
마음이 법대로 움직여지는 의신족,
도가 법대로 전일하게 행해지는 도신족이다.
이들 네 가지는 마음이 한결같이 법을 떠나지 않고 전일하게 유지되었을 때 나타난다. 만일 마음이 한결같이 법대로 움직이지 않고 비약하여 악이 멸해지지 않는다면 네 가지 신족도 나타나지 않아서 도에 따르지 않는다. 도에 따르지 않으면 죄에 떨어진다.
*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 중 구체적인 수행지침서로서는 이 경이 가장 논리정연하게 잘 정비된 수행체계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경을 중심으로 수행해 나가시되 필요한 부분은 다른 수행방법도 보충해 나가신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수행방법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
* 4념처(四念處) : 4가지 알아차림(마음챙김, 심사숙고, 관찰, 분석, 바로 앎)
(1) [身念處] 몸(身 kāya) : 14가지
① 들숨날숨 관찰(出入息念)
② 네 가지 자세 관찰 [行住坐臥]
③ 순간순간 모든 자신의 언행에 대한 분명한 앎 [正知正念]
④ 32가지 몸의 형태 관찰[厭逆作意 : 몸에 대한 집착과 아상(我相)을 탈피시키기 위한 몸에 대한 혐오감 수련] :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발톱,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내장, 내장의 내용물, 위장, 위장의 내용물,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혈액, 땀, 고형지방질, 눈물, 액체지방질,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등
⑤ 사대(四大)를 분석함(界分別觀 : 아상(我相) 극복, 분별력 향상 수련) [四大 : 地水火風]
⑥-⑭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10不淨觀, 9想 : 몸에 대한 집착과 아상(我相)을 탈피시키기 위한 몸에 대한 혐오감 수련)
(2) [受念處] 느낌(受 vedanā) : 9가지
① 즐거운 느낌 ② 괴로운 느낌 ③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④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⑤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 ⑥ 육체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⑦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⑧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 ⑨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3) [心念處] 마음(心 citta) : 16가지
① 탐욕이 있는 마음 ② 탐욕이 없는 마음
③ 성냄이 있는 마음 ④ 성냄이 없는 마음
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⑥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⑦ 위축된 마음 ⑧ 산만한 마음
⑨ 커진 마음 ⑩ 커지지 않은 마음
⑪ 향상된 마음 ⑫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마음
⑬ 집중된 마음 ⑭ 집중이 안 된 마음
⑮ 자유로워진 마음 ⑯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
(4) [法念處] 마음의 대상(法 dhamma) : 5가지
①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파악함 : 욕망, 악의(惡意,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우울), 회의적 의심
②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를 파악함
③ 감각장소(十二處)를 파악함
④ 깨달음의 7 가지 요소(七覺支)를 파악함
⑤ 사성제(四聖諦)를 파악함
* 칠각지[七覺支]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를 알아차린다.
깨달음의 요소는 빨리어로 보장가(Bojjhanga), 칠각지(七覺支)이다.
깨달음은 알아차림 등 깨달음의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성숙하면서, 이런 법들의 조화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통찰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깨달음이다.
붓다께서는 대념처경에서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을 때 '내게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을 때 '내게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꿰뚫어 안다.
... 법의 고찰에 대한... 정진... 기쁨... 평안... 집중....평등에 대한...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여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칠각지는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수행자가 직접 경험하는 여러 가지 좋은 현상들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현상도 집착하면 오히려 수행의 장애가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매 단계의 좋은 현상을 오직 알아차릴 대상, 법일 뿐이라고 알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집착한 것을 알아차려 빠져 나오면 다음 단계로 발전한다.
1. 첫째,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 [念覺支]
알아차림을 빨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한다.
칠각지의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는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확고할 때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 즉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상태를 말한다.
알아차림은 그 자체가 깨끗한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있으면 저절로 계율을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를 알아차리고, 또 지속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대상을 알아차려 결론을 내리고 마침표를 찍으면 알아차림이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최종상황을 또 다시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야 한다.
알아차림은 믿음과 지혜의 균형을 잡아주며, 노력과 집중의 균형도 잡아준다.
그래서 더 높은 법을 보게 한다.
2. 둘째,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 [擇法覺支]
법에 대한 고찰을 빨리어로는 담마 위짜야(Dhamma vicaya)라고 한다.
법(알아차릴 대상)은 오직 몸과 마음, 즉 신수심법(身受心法 : 四念處)이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대상(법)으로 하여 있는 그대로 고찰한다.
그 결과로 물질작용과 정신작용의 법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고찰하는 것이 법에 대한 고찰이다.
부처님께서는 깔라마경에서 붓다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이다.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법에 대해 탐구하여 법에 대한 확신이 생길 때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라고 하셨다.
수행자가 우선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이 확립되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법과 불선법을 보고, 그 법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 원인과 결과를 보는 눈이 생긴다.
그래서 불선법을 멀리하고 선법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이런 법들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緣起法) 무상한 것(諸行無常)이며, 괴로움(一切皆苦)이며,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는 제법의 성품을 통찰하여,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생긴다.
그래서 택법각지는 정견(正見)에 속한다.
3. 셋째,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 [精進覺支]
정진을 빨리어로 위리야(Viriya)라고 한다.
또는 노력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알아차림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이 노력이다.
노력은 다시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인내가 수행자를 열반으로 이끈다.
수행자는 스승과 선각자가 앞서 간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노력을 한다.
노력은 정신적인 노력이 있고, 신체적인 노력이 있다.
정신적인 노력은 알아차림을 강화하기 위해서 계속 마음을 새로 내서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노력은 알맞게 경행을 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집중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노력이 지나치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노력이 부족하면 나태해져 졸음이 온다.
그래서 노력도 알맞게 해야 한다.
노력이 지나치다 싶으면 법의 고찰과 정진력과 기쁨을 키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평안함과 집중력과 평등심을 키워야한다.
4. 넷째,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 [喜覺支]
기쁨을 빨리어로 삐띠(Piti)라고 한다.
삐띠는 기쁨, 희열, 좋아하고 만족함을 말한다.
삐띠는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생긴 환희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육체적 느낌이다.
수행자는 탐진치가 줄어들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생긴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다.
삐띠의 다섯 종류가 있다.
약한 기쁨, 순간적인 기쁨, 파도 같은 기쁨, 들어올리는 기쁨, 널리 퍼지는 기쁨이 있다.
처음에 이런 삐띠가 몸에 나타나면 놀라거나 좋아하게 된다.
이때도 이런 현상을 법으로 그대로 알아차린다.
삐띠가 있으면 있다고 알아차리고, 없으면 없다고 알아차리고, 다시 생겨나면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완성되면 완성되었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희각지도 좋아하거나 집착하면 수행이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5. 다섯째,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 [輕安覺支]
평안을 빨리어로 빠사디(Passaddhi)라고 한다.
또는 평온, 평안함, 가벼움, 휴식, 안정의 뜻도 있다.
기쁨이 생긴 수행자가 기쁨을 알아차리면 다음으로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고 경쾌한 느낌이 생긴다.
수행을 하는 동안 마음이 청정해졌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진다.
이때의 편안한 느낌이 바로 알아차릴 대상, 법이다.
이때가 되면 자기나 남이나 모두 업(業)만이 각자의 재산이 됨을 생각하게 되며, 경안각지가 확립된다.
이때에도 경안각지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6. 여섯째,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 [定覺支]
집중을 빨리어로 사마디(Samadhi)라고 한다.
집중을 삼매라고도 하는데, 집중의 정확한 뜻은 '청정한 마음의 집중'이다.
또는 '고요한 마음의 집중'이라고 한다.
그냥 집중이 아니고 청정함이 선행되어 생긴 집중을 말한다.
청정은 12처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편안해진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사마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는 마음이 방황하지 않고 심란하지 않다.
대상에 마음이 가볍게 놓여있는 상태로 대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사마디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마치 바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타고 있는 등불처럼 고요하다.
이때도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7. 일곱째,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 [捨覺支]
평등을 빨리어로 우뻭카(Upekkha)라고 한다.
평등의 상태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집중의 상태에서 기쁨도 없기 때문에 평등심의 상태가 유지된다.
평등심(平等心)으로 정신과 물질의 생멸(生滅)을 알아차림으로써 법의 본성(法性)을 본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함을 놓아버린다. [放下]
마음은 균형(均衡)을 갖추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不動心]
이때의 느낌은 알아차림이 있는 평온의 느낌이다.
이것은 시비 분별(分別)을 버림으로 얻어진 평등이다. [無分別智]
그래서 사각지(捨覺支)라고 한다.
이때도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칠각지는 모두 알아차릴 대상(법)이며,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의 법(dhamma)이며, 수행자는 여기에서 법(Dhamma)을 있는 그대로 볼뿐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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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禪定)[깨달음(解脫)의 길]의 단계 [9차제정(九次第定)] : (色界) 4선(四禪) => (無色界) 4무색정(四無色定) => 멸진정(滅盡定, 滅受想定, 想受滅定, 想知滅定)
* 색계(色界) 선정(禪定)의 단계 [4선(四禪)] : 초선(初禪)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 제2선(第二禪)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 제3선(第三禪)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 제4선(第四禪)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 수행의 단계
1. 범부위(凡夫位)
a. 외범위(外凡位) : 불교교리에 약간의 지혜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단계를 말한다.
1) 소승 : 3현위(三賢位)
⑴ 5정심(五停心)
⑵ 별상념주위(別相念住位) : 身, 受, 心, 法. (四念住)
⑶ 총상념주위(總相念住位) : 사념주(四念住)를 총괄해서 관(觀)함.
2) 대승 : 10신위(十信位)
b. 내범위(內凡位) : 불교교리에 약간의 지혜가 있는 사람의 단계를 말한다.
1) 소승 : 4선근위(四善根位 ; 5위 중 加行位)
2) 대승 : 7방편위[七方便位 ; 四善根位(順決擇分) + 三賢位(順解脫分) : 十住, 十行, 十廻向. (三十心)〕
2. 성자위(聖者位)
1) 소승 : 4향4과(四向四果)
2) 대승 : 10지(十地)
* 5위(五位) :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
* 4선근위(四善根位) 또는 4가행(四加行) : 난위(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위(世第一位)
* 4심사관(尋思觀) : 명심사관(名尋思觀), 사심사관(事尋思觀),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
* 52위(五十二位)
1) 10(신)심[十(信)心]: 신심(信心), 염심(念心), 정진심(精進心), 정심(定心), 혜심(慧心), 계심(戒心), 회향심(回向心), 호법심(護法心), 사심(捨心), 원심(願心)
2) 10주(十住) : 발심주(發心住), 치지심주(治地心住), 수행심주(修行心住), 생귀심주(生貴心住), 구족방편심주(具足方便心住), 정심주(正心住), 불퇴심주(不退心住), 동진심주(童眞心住), 법왕자심주(法王子心住), 관정심주(灌頂心住)
3) 10행(十行) : 환희행(歡喜行), 요익행(饒益行), 무진한행(無瞋恨行), 이치란행(離痴亂行), 선현행(善現行), 무착행(無著行), 존중행(尊重行), 선법행(善法行), 진실행(眞實行)
4) 10회향(十廻向) : 구호일체중생 이중생상 회향심(救護一切衆生 離衆生相 廻向心), 불괴 회향심(不壞 廻向心), 등일체제불 회향심(等一切諸佛 廻向心), 지일체처 회향심(至一切處 廻向心), 무진공덕장 회향심(無盡功德藏 廻向心), 입일체평등선근 회향심(入一切平等善根 廻向心), 수순등관일체중생 회향심(手順等觀一切衆生 廻向心), 진여상 회향심(眞如相 廻向心), 무박무착해탈 회향심(無縛無着解脫 廻向心), 입법계무량 회향심(入法界無量 廻向心)
5) 10지(十地)
一. 별교(別敎)의 십지(十地) :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명지(明地) 또는 발광지(發光地), 염혜지(念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彗地), 법운지(法雲地)
二. 삼승공(三乘共)의 십지(十地) : 건혜지(乾慧地), 성지(性地), 팔인지(八人地), 견지(見地), 박지(薄地), 이욕지(離欲地), 이변지(已弁地), 벽지불지(辟支佛地), 보살지(菩薩地), 불지(佛地)
6) 등각(等覺), 묘각(妙覺)
* 10바라밀(十波羅密) : [6바라밀(六波羅密) : 보시(布施 : 財施, 無畏施, 法施) => 지계(持戒 : 五戒, 具足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반야(般若, 知慧, 明)] +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 40업처관(四十業處觀) : 10변관(十遍觀) : [6대(六大 : 地, 水, 火, 風, 空, 識) + (靑, 黃, 赤, 白)], 10부정관(十不淨觀), 10수념관(十隨念觀 : 佛, 法, 僧 / 戒, 捨, 天 / 死, 身, 入出息, 寂止), 4범주관(四梵住觀 : 慈, 悲, 喜, 捨), 4무색관(四無色觀 : 空無邊, 識無邊, 無所有, 非想非非想), 식염상관(食厭想觀), 계분별관(界分別觀) = 10 + 10 + 10 + 4 + 4 + 1 + 1 = 40
* 5정심관(五停心觀) : 부정관(不淨觀) : 탐심(貪心) 극복 수련, 자비관(慈悲觀) : 진심(瞋心) 극복 수련, 인연관(因緣觀)·계분별관(界分別觀) : 치심(癡心), 아상(我相) 극복 수련, 수식관(數息觀) : 산란심(散亂心) 극복 수련
* 위빠사나 4보호 수행 : 佛隨念, 慈觀, 不淨觀, 死念
* 7청정(七淸淨) : 계(戒) => 심(心) [* 40업처관(四十業處觀)] => 견(見) => 도의(度疑) => 도비도지견(道非道智見) => 행도지견(行道智見) => 지견(智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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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사무색정·멸진정]
초기 불교의 선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 등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 수행도(修行道)이다. 이들 선정설(禪定說)을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사선(四禪, Cattari jhanani)
사선(四禪)은 초선(初禪)·이선(二禪)·삼선(三禪)·사선(四禪)의 네 단계의 선정을 총칭하는 말로서, 선정의 단계 구분은 정신의 통일 상태가 점차 깊고 고요하게 되어 가는 정도에 따른 것이다. 사선(四禪)의 연원에 관해서는 당시 선정가들의 영향을 받아 불교가 채용한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붓다의 독창적 선관(禪觀)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사선(四禪)은 붓다 성도의 직접적인 계기로 묘사되기도 하고, 붓다가 반열반(般跡槃)에 들 때에도 사선에 의거했을 정도로 초기 불교에 있어서 선정수행의 중요한 하나의 방식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사선의 전형적인 서술 방식을 보여주는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사법(四法)이 있다. 이른바 사선(四禪)이다.
