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3.jpg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이 집은 사랑채 내림마루의 망와에 명기된 숭정(崇禎) 87년(1705)이라는 기록과는 달리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19세기 후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옥은 넓은 대지에 높지 않은 뒷산을 배산(背山)으로 남향하고 있다. 집의 주위에는 오랜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노송과 느티나무의 울창한 숲이 치맛자락처럼 둘러싸여 있다.

노송과 느티나무가 울창한 얕으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ㅁ형의 집이 남향하여 자리했다. 집터가 넓어 이웃집이 근접해 있지 않으며 널찍한 터에 큼직하고 나이든 나무들이 어우러져 집안 분위기를 고풍스럽게 한다.

사랑채 내림마루 끝에는 숭정(崇禎)87년(1705) 기명의 망와가 있지만 이것은 건립연대와는 무관한 듯 하며 이 집은 구조기법으로 미루어 19세기 후반 정도로 추측된다.

집의 정면에는 대문채가 있고 여기 축을 약간 서쪽으로 이동하여 같은 수평축 선에 ㅁ자 몸채가 배치되었다. 몸채는 뒤쪽이 안채가 되며 앞쪽의 동남쪽 모퉁이를 날개 달듯 크게하여 사랑채로 이용하는데 대체로 영남식 구성방법이다.

몸채의 간살이를 살펴보면 안채인 가로칸은 전후퇴를 둔 8칸집이고 사이에 낀 세로칸은 맞걸이 4칸반(間半)이다. 전면은, 사랑채에 해당하는 동쪽 3칸은 전퇴집으로 구성하고 그 서쪽은 맞걸이 5칸으로 했다. 따라서 전체적으2844.jpg 로 전면 6칸×측면 7칸반의 ㅁ자집인데 동쪽으로만 앞뒤에서 각각 2칸이 덧붙여졌다. 평면구성은 안채 서쪽으로부터 부엌, 2칸 안방(각 칸은 개방이 가능한 미서기문으로 구분됨), 2칸 대청, 건넌방, 가로간의 맨 동쪽에 2칸 안마루가 놓였다. 안방과 대청 앞의 퇴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었다. 다시 건넌방 앞은 세로로 2칸 안사랑, 2칸 부엌(앞쪽은 상부에 다락시설), 다음은 책방으로 사랑방에 연결된다. 서쪽 세로칸은 부엌으로부터 봉당, 고방, 마루방, 아랫방, 반칸(半間)의 샛문간으로 안채에 연결되었다. 앞채는 서쪽으로부터 2칸 광, 2칸 중문간, 다음은 사랑부엌으로 사랑채에 연결되며 사랑채는 2칸 사랑방과 맨 동쪽에 누마루가 시설되고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가 놓이며 사랑채 서남쪽 모퇴에는 볏광이 마련되었다.

구조는 2고주5량이 기본이지만 대청중앙은 1고주5량이다. 모를 굴린 납도리집이며 장혀는 받쳤다. 종도리 장혀 밑에는 다시 헛창방을 보내고 소로를 끼워 수장했으며 대공은 높은 사다리꼴 판대공이다. 댓돌은 장대석 외벌대이고 높지 않으며 초석(礎石)도 덤벙주초로서 매우 낮다. 다만 사랑채 앞만 큼직한 판석으로 댓돌을 만들어서 위엄을 표현했으며 사랑마당에서 중문간까지도 여러단의 계단을 오르도록 하였다. 기둥은 네모기둥이고 홑처마이며 지붕은 안채 서쪽과 사랑채 동쪽은 합각으로 해서 전벽돌로 무늬를 만들어 넣고 안채 동쪽은 박공지붕으로 했다.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는 곳은 겹(솟을) 지붕으로 처리했고 나머지 두 곳은 슬그머니 모임지붕으로 만들었다.

대문채는 一자 맞걸이 6칸집으로 솟을대문을 만들고 양끝으로 박공으로 처리했다. 대문간은 동쪽 세 번째 칸에 놓이고 중문간(中門間)은 서쪽에서 동쪽 칸으로 꺾여 들어가도록 계획되었으므로 동선이 역으로 꺾이도록 의도되었다. 원장(垣墻)이 좀더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졌음직 하나 남아 있진 않다. 전체적으로 사대부집의 전형적인 예(例)이다.

 

중요민속자료 192-1

안채

 

중요민속자료 192-2

사랑채

 

중요민속자료 192-3

행랑채

 

 

7787.jpg

7788.jpg