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란 무엇인가?
1. 이끄는 말
2. 계시의 정의
3. 계시의 구분
4. 계시의 성질
5. 계시의 필요성
6. 계시의 목적
7. 계시의 방법
8. 계시의 시기
9. 맺는 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오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ㅠ-갈1:11-12-
1. 이끄는 말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가리켜 계시의 종교라 일컫는다. 그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계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타종교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우월한 특성 중의 하나가 신적 계시를 경전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계시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허다한 교파분열과 신앙적 혼란은 물론, 사이비적 신앙운동이 범람하게 되었고, 기독교를 빙자한 무속 행위가 점점 더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m)에 의하여 신적 계시의 비중을 가볍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은 신적 계시가 지금도 음성이나 환상 또는 꿈 등으로 오고 있다고 믿기도 하고 실제로 경험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칼 바르트(Karl Barth)의 계시관을 따르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자연신학이나 일반계시를 모두 부정하고 오직 그리스도 사건만을 계시로 인정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계시관에 대한 혼란은 신 . 구약성경 66권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을 흔들어 놓게 되었고, 따라서 성경에 기초한 순수한 기독교가 몰락되어져 가는 위기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중세시대의 기독교 부패와 타락은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으나 성경 계시에 대한 오해가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음을 중세교회사가 말해주고 있으며,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부패와 타락 역시 성경 계시에 대한 오해가 그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음을 일반 신학사상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언제나 개혁은 부패와 타락의 원인 치료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 계시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매우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며, 개혁의 당위성이 점점 가중되어져 가는 오늘의 교회가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2. 계시의 정의
계시(revelation)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갈라’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벗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로는 ‘아포칼뤂시스’와 ‘파네루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이들 두 단어는 모두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아포칼뤂시스’라는 말은 ‘폭로하다’ 또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파네루운’이라는 말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뚜껑을 연다’고 하는 뜻을 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계시란 가려지고 덮어져서 알 수 없도록 감추어진 것을 벗기거나 열어서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에 있어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어 보이시는 섭리를 의미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원하신 영광과 능력은 물론, 그의 본질과 속성 등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내시는 사역을 총괄해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계시라는 말을 어떤 미래사에 관한 것이나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나 물건 도는 대상 등에 관하여 초자연적 신통력으로 알아지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계시개념은 무속 신앙계에 널리 퍼져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계에까지 깊숙이 파급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를 들면, 사업에 대한 성공과 실패, 또는 자녀들의 대학 진학에 대한 합격과 불합격 등은 물론, 결혼 상대자를 정하는 일, 심지어는 부동산을 팔고 사는 일 등에 이르기까지 기도해서 계시를 받아 해결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지도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서 허다한 성도들이 자기 스스로가 기도를 하거나 또는 소위 신령한 종이라고 추앙 받고 있는 광신자들에게 기도를 받아서 계시를 통한 응답을 듣고 모든 일을 결정하는 미신적이며 비기독교 적인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 .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기독교적인 계시의 올바른 정의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데서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3. 계시의 구분
기독교에 있어서의 계시는, 계시 방법상으로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나누어지며, 계시의 성격상으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되어진다.
그러나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에 대한 이해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종교개혁 이전에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하여 악용이 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를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여 자연계시의 과대평가로 인한 자연신학을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즉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과학적 지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초자연계시는 과학적 지식에다가 신비(mysteria)적인 지식ㅇ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연계시나 초자연계시는 스콜라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게시란 근본적으로 모두가 다 초자연적인 것인데 다만 방법상의 구분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의한 자연현상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초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의한 초자연현상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계시의 성질상의 구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모두가 자연적이나 초자연적 방법으로 주어지는 계시이다. 그러나 혹자들은 자연계시는 일반계시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초자연계시는 특별계시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오해이다. 이와 같은 오해는 중세 로마 카톨릭의 자연신학이나 18세기 영국의 이신론(Deism)자들과 독일의 이성론 자들의 자연신학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 몫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계시를 구분함에 있어서는 방법상의 구분인 자연계시나 초자연계시의 구분은 별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다만 계시의 구분(종류)은 성질상으로 보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뒷부분에서 자세히 재론하게 되므로 더욱 분명하게 증명될 것이다.
4. 계시의 성질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이 되어지는 계시가 각각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먼저, 일반계시의 성질은 그 명칭이 보여주듯이 일반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불 명료성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택자나 불택자에게 일반적으로 주시는 계시라는 점에서 일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구별 없이 계시를 하셨다는 듯이다. 그리고 불 명료성은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를 통하여 해주신 일반계시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저주가 덮여서 분명치를 못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반계시로는 하나님을 아는 분명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 특별계시의 성질은 역시 명칭이 보여주듯이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일반계시와는 달리 명료성을 포함하고 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에게만 특별히 주시는 계시라는 점에서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만 하나님을 분명히 알게 해서 구원해 주시려고 특별히 계시하여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명료성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의 절정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주신 특별계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에 너무도 분명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특별계시는,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분명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여 준다.