이에 비구는 욕악불선(欲惡不善)의 법(法)을 없애고,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으면서 떠남에서 생기는 희락(喜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간다.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각관(覺觀)이 멸하고, 내신(內信)의 일심(一心)으로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으면서 정(定)에서 생긴 희락(喜樂)이 있는 제이선(第二禪)에 들어간다.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기쁨을 떠나 평등을 닦아 생각이 나아가 스스로 몸의 즐거움을 알고 모든 성인이 구하는 바 억념사락(憶念捨樂)이라 부르는 제삼선(第三禪)에 들어간다.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고락(苦樂)의 행(行)을 떠나고 먼저 걱정과 기쁨을 멸해 기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 생각을 버려 청정하여 제사선(第四禪)에 들어간다.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
경문(經文)을 보면 초선(初禪)의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의 장애가 끊어지고 마음을 선정의 대상에 집중하여 마침내 감각적 욕망이 없어지고 불선법(不善法)을 떠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아직 대상에 대해 분별하고 사려하는 마음이 있어 고요히 가라앉지 못하는 단계다.
제이선(第二禪)에서는 각(覺)과 관(觀)이 없어져 분별적인 사유작용이 그치고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게 되어 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제삼선(第三禪)에서는 제이선(第二禪)에서 생긴 희락(喜樂)의 감정까지도 버리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로써 신체가 가볍고 편안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끝으로, 제사선의 단계에 와서는 신체의 편안함까지도 사라지고, 완전히 고락(苦樂)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이 더욱 순화(純化)되어 부동(不動)이 되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정형화된 서술방식과는 다른 사선(四禪)의 형태를 보여 주는 자료도 있는데 김준호는 <원시불교의 선정설 연구>27)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中阿含》 卷60, <五下分結經> (大正 1, p.779c)
初禪成就遊. 彼依此處觀覺興衰. 彼依此處觀覺興衰已. 住彼必得漏盡.
① 사선(四禪)은 무상(無常)하여 멸하는 법[有爲法])
② 사선(四禪)의 각 단계에서 일체법(一切法)을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 등으로 관찰할 것.
③ 사선에 의해 생기는 악(惡)에서 벗어난 희열(喜悅)에 집착하지 않을 것.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사선(四禪)의 구체적 내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사선(四禪) 각 단계의 희락(喜樂)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의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실상(實相)을 끊임없이 관찰하여 정각(正覺)을 성취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사무색정(四無色定, Catur aruppa samapati)
사무색정(四無色定)의 네 가지 선정(禪定)은,
① 공무변처(空無邊處, akasanancayatana)
the stage of infinity of space
② 식무변처(識無邊處, vinnanancayatana)
the stage of infinity of perception
③ 무소유처(無所有處, akincannayatana)
the stage of nothingness
④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nnanasannayatana)
the stage of neither ideation nor non-ideation
위와 같은 네 가지 처(處, Ayatana)에서 행해진다. 이것은 각각 '허공(虛空)과 같은 무한한 장소', '인식(認識)과 같은 무한한 장소', '존재(有)하는 바가 없는 장소', '의식(意識)도 무의식(無意識)도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사무색정의 내용을 경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는 일체(一切)의 색상(色想)을 넘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염(念)하지 않으며, 한량없는 공(空)인 이 무량(無量)한 공처(空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
비구는 일체의 무량한 공처를 넘어 한량이 없는 식(識)인 무량(無量)한 식처(識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넘어 무소유(無所有)인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
비구는 일체의 무소유처를 넘어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인 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 마음은 안에서 머무르는 것이오."
경문(經文)을 통해 볼 때,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란 일체의 물질관념을 타파하고, 단지 끝없는 공간만을 염(念)하여 마음을 집중시키는 상태이다.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이란 공처(空處)의 심경을 더욱 진전시켜 식이 무변하다는 사실을 염(念)하여 식(識) 중에 일어나는 차별상을 제거하는 수행이다.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서는 공간도 식도 초월하여 일체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상태에 도달한다.
마지막으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란 일체 공(空)이라고 하는 상(想)까지도 뛰어넘어 상(想)도 없고 무상(無想)도 없는 데까지 수련을 진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붓다에 의해 이미 비판되었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 불교의 선정법으로 채용되고 사선과 함께 대표적 선정 체계를 이루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것은 아마 당시에 행해지던 선정의 의미와는 다른 관점에서 붓다가 수행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사무색정(四無色定)은 원래 사선(四禪)과는 별개의 수행방식이었으나 후대에 선정법이 체계화되면서 점차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의 결합된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3) 멸진정(滅盡定)
멸진정(滅盡定, nirodha samapatti)은 상수멸정(想受滅定, sannavedayita)이라고도 하는데 이 선정의 단계에서는 수(受)와 상(想)의 작용이 멸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하게 되면 감각기관을 통한 느낌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즉 대립 분별적인 심작용인 상(想)과 고(苦)를 일으키는 원인인 수(受)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멸진정(滅盡定)은 수(受)와 상(想)이 완전히 멸한 경지로 죽은 사람의 상태와 비슷하나 이 정(定)에 들어간 사람은 오근(五根)이 그대로 갖추어져 있고, 온기(溫氣)가 사라지지 않으며, 생명(生命)이 붙어 있다는 점에서 사자(死者)와는 다르다고 한다. 또한 불교 외에서 최고의 경지라고 여겨지는 무상정(無想定)과는 달리 멸진정에서는 생각[想]과 알음[知]이 완전히 멸(滅)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장아함(長阿含)》 <십상경(十上經)>에는 구차제정 각지(各支)에서 멸하는 요소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선(初禪) : 소리가 멸함
이선(二禪) : 각(覺)과 관(觀)이 멸함
삼선(三禪) : 희(喜)가 멸함
사선(四禪) : 호흡(呼吸)이 멸함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 색상(色想)이 멸함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 공상(空想)이 멸함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 식상(識想)이 멸함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 무소유상(無所有想)이 멸함
멸진정(滅盡定) : 상(想)과 수(受)가 멸함
* 석존의 선정(禪定)
석존은 수행시대에 알라라 까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뿌타(Udaaka Ramaputta) 등으로부터 선정을 배웠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마침내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찾아 정각을 성취하였다.
두 선인의 정(定)과는 완전히 그 입장을 달리하였지만 불타가 깨달음을 얻은 것도 보리수나무 밑의 선정에 의한 것이다.
성도 이후에도 낮과 밤으로 깊은 선정에 들어 법을 설하고, 입멸에 이르러서도 구차제정(九次第定 : 四禪·四無色定·滅盡定)을 순(順)과 역(逆)으로 행하여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석존이 설한 수행덕목 가운데 선정을 떠난 것은 하나도 없다. 선정은 언제나 실천수행의 기체(基體)를 이루고 있었다.
석존이 중도(中道)의 내용으로서 보인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마지막의 정정(正定)은 일반적으로 사선(四禪)이라 말해지고 있다.
초선(初禪)은 모든 장애를 끊고, 몸을 단정히 하여 마음을 집중하여 곧 오개(五蓋)를 여의는 것이다.
제이선(第二禪)은 신(信)을 얻어 명정(明淨)하게 되어 내적으로 청정과 기쁨을 느끼며, 심신이 경쾌하고 편안하게 되는 심경으로 곧 각〔覺 : 추리작용에서 마음의 거친 작용, 신역에서는 심(尋)이라 함〕과 관〔觀 : 추리작용에서 마음의 미세한 작용, 신역에서는 사(伺)라 함〕이 모두 멸한다.
제삼선(第三禪)은 기쁜 감정도 버리고 마음이 평등해져 정념정지(正念正知)가 나타나며, 심신에 쾌락을 느끼는 것으로서 곧 희(喜)가 멸한다.
제사선(第四禪)은 불고불락(不苦不樂)에 머물고 내면이 순화되어 관찰지(觀察智)가 촉진되는 것으로 곧 쾌락이 멸한다.
이 사선의 기원은 불교 이외에 있지만 석존은 그 정신을 채용하여 불교적인 의미 내용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형(型)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형(型)이 되기 이전의 것, 또한 이와 같은 형(型)을 벗어난 것 속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석존 선정의 특질은 무엇인가.
불타의 선정은 이상으로서의 열반(전체와 개개가 일체된 인격 완성)을 체현(體現)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방법으로서 두 선인의 수정주의자처럼 그것을 결코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만약 선정을 무조건적으로 목적시 한다면 선정을 닦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어느 정도까지 고를 여읠 수가 있겠지만 선정을 잠시 멈추는 동시에 그 선정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단지 성도 이후에 그 입장을 두고 또한 불성의 본유(本有)를 설하는 선문에서는 좌선을 단순히 방법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의 법문으로 간주한다.
불타의 선정은 현세에 있어서 열반의 체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두 선인의 수정주의자와 같이 사후에 거기에 상응하는 천(天)에 태어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외부 학파의 제일원리(第一原理)로부터 일체가 전변유출(轉變流出)된다는 전변설(轉變說) 등의 독단적인 형이상학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행해진 것이다.
* 전변설(轉變說) : 인도철학에 있어서 우주론(宇宙論)의 하나. 우주의 모든 것은 일원(一元)의 실재가 스스로 전개 변화하여 생성(生成)된다는 설. 전변(轉變)은 변화의 뜻으로서, 특히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하여 자기 자신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일(一)에서 다(多)가 생긴다고 하는 주장으로서, 적취설(積聚說)과 대립된다. 이것은 전통바라문 사상, 즉 우파니샷드의 중심사상인데 사앙키아학파는 이것을 개혁하여 2원론(二元論)을 세우고, 근본물질(根本物質)에 이 전변설을 채용했다. 이 설은 반드시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에 서 있고 또한 요가학파도 이것을 채용하였다. 한편 수주파. 비슈누파도 사앙키아의 영향을 받았다. 베에단타학파에 있어서도 라이마뉴쟈는 전변설을 주장하지만, 사앙카라파는 특이한 화현설(化現說)을 채용하고 마야를 주장한다. 또한 대승불교의 유식파(唯識派)도 후기가 되면, 식(識) 전변(轉變)을 주장한다. 즉 체의 사물(事物) 현상은 아라야식이 전변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유식파는 초기에는 전변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현(似現) 등이라고 하여, 오히려 화현설(化現說)이었는데, 후에 인전변(因轉變), 과전변(果轉變)이라 하여 상세하게 논하게 되었다.
