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은 삶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문성식 2019. 1. 12. 16:45



◆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   
굳이 랭보의 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슴 속 하나씩은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외상이니 내상이니 하며 따로 구분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네요.
단지 흉이 남지만은 않길 바랄뿐이죠.
우리들은 학교생활과 사회생활, 조직생활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가지고 또한 헤어짐을 경험합니다.
여기서도 동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구분은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단지 어떤 인연에 의해 만남을 지속하고 혹은 알고 지내는 동안에 
서로 도움을 주고 받지는 못할지언정 상처는 주고 받지를 않길 바랄뿐이죠.
상처!
상처의 속성은 외부의 조그마한 충격에도 더욱 악화되어 덧나고, 
물기가 닿으면 따갑고 아픈 고약한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아니 오려고하면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네요.
그 상처의 이름은 사람들 저마다에게 조금씩은 다르게 불리우죠.
사랑, 그리움, 아쉬움, 이별, 슬픔, 우정, 가족, 한, 회한, 미움, 복수, 
원망, 배신, 두려움, 공포, 외로움,배고픔, 눈물, 고독 등등으로
그 상처의 이름이 뭐로 불리우는지는 그 또한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그 상처란 것이 또 그렇네요.
수일 수개월에 걸쳐 아무는 상처가 있는가 하면, 
평생을 살아도 아물지 않는 상처도 있죠.
설령 겉보기에는 다 아문 것처럼 보이지만, 바이러스성 상처처럼 
어떤 요인에 의해 불쑥 불쑥 생체기를 드러내는 상처가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 외상처럼 날 궂으면 쑤시고 저리우는 상처도 있죠.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타자를 얼굴로 만난다고 하네요. 
타인은 나에게 얼굴로 다가오고, 
내가 타인의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내가 존재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듯이 
타인의 얼굴은 내가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기도 하죠.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 대해 단지 수용하는 자세를 취할 뿐이죠. 
타자와의 이러한 관계를 레비나스는 '관계성 없는 관계'라고 표현하네요.   
시인 랭보의 오랜 전언처럼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지요. 
상처 받은 영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거리마다, 복도마다, 건물마다 슬프도록 아름답게 널려져 있네요.
침묵 속에서, 뒹구는 단풍잎과 같은 이미지의 수런거림 속에서...
한해가 다가는 12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올 한해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또한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았는지를 곰곰 생각해 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용서를 구할 일들이 참으로 많네요.
이유없이 시기한 죄, 미워한 죄, 질투한 죄 온 세상을 함부로 재단한 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욕 먹을 자라고 생각하고 내 맘대로 욕한 죄
까야 될 자라고 생각하고 맘껏 깐 죄
행여 나로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또한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도 너그러이 용서하려고 해요.
누군가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어쩌면 날마다 새롭게 용서하는 용기이므로.
우리 모두 용서하고 용서 받고 
그리고 사랑합시다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