이상과 같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이에는 엄청난 성질상의 차이가 잇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으로 계시관에 대한 많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인본주의 학자들이 특별계시를 경시하는 태도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지금도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받은 경험도 있다고 하는 따위의 모든 작태들은 기독교적 올바른 계시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되고 있는 것이다. 소위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도 더러는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에 공감을 갖는 서글픈 현상도 없지 않다.
5. 계시의 필요성
계시의 필요성은 하나님 측면에서의 필요성이 아니라 인간 측면에서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계시의 필요성은 일반계시나 특별계시가근본적으로다 동일하다. 그러나 특별계시에 있어서는 일반계시와는 달리 지엽적인 필요성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별 없이 계시의 근본적인 필요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는 데 있다. 사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적인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게시가 없이는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누구 나가 본능적인 신 의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구체적인 신의 속성이나 하시는 일을 알고싶어하는 것이 인간들의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아무리 신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며 탐구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계시의 경우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지어 놓으셨을 때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창조해 놓으신 만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은 물론, 하나님 스스로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시는 경우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영광은 볼 수 없고 수치를 보는 눈이 밝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특별계시의 근본적인 필요성은 물론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는 데 있다. 그러나 특별계시의 지엽적인 필요성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인간도 저주를 받고 모든 만물도 저주가 덮여져서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신학 주창자들은 특별계시가 없이도 피조된 자연만물을 통하여 타락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만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계시가 없는 신지식의 추구는 철학적 신 또는 우상적 신과 같은 주관적 신지식을 얻을 수밖에 없으며 객관적인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6. 계시의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를 하시는 근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계시의 목적은 일반계시나 특별계시가근본적으로다 동일하다. 그러나 결과적인 면에서나 과정 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면도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목적은 일반계시나 특별계시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택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의 권능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도 일치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곧 스스로를 계시하시기 위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게시가 불택자들에게는 도리어 멸망을 당해도 핑계할 수 없는 조건이 되고 특별계시는 걷어 쳐 넘어지게 하는 부딪히는 돌이 되게 하신다. 그러나 이들도 최후의 심판 후에는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지옥의 고통 속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권능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송하게 된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만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특히 특별계시의 경우 죄인을 구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여 구원의 계시라고까지 지칭할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특별계시의 일부 내용이며 수단이기 때문에 계시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목적이 죄인의 구원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역 자체가 계시라는 뜻이다. 계시의 목적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특별계시도 일반계시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행하시는 것으로서 게시의 목적이 아니라 계시의 수단이다.
계시의 과정을 정리하여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능력과 영광을 창조 사역을 통하여 드러내신 것이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역사, 즉 일반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찬양토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저주가 덮여 일반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하여 권능과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은 일반계시이건 특별계시이건간에 죄인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피조 인간에게 주시려는 것이 그 근본적인 목적이다.
7. 계시의 방법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가?
하나님의 계시 방법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계시 목적과는 달리 각각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계시가 저주가 덮여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와 다른 방법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계시의 구체적인 방법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총체적인 방법을 정리해보면,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심판하시는 일반적인 섭리 방법으로 하시는 것이며, 특별계시는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특수적인 섭리 방법으로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시 방법 역시 각각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심판하시는 일반적인 섭리 방법으로 계시하시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법칙(자연현상)에 의하여 주관하시며, 만사를 작정하신 경륜(역사원리)을 따라 섭리하시며, 인간을 예정하신 뜻(인생목적)을 따라 인도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주와 역사와 인생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고 인도하셔서 창조로부터 심판 때까지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려고 자연적 방법이나 초자연적 방법 등을 동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으나 자연과 초자연에 대한 구체적인 구분이 가능한 것인가? 라는 것이 문제이다. 엄밀히 말하면 자연이라는 말은 철학적 요소를 가진 것으로서 기독교에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관은 초월 신과 내재 신을 포함하고 있는데, 철학적 용어인 자연이라는 말은 내재 신을 부정할 때만이 성립이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과 초자연 방법이라기보다는 보편과 특수(기적)방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무방하다.