* 불타시대(佛陀時代)의 일반사상계(一般思想界)
― 전변설(轉變設) …범의 창조(梵의 創造)……수정주의(修定主義)…바라문교 등(波羅門敎 等)
― 적취설(積聚說) …요소의 결합(要素의 結合)…고행주의(苦行主義)…자이나교 등(자이나敎 等)
― 연기설(緣起說) …인연취산(因緣聚散)…… 중도주의(中道主義)…불교(佛敎)
생각컨대 불타의 관심은 항상 현실의 반성에 있으며 단순한 우주론과 세계관을 필요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물며 생천(生天)과 같은 것은 결코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심일원론(物心一元論)에 기초하여 두 선인의 수정주의자처럼 물심에 대하여 각각 실체를 인정하는 일은 없었으며, 또한 그러한 이원론적 대립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외부의 수정주의자는 육체를 고의 근거로 삼아 그 자극을 느끼지 않게 되어 마음의 산란을 멈추는 선정을 닦았다. 그리고 마음에는 실체로서의 아(我 atman)의 존재를 긍정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법인(法印)으로 그러한 사상을 배척하고 무아설(無我說)에 기초한 선정(禪定)을 역설하였다.
석존이 행한 선정의 목적은 현세에 누진(漏盡 : 번뇌를 멸하는 것)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외부 학파와 같이 신통을 얻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불타는 누진통(漏盡通)과 신변(神變)을 제외한 다른 초자연적인 힘을 극력 배척하였다. 한편 석존은 무아에 철저하여 대비(大悲)를 기반으로 삼고 있어서 외부 학파와 같은 착미(著味)·사견(邪見)·아만(我慢) 등 삼과환(三過患)을 떠난 근원적인 실천이다.
* 무기[無記, avyākrta] : 석가가 다른 종교가들[六師外道]로부터의 형이상학적 10가지 질문에 대하여 침묵하고 기답(記答)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함경(阿含經)』에 의하면, 그 질문의 내용은
1) 자아 및 세계는 시간적으로 유한(有限)한가,
2) 무한한가,
3) 유한하기도 하며 무한하기도 한가,
4) 유한도 무한도 아닌가,
5)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6) 무한한가,
7)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8) 다른가,
9) 여래(如來)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10) 존재하지 않는가 등이다.
이를 가리켜 '십무기(十無記)' 라고도 한다.
그 무기의 이유는 형이상학적 문제가 인간의 인식, 경험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며, 또 비록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불안과 고뇌의 해탈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질문들을 비유한 것으로써 '독화살[毒箭]의 비유' 가 또한 유명하다.
즉, 이러한 형이상학적 관심은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고, 그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이며, 그 독이 어떤 종류의 독인가, 등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기는 불교의 중도적(中道的), 실천적 측면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후에 무기는 경험계의 상대성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으로도 해석되어 무(無), 공(空), 또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적 침묵'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이해되기도 하였다.
[자료 정리: 박남철 / 자료출처: naver.com / 백과사전]
* 육사외도[六師外道, Sad-darśama] : 기원전 5 ~ 3 세기경에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사상 중, 세력이 컸던 푸라나 카사파, 마칼리 고살라, 산자야 벨라지푸타, 아지타 케사캄발라, 파구타 카자야나, 니간타 나타푸타 등의 여섯 유파를 이르는 말이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생겨난 사상과 학설에는 62견(見), 또는 360여 종의 이설이 있었다고들 하는데, 그 중 세력이 컸던 여섯 유파들을 말한다.
베다 문명에 기인(起因)하는 인도 사상계는 우파니샤드 철학을 탄생시켜 인도 종교의 기조를 형성하였다.
거기에서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 등 여러 사상, 학설 들이 태동하여 이른바 6대 철학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학설들은 브라만의 근본 경전인 『베다』와 『우파니샤드』 등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점이 많았으므로, '외도(外道)'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더군다나 이 '외도'란 호칭도 이들을 수용해준 불교측에서 붙여준 호칭이었다.
1) 푸라나 카사파[Purana Kassapa, 富蘭那迦葉]: 인과응보를 부정하고 윤리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여 도덕이 필요없다고 주장[도덕부정론]했으나, 이는 선악의 관념이 사회적 관습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2) 마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 末伽梨拘賖梨子]: 숙명론을 내세웠다. 흔히 '사명외도(邪命外道)' 라 불리는 이 파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삶에는 인연이 작용하지 않고 모든 자연 현상에는 고유의 생명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3) 산자야 벨라지푸타[Sanjaya Belattiputta, 刪闍耶毘羅胝子]: 회의론을 주장하여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 하여, '기분파 또는 개현파' 또는 '痍年制派' 라고도 불렸다.
부처의 십대 제자 중 목건련과 사리불이 속했던 파인데, 윤리적 또는 실천적 태도를 표명하지 않아 '외도'로 일컬어졌다.
4) 아지타 케사캄발라[Ajita Kesakambalin, 阿耆多翅舍欽婆羅]: 유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도덕을 부정하고 현실의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여, '순세파(順世派)' 또는 '사탕발림파' 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파에서 내세우는 우주의 구성 원소, 즉 흙, 물, 불, 바람의 사대(四大)는 인도의 모든 사상 체계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5) 파구타 카자야나[Pakudha Kaccayana, 迦羅鳩馱迦卯延]: 불멸론을 폈다.
인간의 생명이나 특질은 영원하다는 점에서 유물론과 반대이나 선악의 인과를 부정하는 면에서 도덕 부정론에 가깝다.
생명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불생 불멸을 주장하여 죽이는 자도 없고, 죽는 자도 없으며, 가르치는 자도 없고, 가르침을 받는 자도 없다고 하였다.
6) 니간타 나타푸타[Nigantha Nataputta, 尼룐咤若提子]: 마하비라Mahāvīra. 출가 이전의 이름은 바르다마나. 한자명은 대웅(大雄) 또는 대용(大勇).
'자이나 교' 를 창시하였다.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고, 인내를 강조하는 극단적인 고행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강조하였다.
특히 불살생(不殺生)을 강조하여 생명을 해칠 수밖에 없는 농업보다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이들 '육사(六師)'들은 한결같이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브라만 교'에 저항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신흥 도시의 왕후, 귀족, 부호들의 정치적, 경제적 원조 밑에서 활약하였다. 이들 각 유파들의 형성은 그 기원 및 성립 연대들이 또한 각각 다르다.
[자료 출처: naver.com / 백과사전]
* 7청정과 단계적 지혜의 순서
(1) 지계의 청정(Sīla Visuddhi) 계청정(戒淸淨)
(2) 마음의 청정(Citta Visuddhi) 심청정(心淸淨)
(3) 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 견청정(見淸淨)
① 정신(마음)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 Rūpa Pariccheda Ñāṇa) [名色區別智]
(4)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Kankhā-vitaraṇa Visuddhi) 도의청정(度疑淸淨)
②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 Pariggaha Ñāṇa) [緣把握智]
(5) 바른 길을 아는 청정(Maggā-maggañāṇa-dassaṇa Visuddhi)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
③ 현상들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사유에 의한 지혜(Sammasana Ñāṇa) [思惟智]
(6)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Paṭipadā ñāṇadassaṇa Visuddhi)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④ 생멸(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Udayabbaya Ñāṇa) [生滅 隨觀智]
⑤ 소멸의 지혜(Bhanga Ñāṇa, Bhaṇga Ñāṇa) [壞隨觀智]
⑥ 두려움에 대한 지혜(Bhaya Ñāṇa) [怖畏隨觀智]
⑦ 고난의 지혜(Ādīnava Kāṇa) [過患隨觀智]
⑧ 혐오감에 대한 지혜(Nibbidā Ñāṇa) [厭離隨觀智]
⑨ 해탈을 원하는 지혜(Muñcitukamayatā Ñāṇa) [脫欲智]
⑩ 다시 살펴보는 지혜(Paṭisankha Ñāṇa, Paṭisaṅkha Ñāṇa) [省察隨觀智]
⑪ 현상에 대한 평등, 초연의 지혜(Sankhārupekkhā Ñāṇa) [行捨智]
⑫ 벗어남에 이르는 관찰의 지혜 [出起觀智]
⑬ 진리에 따르는 지혜(Anuloma Ñāṇa) [隨順智]
⑭ 성숙(種姓 : 범부에서 성인으로의 변환)의 지혜(Gotrabhū Ñāṇa)
* 종성(種姓 gotrabhū)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순간의 마음 또는 열반으로 전향하는 첫 번째 마음이다. 즉 첫 번째 성자의 경지인 수다원도를 얻기 바로 전 찰나에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찰나를 종성(種姓 gotrabhū)이라고 부른다. 선(禪)의 증득의 경우, 이것은 욕계의 '범부 혈통'에 속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드디어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종성이라는 이름을 얻고, 첫 번째 도인 수다원의 도의 경우, 이 순간에 범부의 혈통에서 성자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고뜨라부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리고 이 순간의 마음을 종성의 지혜(gotrabhū-ñāṇa)라 한다. 또 이 종성의 지혜는 수행자의 지혜가 도(magga)를 얻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뜻에서 성숙의 지혜라고도 한다.
(7) 지혜통찰의 청정(Ñāṇadassana Visuddhi) 지견청정(智見淸淨)
⑮ 도(道)의 지혜(Magga Ñāṇa)
⑯ 과(果)의 지혜(Phala Ñāṇa)
⑰ 되돌아보는 지혜(Paccavekkhana Ñāṇa) [廻光返照]
⑱ 깨달음에의 몰입 [果定]
⑲ 더 높은 단계의 도와 과로 깨달음의 단계로 전개되어 마지막 아라한의 깨달음의 결실이라는 최상의 목적에 이르게 된다.
* 31가지 마음의 경계
3계(三界) |
영역 |
수명 | ||
무색계 (無色界) |
|
㉛ 비상비비상처천 (非想非非想處天) ㉚ 무소유처천 (無所有處天) ㉙ 식무변처천 (識無邊處天) ㉘ 공무변처천 (空無邊處天) |
84,000 대겁 60,000 ” 40,000 ” 20,000 ”
| |
색계 (色界) |
사선 (四禪)
|
淨居天 |
㉗ 색구경천 (色究境天) ㉖ 선견천 (善見天) ㉕ 선현천 (善現天) ㉔ 무열천 (無熱天) ㉓ 무번천 (無煩天) ㉒ 무상유정천 (無上有頂天) ㉑ 광과천 (廣果天) |
16,000 대겁 8,000 ” 4,000 ” 2,000 ” 1,000 ” 500 ” 500 ”
|
| ||||
삼선(三禪) |
⑳ 변정천(변정천) ⑲ 무량천(無量천) ⑱ 소정천(小淨天) |
64 대겁 32 ” 16 ” | ||
이선(二禪) |
⑰ 광음천(光音天) ⑯ 무량광천 (無量光天) ⑮ 소광천(少光天) |
8 대겁 4 ” 2 ” | ||
초선(初禪) |
⑭ 대범천(大梵天) ⑬ 범보천(梵보천) ⑫ 범중천(梵衆天) |
1 무량겁 1/2 ” 1/3 ” | ||
욕계 (欲界) |
육욕천 (六欲天) |
⑪ 타화자재천 (他化自在天) ➉ 화락천(化樂天) ➈ 도솔천(兜率天) ➇ 야마천(夜摩天) ➆ 삼십삼천 (三十三天) ➅ 사대왕천 (四大王天) |
16,000 천상년 8,000 4,000 2,000 1,000 500 | |
|
➄ 인간(人間) |
정해지지 않음 | ||
악처(惡處) |
➃ 아수라(阿修羅) ➂ 아귀(餓鬼) ➁ 축생(畜生) ➀ 지옥(地獄) |
정해지지 않음 |
* 정거천(淨居天) : 색계(色界) 제사선(第四禪)에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성자가 태어나는 무번천(無煩天), 무열천(無熱天), 선현천(善現天), 선견천(善見天),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오직 청정한 성인만의 세계이므로 오정거천(五淨居天)이라 하고, 그곳에 사는 천신(天神. 곧 성자)을 정거천이라 한다.
* 성문사과(聲聞四果)
*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오위백법(五位百法)의 체계
1. 有爲法 ------ 94 |
1. 심법(心法) : 8가지 인식의 주체(心王)
(1) 육식(六識) : 식(識)
2) 이식(耳識) ; 각종 소리의 인식
3) 비식(鼻識) ; 각종 냄새의 인식
4) 설식(舌識) ; 각종 맛의 인식
5) 신식(身識) ; 각종 감촉의 인식
6) 의식(意識) ; 전5식의 대상 이외에 인식 대상인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이 있다. 그리고 의식의 작용에 자성분별(自性分別)· 수념분별(隨念分別)·계탁분별(計度分別) 등이 있고, 의식의 종류에 독산의식(獨散意識)·몽중의식(夢中意識)·정중의식(定中意識)·광연의식(廣緣意識) 등이 있다.
