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즈 로제 - 프랑스 농촌의 고단함을 담다
주말마다 모네의 정원에서 가을 준비를 하다 보니 그림 여행을 떠날 기회가 자꾸 멀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가을이면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몸도 마음도 바쁘기 그지 없습니다. 그림자가 짧아지면서 만나야 할 사람이 늘어 나는 것도 한 가지 원인입니다. 요즘은 그림보다 사람과 꽃을 보는 일이 더 많아 지고 있습니다. 가을이니까요-----.
프랑스 농촌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은 조르즈 로제 (1853 - 1937)의 작품이 정겹게 다가 온 것도 같은 이유이겠지요.
추수 Harvesting the Fields / 54.6cm x 66.7cm / oil on canvas / 1886
추수가 한창인 들판 위로 구름이 잠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늘이 만들어지자 여인이 일어나 허리를 폈지만 초점이 없는 것 같은 눈은 피곤한 기운으로 젖었습니다. 낫으로 베고 묶는 일이 쉽지 않겠지요.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순간이 다가 오고 있으니 조금 더 힘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없이 짚단을 묶는 사내의 손길에 가을도 함께 묶이고 있습니다.
로제는 프랑스의 몽빌에서 셋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지레는 들판에서 일하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당대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였습니다. 어린 로제에게 미술을 처음 지도한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훗날 로제의 작품에 아버지가 추구했던 화풍이 묻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휴식 끝 The Repose End
이제 그만 쉬고 빨리 일하자!
지친 몸을 쉬고 있는 언니들에게 막내가 와서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는 벌써 기울기 시작했고 아직도 거둬야 할 밭은 넓기만 합니다.
벌써 부모님은 일을 시작했는데 언니들 빈둥거리는 모습이 싫은 막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딸 많은 집 셋째 딸은 묻지도 않고 데려 간다던 옛말이 생각납니다.
아무래도 낫을 살피고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금방 이 쪽으로 건너 올 것 같습니다.
가을 해가 짧다.서둘러 가을에는 서둘러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로제는 당시 프랑스 화가들이 미술계에 진입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 곳에서 스케치와 정물화를 완벽하게 배운 그는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큰 흐름 중의 하나였던 농촌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저무는 하루 The Wane of the Day / 81cm x 60.cm / oil on canvas
아직도 일이 남았지만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들판에서의 오늘 일을 끝냈습니다. 잠시 밭둑에 앉아 숨을 고르기로 했는데 앞치마에 저녁거리를 담은 여인은 그냥 서서 쉬는 모습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농촌의 여인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도시에 사는 여인들이 그림 속 여인들보다 상황이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요 ? 늘 궁금합니다.
1877년, 로제는 파리 살롱전에 데뷔합니다. 이 때부터 시작된 살롱전 참가는 그 후 50년간 계속됩니다.
매 해 출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살롱전을 통해 로제는 확실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 살롱전 참가 후 4년 만에 동메달을 수상했습니다. 사실주의 화법의 그의 작품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셈입니다.
고된 일 Hard Work / oil on canvas
아이고 힘들다!
나이든 여인이 삽에 몸을 기대고 허리를 폈습니다. 당근처럼 보이는데 꽃 모양을 보니 당근은 아닙니다.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구부리고 땅에서 캐고 난 뒤 잎을 잘라버리는 일이고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겠지요. 사내들의 얼굴도 검붉게 달아 올랐습니다.
추수가 끝난 뒤의 뿌듯함은 있겠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늘 이렇게 고통과 인내의 계단을 거쳐야 합니다.
고통없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아닐까요?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로제는 자연과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좋아했습니다.
농부들과 함께 있는 동물들도 작품 구성에서는 빠질 수 없었지요. 그의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벌판 가득 내리는 빛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폭풍 The Coming Storm / 66.6cm x 51.4cm / Charcoal Pastel Gouache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벌판 끝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 와 하늘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거세지자 서둘러 일을 끝낸 여인들이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도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수확한 것들을 머리에 이고 손이 든 여인들 앞에는 풀을 잔뜩 실은 수레를 미는 여인이 보입니다.
바퀴가 하나인 저 수레는 힘이 많이 드는데 무사히 집에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다 어디 간 겁니까?
로제의 첫 화실은 화가였던 줄리앙 뒤프레의 집이었습니다.
사실 뒤프레는 로제의 누나인 마리아와 결혼한,그러니까 그에게는 자형이 되는 셈입니다. 원래 뒤프레는 로제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로제는 아버지의 화실에서 뒤프레를 자주 만날 수 있었지요.