다음,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언약을 성취하시는 특수적인 섭리 방법으로 계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친히 언약을 하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언약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권능의 역사로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실 것을 알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열조와의 언약을 이루신 후, 메시아를 통하여 완전히 성취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보편적인 방법과 특수(기적)적인 방법 등을 모두 사용하셨다. 보편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창조법칙에 따라 나타나는 사건이나 사물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특수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특수적인 기적적 사건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수적인 기적적 사건을 예를 든다면 에녹의 승천, 노아 홍수, 사라의 출산, 애굽의 열 재앙, 홍해의 갈라짐, 광야에서의 생활, 요단강 갈라짐, 여리고 성의 함락, 예수님의 처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더러는 환상, 음성, 꿈 등도 특수한 방법에 속하는 것들이다.
8. 계시의 시기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적 계시 관을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지금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은 아무런 계시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계시의 시기에 대하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서로 기간이 다르다.
먼저,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 시작한 대부터 최후 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다라서 일반계시는 지금도 계속해서 보편적인 방법이나 특수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우주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성하며 계절이 바뀌고 낮과 밤이 계속되는 보편적인 방법에 의한 계시와 거짓 영들을 통한 기적적인 사건들을 비롯해서 성경의 능력에 의한 특수한 방법의 일반계시가 지금도 주어지고 있다.
다음, 특별계시는 아담 타락으로 인하여 저주가 덮혀 일반계시로는 하나님 지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전제할 때, 계시 기간은 당연히 아담 타락 후부터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져 약속이 성취된 최후의 모습을 묵시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때까지이다. 따라서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이 되었고 끝이 났기 때문에,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특별계시를 통하여 지금도 주어지는 일반계시를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정리할 것이 있다. 그것은 특별계시의 시기와 특별계시 기록(성경) 시기는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특별계시와 성경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특별계시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심이라면 성경은 그에 대한 기록물이다. 그래서 계시의 시기와 계시 기록 시기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성경 기자들이 계시를 받았을 때, kqf 기록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계시를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기도 했으며, 아직 실제로 나타나지도 않은 사건을 묵시로 보고 기록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지금도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특별계시에 대한 개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기독교가 지금까지 성경에 기록된 계시 내용만을 특별계시로 받아왔다. 그리고 성경 자체도 이를 강력히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특별계시의 개념으로는 절대로 특별계시가 지금도 주어진다고 이해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립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이들 계시 방법 자체가 질적으로 기원을 달리하는 이원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계시들은 모두가 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같은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데, 특별계시는 다만 계시를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을 더해서 성령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여 시대를 초월하여 계시의 전체를 택자들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다라서 신 . 구약성경 66권만이 오직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인 것이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한 사실대로 지금 현재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들이 나가서 선교하는 사건이 있다 하더라도 이 사건이 특별계시는 될 수가 없다. 또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 지금 지상에 재림하셨다 하더라도 그 사건이 특별계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오늘날 특별계시가 이미 완성된 이 때에 어떠한 신령한 사건이라든가 또는 환상, 음성, 예언, 꿈 등 온갖 계시 역사가 있다 하더라도 이같은 것들은 모두가 일반계시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계시의 내용인 성경에 의하여 반드시 재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들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계시의 시기는 너무도 분명해졌다. 일반계시는 우주의 존속과 역사가 계속되는 한 주어지는 계시이지만, 특별계시는 이미 다 완료되어 기록까지 다 이루어져서 성경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주어지지 않고 끝이 난 계시이다.
9. 맺는 말
결국 기독교에 있어서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거룩한 속성 등을 나타내시는 것인데 창조의 능력으로 주어진 계시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어두워졌기 때문에 특별계시를 통하여 밝히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
따라서 특별계시 즉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하나 밖에 없는 그리고 더하거나 덜할 수도 없는 계시진리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근대에 이르러서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가르치는 교사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가 하면, 일시적인 심리적 감상에 빠져 있는 소위 성령파로 일컬어지는 신비주의자들은 지금도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는 성경진리에 의하여 항상 개혁이 되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교회로 개혁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바르게 전해지고 또 바르게 받아들여질 때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교회란 어떤 조직이나 시설, 또는 제도만으로 선행되어져야 하며, 그 진리가 지켜지고 전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미를 거듭하는 현대 교회의 선결 과제는 확실한 계시관의 정립이다. 권위주의와 형식주의 또는 신비주의와 기복주의, 나아가서는 물량주의와 쾌락주의에 취해 혼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교회는 이제라도 건전한 계시관을 정립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교사들로부터 자기 학문의 아집을 버리고 진리의 군더더기에 불과한 철학적 사고의 늪에서 벗어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 교회를 정치무대로 착각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권모술수를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 기독교 신앙을 한낱 도덕적 수양이나 성공의 방편으로 오해하는 성도들은 자기 기만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만이 기독교의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특별계시 진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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