7) 말라식(末那識) ; 제7식은 전도식(顚倒識)으로 사량(思量)·분별(分別)·망상(妄想)하는 인식, 염오식(染汚識), 자아의식인 아치(我癡, 참나를 망각)·아애(我愛,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 배타적인 차별심)·아만(我慢, 자타가 평등함을 망각하여 자기만이 제일이라는 생각)·아견(我見, 자기 편견에 집착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말한다.
8) 아뢰야식(阿賴耶識) ; ㄱ) 장식(藏識, 모든 것을 함장)의 의미가 있는데, 장(藏)의 의미로 능장(能藏, 모든 업력을 저장시킴), 소장(所藏, 모든 업력을 받아들여 보존함), 집장(執藏, 모든 선악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기능을 보유함) 등의 의미가 있다.
* 삼식(三識) : 식(識), 의(意), 심(心)
* 유식의 목적인 전식득지(轉識得智)
이상과 같은 심식들의 중요한 기능은 일시적인 기능으로 궁극적으로 망식(妄識)으로 뒤얽힌 번뇌를 전환시켜 때묻지 않는 청정한 진여성(眞如性)을 개발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따라서 유식학의 의의는 각각의 식 작용을 전환하여 지혜를 개발하여 열반성과 불성에 귀환하는 것이다.
1) 전오 식(前五識) → 성소작지(成所作智)
2) 제육 의식(第六意識) → 묘관찰지(妙觀察智)
3) 제칠 말나식(第七末那識) → 평등성지(平等性智)
4) 제팔 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 대원경지(大圓鏡智)
2. 심소법(心所法) : 인식의 주체와 작용하는 심소(心所)(51)
1) 모든 마음에 널리 미치는 심소[변행(遍行)심소 5가지]
a. 5가지 모든 마음에 두루 미치는 마음 작용[변행(遍行)심소]
1) 촉(觸) ; 감촉
2) 작의(作意) ; 意義 활동
3) 수(受) ; 감수능력
4) 상(想) ; 구상, 표상작용
5) 사(思) ; 의지
b. 5가지 특별한 대상과 사물에 작용하는 마음[별경(別境)심소]
1) 욕(欲) ; 욕망
2) 승해(勝解) ; 수승한 이해, 수승한 지혜
3) 염(念) ; 기억력
4) 정(定) ; 삼매력, 선정력
5) 혜(慧) ; 지혜력
c. 11가지 착한 대상과 작용하는 마음[선(善)심소]
1) 신(信) ; 믿는 마음
2) 참(慙) ; 참회하는 마음
3) 괴(愧) ;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마음
4) 무탐(無貪) ; 탐내지 않는 마음
5) 무진(無瞋) ; 화내지 않는 마음
6) 무치(無癡) ; 어리석지 않는 마음
7) 근(勤) ; 정진
8) 경안(輕安) ; 신체나 마음이 경쾌함
9) 불방일(不放逸) ; 악을 끊고 선을 닦는 마음
10) 행사(行捨) ; 평화로운 마음
11) 불해(不害) ; 해치려는 마음이 없는 마음
d. 6가지 근본적인 더러움에 물든 마음[(근본)번뇌(煩惱)심소]
1) 탐(貪) ; 탐욕과 갈애
2) 진(瞋) ; 성내는 마음
3) 치(癡) ; 진실,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 즉 무명
4) 만(慢) ; 자기는 타인보다 뛰어나다는 오만불손한 마음, 만(慢), 과만(過慢), 만과만(慢過慢), 아만(我慢), 증상만(增上慢), 비하만(卑下慢), 사만(邪慢) 등
5) 의(疑) ;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사제법(四諦法)의 도리, 삼보(三寶)를 의심하는 것
6) 악견(惡見) ; 그릇된 견해, 즉 유신견(有身見), 변집견(邊執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e. 20가지 부수적인 번뇌[수번뇌(隨煩惱)심소]
1) 분(忿) ; 분노의 마음으로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해를 당했을 때 일어나는 마음작용이다.
2) 한(恨) ; 원한의 마음으로 상대에게 당한 해를 복수하려고 품고 있는 마음
3) 복(覆) ; 자기의 잘못을 숨기려는 마음, 어리석음의 일부이며 악작의 선행이 되는 마음작용이다.
4) 뇌(惱) ; 매도하려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놀라게 하며 어지럽게 하는 마음
5) 질(嫉) ; 질투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이 명성과 재산을 가진 것에 시기함
6) 간(慳) ; 인색한 마음으로 재시(財施)를 꺼리는 마음
7) 광(誆) ; 속이려는 마음으로 이익이나 명성을 얻으려고 남을 속이는 마음
8) 첨(諂) ; 현혹시키려는 마음으로 자기의 잘못을 감추고 상대를 현혹시킴
9) 해(害) ; 살심으로 상대를 때리거나 결박, 협박하려는 마음작용이다.
10) 교(驕) ; 교만한 마음으로 재산·명예·학문·건강·권력들에 의존하여 우쭐하는 마음작용이다.
11) 무참(無慙) ; 죄를 짓고도 참회하려는 생각이 없는 마음
12) 무괴(無愧) ; 죄를 범하고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함
13) 혼침(昏沈) ; 몽롱한 마음의 상태로 대상을 명확하게 지각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14) 도거(掉擧) ; 마음이 들뜬 상태로 삼매에 들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
15) 불신(不信) ; 연기, 사제, 법인 등의 올바른 진리와 삼보를 믿지 않는 마음
16) 해태(懈怠) ; 게으른 마음으로 선행에 게으르고 모든 일을 꺼리는 마음
17) 방일(放逸) ; 방종하여 세밀성과 정밀성이 결여되어 아무렇게나 하려는 마음작용이다.
18) 실념(失念) ; 어지러운 마음으로 산란함의 원인
19) 산란(散亂) ; 탐, 진, 치의 어지러운 마음으로 삼매를 방해하는 것
20) 부정지(不正知) ; 사물의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여 올바른 행위를 방해하는 마음작용이다.
f. 네 가지 결정되지 않는 마음 작용[부정(不定)심소]
1) 회(悔) ; 후회하는 마음으로 그릇된 일을 한 것을 후회하는 마음
2) 면(眠) ; 수면, 억압된 마음으로 가위눌린 마음
3) 심(尋) ; 거친 추리 작용으로 행(行)의 일부이며, 사(思)와 함께 작용하며 각(覺)이라고도 한다.
4) 사(伺) ; 미세한 추리 작용으로 심(尋)과 유사하나 더욱 미세한 마음의 작용으로 관(觀)이라고도 한다.
3. 색법(色法) : 물질(repa) - 육대(六大)[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11)
(인식의 주체로서 물질) (인식의 객체로서 물질)
1) 안근(眼根)............................................6) 색경(色境)
2) 이근(耳根)............................................7) 성경(聲境)
3) 비근(鼻根)............................................8) 향경(香境)
4) 설근(舌根)............................................9) 미경(味境)
5) 신근(身根)..........................................10) 촉경(觸境)
11)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 극략색(極略色), 극형색(極逈色), 수소인색(受所引色), 정중소인색(定中所引色),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
4.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 물질적, 정신적 요소에 포함될 수 없는 힘인 불상응(不相應)(24)
1) 득(得) ; 한 개인의 생의 흐름을 지속하게 하는 상속력(相續力)
2) 명근(命根) ; 종자식 즉 아뢰야식에 의해서 일생을 유지시키는 생명력
3) 중동분(衆同分) ; 동류를 유지시키는 힘
4) 이생성(異生性) ; 이생류를 유지시키는 힘
5) 무상정(無想定) ; 6식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4대를 조화시켜 무상천의 과보를 받게 하는 선정의 힘
6) 멸진정(滅盡定) ; 6식과 7식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무루(無漏)의 선정을 닦게 하는 성자의 선정력
7) 무상사(無想事) ; 무상천(無想天)의 과보에 머무르려는 힘
8) 명신(名身) ; 주어의 모임
9) 구신(句身) ; 주어와 술어의 모임
10) 문신(文身) ; 음소의 모임
11) 생(生) ;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는 듯 한 것(생성)
12) 노(老) ; 계속되면서 변하여 달라지는 것(쇠퇴)
13) 주(住) ; 잠시 동안은 변하지 않으면서 머물러 있는 것(지속)
14) 무상(無常) ; 잠시 동안은 있지만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것(변화, 소멸)
15) 유전(流轉) ; 온갖 존재가 인과(因果)로 상속하여 끊임이 없는 것
16) 정이(定異) ; 인과(因果)의 선악(善惡)이 결정되어 구별이 분명한 것
17) 상응(相應) ;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가 상응하는 것
18) 세속(勢速) ; 인과(因果)의 상속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
19) 차제(次第) ; 유위(有爲)의 온갖 법에 순서가 있는 것
20) 방(方) ; 존재의 방위가 존재하는 것
21) 시(時) ; 공간과 상응하여 상속(相續)하는 기본 성질
22) 수(數) ; 존재의 구별과 차별을 가능케 하는 성질
23) 화합(和合) ; 하나의 결과에는 많은 원인과 반연이 모이는 성질
24) 불화합(不和合) ; 화합의 반대로 온갖 존재는 각각의 독자성이 있는 성질
5. 무위법(無爲法) : 6가지 불변적인 요소인 무위법(無爲法)
1) 허공무위(虛空無爲) ; 모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여읜 적정처(寂定處)
2) 택멸무위(擇滅無爲) ; 무루지(無漏智)에 의해서 얻어진 적정처(寂定處)
3)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 ;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에 의해서 얻어진 적정처(寂定處)
4) 부동무위(不動無爲) ; 감수작용이 완전히 멸한 색계 제4선정 적정처(寂定處)
5) 상수멸무위(想受滅無爲) ; 상(想)과 수(受)가 멸한 무색계의 적정처(寂定處)
6) 진여무위(眞如無爲) ;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 그대로의 적정처(寂定處)
* 마음 89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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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운마음 12 |
유익한마음 21 |
무기마음 56 | |||||
과보로나타난마음 36 |
작용만하는마음 20 | |||||||
세 간 의
마 음 |
욕 계
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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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재생 연결 (19) |
등록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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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뿌리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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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운과보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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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쁜,사견○,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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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평온, 안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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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쁜,사견○,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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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평온, 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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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쁜,사견×,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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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평온, 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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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쁜,사견×,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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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평온, 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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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평온,사견○,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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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괴로운, 신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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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평온,사견○,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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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평온, 받아들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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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평온,사견×,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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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평온, 조사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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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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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평온,사견×,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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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과보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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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평온, 안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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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없는마음 (3) | ||
성냄뿌리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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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평온, 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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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평온, 오문전향 | ||
(9)싫은,성냄,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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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평온, 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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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평온, 의문전향 | ||
(10)싫은,성냄,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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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평온, 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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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기쁜, 미소짓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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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즐거운, 신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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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뿌리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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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평온, 받아들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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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온, 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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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기쁜, 조사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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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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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평온, 들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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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평온, 조사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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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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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큰유익한마음 (8) |
욕계큰(유익한)과보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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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큰작용만하는 (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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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기쁜,지혜○,자극× |