처남 매부가 같은 직업을 가진다는 것,서로에게 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추수 La Moisson / 92.1cm x 65.4cm / oil on canvas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밭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키만큼 큰 짐을 어깨에 올려 놓은 어린 아이도 보이는가 하면 무거운 짐을 다시 올리기 위해 허리를 구부린 여인도 보입니다.
마차라도 있으면 한꺼번에 싣고 가겠지만 이들에게는 그 것도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로제가 묘사한 농촌의 풍경은 낭만보다는 일상의 고단함이 먼저 다가 옵니다. 그리고 그 것이 당시 농촌의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로제는 역시 전원 풍경을 주요 주제로 담았던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도 매우 친했는데 밀레와도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이나 활동한 시대를 감안하면 아주 짧은 기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로제가 시골의 전원만 묘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휴가 때 노르망디를 찾았을 때는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제작되곤 했지요.
하루의 끝 The End of the Day / oil on canvas
얼마 전 비가 내렸던 모양입니다. 곳곳에 물이 고인 길 위로 힘들게 수레를 끌고 집으로 돌아 가는 가족이 나타났습니다.
여인은 앞에서 수레를 끌고 있고 사내는 두 손으로 수레의 균형을 잡으며 밀고 있습니다.
마른 길도 힘이 드는데 비까지 내렸으니 몇 배는 더 힘이 들겠지요. 그 나마 다행인 것은 서로 끌고 밀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 우리 삶이죠. 그 무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견딜 수도,꿈을 가져 볼 수도 있겠지요.
서른 네 살이 되던 1887년,로제는 영어교사의 딸인 에바와 결혼합니다. 에바는 음악가였는데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피아노 3 중주곡을 작곡할 정도였지요.로제보다 다섯 살이 어린 그녀는 100세까지 장수합니다.
저의 상상이지만 음악과 미술이 어우러진 생활이 준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삭 줍는 사람 The Gleaner / 55.2cm x 38.4cm / oil on canvas
프랑스에서 밭에 떨어진 이삭을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최저생활비에도 모자라는 수입으로 사는 사람이나 과부처럼 극빈층에게 허락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림 속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사람들은 생활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9세기 프랑스 농촌을 묘사한 작품 중에는 이삭 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시대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이지요.
여인의 자세가 흥미롭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으로는 종달새 울음 소리를 내는 모습이라고 했는데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종달새 소리를 왜 내는 것일까요? 찾아 봐야겠습니다.
로제의 수상과 공식적인 역할도 남 못지 않았습니다. 1889년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한 그는 동메달을 수상합니다.
1900년에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는 은메달을 수상하고 1907년부터 2년간 프랑스 예술인 협회의 멤버가 됩니다.
1908 년부터는 살롱전의 심사위원의 역할을 맡았으니까,로제의 50 대 생은 화가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은 것 아닐까요?
하루의 끝 End of Day / 61cm x 73.7cm / oil on canvas
이 여인도 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군요.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오늘 계획했던 일을 모두 끝낸 모양입니다.
점심을 담았던 광주리는 비어 있고 대신 한 손에 한 묶음의 짚단을 들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벌판에는 추수를 끝낸 흔적들이 점차 늘어 나고 있습니다. 하루의 끝이 보이는 순간 가을의 끝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몸을 쉬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 오는 것이겠지요.
1930 년무렵 여든을 바라 보는 나이가 되자 로제는 점차 시력을 잃게 됩니다.
더 이상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못했지만 작은 스케치 활동은 계속했습니다. 그 스케치 작품도 대단히 뛰어난 것이었다고 합니다.
로제는 여든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 A Mother Holding Her Child / 132.1cm x 88.9cm / oil on canvas / 1883
아이가 작은 탓도 있지만 엄마의 모습이 아주 당당합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손도 곱다기 보다는 씩씩해 보입니다.
비록 치마 이 곳 저 곳이 헤졌고 아이를 감싼 포대기도 남루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굳건합니다.
아이의 밝은 얼굴을 지켜 주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힘도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만큼 단단한 것도 없습니다.
팔순이 되신 제 어머니도 전화를 드릴 때마다 ‘밥은 먹었냐?’가 첫 말씀입니다.
여전히 어머니에게 저는 밥을 제 때 먹어야 하는 ‘아이’입니다.
가끔 모네의 농장에 앉아 있다 보면 시간 흐르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색이 다를 때, 어제까지 있었던 것이 오늘 보이지 않을 때 그리고 하늘이 자꾸 깊어질 때입니다.
한바탕 비가 훑고 지나간 다음 가을이 자리를 잡았습니다.고마운 일입니다.
이제 서서히 비어 가는 자리가 늘어 날 것이고 밤이면 그 것들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겠지요.
작성자 : 레스까페'세계의 명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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