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7.jpg 경상북도 경산군 용성면 곡난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

 

임진왜란 때 전라도도사로 전주를 방어했던 난포 최공철이 지은 집이라고 전한다. 명종 원년(1545)에 지었다고 하는데, 건축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서는 대략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집으로 보인다. ‘가경 14년’(1809)이라고 쓰여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어, 순조 9년(1809)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정침·아랫사랑·중사랑·방아실·행랑채와 마루 그리고 사당 등이 고루 갖추어진 집이었으나, 지금은 정침·행랑채·사당만 남아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창건되었다 하고 순조7년(1809)명의 막새기와와 순조16년(1817)의 상량문이 있어 중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채○아랫채○사당채○수오당(守吾堂)이 현존한다.

원래는 대문간채○사랑채○중사랑채○고방채○방아실채가 더 있었다 한다. 수오당은 최근세에 용산(龍山)에서 이건하였다 해서 거론되지 않고 있다.

난포는 영천최씨시조 최한(崔漢)의 14세손 최철견(崔鐵堅) 아호이다. 난포고택은 그가 명종원년(1546)에 창건. 임진왜란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난포공실기 蘭圃公實記》에 전한다.

난포는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고 임진왜란때는 70 고령인데도 창의하여 대장이 되고 손자 인수(仁壽), 증손자 준립(竣立)과 함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의병과 합세,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난포고택은 넓은 마당에 서향한 안채가 있고 좌측에 남향한 아랫채○안채○뒷쪽 동남으로 사당이 있다. 안채는 -자형, 향좌측에서부터 부엌2칸, 안방1칸, 대청2칸, 작은방1칸, 마루방1칸 순이다.

간방통(間半通)으로 앞퇴가 있고 안방 뒷벽엔 그미다락이 있다. 이집 특색은 마루도 문짝을 달아 폐쇄하였다는 점이다. 마당에서 바라다 보면 부엌은 널문, 안방 건너방은 머름 위에 두짝 띄살창, 대청은 두짝의 띄살문 분합, 마루방은 외짝살대문이다.

홑처마 맞배지붕인데 좌우 끝에 가적지붕을 덧달이 마감하였다. 영천 경산지역의 특성인 지붕형태이다. 사당은 정면2칸 측면1칸 앞퇴 없는 가묘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