(39)기쁜,지혜○,자극× |
3 |
○ |
○ |
(47)기쁜,지혜○,자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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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기쁜,지혜○,자극○ |
(40)기쁜,지혜○,자극○ |
3 |
○ |
○ |
(48)기쁜,지혜○,자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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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기쁜,지혜×,자극× |
(41)기쁜,지혜×,자극× |
2 |
○ |
○ |
(49)기쁜,지혜×,자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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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기쁜,지혜×,자극○ |
(42)기쁜,지혜×,자극○ |
2 |
○ |
○ |
(50)기쁜,지혜×,자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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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평온,지혜○,자극× |
(43)평온,지혜○,자극× |
3 |
○ |
○ |
(51)평온,지혜○,자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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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평온,지혜○,자극○ |
(44)평온,지혜○,자극○ |
3 |
○ |
○ |
(52)평온,지혜○,자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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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평온,지혜×,자극× |
(45)평온,지혜×,자극× |
2 |
○ |
○ |
(53)평온,지혜×,자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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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평온,지혜×,자극○ |
(46)평온,지혜×,자극○ |
2 |
○ |
○ |
(54)평온,지혜×,자극○ | ||
색 계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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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초선정 |
(60) 초선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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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초선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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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제2선정 |
(61) 제2선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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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제2선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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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제3선정 |
(62) 제3선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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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제3선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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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제4선정 |
(63) 제4선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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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제4선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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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제5선정 |
(64) 제5선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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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제5선정 | ||
무색계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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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공무변처정 |
(74) 공무변처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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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공무변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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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식무변처정 |
(75) 식무변처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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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식무변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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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무소유처정 |
(76) 무소유처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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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무소유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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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비상비비상처정 |
(77) 비상비비상처정 |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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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비상비비상처정 | ||
출세간 마음 |
출세간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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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수다원도 |
(86) 수다원과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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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사다함도 |
(87) 사다함과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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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아나함도 |
(88) 아나함과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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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아라한도 |
(89) 아라한과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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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가지 마음의 작용(dvipaññāsa cetasikā)
A. 다른 것과 같아지는 마음의 작용
1)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것 7가지
(1) 감각접촉(觸 phassa)
(2) 느낌(受 vedanaa)
(3) 인식(想 saññā)
(4) 의도(思 cetanā)
(5) 집중(心一境 ekaggatā)
(6)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
(7) 주의 기울임 함(作意 manasikāra)
2) 때때로 있는 것 6가지
(8) 일으킨 생각(尋 vitakka)
(9)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
(10) 결심(信解 adhimokkha)
(11) 정진(精進 viriya)
(12) 희열(喜悅 pīti)
(13) 열의(欲 chanda)
B. 착하지 않은 마음의 작용 14가지(akusala-cetasika)
1) 착하지 않은 것의 공통되는 것 4가지
(14) 어리석음(痴 moha)
(15) 양심 없음(無慙 ahirika)
(16) 수치심 없음(無愧 anottappa)
(17) 들뜸(掉擧 uddhacca)
2) 때때로 있는 것 10가지
* 탐욕에 관한 것 3가지
(18) 탐욕(貪 lobha)
(19) 사견(邪見 diṭṭhi)
(20) 자만(慢 māna)
* 성냄에 관한 것 4가지
(21) 성냄(嗔 dosa)
(22) 질투(嫉 issā)
(23) 인색(吝 macchariya)
(24) 후회(惡作 kukucca)
* 게으름에 관한 것 3가지
(25) 해태(懈怠 thīna)
(26) 혼침(昏沈 middha)
(27) 의심(疑 vicikacchā)
C. 께끗한 마음의 작용 25가지(sobhana-cetasika)
1) 깨끗한 것에 공통되는 것 19가지
(28) 믿음(信 saddhā)
(29) 알아차림(念 sati)
(30) 양심(懺 hiri)
(31) 수치심(愧 ottappa)
(32) 탐욕 없음(不貪 alobha)
(33) 성냄 없음(不嗔 adosa)
(34) 중립(tatramajjhattatā)
(35) 몸의 경안(輕安 kāyapassaddhi)
(36) 마음의 경안(cittapassaddhi)
(37) 몸의 가벼움(kāyalahutā)
(38) 마음의 가벼움(cittalahutā)
(39) 몸의 부드러움(kāyamudutā)
(40) 마음의 부드러움(cittamudutā)
(41) 몸의 적합함(適業性 kāyakammaññatā)
(42) 마음의 적합함(cittakammaññatā)
(43) 몸의 능숙함(練達性 kāyapāguññatā)
(44) 마음의 능숙함(cittapāguññatā)
(45) 몸의 올곧음(正直性 kāyaujukatā)
(46) 마음의 올곧음(cittaujukatā)
2) 절제(위라띠, virati) 3가지
(47) 바른 말(正語 samā-vācā)
(48) 바른 행위(正業 samā-kammanta)
(49) 바른 생계(正命 samā-ājīva)
3) 무량(無量 appamaññā) 2가지
(50) 연민(悲 karuṇā)
(51) 같이 기뻐함(喜 muditā)
4) 어리석음 없음(不痴 amoha) 1가지
(52) 통찰지의 기능(慧根 paññindriya)
*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다른 점
1.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 ― 화두와 법
2. ‘오직 직관’과 ‘분석을 통한 직관’
3. 정해진 대상(화두)과 변하는 대상(법)
4. 교학 무시와 중시
5. 인가 중시와 무시
* 유식학에 있어서 수행(修行)의 계위(階位)[오위(五位]
- 차 례 -
1. 자량위(資糧位)의 수행
2. 가행위(加行位)의 수행
3. 통달위(通達位)의 수행
4. 수습위(修習位)의 수행
5. 구경위(究竟位)의 수행
유식의 법상(法相)은 마음의 현상과 물질의 현상을 말한다. 그러한 현상에는 반드시 진여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을 마음의 실성(實性)이라고 이름한다. 위에서 마음이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眞如性)에 대한 설명을 삼무성(三無性)의 설명으로 대신하였다. 이러한 삼무성의 진리를 완전히 깨닫기 위하여는 보살의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의 목적은 팔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망식을 정화하여 지혜를 얻는데 목적을 두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 수행의 절차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 등 오위(五位)로 나누어 설명하게 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량위(資糧位)의 수행
자량위는 수행의 자질을 향상하는 수행위를 말하며, 이 수행위는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는 진리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보살들의 수행을 뜻한다. 자량위의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하면서 마음을 닦는 것이며, 수행의 절차에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등 삼십위(三十位)의 단계가 있다. 이들 삼십위를 모두 합쳐서 자량위라고 하며, 자량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를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이 되는 번뇌는 정화되지 않으므로 매우 초보적인 수행위에 속한다.
그리하여 자량위에서는 미세하고 깊이 집착하는 마음은 정화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번뇌의 뿌리인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번뇌형상이 남아있게 된다. 능취와 소취가 남아있다는 것은 망심과 분별심의 번뇌망상을 야기하고 있음을 뜻한다.
* 오십이위(五十二位)
대승(大乘)의 보살(菩薩)이 최초에 보리심을 일으키고부터 수행(修行)을 쌓아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의 오십이종류(五十二種類)의 계위(階位)를 말한다.
보살영락본업경권상(菩薩瓔珞本業經卷上)에 설(說)해지는 별교(別敎)와 원교(圓敎)의 보살(菩薩)의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의 오십위(五十位)와 등각(等覺)・묘각(妙覺)의 이위(二位)를 말한다.
보살(菩薩)의 계위(階位)에 관해서는 사십위(四十位), 사십일위(四十一位), 오십일위(五十一位) 등 갖가지 설이 있으나, 법화현의권사하(法華玄義卷四下)에는 명의(名義)가 갖추어 졌다고 하는 이유로서, 오십이위설(五十二位說)을 쓰고있다.
별교(別敎)에서는 초지(初地) 이상을 성(聖), 십회향(十廻向) 이하를 범(凡)이라 하며, 특히 범(凡) 가운데 십신(十信)을 외범(外凡)이라 부르고 기타의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을 내범(內凡) 또는 삼현(三賢)이라고도 한다.
천태(天台)는 이 별교(別敎)의 오십이위(五十二位)를 빌어서 원교(圓敎)의 보살(菩薩)의 위(位)를 밝히되 십주(十住) 이상을 성위(聖位)로 하고, 십신(十信)을 내범(內凡), 십신(十信) 전에 법화경분별공덕품제십칠(法華經分別功德品第十七)에 의해서 오품제자(五品弟子)의 위(位)를 두고, 이 위를 외범이라고 했다.
日蓮大聖人의 불법(佛法)에서는 오품제자위(五品弟子位)『관행즉(觀行卽)』보다 더욱 하위(下位)인 명자즉(名字卽)에서 오십이위(五十二位)의 단계(段階)를 거치지 않고 즉신성불(卽身成佛)한다고 설(說)한다.
1) 십신(十信)
별교(別敎)의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의 위(位).
보살영락본업경권상(菩薩瓔珞本業經卷上)에 설(說)해지는 오십이위(五十二位) 가운데 제일위(第一位)부터 제십위(第十位)까지의 계위(階位)를 말한다.
십심(十心)・십신심(十信心)이라고도 한다.
1. 신심(信心) :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는 위(位).
2. 염심(念心) : 염지(念持)하여 잊는 일이 없는 위(位).
3. 정진심(精進心) : 한결같이 선업(善業)을 닦는 위(位).
4. 정심(定心) : 마음을 한곳에 정하고 수행(修行)하는 위(位).
5. 혜심(慧心) : 제법(諸法)이 일체공(一切空)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위(位).
6. 계심(戒心) : 보살(菩薩)의 청정한 계율(戒律)을 수지(受持)하고 실수를 범하지 않는 위(位).
7. 회향심(回向心) : 몸에 닦은 선근(善根)을 보리(菩提)・깨달음에 회향(回向)하는 위(位).
8. 호법심(護法心) : 번뇌(煩惱)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방호(防護)하고 불법(佛法)을 보지(保持)하는 위(位).
9. 사심(捨心) : 공리(空理)에 주(住)하여 집착(執着)이 없는 위(位).
10. 원심(願心) : 여러가지의 청정한 원(願)을 수행(修行)하는 위(位).
2) 십주(十住)
별교(別敎)에서 설하는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의 위(位).
마음을 진실한 공리(空理)에 안주하는 것으로 주(住)라고 한다.
보살영락본업경권상(菩薩瓔珞本業經卷上)에 설(說)해지는 오십이위(五十二位) 가운데 제십일위(第十一位)에서 제이십위(第二十位)까지를 말한다.
1. 발심주(發心住) : 십신(十信)을 성취하여 널리 지혜를 구하는 위(位).
2. 치지심주(治地心住) : 항상 공관(空觀)을 수행하여 마음을 청정이 하는 위(位).
3. 수행심주(修行心住) : 제선법(諸善法)・만행(萬行)을 수행하는 위(位).
4. 생귀심주(生貴心住) : 제법(諸法)은 인연(因緣)의 화합에 의해서 존재(存在)하고 있으므로, 제법(諸法)의 상주불멸(常住不滅)한 체(體)는 없다고 하는 법리(法理)를 깊이 이해하고, 본성(本性)이 청정한 위(位).
5. 구족방편심주(具足方便心住) : 무량(無量)의 선근(善根)을 수행(修行)하여 공관(空觀)을 돕는 방편(方便)으로 하는 위(位).
6. 정심주(正心住) : 공관(空觀)의 지혜(智慧)를 성취하는 위(位).
7. 불퇴심주(不退心住) : 구극(究極)의 극리(極理)를 나타내어 물러서지 않는 위(位).
8. 동진심주(童眞心住) : 사견(邪見)을 일으키지 않고 보리심을 파괴하지 않는 위(位).
9. 법왕자심주(法王子心住) : 부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미래(未來)에 부처의 위(位)를 받는 위(位).
10. 관정심주(灌頂心住) : 공(空)・무상(無相)을 관해서 무생지(無生智)를 얻는 위.
3) 십행(十行)
십종(十種)의 행을 말함.
별교(別敎)의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의 위(位).
오십이위(五十二位) 가운데 제이십일위(第二十一位)에서 삼십위(三十位)까지를 말함.
십행심(十行心)이라고도 한다.
십신(十信)・십주(十住)에서 자리를 만족한 뒤, 화타(化他)를 행하는 위(位).
화엄경(華嚴經)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 환희행(歡喜行) : 일체제법(一切諸法)의 공리(空理)를 깨닫고, 일체소유(一切所有)의 것을 중생(衆生)에게 베풀어 환희(歡喜)케 한다.
2. 요익행(饒益行) : 항상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교화(敎化)하고 이익(利益)케 한다.
3. 무진한행(無瞋恨行) : 인욕(忍辱)을 닦아서 노(怒)함을 떠나, 사람에게 거역하지 않는다.
4. 무진행(無盡行) : 온갖 고뇌(苦惱)를 받을지라도 정진(精進)하여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한다. 무굴요행(無屈橈行)이라고도 한다.
5. 이치란행(離痴亂行) : 정념(正念)을 성취하여 마음에 산란이 없다. 무치란행(無痴亂行)이라고도 한다.
6. 선현행(善現行) : 항상 불국(佛國)의 안에서 선(善)을 시현(示現)한다.
7. 무착행(無著行) : 공유(空宥)의 이견(二見)에 집착하지 않는다.
8. 존중행(尊重行) : 난득(難得)의 선근을 성취한다. 난득행(難得行)이라고도 한다.
9. 선법행(善法行) : 법을 설해서 사람에게 가르쳐 주며 정법을 호지(護持)한다.
10. 진실행(眞實行) : 중도진실(中道眞實)의 이(理)를 깨닫는다.
