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제311호 금계일기(錦溪日記)
종 목 | 보물 제3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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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금계일기(錦溪日記) |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일기류 |
수량/면적 | 1책 |
지 정 일 | 1963.01.21 |
소 재 지 | 광주 동구 (국립진주박물관 보관)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노준채 |
관 리 자 | 노준채 |
조선조 학자인 금계노인(1566∼1623)이 정유재란 때 남원성의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2년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명나라 사절단의 배로 도주하여 북경을 거쳐 귀국하게 된 경위를 쓴 일기문으로, 선조 32년(1599) 2월 22일부터 같은 해 6월 27일까지 약 4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금계노인은 고향인 나주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터지자 권율장군의 밑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일본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후에는 일본에 대한 복수책을 명나라에 알려주는 일을 했다. 이 일기는 책의 앞뒤가 없어지고 글씨도 많이 훼손되어 읽기가 매우 힘들어 대체적인 정황만 알 수 있는데 남원성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힌 경위부터 귀향 때까지 기록이었으나, 내용의 앞뒤가 유실되고 그 일부만 남았다. 그가 죽은 후 200여년이 지나고 그의 7대 후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노인의 시문과 함께『금계집』속에 이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더욱이 중국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학자들과 만나서 그들의 질문에 따라 한국의 교육, 과거, 재정, 군사, 문화, 풍속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준 것이 일기에 쓰여있어 시대상황과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저자(著者) 노인(魯認)(1566∼1622)은 자(字)는 공식(公識), 금계(錦溪)는 그의 호다. 처음에 사수사별제(司需寺別提)로 있다가 고향인 나주(羅州)로 돌아가 있는 동안에 임진왜란을 만나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선조(宣祖)30년(1597) 8월 남원(南原) 전투에서 일본군에 잡히어 일본으로 송치되었다가 그곳에서 중국사람인 임진혁(林震혁) ·진병산(陳屛山) ·이원징(李源澄) 등과 일본 탈출을 계획하여 마침내 성공· 배로 중국 복건지방(福建地方)의 항구에 닿아서 장주(장州), 흥화(興化)를 경유, 복건(福建)에 도착하여 본국에 보내 달라는 탄원서를 내고 관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명(明)나라 중앙정부에서 귀국허가를 받아서 복건(福建)을 출발하여 북경(北京)에 들러 일본에 대한 복수책을 전술하고 호송되어 본국(本國)에 돌아왔다. 뒤에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내고 인조(仁祖) 원년(元年)에 57세로 죽었다. 저자는 일본에서 포로생활 할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일본에서 탈출한 경위와 중국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는 중에 그곳의 학자들과 만나서 그들의 질문에 따라 한국의 교육 ·과거 ·재정 ·군사 ·문화 ·풍속 등 여러가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 일기에 기술되었다. 이 책은 필사본인데 앞과 뒤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져서 완전하지 못하며 1599년(선조(宣祖)32년) 2월 22일부터 같은 해 6월 27일까지의 일기다. 그리고 그가 죽은 200여년 뒤에 후손들이 간행한「금계집(錦溪集)」에 그의 시문(詩文)과 함께 그의 일기가 앞뒤 모두 수록되어 있고 1970년에「조선학보(朝鮮學報)」제56집의 별쇄본(別刷本)으로 영인(影印)되어 유통되었다. |
이 책은 필사본인데 앞과 뒤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져서 완전하지 못하며 1599년(선조(宣祖)32년) 2월 22일부터 저자(著者) 노인(魯認)(1566∼1622)은 자(字)는 공식(公識), 금계(錦溪)는 그의 호다.
처음에 사수사별제(司需寺別提)로 있다가 고향인 나주(羅州)로 돌아가 있는 동안에 임진왜란을 만나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선조(宣祖)30년(1597) 8월 남원(南原) 전투에서 일본군에 잡히어 일본으로 송치되었다가 그곳에서 중국사람인 임진혁(林震혁) ·진병산(陳屛山) ·이원징(李源澄) 등과 일본 탈출을 계획하여 마침내 성공· 배로 중국 복건지방(福建地方)의 항구에 닿아서 장주(장州), 흥화(興化)를 경유, 복건(福建)에 도착하여 본국에 보내 달라는 탄원서를 내고 관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명(明)나라 중앙정부에서 귀국허가를 받아서 복건(福建)을 출발하여 북경(北京)에 들러 일본에 대한 복수책을 전술하고 호송되어 본국(本國)에 돌아왔다. 뒤에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내고 인조(仁祖) 원년(元年)에 57세로 죽었다.
저자는 일본에서 포로생활 할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일본에서 탈출한 경위와 중국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는 중에 그곳의 학자들과 만나서 그들의 질문에 따라 한국의 교육 ·과거 ·재정 ·군사 ·문화 ·풍속 등 여러가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 일기에 기술되었다.
이 책은 필사본인데 앞과 뒤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져서 완전하지 못하며 1599년(선조(宣祖)32년) 2월 22일부터 같은 해 6월 27일까지의 일기다. 그리고 그가 죽은 200여년 뒤에 후손들이 간행한「금계집(錦溪集)」에 그의 시문(詩文)과 함께 그의 일기가 앞뒤 모두 수록되어 있고 1970년에「조선학보(朝鮮學報)」제56집의 별쇄본(別刷本)으로 영인(影印)되어 유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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