이상의 십행(十行)의 위에 관해서, 천태(天台)는 사교의권구(四敎義卷九)에, 육종성(六種性) 중의 성종성(性種性)『공(空)에 주(住)하지 않고 일체법(一切法)을 분별(分別)하고, 능히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한다』이며, 내범(內凡)『불교내(佛敎內)의 범부(凡夫)라는 뜻으로 진실의 깨달음에 접근한 사람』의 위(位)로 하고 있다.
천태의 사교의(四敎義)는 십이권(十二卷)이며, 제관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와 혼동 조심.
4) 십회향(十廻向)
별교(別敎)의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의 위(位).
화엄경권사십(華嚴經卷四十), 보살영락본업경권상(菩薩瓔珞本業經卷上)에 설(說)해지는 오십이위(五十二位) 가운데 삼십일위(三十一位)부터 사십위(四十位)까지의 계위(階位)를 말함.
십향(十向)・십회향심(十回向心)이라고도 한다.
1. 구호일체중생 이중생상 회향심(救護一切衆生 離衆生相 廻向心) : 무상(無相)의 마음을 가지고 육도(六道)에 들어가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을 수행(修行)해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구호(救護)하면서 중생(衆生)의 상(相)을 떠나는 위(位).
2. 불괴 회향심(不壞 廻向心) : 삼보(三寶) 밑에서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이 없고 파괴되지 않는 믿음을 얻어, 깊이 제법(諸法)에 통달하고, 일체법(一切法)의 공리(空理)를 직관(直觀)하는 위(位).
3. 등일체제불 회향심(等一切諸佛 廻向心) : 삼세(三世)의 불법(佛法)을 모든 시(時)에 수행하는 위(位).
4. 지일체처 회향심(至一切處 廻向心) : 일체(一切)의 불소(佛所)에 이르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을 공경(恭敬)하고 공양(供養)하는 위(位).
5. 무진공덕장 회향심(無盡功德藏 廻向心) : 끊임 없는 선근(善根)을 회향(廻向)하여 불사(佛事)를 행하며, 또한 끊임없는 공덕(功德)을 얻는 위(位).
6. 입일체평등선근 회향심(入一切平等善根 廻向心) : 평등하게 선근(善根)을 베풀고 평등하게 중생(衆生)을 이익(利益)케 하며, 선악불이(善惡不二)를 관(觀)하는 위(位).
7. 수순등관일체중생 회향심(手順等觀一切衆生 廻向心) : 일체중생(一切衆生)의 행위(行爲)를 선악불이(善惡不二)・일상(一相)이라고 관(觀)하는 위(位).
8. 진여상 회향심(眞如相 廻向心) : 중도(中道)의 진리(眞理)를 수습(修習)하여 제법(諸法)의 진실(眞實)의 상(相)을 소견하는 위(位).
9. 무박무착해탈 회향심(無縛無着解脫 廻向心) : 깊이 지혜(智慧)의 문(門)에 들어가서, 일체제법(一切諸法)의 차별상(差別相)과 평등상(平等相)을 남김없이 요지(了知)하여 일체(一切)의 집착을 떠나는 위(位).
10. 입법계무량 회향심(入法界無量 廻向心) :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지혜(智慧)를 가지고 일체세간(一切世間)을 조견(照見)하고, 일체법(一切法)에 있어서 무애자재(無礙自在)를 득하여 평등정관(平等正觀)을 성취하는 위(位).
천태(天台)의 사교의권구(四敎義卷九)에『사(事)에 돌려서 이(理)를 향하고, 인(因)을 돌려서 과(果)로 향하며, 자신의 공덕(功德)을 돌려서 남김없이 중생(衆生)에게 베풀고, 사리화융(事理和融)하여 법계(法界)에 귀입(歸入)하는 고(故)로 회향(廻向)이라 이름함이라』라고 있다.
천태의 사교의(四敎義)는 십이권(十二卷)이며, 제관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와 혼동조심.
5) 십지(十地)
불도수행자의 수행단계(修行段階)・경지(境智)를 십종(十種)으로 나눈 것.
지(地)는 능생(能生)・소의(所衣)의 의(義)이며, 그 위(位)에 주(住)해서, 그 위(位)의 법(法)을 수지(受持)함으로써 과(果)를 생성하는 것을 말한다. 각종(各種)의 십지(十地)가 있다.
一. 별교(別敎)의 십지(十地)
별교(別敎)에서 설하는 보살(菩薩)의 수행의 단계(段階)이며, 무명혹(無明惑)을 끊고 중제(中諦)의 이(理)를 증득하는 과정을 말한다.
오십이위(五十二位) 중의 제사십일위(第四十一位)에서 오십위(五十位)까지에 해당한다.
성유식론권구(成唯識論卷九)・대승의장권십사(大乘義章卷十四) 등에 설해져 있다.
1. 환희지(歡喜地) : 일분(一分)의 중도(中道)의 이(理)를 증득(證得)하고 크게 환희(歡喜)를 일으키는 위(位).
2. 이구지(離垢地) : 중생계(衆生界)의 번뇌(煩惱)의 더러움 속에 들어갔어도 그것을 떠나는 위(位).
3. 명지(明地) 또는 발광지(發光地) : 지혜의 광명(光明)을 일으키는 위(位).
4. 염혜지(念慧地) : 번뇌(煩惱)의 장작을 태운 지혜의 불꽃이 증상(增上)하는 위(位).
5. 난승지(難勝地) : 끊기 어려운 무명혹(無明惑)을 이기는 위(位).
6. 현전지(現前地) : 청정한 진여(眞如)의 최승지(最勝智)가 눈앞에 나타나는 위(位).
7. 원행지(遠行地) : 중도(中道)를 얻어 염념상지(念念上地)를 향하여, 세간(世間)과 이승(二乘)의 도(道)를 멀리 출과(出過)하는 위(位).
8. 부동지(不動地) : 중도(中道)의 이(理)에 안주(安住)하여 움직이지 않는 위(位).
9. 선혜지(善彗地) : 선교(善巧)한 혜관(慧觀에 의해서 시방일체(十方一切)에 걸쳐서 법(法)을 설(說)하는 위(位).
10. 법운지(法雲地) : 설법(說法)이 구름과 같이 무량무변(無量無邊)의 법우(法雨)를 내리어 진리(眞理)를 가지고 일체(一切)를 덮는 위(位).
二. 삼승공(三乘共)의 십지(十地)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삼승(三乘)에 공통된 것으로서, 견사혹(見思惑)을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경지(境地)이다.
통교(通敎)의 십지(十地)라고도 한다.
대지도론권칠십오(大智度論卷七十五), 마하지관권육상(摩訶止觀卷六上)에 설해져 있다.
1. 건혜지(乾慧地) : 건혜(乾慧)는 이수(理水)를 얻지 못한 건조한 지혜로서 오정심관(五停心觀)・사념처(四念處)의 관(觀)을 수행해서, 지혜는 있으나 아직 법성(法性)의 공리(空理)【진공(眞空)의 이(理)】를 증득하지 못한 위(位).
성문(聲聞)의 삼현위(三賢位)【외범(外凡)】, 보살(菩薩)의 순인(順忍) 이전에 해당한다.
2. 성지(性地) : 약간의 법성(法性)의 공리(空理)를 득해서 견사혹(見思惑)을 굴복하는 위(位). 성문(聲聞)의 사선근위(四善根位)【내범(內凡)】, 보살(菩薩)의 순인(順忍)에 해당한다.
3. 팔인지(八人地) : 인(人)은 인(忍)의 뜻이며, 처음으로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견혹(見惑)을 끊는다고 하는 견도십오심(見道十五心)【팔인칠지(八忍七地)】, 성문(聲聞)의 수타원향(須陀洹向), 보살(菩薩)의 무생법인(無生法忍)에 해당한다.
4. 견지(見地) : 견(見)은 견혹(見惑)을 단진하여 사제(四諦)의 이를 본【관(觀)】하다는 뜻이며, 견도제십육심(見道第十六心)【도류지(道類智)】의 위(位)』성문의 초과【수타원과】, 보살(菩薩)의 아비발치【불퇴전(不退轉)】의 위(位)에 해당한다.
5. 박지(薄地) : 욕계구품(欲界九品)의 사혹(思惑) 중에 전육품(前六品)을 끊고 후의 삼품(三品)을 남길 뿐이므로 박(薄)이라고 한다. 성문(聲聞)은 제이과(第二果)【사타함과(斯陀含果)】, 보살은 여러 번뇌를 끊어서 여결(餘結)【남아있는 잠재적인 번뇌】도 엷어진 아비발치 이후의 위(位)에 해당한다.
6. 이욕지(離欲地) : 욕계구품(欲界九品)의 사혹(思惑)을 단진(斷盡)하고 욕계(欲界)를 떠나는 위(位). 성문(聲聞)의 제삼과(第三果)【아나함과(阿那含果)】, 보살(菩薩)은 오신통(五神通)을 득(得)한 위(位)에 해당한다.
7. 이변지(已弁地) : 삼계(三界)의 견사혹(見思惑)을 남김없이 단진(斷盡)한 위(位). 나무를 태워서 재로 만든 것에 비유한다. 성문(聲聞)의 제사과(第四果)【아라한과(阿羅漢果)】, 보살(菩薩)은 불지(佛地)를 성취한 위(位)에 해당한다.
8. 벽지불지(辟支佛地) : 연각(緣覺)의 위(位). 삼계(三界)의 견사혹(見思惑)을 단절한 위에 그 습기를 없애고 공관(空觀)에 들어가는 위(位). 습기는 습관에 따라 자연발생되며 무의식 중에 몸에 배어 있는 혹을 말함. 이 위는 숯을 태워서 재로 만든 것에 비유한다.
9. 보살지(菩薩地) : 보살(菩薩)로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하는 위(位). 공관(空觀)으로부터 가관(假觀)으로 나와 재차 삼계(三界)에 태어나서 중생(衆生)을 이익(利益)케 하므로 전술(前述)의 건혜지(乾慧地)에서 이욕지(離欲地)까지를 가르킨다. 또한 보살(菩薩)의 초발심(初發心)에서 성도(成道)의 직전(直前)까지를 말한다.
10. 불지(佛地) : 보살(菩薩)의 최후심(最後心)이며, 일체(一切)의 혹(惑) 및 습기를 단진(斷盡)하고【재마저 없애버리고】인적(人寂)하는 위(位). 일체종지(一切種智) 등의 제불(諸佛)의 법(法)을 구비한 통교(通敎)의 부처를 말한다.
이상의 십지(十地)는 삼승(三乘)에 공통된 것이나, 그 차위(次位)에 관해서는 초지(初地) 내지 칠지(七地)를 성문(聲聞), 팔지(八地)를 연각(緣覺), 구지(九地)를 보살(菩薩), 십지(十地)를 부처로 하여 불과(佛果)에 이르는 차례를 설(說)했다고도 생각된다.
그 밖에, 십지(十地)에는 불(佛)의 십지(十地), 성문(聲聞)의 십지(十地), 연각(緣覺)의 십지(十地) 등이 있다.
6) 등각(等覺)
1.부처의 깨달음과 동등(同等)한 위(位). 보살(菩薩)의 최고위(位)를 말한다.
오십이위(五十二位)의 오십일위(五十一位)에 해당함. 일생보처(一生寶處)・금강심(金剛心)・유상사(有上士) 라고도 한다.
장기간에 걸친 보살(菩薩)의 수행을 완수하고 바야흐로 묘각(妙覺)의 불과(佛果)를 얻으려고 하는 위로서 인극(隣極)이라고 한다.
법화현의서왕(法華玄義序王)에『위(位)는 대각(大覺)에 인접(隣接)한다』라고 있다.
2.부처의 이명(異名). 등정각(等正覺)의 약.
부처의 깨달음은 평등(平等)하고 진실일여(眞實一如)인데서 이와 같이 말한다.
7) 묘각(妙覺)
불가사의한 부처의 무상정각(無上正覺)을 말함.
일체(一切)의 번뇌(煩惱)를 단진(斷盡)한 불과(佛果)를 가르킴. 오십이위(五十二位)의 최고위에 위치하며, 육즉위(六卽位)『원교(圓敎)의 보살(菩薩)의 수행위(修行位)』에서는 구경즉(究竟卽)에 해당함.
2. 가행위(加行位)의 수행
가행위는 자량위에서 수행하는 마음을 더욱 경책하여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수행을 뜻한다. 이 수행은 난(煖)과 정(頂)과 인(忍)과 세제일(世第一) 등 사선근(四善根)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그 내용은 4심사관(尋思觀)과 4여실지관(如實智觀)을 닦는 것이다. 이는 유식(唯識)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4심사관(尋思觀)을 통해 소취(所取)가 공(空)함을 관하고, 4여실지관(如實智觀)을 통해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사가행(四加行) 또는 사선근(四善根)위(位)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수행자는 문(聞), 사(思), 수(修)를 통해 삼혜(三慧)를 갖추어 사심사관(四尋思觀)과 사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 견도(見道)로 나아가 무루지(無漏智)를 증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닦는 선정(禪定)의 명칭도 각기 다르다.
1) 즉, 먼저 난가행(煖加行)은 하품의 심사관(下品尋思觀)을 수행하며, 경계에 대한 집착인 소취(所取)를 정화하는 명득정(明得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한다.
2) 다음에 정가행(頂加行)은 상품의 심사관(上品尋思觀)을 닦고, 경계에 대한 집착인 소취(所取)를 정화하는 명증정(明增定)을 수행한다.
3) 세 번째로 인가행(忍加行)은 하품의 여실지관(下品如實智觀)을 수행하고, 집착된 경계인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한 것임을 인가하는 인순정(忍順定)을 수행한다.
4) 네 번째로 세제일법가행(世第一法加行)은 상품의 여실지관(上品如實智觀)을 수행하며,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다. 여기서는 선정을 간단없이 수행하는 무간정(無間定)을 닦는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4심사관(尋思觀)과 4여실지관(如實智觀)은 유식관법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관법으로 심사관(尋思觀)은 심구사찰(尋求思察)이란 의미로 이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아는 여실지관(如實智觀)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명(名)이 있고, 명(名)에 대한 사(事, 현상) 또는 의(義, 의미)가 있으며, 명(名)과 사(事)는 그 자체의 자성(自性)이 공(空)하고, 그러한 각각의 모든 존재는 차별(差別)이 있다고 관한다. 이 네 가지가 거짓으로 존재하고 실체가 없다는 가유실무(假有實無)한 텅 빈 공(空)이라 관(觀)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무분별지(無分別智)는 아니고 어렴풋이 이해하는 정도이다.
1) 다시 말해서 먼저 명심사관(名尋思觀)은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중생과 사물이 모두 그 명칭이 있으나 그러한 명칭은 엄격히 말해서 거짓으로 설립된 것이고 사물 자체의 본체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중생은 항상 명(名)으로 인하여 집착을 일으키고, 그것에 대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내면서 서로 다투고 서로 해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명(名)이란 유가무실(有假無實)한 공(空)임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는 것이다.
2) 다음에 사심사관(事尋思觀)은 사(事)란 일을 짓는다는 의미로 사물과 행위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5온(蘊), 12처(處), 18계(界), 사제(四諦), 12연기(緣起), 산(山), 하(河), 대지(大地), 결혼, 상례(喪禮), 농업(農業), 상업(商業), 공업(功業) 등등 모두가 사(事)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과 현상은 모두가 인연소생(因緣所生)이고 유식소현(唯識所現)인 것으로 인연(因緣)과 식(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고, 찰라찰라에 생멸(生滅)함으로 그 당체가 곧 공(空)이며, 존재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모든 사물은 찰라에 존재하면서 변하여 가는 것으로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허망하게 변현(變現)된 현상의 모든 존재를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외형의 가상적 존재에 미혹되지 않고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는 것이다.
3) 세 번째로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은 모든 존재의 자성(自性)은 본래로 무소유(無所有)이며, 필경공(畢竟空)이다. 오로지 허망한 분별만이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제법의 자성이 허공과 같음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허망하고 황당한 집착을 여의는 것이다.
4) 네 번째로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은 모든 명(名)과 사(事)의 차별된 모양을 말한다. 예를 들면 명(名)의 차별은 음(音)과 의(義)가 있고, 사(事)의 차별은 대소(大小), 고저(高低), 장단(長短), 방원(方圓), 선악(善惡),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지혜(智慧)와 무명(無明) 등이 있으며, 또한 생(生), 주(住), 이(異), 멸(滅)의 사상(四相)이 부동(不同)한 과정은 끝없는 차별(差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수행할 때에 제법의 차별된 모습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모든 차별하는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4심사관(尋思觀)을 닦음으로써 얻어지는 지혜를 4여실지(如實智)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실(如實)이란 있는 그대로의 참다운 성품과 같다는 의미이며, 이러한 제법의 실성(實性)이 진여(眞如)이다. 그러므로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기면 모든 법의 명(名), 사(事), 자성(自性), 차별(差別)이 바로 진여(眞如)의 실성(實性)과 같아져서, 무소유(無所有), 무소득(無所得), 무주(無住), 무상(無相), 공(空)임을 깨닫고, 모든 분별을 여의기 때문에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의 경계도 공(空)하여진다. 이때 오직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인 진여(眞如)가 여여(如如)하게 된다.
이러한 사심사관(四尋思觀)을 닦으므로 해서 사여실지(四如實智)를 얻고, 사여실지(四如實智)를 얻음으로써 유식실성(唯識實性)을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4관(觀)과 4지(智)는 유식(唯識)을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편인 것이다.
그런데 심사(尋思)하지만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를 관(觀)이라고 하며, 이것이 아직 결정적인 지(智)가 아니기 때문에 인위(因位)라 하고, 관(觀)에 의해서 지(智)를 발생하게 하여 일체법을 결정적으로 이해하여 공(空)한 지혜에 도달하게 되면 이를 과위(果位)라고 한다. 그리하여 여실지(如實智)를 얻고 나면, 만법의 명(名)과 사(事),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이 모두 유식(唯識)에 의해 생긴 것이며, 방편으로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식(識)을 떠나서는 일체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지혜를 무상(無上)의 지(智)라고 하며, 무상지(無上智)는 모든 법의 실성(實性)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여실지(如實智)라고 한다. 이러한 4심사관(尋思觀)을 닦아 4여실지(如實智)를 얻어서 일체의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을 여의는 것이 유식의 수행이다.
이러한 4관(觀)과 4지(智)를 수행함에 반드시 위계(位階)와 차례가 있다. 이를 사선근위(四善根位) 또는 4가행(四加行)이라고 한다. 4선근은 난위(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위(世第一位)이다. 이 4위(位) 중에서 난위와 정위는 4심사관(尋思觀)을 닦아 소취(所取)가 공(空)함을 관하고, 인위와 세제일위는 4여실지(如實智)를 닦아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다.
1) 먼저 난위(煖位)는 {성유식론}에, "명득정(明得定)을 의지하여 하품의 심사(尋思)를 발하여 소취(所取)가 없다는 것을 관(觀)하는 위(位)를 세운 것을 난위(煖位)라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명득(明得)은 선정(禪定)의 이름으로 명(明)은 무루(無漏)의 지혜광명이며, 난성(煖性)에 해당된다. 수행자는 이 명득정(明得定)에 의지하여 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을 닦아 소취(所取)인 명(名), 사(事), 자성(自性), 차별(差別) 등이 모두 분별하는 의식에 의해 잠시 머문 듯하면서 사라지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수행의 지위는 광명이 따뜻하게 되는 것에 의해서 이름한 것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처음 산을 오를 때에 열이 나는 것과 같다.
2) 다음에 정위(頂位)는 {성유식론}에, "명증정(明增定)에 의지해서 상품의 심사(尋思)를 발해서 소취(所取)가 없다는 것을 관(觀)하는 것에 계위(階位)를 세운 것이 정위(頂位)이다"라고 하였다. 명증(明增)도 또한 선정(禪定)의 명칭으로 광명(光明)이 증장하고 지혜가 증장한다는 의미이다. 즉, 앞의 난위(煖位)인 광명의 지혜를 더욱 증장시킨다는 뜻이다. 이 지혜에 의해서 상품의 심사(尋思)를 닦음으로써 소취(所取)인 명(明), 사(事), 자성(自性), 차별(差別) 등이 모두 자심(自心)의 소변(所變)으로 실제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밝은 지혜의 광명과 불꽃이 더욱 치성하기 때문에 명증정(明增定)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심사(尋思)의 관(觀)이 최상의 극점에 도달하기 때문에 정위(頂位)라고 한 것이다.
3) 세 번째로 인위(忍位)는 {성유식론}에 "인순정(印順定)에 의지하여 하품의 여실지(如實智)를 발해서 소취(所取)가 없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印持)하고, 능취(能取)가 없는 가운데 또한 순락(順樂)을 인지(印持)한다"라고 하였다. 이 인순정(印順定) 역시 선정의 명칭이다. 이는 인지수순(印持隨順)의 의미로 앞의 4심사관(尋思觀)을 확실하게 가지고 소취(所取)가 공(空)함을 관하여 뒤의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수순(隨順)하여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다 공(空)함에 도달하기 때문에 인순정(印順定)이라고 한다. 여기서 여실지(如實智)란 지(智)가 아직 확실하지 못하므로 하품(下品)에 속하고, 이 위(位)는 난(煖), 정(頂) 2위를 경과해서 소취(所取)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지(印持)하지 못하기에 순락순인(順樂順忍)할 뿐이다. 이 인위(忍位)의 관법(觀法)에서는 소취(所取)가 공(空)임을 알았으나 아직 능취(能取)의 견(見)이 남아 있어서 인(忍)의 수행력이 더 요구되기 때문에 인위(忍位)이다.
4) 네 번째로 세제일위(世第一位)는 {성유식론}에, "무간정(無間定)에 의지하여 상품의 여실지(如實智)를 발하여 2취(取)가 공(空)함을 인지(印持)하기에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세운다"라고 하였다. 이 무간(無間)도 역시 선정의 명칭이다. 이 선정에 의해서 견도위(見道位) 즉 통달위(通達位)에 이르고 중간에 끊어짐이 없으므로 무간정(無間定)이라고 한다. 여기서 상품의 여실지(如實智)를 발하여 2취(取)가 모두 공함을 인지(印持)한다. 아직 세간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세간법 중에서 제일이으로 세제일위라고 한다.
이와 같이 가행의 보살행을 실천하면 집착심과 차별심을 발생하는 능취와 소취의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번뇌가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만을 정화하게 된다. 분별기의 번뇌는 후천적인 번뇌를 뜻하는 것이며, 여기서 진일보하여 근본이 되는 번뇌를 정화하려면 부단하게 보살도를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통달위(通達位)의 수행
통달위는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자량위와 가행위를 통하여 부단히 수행한 결과 진리의 눈이 트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무분별의 지혜가 발생하여 진여(眞如)를 체달(體達)하고 달관하게 되며, 이러한 경지를 통달이라고 한다. 통달은 진리를 통달했다는 뜻으로서 진리를 통달했기 때문에 마음에는 집착과 탐욕을 나타내는 분별심(分別心)이 없어지게 된다.
분별심이 없어진다는 것은 마음 속에 견분(見分)의 분별작용이 없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견분의 분별작용이 없어진다는 것은 능취와 소취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인식이 아니라 절대적인 인식이 실현되게 되며, 따라서 진여성(眞如性)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을 관찰하게 된다는 뜻에서 견도(見道)라고 한다.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 칭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초지보살 이전의 수행위를 지전(地前)의 수행위라 하고, 지전의 수행위를 자량위와 가행위라고 칭한다.
이와 같이 통달위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초지의 수행위를 뜻하며,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를 말한다. 초지보살의 경지는 비록 견분(見分)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별하는 작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분별은 없지만 아직도 반연하는 작용이 있어서 진여를 완전히 증득한 것은 아니다.
4. 수습위(修習位)의 수행
수습위는 위에서 말한 통달위에서 정화하지 못한 마음을 더욱 정진하여 정화하는 수행위를 말한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정화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닦아 진여(眞如)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아공(我空)은 나 자신이 공(空)한 것을 깨달은 것이고, 법공(法空)은 인연의 법이 공(空)한 것임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물은 인연의 집합과 더불어 공동의 노력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의 지혜로 그 본성을 잘 관찰하면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는 극미(極微)의 형성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는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으려면 금강유정(金剛喩定) 즉 멸진정(滅盡定) 또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하여야 가능하게 된다. 금강유정은 최상의 선정을 뜻하며, 이 선정은 제십지보살(第十地菩薩)의 수행심에만 나타나는 선정이다. 번뇌의 정화는 제 6 의식과 제 7 말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초지(初地)에서부터 점점 정화되기 시작하여 제칠지(第七地)의 보살수행에서 번뇌장(煩腦障)이 정화되고 아집이 단절된다.
그 후 보살은 더욱 수행하여 아직도 단절되지 않은 소지장(所知障)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법집(法執)을 정화하기 위하여 계속 수행하여야 하며, 제십지(第十地)에 진입하여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단절하게 된다. 번뇌장과 소지장이 단절되면 그 동안 번뇌의 장애를 받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했던 지혜(智慧)가 활발하게 나타나서 모든 법체를 확실하게 관찰하게 된다. 그 지혜들을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칭한다.
성소작지(成所作智)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망식(妄識)이 정화되면 나타나게 되고, 묘관찰지(妙觀察智)는 제 6 의식의 번뇌가 정화되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평등성지(平等性智)는 제 7 말나식의 번뇌가 정화되면 발생하고,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제 8 아뢰야식의 번뇌종자가 정화되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도의 수행을 통하여 망식(妄識)의 번뇌가 정화되면 마음의 진여성에 발휘되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轉識得智)는 번뇌장(煩腦障)이 정화되면 열반(涅槃)이 실현되고, 소지장(所知障)이 정화되면 보리(菩提)가 발생한다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실현하기 위하여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며, 보살도를 수행하는 가운데에 마음의 번뇌가 하나하나 정화된 이러한 수행들을 모두 합쳐서 수습위(修習位)의 수행이라고 한다. 수습위의 수행은 초지보살의 수행으로부터 제십지보살의 수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되는 수행이다.
5. 구경위(究竟位)의 수행
구경위는 자량위와 가행위와 통달위와 수습위의 수행을 통하여 팔식(八識)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成佛)의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한다.
자량위로부터 구경위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기간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걸린다. 삼겁을 다시 분류하면, 자량위에서 통달위까지 도달하려면 1겁(劫)이 걸리고, 통달위에서 제팔지보살의 수행위인 수습위까지 도달하려면 1겁이 소요되며, 제팔지보살의 수습위에서 구경위에 오르기까지 1겁이 걸린다.
이들 수행기간을 모두 합치면 3겁이 된다. 3겁 동안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나아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등 이타적인 수행을 해야만이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이타적인 수행 가운데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이 유식학의 수행사상이다.
십바라밀은 1) 보시(布施), 2) 지계(持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선정(禪定), 6) 지혜(智慧), 7) 방편(方便), 8) 원(願), 9) 역(力), 10) 지(智) 등의 바라밀을 뜻한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到彼岸]는 뜻으로 십종의 바라밀을 수행하면 유식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유식의 실성(實性)인 진여성을 깨닫고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들 십바라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은 물질과 정신을 남에게 베풀어준다는 뜻이다.
보시는 물질을 베풀어준다는 재시(財施)가 있고, 진리를 설명하여 사상을 길러주는 법시(法施)가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보시바라밀을 수행하여 중생들을 계몽하고 복되게 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는 견혹(見惑)을 타파하고,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치를 증득하여, 변행 진여(遍行 眞如)를 증득한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은 보살 스스로의 계율을 잘 지키고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으로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삼취정계는
첫째,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하고, 스스로의 범죄를 방호하는 율의계(律儀戒)인 제악막작(諸惡莫作)을 실천하고,
둘째, 중생들에게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고, 심지어 짐승의 공포까지도 없애주는 섭선법계(攝善法戒)인 중선봉행(衆善奉行)을 실천한다.
셋째,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모든 이익을 가져다 주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인 이락중생(利樂衆生)을 실천한다.
이와 같이 이타적인 계율이 삼취정계이며 대승적인 계율사상이다.
여기서는 수혹(修惑)을 타파하고 번뇌를 여의어 최승 진여(最勝 眞如)를 증득한다.
3)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모든 일에서 고된 일을 참고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인욕은 내원해인(耐怨害忍)과 안수고인(安受苦忍)과 제찰법인(諸察法忍) 등 3인(忍)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 3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원해인(耐怨害忍)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할 때 인욕하며, 지혜롭게 피해를 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안수고인(安受苦忍)은 추위와 더위 등 자연의 나쁜 조건을 극복하고, 죽음이 닥쳐올 만큼 어려운 고통을 겪어도 이를 능히 참으면서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다.
셋째, 제찰법인(諸察法忍)은 사성제(四聖諦) 등 여러 진리를 관찰하고 진리를 통달하기 위하여는 어려운 고통을 참고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대총지법문(大總持法門)을 얻어 지혜의 광명을 발한 승류 진여(勝流 眞如)를 증득한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은 선법을 행하고 보살행을 할 때 게으름을 퇴치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정진은 피갑정진(被甲精進)과 가행정진(加行精進)과 무퇴정진(無退精進)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피갑정진(被甲精進)은 병사가 전장에서 두려움 없이 근면하게 전투하여 적군을 격퇴하는 것과 같은 근면성을 말한다.
둘째, 가행정진(加行精進)은 견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이든지 용감하게 완수하는 근면성을 말한다.
셋째, 무퇴정진(無退精進)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후퇴하지 않는 근면성을 말한다.
여기서는 보리분법(菩提分法) 중에서 특히 지혜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여 번뇌를 태워 없앤 무섭수 진여(無攝受 眞如)를 체득한다.
5)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은 마음의 산란과 동요함이 없이 미세한 번뇌까지도 정화하는 선정을 뜻한다.
정(定)과 지혜(慧)를 함께 수행하여 진여를 증득하는 근본지(根本智)를 나타내고, 인연법과 더불어 유위법(有爲法)을 반연하는 후득지(後得智)를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즉, 2정려(靜慮)인 인발정려(引發靜慮)와 변사정려(辨事靜慮)를 수행하여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성공법계(性空法界)와 사(事)를 처리함에 선정을 잃지 않고, 하승(下乘, 성문과 연각)의 열반에 의해 성불(成佛)을 장애하는 것을 끊어 유무별 진여(類無別 眞如)를 증득한다.
6)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은 선정을 닦아 발생되는 지혜를 말하며, 지혜는 마음의 번뇌가 없어짐에 따라 분별심이 전환하여 나타나는 마음을 뜻한다.
지혜는 삼라만상이 인연법으로 형성된 연기법을 알고, 연기법을 알게 되면 중생의 불성도 알게 된다. 따라서 지혜를 가진 자는 대자대비의 이타행(利他行)도 실천하는 인격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삼공(三空 : 我空, 法空, 俱空)의 반야(般若)를 체득하여, 연기(緣起)가 성공(性空)이고 성공(性空)이 연기(緣起)인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임을 통달하여, 구생소지장(俱生所知障)을 끊어서 무염정 진여(無染淨 眞如)를 체득한다.
7)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은 방(方)은 훌륭한 방법과 정직을 뜻하고, 편(便)은 편리하게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일체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고, 근기에 계합하는 방법과 수단을 편리하게 활용하여 구제사업을 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방편바라밀로 말미암아 마음 속 깊이 발생하는 미세한 번뇌를 단멸(斷滅)하게 된다.
즉, 여기서는 순수한 무상관(無相觀)에 머물러 회향방편(回向方便)으로 대지(大智)를 실천하고, 제도방편(濟度方便)으로 대비(大悲)를 실천하여, 세상현행장(世相現行障)을 끊어 법무분별 진여(法無分別 眞如)를 증득한다.
8) 원바라밀(願波羅蜜)은 보리와 열반을 속히 증득하기를 발원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원(願)은 구보리원(求菩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의 내용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구보리원(求菩提願)은 큰 깨달음과 불과(佛果)가 성취되기를 발원하는 것이고,
둘째, 이락타원(利樂他願)은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뜻한다.
여기서는 근본무분별지를 얻기 위해 가행정진하지 않아도 자연으로 이루어져 무상중작가행장(無相中作加行障)을 끊어서 부증감 진여(不增感 眞如)를 체득한다.
9) 역바라밀(力波羅蜜)은 보살이 자신의 수행과 이타행을 하면서 보다 더 힘을 내어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역(力)에는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思擇力)이 있다.
수습력(修習力)은 모든 힘을 다하여 정화운동을 가행하는 것을 뜻하고,
사택력(思擇力)은 모든 진리를 지혜롭게 선별하고, 사리를 진리롭게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사무애지(四無碍智 : 義無碍辯, 法無碍辯, 辭無碍辯, 樂說無碍辯)를 증득하여 설법에 자재하고, 이타불욕행장(利他不欲行障)을 끊어 지자재소의 진여(智自在所依 眞如)를 증득한다.
10) 지바라밀(智波羅蜜)은 일체의 법을 관찰하여 승의(勝義)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세속에 있는 모든 것과 중생의 근기까지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광대한 교법(敎法)을 구족하여 큰 구름이 온 대지를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수용법락지(受用法樂智)와 성숙유정지(成熟有情智)로 중생을 성숙시켜 제법미자재장(諸法未自在障)을 끊어 업자재소의 진여(業自在所依 眞如)를 체득한다.
이상으로 보살이 수행하는 십바라밀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보살은 자량위의 수행을 할 때부터 육바라밀 내지 십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며, 유식학에서는 십바라밀의 실천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십바라밀은 모든 수행을 집약한 수행관이며, 이 바라밀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사회를 불국토(佛國土)로 건설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한 수행으로 말미암아 본래 소유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장애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번뇌가 없어지고 동시에 모든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번뇌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불성에서 발휘되는 지혜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며,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작용을 하게 된다. 망식(妄識)이 강하면 지혜가 약해지고, 지혜가 강해지면 망심이 약해진다는 말과 같이 자량위 때부터 지혜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여 구경위에 도달해서는 망식이 완전히 없어지고 지혜만 원만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들 지혜를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한다.
성소작지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오식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이고, 묘관찰지는 제 6 의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평등성지는 제 7 말나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며, 대원경지는 제 8 아뢰야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주의 진리를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환하게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불타의 삼신(三身)과 더불어 작용하게 된다.
불타는 사지(四智 : 成所作智, 妙觀察智, 平等性智, 大圓鏡智)를 구족하고, 삼신(三身)을 구족하였으며,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이들 삼신을 통하여 불타의 자비가 육도의 중생들에게 미치게 되며 삼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법신(法身)은 자성신(自性身)이라고도 하며, 이는 진여(眞如)의 체성이며, 진리적인 몸을 뜻한다. 그러므로 법신은 만법의 체성이며, 모든 진리의 의지처이고, 여러 덕(衆德)의 집합체인 것이다.
2) 보신(報身)은 3겁(劫)을 수행하여 과보로 받은 불타의 몸을 말한다. 불타는 과보를 받아 수용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한다. 십바라밀을 비롯하여 여러 공덕으로 받은 과보를 혼자서만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는 자비의 실천이 따르기 때문에 이를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수용신(自受用身)은 여래의 대원경지와 제팔식의 진여성을 말하며, 이는 여래 자신만이 수용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한다.
타수용신(他受用身)은 십지보살들이 수용하는 불타의 덕성을 말하며, 이는 평등성지에 의하여 발생하는 응신(應身)을 뜻한다.
3) 화신(化身)은 여래가 하급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몸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성소작지를 변현하여 나타내는 불신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화신을 변화신(變化身)이라고도 한다.
변화신은 자량위의 보살과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등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정토(淨土)와 예토(穢土)에 거주하는 불신을 말한다.
위에서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 구경위 등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이들 수행사상은 이타적인 원리로 구성되었으며, 이타적인 수행을 통해서만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하여서도 다시 보신과 화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불타의 자비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근본이념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덧붙여 언급할 내용은 바로 열반에 대한 이해이다.
초기불교에서 열반은 수행의 목적지이자 궁극적 도달점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와서는 그 열반의 내용이 첨가되기도 하고 의미가 확대된다.
이를 법상종에서 열반을 네 종류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1) 그 내용은 먼저 모든 존재의 근본인 진여(眞如)를 말하는 본래자성청정 열반(本來自性淸淨 涅槃)이고,
2) 다음에 번뇌장(煩腦障)을 단멸(斷滅)하여 나타난 진여를 말하는 유여의 열반(有餘依 涅槃)이며,
3) 세 번째로 마음에 번뇌장(煩腦障)을 끊고 나아가서 사대(四大)라는 색온(色蘊)과 정신적 현상인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온(蘊)이 결합한 업신(業身)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적정하게 된 무여의 열반(無餘依 涅槃)이다.
4) 끝으로 번뇌장(煩腦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완전히 끊어, 생사(生死)와 열반(涅槃), 번뇌(煩惱)와 보리(菩提), 무명(無明)과 지혜(智慧) 등이 불이(不二)임을 체득하여, 열반에도 집착하여 머물지 않고, 생사를 초월하고, 자타불이(自他不二)하여 양변(兩邊)을 넘어, 치우친 주처가 없는 무주처 열반(無住處 涅槃)이 있다고 하였다.
* 부처님의 최후 법문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자등명(自燈明), 자귀의(自歸依)]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법등명(法燈明), 법귀의(法歸依)]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라.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라.
함께 내 교법(敎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道)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흩어진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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